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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서 평론] ‘가는 세월’의 작곡가 겸 가수, 기타리스트 김광정의 삶과 노래[3]
‘가는 세월’, ‘오는 세월’ 속에서도 절대 변하지 않을 나만의 음악 이야기
2024년 03월 07일 (목) 09:06:21 박성서 webmaster@newsmaker.or.kr
▲ 대표곡 ‘가는 세월’ 발표 당시 김광정씨, 1975년.

‘가는 세월 그 누구가 잡을 수가 있나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사랑받는 노래 ‘가는 세월’이다.

이 노래의 작곡자 겸 가수인 기타리스트 김광정씨(82세).

1959년, KPK쇼단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 뉴요커쇼, 베니쇼, 탑드로우쇼 등 미8군쇼단에서 활동했다. 아울러 그룹사운드 롤링식스, 수퍼스타, 키브라더스 등을 거쳤다.

어느덧 데뷔한 지 65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음악 활동을 이어오고 있는 그는 최근 ‘가는 세월’의 후속작인 ‘오는 세월’을 취입했다. ‘가는 세월’ 발표 이후 47년 만이다.

우리나라 미8군쇼와 그룹사운드 1세대 모임인 ‘예우회’ 회원 20여 명이 함께 참여한 옴니버스 음반에 수록될 예정인 이 노래의 작사, 작곡은 물론 노래까지 직접 불러 80대의 노익장을 과시했다.

2006년 3월에 창립된 ‘예우회’는 김광정씨가 초대 회장을 맡은 이후 10여 년간 모임을 이끌어 왔다.

우리나라 그룹사운드 1세대의 살아있는 전설, 1959년 KPK쇼단에서부터 시작된 그의 길고 긴 음악 여정을 따라가 본다. 김광정의 삶과 노래, 그 세 번째.

글l박성서(음악평론가, 저널리스트)

▲ 미8군쇼단 탑드로우쇼(단장 최태원) 단원들과. 우측에서 세 번째가 김광정씨.


월남에서 미군쇼 활동 후 귀국, 6인조 그룹 ‘슈퍼스타’에 합류

월남 미군쇼에서 1년 7개월 간의 일정을 마치고 김광정씨는 1971년 3월에 귀국한다.

어느덧 1970년대, 당시 한국은 고고 춤의 유행과 더불어 젊은이들의 음악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귀국 후 그는 6인조 그룹 ‘슈퍼스타(Superstar)’에 합류, 리더 겸 단장으로 활동을 시작한다. 남성 멤버 다섯에 여성 싱어 한 명. 그 리드싱어가 바로 당시 무명 가수, 윤시내였다. 

“슈퍼스타 팀의 하모니와 팀웍이 참 좋았어요. 세컨 기타 겸 싱어 서정호, 드러머 박태훈, 그리고 베이스 정... 이름이 잘 생각이 안 나. 특히 보컬 윤시내는 자그마한 체구에 팝 스타일로 노래를 부르는데 하이톤도 세게 나오고 파워풀했지요. 팀에 합류하자마자 첫 팔군쇼 오디션을 봤는데 A클라스를 받았을 정도로 실력 또한 탄탄한 팀이었죠.”

김광정은 기타리스트 겸 리더로 쇼프로그램을 직접 만들었다.

“단장 겸 리더를 내가 맡았어요. 팔군쇼에 나가면서 고고클럽 ‘닐바나’에도 함께 출연했지요, 미군들에게도 인기가 가히 폭발적이었죠.” 

시간이 날 때면 팀웍을 다질 겸 함께 가까운 곳으로 낚시를 가는 등 늘 가족처럼 지냈다. 

“참 순수한 멤버들이었고 또한 인간적으로도 가깝게 지냈어요. 며칠 전 미국 LA에 있는 아들 건오(김건오·57세)가 갑자기 전화해서 물어요. 어릴 때 강가에 빠졌을 때 구해준 누나가 누구였냐고...” 

50여 년이 더 지난 일임에도 당시 다섯 살 난 아들은 지금까지도 윤시내가 내민 손길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 예우회 회원들과. 좌로부터 김광정, 작사가 지명길, 키브라더스 정명용. (사진 아래) ‘미8군쇼 기록전(용산공원 기록관)’ 전시장에서 예우회 멤버들과 함께. 아랫줄 좌로부터 윤항기, 장미화, 김광정, 조갑출, 정명용, 윗줄 좌로부터 윤신호, 김혜정, 박성서, 유재만, 김학우. 2023년.

‘슈퍼스타’를 떠나 ‘키브라더스’에 합류하다

그룹 ‘슈퍼스타’는 팀웍만큼이나 음악적 호흡도 잘 맞았다. 

“한 2년간 이끌었죠. 어느 날 ‘닐바나’에서 공연하고 있는데, 키브러더스의 윤항기와 정경모라는 친구가 놀러 왔더라고요. 그냥 놀려왔다고 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음악이 끝날 때까지 그냥 기다리고 있는 거야. 나중에 얘기를 들어보니 그룹 키브라더스를 다시 결성해 활동하려고 하는데 저도 팀에 합류해달라는 거예요.”

그 무렵 키브라더스는 부산에서 잠깐 활동하다 해체된 상태였다.

“내 대답은 당연히 ‘노(No)’였죠. 슈퍼스타 팀을 버릴 수는 없었어요. 멤버들이 너무 순수하고 무엇보다 가는 곳마다 평도 좋았을 만큼 실력이 대단했으니까.” 

그러나 둘은 집요했다. 리더 겸 보컬 윤항기, 그리고 ‘딸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드러머 정경모, 이 둘은 술도 마시지 않으면서 20일 이상을 매일 찾아왔다
.
그런데 열 번 찍어서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던가. 어느 날 윤항기씨가 갑자기 자기 집에 가자고 했다.

거기서 부인 정경신 여사와 처음 인사를 나누었다. “식사를 마쳤는데 부인이 ‘커피 한잔하세요’ 하면서 느닷없이 ‘우리 혜민이 아빠(윤항기) 좀 도와주세요.’하는 거예요.” 그 한마디에 순간적으로 ‘예’하고 얼떨결에 승낙하고 말았다. 마치 마법에 걸린 것 같았다.

슈퍼스타, 이후 ‘포시즌(Four Season)/사계절’로 이름을 바꿔 활동

그렇게 키브라더스에 합류하기로 결정한 다음 날, 김광정씨는 슈퍼스타 멤버를 모아놓고 이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동안 2년 정도 함께 하면서 정이 들 만큼 들었는데 결국 슈퍼스타는 나 때문에 해산됐어요. 그동안 두 군데나 무대에 오르면서 팀도 점점 나아진다고 다들 좋아했는데 이제 해체된다니 얼마나 서운하겠어요, 헤어질 때 모두 울었지요.”

다행히 윤시내는 이후 솔로 활동을 시작한다, 이듬해 영화 ‘별들의 고향(1974년)’의 삽입곡인 ‘나는 열아홉 살이에요’를 부르며 화려하게 데뷔한 것. 또한 ‘슈퍼스타’ 팀은 이후 3년 뒤인 1976년, 신병하를 중심으로 유현상(기타)을 영입, 그룹 ‘포시즌(Four Season/사계절)’으로 활동을 이어가게 된다.

▲ 김광정씨가 이끌던 ‘슈퍼스타’는 이후 신병하, 유현상(기타)을 영입, 그룹 ‘포시즌/사계절’로 활동을 이어갔다. 좌로부터 시계방향으로 윤시내, 유현상, 신병하, 정OO, 서정호, 박태훈. 1976년.

김광정과 윤항기의 오랜 인연

김광정씨가 윤항기씨와 함께 키브라더스로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73년도 말이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윤항기씨와의 인연은 오래전부터였다.

유년 시절, 옆 동네에서 자랐기 때문에 서로 낯 익은 사이이기도 했지만 음악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만난 건 1961년도다.

“키브라더스로 만나기 12년 전쯤이죠. 그때는 항기가 해병대 군악대에 몸담고 있었을 때였죠. 그 무렵 항기가 갑자기 새로운 그룹을 만들어 함께 음악을 해보자는 거예요. 그래서 나하고 내 동생 광수, 그리고 당시 쇼단에서 코미디를 하던 이상한... 이렇게 넷이 후암동 우리 집 2층에 모여 봉고를 두드리면서 연습하곤 했지요.”

당시 연습 레파토리는 해리 벨라폰테가 부른 ‘데이오(Day-O, The Banana Boat Song)’. 자메이카에서 구전으로 불리던 노동요로 노동자들이 합창으로 주고받는 재미있는 노래다.

“봉고를 두드려 가며 신명 나게 연습했지요. 정말 재미있었어요. 항기는 천재예요. 헤리 벨라폰테 목소리를 똑같이 흉내 냈고 동작 하나하나마다, 쇼맨십도 대단했었으니까.”

멤버도 막강했다. 윤항기와 김광정, 그리고 동생 김광수. 코미디언 이상한.

“그때 동생 광수는 ‘김희갑의 에이원쇼’에서 세컨 기타를 맡고 있었어요. 또 이상한은 윤항기의 친구로 쇼단에서 코미디와 MC를 보고 있었죠.” 그는 이후 ‘이상한 이상해’ 콤비로 유명세를 떨쳤다. 

“그러나 아쉽게도 항기의 개인 사정으로 그룹의 꿈은 무산되었지요. 만약 그 그룹이 제대로 탄생했더라면 굉장했을 거야. 당시엔 그런 팀이 없었거든...”

키브라더스에 합류한 뒤 윤항기, 솔로 활동 시작

젊은 시절 그룹사운드의 꿈을 지폈던 바로 그 윤항기와 12년 만에 재회, 드디어 함께 음악을 하게 되었다.

1971년 창단한 키브라더스는 ‘별이 빛나는 밤에’, ‘목이 메어’ 등을 히트시키며 당시 전 세계적으로 유행한 고고리듬을 타고 엄청난 인기를 누렸던 팀이다.

그러나 김광정이 합류하던 1973년도 당시 키브라더스는 몇 차례 멤버 교체를 겪고 난 후, 일단 그룹이 해체된 상태였다.

이 무렵, 키브라더스는 윤항기(싱어), 김광정(기타), 정경모(드럼), 이렇게 셋이 의기투합해 멤버를 모으기 시작했다. 이전 멤버인 정명용(기타)씨가 다시 합류했고, 한덕호(오르간), 장경선(플룻), 윤민호(테너 색소폰) 등이 가세하면서 ‘키브라더스 3기’의 완전체가 갖춰진다.

“우리가 결성되자마자 팔군쇼 대행업체 ‘동일’을 통해 오디션을 봐서 에이(A)클라스를 받았어요. 이어 팔군쇼를 비롯해 화신 근처의 음악 살롱 ‘파노라마’, ‘여의도 관광호텔 나이트클럽’, ‘다운타운’ 등 몇 군데를 함께 출연했죠.”

밤무대에서 키브라더스는 귀하신 몸이었다. 이들은 고고클럽에서 그야말로 당시 젊은이들을 미치게 만드는 음악을 했다. 특히 김광정과 윤항기의 호흡은 환상적이었다.

“고고클럽 ‘닐바나’에서 우리는 키브라더스만의 개인 리사이틀도 했어요. 그럴 때면 난 멤버들 앞에 나가 항기 옆에서 그룹을 지휘했죠. 미8군 무대에서 배운 ‘업/다운(Up/Down)’을 특히 잘했어요. 노래에 따라 볼륨을 완전히 죽이기도 하고 클라이맥스 부분에서는, 머리를 한 번 흔들고 나서 큰 소리로 “때려!!”하고 사인을 보내면 멤버들은 사정없이 볼륨을 높여 ‘쾅쾅쾅쾅..!!’, 그야말로 미친 듯이 연주했지요. 우리가 무대에 서면 플로어는 물론 고고클럽 전체가 열광의 도가니였죠,”

싱어 윤항기는 분위기가 극에 달하면 넥타이를 머리에 매고 양복바지를 한쪽만 걷어 올린 채 무대를 종횡무진하며 샤우트 창법으로 노래를 불러댔다. 키브라더스 무대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퍼포먼스이기도 했다.

“닐바나 이영섭 사장이 늘 입버릇처럼 말했어요. 광정이와 항기, 둘은 절대 떼어내면 안 된다고. 앞으로도 반드시 둘이 붙어 다니라고 주문했을 만큼 찰떡 콤비라고 말하던 기억이 나요.”

나이트클럽과 고고클럽, 젊음과 음악과 춤이 있는 그곳에서 키브라더스는 승승장구했다. “그때 나는 혼혈이 아니냐는 소리를 많이 들었어요. 타워호텔 나이트클럽 무대에 한 몇 년간 섰는데 그때 콧수염을 길렀기 때문에 별명이 ‘찰슨 브론슨’이었죠.”

그러나 그동안 무리했는지 건강에 이상 신호가 왔다. 코피까지 쏟았다.

“어느 날 멤버들과 함께 있는데 어디서 자꾸 단내가 나. 그래서 멤버들에게 ‘이게 무슨 냄새냐’ 물었는데 알고 보니 내 코에서 나는 거야. 그제서야 알았죠, 나는 매일 거울을 보니까 미처 모르고 있었지만 다른 사람 눈에는 이미 얼굴이 반쪽이 되었다는 것을...”

‘보통 사람의 일상과 거꾸로 살아온’ 후유증이 한꺼번에 몰려온 것이다.

“매일 밤을 새운다는 게 사실 쉬운 일이 아니죠. 그뿐 아니라 클럽에는 왕 먼지가 날아다녀요. 그걸 들이마시면서 무대에 선다는 게 무척 힘든 일이죠.”

이 무렵 팀웍에도 약간의 잡음이 생기고 해서 겸사겸사 쉬기 위해 그는 팀을 떠난다. 윤항기씨 역시 ‘무지개빛‘을 비롯해 ‘나는 어떡하라고’, ‘노래하는 곳에’ 등을 잇달아 히트시키며 솔로 활동에만 전념했다. 결국 이로부터 얼마 뒤 키브라더스는 또 한 번 해체를 맞는다.

▲ 키브라더스 공연 장면, 좌측부터 윤민호, 한덕호, 장경선, 정경모, 윤항기, 김광정, 정명용. 1973년 타워호텔 나이트클럽. (아래) 윤항기씨(우측)와 김광정씨. ‘키브라더스-이제는 늦었나 봐’ 음반. 1979년.

여의도 나이트클럽에서 다시 시작된 ‘키브라더스 4기’

기타를 내려놓고 쉬고 있을 즈음, 김광정씨에게 ‘80~90년대 슬롯머신 대부’라 불리던 정덕진씨로부터 전화가 왔다.

‘동생 정덕일이 여의도 관광호텔 나이트클럽을 맡아 운영하고 있는데 도와달라’는 전화였다. 한 달에 몇천만 원씩 적자를 보고 있다고도 했다.

여의도 관광호텔 나이트클럽은 1975년 오픈 당시 키브라더스가 섰던 무대다. 이들 형제와는 그 이전부터 친분이 있었다.

“만나자고 해서 가보니 무대도, 플로어도 클럽 규모에 비해 너무 작게 만들어놨어요. 사람들이 춤을 추기엔 사실상 좁은 공간이었죠. 그래서 무대를 다 터버리고 조명만 잘 달아놓으라고 했죠.”

음악에도 문제가 있어 보였다. 손님들과 상관없이 밴드는 자기들 위주의 음악만을 하고 있었다. 춤추는 사람의 스텝과 음악이 전혀 맞지 않았다. 몸이 좋지 않아 쉬고 있었지만 무대를 제대로 살리고 싶은 욕심이 본능적으로 꿈틀거렸다.

“한 20일만 시간을 달라고 했어요. 그 사이에 팀을 만들어 무대에 올라가겠다고. 그리고 두 달 후 손님들이 꽉 차지 않으면 책임지겠다고 큰소리까지 쳤죠. 하하...”

그때부터 그룹 멤버들을 다시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그때 항기는 이미 솔로로 자리 잡아 합류하기 힘들었어요. 그래서 항기에게 ‘이제부터 키브라더스 이름은 내가 쓰겠다’고 말한 뒤 사람을 모으기 시작했죠.”

드럼 정경모를 비롯해 조규성(오르간), 오정성(색소폰), 안희조(베이스) 등 7명을 모아 팀을 결성했다.

“먼저 우리가 무대에 선다는 걸 사림들에게 알려야 했어요. 그래서 새벽 4시에 영업이 끝나자마자 사장의 자가용을 빌려 청진동 해장국집에서부터 조선호텔 커피숍까지 한 바퀴 돌았죠. 그 시각에 커피숍에서는 피자도 팔았어요. 그곳에 가면 밴드들뿐 아니라 나이트클럽에서 밤새고 나온 사람들이 죄다 몰려 있어.”

메일 새벽 그곳을 돌며 사람들에게 입소문을 냈다. 

”거기 가면 아는 얼굴들이 많았어요. 날 보러오는 팬들도 제법 있었고 또 나이트클럽 끝나고 택시 잡으려 서 있다가 불량배들로부터 납치(?)당할 뻔할 때 구해준 여성들까지... 그 무렵 친하게 지내던 여성들이 꽤 많았죠.”

그들이 하나, 둘씩 몰려오면서 클럽은 점차 붐비기 시작했다.

“그날 저녁부터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어요. 손님이 겨우 두, 세 테이블 있던 곳에 갑자기 여자들이 3, 4명씩 몰려드니까 금방 자리가 차요. ‘꽃 있는데 벌 날아든다’고 여성들이 많아지니까 남자들도 자연스레 몰려와 금세 뒷자리까지 차더군요.”

특히 키브라더스의 다이나믹한 연주와 노래는 더 많은 이들의 발길을 클럽으로 끌어들였다.

이때 결성된 키브라더스 멤버는 몇 년 후 김광정씨가 미국으로 도미한 뒤. 새롭게 전종서(트럼펫), 조인성(기타)을 합류시켜 본격적으로 음반까지 내며 활동을 이어 나갔다. ‘이제는 늦었나 봐’, ‘두 사람’ 등 신곡도 이때 발표한 노래다. ‘키브라더스’ 활동은 이렇게 이어졌다.

▲ 키브라더스 시절 ‘탑 고고클럽(부산)’에서 딸 세희와, 1975년. (중간) ‘김광정 독집 음반 ’꿈길에서/가는 세월‘, 서유석 ‘가는 세월’ 음반(1977년). (우측) 도미한 뒤 미국 헐리우드에서.

김광정, ‘가는 세월’ 음반 발표하며 싱어송라이터로 변신

앞서 ‘기타리스트 김광정의 삶과 노래[1](뉴스메이커 1월호)’에서 거론했듯 김광정씨는 1975년. 자작곡 ‘가는 세월’을 발표한다. 이 노래는 1977년, 가수 서유석에 의해 먼저 취입된 데 이어 같은 해 본인에 의해 음반으로 발표되었다.

음반 타이틀곡은 ‘꿈길에서’. 그동안 만들어 놓은 7곡을 포함해 총 12곡이 수록된 독집 앨범이다.

음반 재킷 사진을 찍기 위해 트레이드 마크였던 콧수염도 깎았다. 기타리스트에서 작곡가로 그리고 가수로 변신한 것.

‘동트는 새벽에 까치가 울길래/온종일 기다리다 별빛만 보았네/행여나 오시려나 자꾸만 기다리다/목마른 사슴처럼 잠들어 봅니다/꿈길로 온 그 사람 밤이슬에 얼룩진/내 야윈 두 뺨을 어루만져 주더니/돌아서며 한마디 목 메인 한마디/지금은 못 오지만 언젠간 온다고. -꿈길에서(심재현 작사, 김광정 작곡, 김광정 노래)’

타이틀곡 ‘꿈길에서’다.

“당시에는 몰랐는데 지금 들어보니 멜로디가 너무 좋은 거예요. 녹음 당시 엔지니어가 ‘이 노래가 히트되지 않으면 손에 장을 지지겠다’고 큰소리치던 말도 새삼 생각이 나고...”

본인이 아끼는 또 하나의 노래가 ‘세희에게(아빠의 미소)’다. 세희는 그의 딸. 태어났을 때의 애틋함, 그 아빠의 마음을 담았다.

‘속눈썹 나려진 귀여운 얼굴에/꽃구름 피우는 아빠의 사랑을/세희야 귀여운 세희야/세희야 내 사랑 세희야/너는 나의 한 떨기 꽃송이/아름다운 네 길에 아빠의 사랑을/자랑스런 네 길에 아빠의 미소를 띄우리라/세희야 어여쁜 세희야/세희야 내 사랑 세희야. -세희야(아빠의 미소) 김광정 작사, 작곡, 노래.’
음반이 나오자마자 방송국마다 열심히 PR을 다녔다. 출연 섭외가 밀려왔다. 

“키브라더스 시절에 안면이 있던 PD들이 특히 좋아했어요. 그런데 내가 무대 ‘빨’이 안 되는 거야. 무대에 조명만 켜지면 갑자기 온몸이 굳어버려요. 그러니 노래도, 말도 전혀 안 돼요. 혼자 무대에 서려니 감당이 안 돼. 뒤에 멤버들이 있을 때는 전혀 그렇지 않았었는데...”

예상치 않게 자신에게 ‘카메라 공포증’, ‘마이크 울렁증’이 심각하다는 것을 정작 본인이 모르고 있던 것.

“그래서 결국 활동을 포기했어요. 해서 음반 내놓고 얼마 뒤에 그냥 미국으로 떠났죠.”
그는 1978년 3월 22일 도미한다. 이어 한국에 남아있던 아들과 딸도 모두 LA로 불러들인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미국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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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도
(222.XXX.XXX.177)
2024-03-10 14:21:44
하단부에서 팩트오류입니다.
‘세희에게(아빠의 미소)가 아니라 그 곡의 정확한 제목은 '세희야(아빠의 미소)'임.
전체기사의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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