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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형의 100년의 기록 100년의 교훈
2024년 02월 07일 (수) 20:27:53 김정형 webmaster@newsmaker.or.kr

한국 창작동요 100년… 윤극영이 1924년 작곡한 ‘설날’ ‘고드름’이 출발점

우리나라 동요 100년사에 기록된 인물 가운데 오직 한 명의 동요 작곡가를 꼽으라면 단연 윤극영(1903-1988)이다. 한국에서 태어난 40대 이상 치고 윤극영의 동요를 모르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 중에는 자신이 알고 있는 동요가 윤극영의 곡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따라 부르는 사람들도 많다. 윤극영이 작곡한 동요는 ‘반달’ ‘고드름’ ‘설날’ ‘기찻길 옆’ ‘따오기’ ‘꼬부랑 할머니’ ‘나란히 나란히’ 등 400여 곡에 이른다.

윤극영은 우리 동요 100년사에서 상징적 인물

윤극영은 서울에서 태어나 교동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7년 경성고보(경기고 전신)에 입학했다. 소설 ‘상록수’를 쓴 심훈과 일본 천황을 폭살하려다 실패한 박열 열사가 경성고보 동기다. 윤극영은 음악을 하고 싶었지만 부모의 강권으로 1920년 경성법학전문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음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그때 친척이면서 구한말 사상가인 윤치호가 윤극영의 부모를 설득하고 유학자금까지 대 준 덕에 음악 유학의 꿈을 키울 수 있었다.

윤극영은 경성법학전문학교를 1년만에 중퇴하고 1921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도요 음악학교(도쿄음악대학 전신)에서 성악과 바이올린을, 도쿄음악학교(우에노 음악학교. 도쿄 예술대학 음악학부 전신)에서 성악을 전공했다. 1923년 3월 어느 날 윤극영의 하숙집에 초면인 방정환이 찾아왔다. 4살 많은 방정환이 윤극영에게 “나는 창작 동화에 힘쓸 테니 윤 형은 이 땅의 어린이를 위해 동요 작곡에 힘써 달라”고 청했다. 윤극영이 훗날 “그날 밤 내 운명이 바뀌었다”고 술회했듯 윤극영의 인생행로에 분기점이 되는 순간이었다. 윤극영은 방정환과 만난 후, 어린이를 위한 노래를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그해 5월 1일 방정환이 우리나라 최초 어린이 문화단체 ‘색동회’를 도쿄에서 창립했을 때 윤극영도 창립 동인으로 참여했다. 윤극영은 1923년 9월 일본 관동대지진을 현지에서 겪었으나 다행히 목숨을 건져 귀국했다. 당시 조선일보는 조선총독부가 일본 현지 조사를 통해 발표한 한국인 생존자 명단을 ‘동경진재지방생존동포(東京震災地方生存同胞)’ 제목으로 여러 차례 실었는데 윤극영 이름은 1923년 10월 6일 자에 실렸다. 윤극영은 귀국 후 부친이 뒤뜰에 마련해 준 별채를 음악 산실로 삼아 어린이들에게 동요를 가르쳤다. 1924년 8월에는 우리나라 최초 어린이 합창 단체 ‘다알리아회’를 조직했다. 특히 동요 작곡에 힘을 쏟아 1926년까지 2년 남짓한 기간 여러 동요들을 세상에 내놓았다.

‘반달’은 나라 잃은 한국인의 국민가요

▲ 윤극영

윤극영이 작곡한 노래들은 1926년 2월 8일 출판한 우리나라 최초 동요작곡집 ‘반달’에 수록되었다. 동요곡집 ‘반달’에는 ‘반달’(윤극영 작사)을 비롯, ‘설날’(윤극영 작사), ‘꾀꼬리’(윤극영 작사), ‘귀뚜라미’(방정환 작사), ‘두루미’(한정동 작사), ‘꼬부랑 할머니’(최영애 작사), ‘고드름’(유지영 작사), ‘흘으는 시내’(윤석중 작사), ‘소금쟁이’(한정동 작사) 등 주옥같은 동요 10곡의 악보와 가사가 실렸다. 전체 10곡 중 4곡은 윤극영 자신이 직접 작사했다. 윤극영의 창작 동요는 우리나라에서 동요가 음악의 한 장르로 자리 잡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동요작곡집 ‘반달’에 실린 동요 가운데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로 시작하는 ‘반달’은 한국 음악사에 길이 남을 기념비적인 동요로 평가받고 있다. 윤극영은 자신이 작사·작곡한 ‘반달’을 통해 15살 나이 차가 나는 큰누이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을 표현했다. 자신이 5살 때 경기도 가평으로 시집간 누이가 1924년 9월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슬픔에 싸여 만든 노래가 ‘반달’이다. 누이의 죽음 소식에 가슴이 미어지던 그날,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보니 대낮인데도 반달이 외롭게 떠 있었다. 순간 윤극영의 머릿속에 나라를 잃고 정처 없이 헤매야 하는 우리 민족의 처지까지 연상되면서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는 반달” 가사가 떠올랐다. ‘반달’ 가사는 1924년 10월 20일 자 동아일보에 실려 세상에 알려졌다. 윤극영은 1926년 발간한 동요집에서 동요 ‘반달’을 1924년 10월 12일에 완성했다고 적었다. ‘반달’은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갔다. 그것은 동요가 아니라 전 조선인의 국민가요였다.

최초 창작동요는 ‘설날’과 ‘고드름’

그런데 동요 ‘반달’을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 동요로 알고 있거거나 기록한 글들이 많다. 하지만 최초는 ‘반달’이 아니라 역시 윤극영이 작곡한 ‘설날’(윤극영 작사)과 ‘고드름’(유지영 작사)이다. 앞서 ‘반달’이 발표된 시기는 1924년 10월이지만 ‘설날’과 ‘고드름’이 잡지 ‘어린이’ 1924년 2월 호에 수록되었기 때문에 ‘반달’이 최초가 아닌 것이다. ‘설날’과 ‘고드름’ 두 노래 모두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 동요집으로 1926년에 발간된 윤극영의 ‘반달’에도 실려 있다. ‘반달’을 포함 세 노래 모두 1924년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2024년은 한국 근대 동요가 100주년이 되는 해인 셈이다. 다만 ‘설날’과 ‘고드름’ 노래에 앞서 ‘어린이’지 1923년 9월 호에 정순철이 작곡한 ‘형제별’과 김용희가 작곡한 ‘나비’가 실리긴 했으나 번안곡으로 추정되어 창작 동요로 인정받지는 못한다. ‘설날’과 ‘고드름’은 지금도 중년 이상에게는 익숙하다. 윤극영이 ‘설날’을 만든 것은 매년 1월 1일이 되면 아이들이 학교에 모여 1년의 학업을 시작하는 의식을 일본 노래인 ‘식가(式歌)’로 마무리하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총 4절로 이루어진 ‘설날’은 전통 놀이와 풍습을 들어서 가사를 만들었다. 노랑 저고리, 색동저고리, 절 받기, 널뛰기, 윷놀이 같은 시어가 가사로 채워졌다. 윤극영은 23살이던 1926년 1월 북간도 용정으로 떠난 사랑의 도피로도 화제를 뿌렸다. 윤극영은 3살 때 할아버지가 정해준 규수와 16살에 결혼을 했는데 마음에 없는 결혼이다 보니 도무지 정이 들지 않았다. 그러다가 눈에 들어온 여인이 ‘다알리아회’에서 피아노 반주를 맡고 있던 이화여전 출신의 오인경이었다. 윤극영은 ‘반달’ 동요곡집을 취입하기로 한 레코드사에서 받은 돈을 ‘사랑의 도피’ 자금으로 썼다. 윤극영은 이후 잠시 서울에 다녀간 것 말고는 해방 후까지 만주 용정의 동흥중학, 광명중학, 용정제2고등학교 등에서 음악교사로 활동했다. 정일권 전 국무총리와 ‘북간도’의 소설가 안수길이 당시 그의 제자였다. 윤극영은 1941년 친일 단체인 ‘오족협화회’에 가입했다가 해방 후 곤경에 처했다. 일본의 패망 후 북간도를 점령한 중국공산당의 팔로군에게 잡혀 옥살이를 하고, 해방 후에는 친일 인사 논란에 휩싸여 적지 않은 마음고생을 했다. 해방 후 감옥의 간수장인 제자의 도움으로 감옥에서 겨우 풀려난 윤극영은 1947년 가을 서울에 도착, 한동안 동요작가 윤석중 집에서 노래 동무회를 만들어 활동을 재개했다. 1948년 5월부터 불리기 시작한 ‘어린이날 노래’를 비롯 ‘나란히 나란히’, ‘기찻길 옆’ 등 새로운 동요도 작곡했다. 일제 때부터 펼쳐온 동요 보급 운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1968년 창경원(현 창경궁)에 ‘반달’ 노래비가 세워졌고 노래비는 1984년 어린이대공원으로 옮겨져 지금에 이르고 있다.

1920년대~1940년대 한국 동요사

윤극영의 창작 동요가 등장하면서 그전까지 신식 노래를 통칭하던 ‘창가’는 동요, 가곡, 유행가 세 분야로 분화되었다. 동요는 전승동요와 창작동요로 다시 구분되는데 전승동요는 언제 누가 지었는지 알려지지 않은 채 말과 귀로 전해져온 전래동요이고 창작동요는 근대 이후에 작사자와 작곡자가 자기 이름을 걸고 창작한 동요를 뜻한다. 한국인이 작곡한 창가 제1호는 1905년 김인식이 작곡·작사한 ‘학도가’이다. 김인식은 1907년 황성기독청년회(YMCA의 전신)가 설립한 상동청년학원 중학부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음악 교사를 했던 인물이다. 가곡의 효시는 1920년 홍난파가 작곡한 ‘애수’에 1925년 김형준이 가사를 붙인 ‘봉선화’이고 창작 대중가요 제1호는 1927년 김서정이 영화 주제가로 작사·작곡한 ‘낙화유수’다. 1920년대에 동요를 가장 많이 만든 작곡가 중에는 홍난파도 있다. 그는 각각 50편의 동요가 수록된 ‘조선동요 100곡집’ 상권(1929)과 하권(1933)을 펴냄으로써 동요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보였다. 1929년에는 정순철이 ‘갈잎피리’라는 창작 동요집을 출간했는데 여기에 수록된 곡이 ‘우리 아기 행진곡’ (윤석중 작사)과 ‘까치야’(김기진 작사) 등 10편의 창작 동요다. 안기영 역시 ‘그리운 강남’(김석송 작사), ‘조선의 꽃’(이은상 작사) 등이 수록된 ‘안기영 작곡집’ 제1집을 1929년 발표했다. 이처럼 우리나라 창작 동요는 1920년대에 윤극영을 비롯 박태준, 정순철, 홍난파, 안기영 등에 의해 개척되고 발전했다. 1930년대는 동요 창작과 보급의 전성기였다. 1931년 박태준의 두 번째 창작 동요집 ‘양양범버궁’과 1932년 ‘현제명 작곡집’ 제1집이 출판되었다. ‘현제명 작곡집’에는 “가을이라 가을바람 솔솔 불어오니…”로 시작하는 ‘가을’, “해는 져서 어두운데…”로 시작하는 ‘고향 생각’ 등이 수록되었다. 강신명은 1932년 ‘강신명 동요 99곡’을 발표했고 이흥렬은 1933년 “나비 나비 흰나비…”로 시작하는 ‘나비노래’ 등이 수록된 ‘꽃동산’ 동요 작곡집을 발표했으며 같은 해 홍난파의 ‘조선동요 100곡집’ 하권이 나왔다. 강신명은 1936년 ‘아동가요곡선 300곡집’을 발간함으로써 그때까지 창작된 한국 동요를 집대성했다. 이 밖에 1930년대에 활약한 주요 동요 작곡가들로는 권태호, 김대현, 김성도, 박태현 등이 있다. 권태호는 ‘봄나들이’(윤석중 작사)와 ‘눈꽃새’(모기윤 작사)를, 김대현은 ‘자전거’(목일신 작사)를, 김성도는 ‘어린 음악대’(김성도 작사)를 작곡했다. 박태현은 “넓고 넓은 밤하늘에 누가 누가 잠자나…”로 시작하는 ‘누가 누가 잠자나’(목일신 작사)와 “산 위에서 부는 바람 서늘한 바람…”이란 가사의 ‘산바람 강바람’(윤석중 작사) 등 주옥같은 명작 동요들을 발표했다.

한국 동요, 일제 때 수난 겪어

동요는 1940년대 들어 일제의 문화 말살 정책에 눌려 수난기를 맞았다. 사회 전반에 걸쳐 전시 가요와 군가 등 전쟁과 관련된 노래들이 강요되면서 새로운 동요는 더 이상 창작되지 못하고 기존의 동요도 부를 수 없게 되었다. 일제하 ‘동요의 암흑기’는 해방과 더불어 사라지고 다시 ‘노래의 고향’ 역할을 하면서 꽃을 피웠다.

1945년 광복이 되자 묻혀있던 우리 동요들이 되살아나고 새 기풍의 동요가 창작 되었다. 박태준·윤극영.정순철 등 개척시대 작곡가들이 동요를 다시 만들기 시작했다. 안병원.권길상.정세문 등 젊은 음악도들이 어린이 노래 지도에 힘을 쏟고 동요 작곡에도 애를 썼다. 이 무렵에 나온 동요 중 유명한 곡이 “우리의 소원은 통일~”로 나가는 ‘우리의 소원’이다. 안석주 작사, 안병원 작곡의 이 노래엔 2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작사가와 작곡가가 부자지간이란 점과 방송 프로그램 삽입곡으로 태어난 동요란 점이다. 노래 탄생 사연은 이렇다. 1947년 초 KBS 중앙방송국에서 3.1절 특집 노래극에 들어갈 동요가 필요해 화가이자 언론인이었던 안석주에게 프로그램 대본이 맡겨져 가사가 완성되었다. 이어 작곡은 안석주의 아들 (안병원)에게 맡겨졌다. 서울대 음대에 다니고 있던 안병원은 아버지가 쓴 노랫말에 곡을 붙인다는 것에 자부심을 갖고 작품을 마무리했다. 처음 만들어진 노랫말은 “우리의 소원은 독립 / 꿈에도 소원은 독립…”이었다. 일제에서 해방된 지 얼마 안 되고 미 군정에 신탁통치 얘기가 오가던 때여서 ‘독립’이었으나 1948년 남한만의 임시정부가 세워져 ‘독립’이 ‘소원’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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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야간비행’의 국산 뮤지컬 공연을 계기로 살펴본 생텍쥐페리의 삶

‘어린 왕자’ 작가 생텍쥐페리의 소설 ‘야간비행’을 소재로 한 국산 뮤지컬 ‘비아 에어 메일’(Via Air Mail)이 2024년 3월부터 5월까지 서울 대학로에서 공연될 예정이다.

비행기와 소설은 암수한몸 같은 존재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1900~1944)에게 비행기와 소설은 삶의 전부이자 암수한몸 같은 존재다. 비행기가 있어 소설이 가능했고 소설이 있어 비행기를 둘러싼 삶의 난관을 세상에 알릴 수 있었다. 프랑스 리옹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생텍쥐페리가 비행기와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12살 때였다. 비행기를 처음 탔을 때 느꼈던 강렬한 전율은 이후 행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생텍쥐페리는 1917년 대학 입학 자격시험 합격 후 해군사관학교에 진학하려 했다. 하지만 구술시험에 낙방해 미술학교 건축과에서 1년 3개월간 건축학을 공부했다. 그가 훗날 발간한 소설 ‘어린 왕자’에 직접 삽화를 그리게 된 것도 이때 그림을 공부했기 때문이다. 생텍쥐페리는 1921년 4월 육군에 징집되어 독일과 접경지인 스트라스부르 주둔 항공정비부대에서 정비병으로 근무했다. 그러다 항공기 조종에 매료되어 민간항공사 자격증(1921.12)과 군용비행사 자격증(1922.1)을 자비로 취득한 뒤 조종사(소위)로 복무했다. 하지만 1923년 비행기 사고로 두개골이 파열되는 큰 부상을 당하자 1923년 6월 군 제대 후 사무원과 트럭 외판원 생활을 했다. 그러면서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비행기 조종간을 잡고 글쓰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 결과물이 1926년 4월 한 잡지에 발표한 첫 소설 ‘비행사’     (중편)였다. 생텍쥐페리는 1923년 9월 라테코에르 항공사(현재의 에어프랑스)에 입사했다. 프랑스령 모로코의 카사블랑카와 서아프리카 세네갈의 다카르 간 우편 비행 업무에 종사하고 모로코 남부의 항공기지에서 근무했다. 아프리카 사막 지역에서 지낸 그때의 경험은 훗날 소설의 주요 모티브가 되었다. 1929년에는 아에로포스탈 아르헨티나 항공사로 이직, 유럽에서 대서양을 건너고 안데스산맥을 넘어 칠레의 최남단 푼타아레나스를 잇는 항로를 개척했다. 우편 비행을 하면서 틈틈이 자신의 첫 장편소설 ‘남방 우편기’를 완성해 1929년 출간했다.

죽음의 그림자가 작품마다 어른거려

▲ 생텍쥐페리

그 시절 우편기 조종사는 추락과 조난의 위험에 노출된 위험한 직업이었다. 특히 생텍쥐페리처럼 유럽과 서아프리카, 유럽과 남미를 오가는 대륙 간 우편기 조종사는 더욱 그랬다. 그때의 고된 경험은 항공회사를 그만두고 발표한 작품 속에 그대로 녹아들었다. ‘남방 우편기’, ‘야간비행’, ‘인간의 대지’, ‘전투 조종사’, ‘어린 왕자’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품들에는 조종사가 겪어야 하는 죽음의 그림자들이 고비마다 어른거렸다. ‘남방 우편기’(1929년)에서는 주인공인 비행사가 사막의 모래 언덕 위에서 죽고, 페미나 문학상을 안겨준 두 번째 장편소설 ‘야간비행’(1931년)에서는 그 자신이 겪은 죽음을 무릅쓴 모험과 조종사들끼리의 인간적 연대감을 그렸다. 생텍쥐페리가 유명 작가의 반열에 오른 것은 ‘야간비행’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였다. ‘인간의 대지’(1939년)에서는 작가 자신과 동료 비행사들의 극적인 경험을 사실 그대로 기술해 감동을 주고 항공문학의 걸작으로 평가받았다. 1935년 12월 말 프랑스 파리~베트남 사이공 간의 비행 기록에 도전했다가 정비사와 함께 리비아의 사하라 사막에 불시착해 5일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사막을 헤매다 원주민에게 구조되는 자신의 체험도 손에 잡힐 듯이 묘사했다. 1930년 6월 남미 횡단 중 눈 덮인 안데스에 추락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온 동료의 기적 같은 일도 ‘인간의 대지’에 수록했다. ‘인간의 대지’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문구가 등장한다. “사랑한다는 것, 그것은 서로를 마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둘이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다.”라는 문장이다. 생텍쥐페리의 대표작은 ‘어린 왕자’이지만 ‘인간의 대지’를 가장 생텍쥐페리 다운 작품으로 꼽는 평론가들도 많다. ‘인간의 대지’는 1939년 6월 미국에서 ‘바람과 모래와 별’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판되어 그에게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소설 부문 대상 등 각종 상을 안겨주고 작가로서의 입지도 굳혀주었다. ‘인간의 대지’는 1939년 논픽션 부문 미국 전미도서상도 수상했다. 생텍쥐페리는 미국 체류 중 2차대전이 임박한 것을 예감하고 1939년 8월 귀국, 정찰비행단 소속 조종사로 복무했다. 처음에는 예전 비행에서 당한 사고로 전투기 조종 불가 판정을 받았으나 어떻게든 조종사가 되어 1939년 말부터 대공화기를 뚫고 고공 정찰과 촬영 임무를 수행했다. 하지만 1940년 6월 파리가 함락되자 그 해 12월 미국으로 건너가 독일 점령 하의 조국 동포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그가 우편기 조종사에서 전투기 조종사로 변신해 활동하던 시절을 회고하며 소설을 썼다. 1942년 2월 출간한 소설 ‘전투 조종사’는 미국에서 6개월 동안 베스트셀러 1위 자리를 지켰다.

20세기 프랑스 작가 중 가장 대중적으로 성공

생텍쥐페리는 1943년 4월 6일, ‘어린 왕자’의 영어판과 불어판을 동시에 미국에서 출판했다. 표지 삽화와 내용 속 그림들 모두 자신이 직접 그렸다. 줄거리는 단순하다. ‘소행성 B612호’라는 우주 속 작은 별에 장미 한 송이와 단둘이 살던 어린 왕자는 까다롭게 구는 장미를 버리고 혼자 우주 여행길에 나선다. 지구라는 별의 사막에 추락, 마침 비행기 고장으로 사막에서 고생하던 비행사를 만나 대화가 시작된다. 그 뒤 여우도 만나고 뱀도 만나고 사업가와 허풍쟁이도 만난다. 그런 과정을 통해 자신이 버린 그 장미야말로 자기가 책임져야 할 존재란 걸 깨닫고 몸통은 사막에 버린 채 영혼만이 다시 외딴 별로 돌아간다는 내용이다. 생텍쥐페리는 ‘어린 왕자’ 출간 직후, 뉴욕을 떠나 1943년 7월 튀니스에 주둔 중인 자신의 옛 비행중대에 복귀했다. 그러나 나이가 43세여서 나이 제한에 걸리고 부상 후유증도 심각해 당초에는 조종사 부적합 판정을 받았다. 그래도 군 고위층에 계속 요청해 적합 판정을 받아 예비군 공군 소령 계급장을 달고 조종사로 복무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비행대는 1944년 7월 지중해 코르시카섬 미 공군 기지로 이동, 연합군의 남프랑스 상륙작전을 위한 항공사진 촬영 임무를 수행했다. 생텍쥐페리는 고향 리옹 남쪽 론 계곡 부근에서 독일군의 이동을 추적할 목적으로 1944년 7월 31일 오전 8시 30분, 미국 록히드사 쌍발기 라이트닝 P38기를 타고 코르시카섬 미 공군기지를 이륙했다. 채워진 연료로는 6시간만 비행할 수 있었기 때문에 늦어도 오후 2시 반까지는 돌아와야 했다. 그러나 정찰기는 기지로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오후 3시 30분 ‘비행중대장 생텍쥐페리 실종’이라는 보고가 상부로 올라갔다. 이후 격추, 사고, 자살 등 추측만 무성한 채 정찰기 잔해는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렇게 세월이 흐른 후 1998년 9월 지중해 항구도시 마르세유 동남쪽 해저에 쳐놓은 그물에 생텍쥐페리와 그의 아내 콘수엘로의 이름이 새겨진 은팔찌 하나가 걸려 올라왔다. 2004년 4월에는 마르세유 근해 깊숙한 곳에서 고철로 변한 정찰기 잔해가 발견됨으로써 비록 유해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공식적으로 전사 처리되었다. 생텍쥐페리는 대중적으로는 유명했으나 앙드레 지드, 장 폴 사르트르, 앙드레 말로로 이어지는 프랑스 문단은 그를 ‘주류에서 벗어난 이단아’로 취급했다. 단순한 ‘청소년 문학가’나 ‘성공한 동화 작가’ 정도로 폄하하는 시각도 있었다. 그러나 생텍쥐페리만큼 대중적인 성공을 거둔 20세기 프랑스 작가는 없다. 작품들은 전 세계 대부분의 국가에서 번역되어 베스트셀러나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았다. 그의 명성에 힘입어 1975년 소련 천문학자가 발견한 소행성에 ‘2578 생텍쥐페리’ 이름이 붙고 2000년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가 태어난 도시 리옹이 관할 국제공항을 리옹 생텍쥐페리 국제공항으로 개명했다. 리옹의 테제베(TGV) 초고속 열차 역도 리옹 생텍쥐페리 역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생텍쥐페리는 20세기 수많은 프랑스 작가 중 프랑스 중앙은행에 초상권을 빌려준 유일한 작가였다. 프랑스 중앙은행이 생텍쥐페리 50주기를 1년 앞둔 1993년 생텍쥐페리를 기념하는 50프랑짜리 지폐를 발행했다. 지폐에는 생텍쥐페리의 얼굴과 그가 조종했던 P38 라이트닝 기, 비행기의 이동 경로, 어린 왕자와 코끼리를 삼킨 보아 뱀을 그려 넣었다. 프랑스 정부는 또한 앞면에 생텍쥐페리, 뒷면에 어린 왕자가 있는 100프랑 기념주화도 주조했다. 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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