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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서 평론] ‘가는 세월’의 작곡가 겸 가수, 기타리스트 김광정의 삶과 노래[2]
‘가는 세월’, ‘오는 세월’ 모두 비켜 간 듯한 80대 뮤지션의 꿈과 열정
2024년 02월 07일 (수) 20:05:46 박성서 webmaster@newsmaker.or.kr
▲ ‘가는 세월’의 작곡가 겸 가수, 기타리스트 김광정씨.

‘가는 세월 그 누구가 잡을 수가 있나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사랑받는 노래 ‘가는 세월’이다.

이 노래의 작곡자 겸 가수인 기타리스트 김광정씨(82세).
1950년대 말 KPK쇼단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 뉴요커쇼, 베니쇼, 탑드로우쇼 등 미8군쇼단에서 활동했다. 아울러 그룹사운드 롤링식스, 수퍼스타, 키브라더스 등을 거쳤다.

어느덧 데뷔한 지 65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음악 활동을 이어오고 있는 그는 최근 ‘가는 세월’의 후속작인 ‘오는 세월’을 취입했다. ‘가는 세월’ 발표 이후 47년 만이다.

우리나라 미8군쇼와 그룹사운드 1세대 모임인 ‘예우회’ 회원 20여 명이 함께 참여한 옴니버스 음반에 수록될 예정인 이 노래의 작사, 작곡은 물론 노래까지 직접 불러 80대의 노익장을 과시했다.
 
2006년 3월에 창립된 예우회(회장 장미화)는 김광정씨가 초대 회장을 맡은 이후 10여 년간 모임을 이끌어 왔다.

우리나라 그룹사운드 1세대의 살아있는 전설, 1959년 KPK쇼단에서부터 시작된 그의 길고 긴 음악 여정을 따라가 본다. 김광정의 삶과 노래, 그 두 번째.

글l박성서(음악평론가, 저널리스트)


꿈의 무대, 미8군쇼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여놓다

김보이즈(도미 후 김브라더스로 개명)가 누나들인 김시스터즈를 따라 미국으로 도미하기 직전인 1962년, 기타리스트 김광정은 몸담았던 KPK쇼단을 떠나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미8군쇼 공급업체 ‘화양’으로 자리를 옮긴다.

화양은 여러 개의 쇼 단체가 모여 만든 대행업체였다.

당시 당국은 1958년 경부터 미8군쇼단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상공부 등록허가제로 바꾸는데 이때 각각 활동하던 쇼단들이 모여 만든 것이 ‘KEAA(Korea Entertainment Agency Association, 한국연예대행연합회)’다. 이 KEAA가 바로 미8군쇼 공급회사의 대표 격이자 5백여 명의 단원이 소속되어 있던 ‘화양(한국흥행주식회사)’이다. 

KPK쇼단을 나온 김광정은 바로 이 화양 소속인 뉴요커쇼의 기타리스트로 들어간다. 

“뉴요커쇼는 팔군쇼 중에서도 프로그램도 좋고 쇼도 괜찮다는 평가를 받는 곳이었죠. 특히 기억나는 분은 유성복씨. 성복이 형은 피아노를 치기도 했지만 주로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마스터는 김영범, 영범이 형이었어요. 성복이 형은 국회의원 유성근씨 동생으로 주먹을 제법 썼기 때문에 다른 단체가 함부로 대하지 못했죠.”

▲ ‘뉴요커쇼’ 시절 기타리스트 김광정씨.(좌측에서 두 번째) 우측 색소폰 연주인이 마스터 김영범씨. 가운데 색소폰 연주인은 가수 한명숙의 부군이기도 한 이인성씨, 우측 뒤는 이후 그룹 ‘죠커스’ 베이스로 활동했던 장웅범씨.

베니쇼에서 이해연과 듀엣곡 ‘투 투 탱고’ 불러

이어 옮긴 곳은 베니쇼다. 뉴요커쇼와 같은 건물에 있는 쇼단체로 서로 왔다갔다 하다가 발탁되었다.

베니쇼는 화양 상무로 있던 베니김(김영순, 트럼펫)이 만든 단체로 가수 이해연 등이 소속되어 있었다.

베니김의 부인인 이해연씨는 ‘단장의 미아리 고개’로 일반 무대에서도 널리 알려진 가수. ‘연안 부두’를 부른 김트리오(김선, 김단, 김파)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이해연 아주머니가 노래할 때 보면 정말 환상적이죠. 특히 ‘언체인드 멜로디(Unchained Melody)’를 부를 때는 미군들이 그냥 자지러져. 그 아줌마와 둘이 듀엣으로 ‘투 투 탱고(Two To Tango)’를 부르곤 했죠.”

‘탱고를 추려면 두 사람이 필요하다(It Takes Two To Tango)’라는 서양 속담을 모티브로 만든 이 노래는 특히 정열적인 댄스 듀엣곡으로 유명한 노래다.

“리듬도 좋고 춤 또한 매우 감미로웠죠. 쭉 뻗는 팔 동작 하나만으로도 미군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으니까. 이해연 아주머니가 워낙 춤도 화려하고 노래를 잘하시니까 저는 그냥 끌려가듯 따라가기만 했죠. 듀엣곡 ‘투 투 탱고’를 연습하면서 이해연 아주머니로부터 무대 매너, 발성법 등 참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피아노 넘어져 오른손 가운데 손가락 끝부분 잘려

예기치 못한 사고도 있었다. 기타리스트로써 가장 중요한 오른손 가운데 손가락 끝 부분이 잘린 것.

“베니쇼의 프로그램 짜는 분이 홍두표(트럼본) 형인데 어느 날 쇼의 오프닝 곡으로 ‘웬 더 세인트 고 마칭 인(When the saint go marching in, 성자들의 행진)’을 한다는 거야. 그러자 무용수들이 화가 잔뜩 났어요. 워낙 오래된 구닥다리 노래라 춤을 또 새로 만들어서 배워야 하거든.”

네 명의 무용수가 투덜거리며 연습실 한가운데에 있는 피아노를 치우라고 신경질을 부렸다. 연습에 방해된다며.

“여자 단원들은 무슨 일만 생기면 꼭 날 불러요. 그래서 피아노를 확 밀었는데 갑자기 넘어지는 거야. 피아노 한쪽 바퀴가 없었던 거죠. 넘어지는 피아노를 잡겠다고 피아노 밑으로 팔을 집어넣었는데 워낙 무거우니까 그대로 넘어가요. 순간적으로 기합을 쓰면서 손을 뺐는데 결국 손가락이 끼어 오른손 가운데 손가락 끝부분이 잘렸어요.”

순간 눈앞이 캄캄했다. 기타리스트로서 오른손 손가락 부상은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히 손가락 끝부분이라 무대에 서는 데는 일단 지장이 없었다. 피크로 연주하면 되니까. 그러나 사고 이후 김광정씨는 클래식 기타를 칠 수 없게 되었다.

▲ (사진 위) ‘김대환 기념관’에서 예우회 멤버들과 함께. 한가운데 목도리하고 있는 인물이 김광정 회장. (사진 아래) 우측으로부터 김광정, 작곡가 신중현, 데블스 도한길, 가수 김선씨.

3개월에 한 번씩 미군 장교클럽에서 오디션 실시

베니쇼는 3개월에 한 번씩 열리는 오디션에서 항상 좋은 점수를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화양 소속 쇼단은 오디션을 앞두고 전체 점검을 한다. 실제 오디션과 똑같이 조명, 의상 등을 갖추고 그대로 재현하면 베니김 상무가 체크, 고칠 것은 고친 뒤 오디션에 임하기 때문이다. 실제 오디션 현장에서도 화양 소속이라면 어느 정도 실력을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그 당시엔 오디션을 3개월에 한 번씩 실시했어요. 그때 오디션 장소는 을지로 6가에 있는 미공병부대에 있는 장교클럽이었죠. 미군 측에서 파견 나온 심사위원 5명이 심사를 봤어요.”

전체 쇼의 흐름과 구성, 그리고 편곡은 물론 영어까지 심사 대상이었던 이 결과에 따라 스페셜A(AA), A, B, C클래스로 등급이 매겨졌다. D는 탈락.
“심사위원들이 심사를 마치면 미스 가이거가 최종 등급을 매겨요. 오디션 결과는 대부분 그 자리에서 매니저들이 대충 알아. 오디션이 끝나면 한 달 스케줄이 나오죠. 재미있게 잘하는 단체는 보통 한 달에 스물다섯 번까지 스케줄이 잡혀요.”

스케줄에 따라 단원들은 미군 트럭으로 이동했다. 당시 비포장도로 달리면 온통 먼지투성이. 

“갑자기 브레이크를 잡으면 그때 먼지가 확 들어오잖아. 뒤로 다 넘어지고... 당시엔 대부분 비포장도로라 트럭이 얼마나 흔들거리는지 멀미도 심했고 무엇보다 엉덩이가 아파서 아예 자기 방석을 각자 가지고 다녔죠.”

쇼단은 주로 미군부대에서 보낸 군용 트럭으로 이동했는데 늦은 시간 공연을 마치면 통행금지 시간으로 인해 미군 측이 출연자 전원을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당시엔 스케줄에 따라 전국 어디든 군용 트럭으로 다녔어요. 당일치기가 안 되는 경우엔 미군부대에서 자죠. 보통 한 달에 한두 번 걸리는데 단원들은 특히 군산에 있는 미군부대에 가는 걸 좋아했어요. 가면 잠자리 좋고 음식도 콜라, 쥬스 등 당시에는 못 먹던 것들도 실컷 먹고... 캔터키 치킨도 그때 처음 먹어봤으니까.”

6인조 그룹 ‘롤링 식스’ 결성, 패키지 쇼 시작해

“베니쇼에서 나와 ‘롤링식스(Rolling Six)’라는 6인조 그룹을 만들었어요. 여자 무용수 겸 가수 둘, 그리고 남자 넷. 기타, 베이스, 드럼, 오르간. 이 팀을 화양에서 받아 줘서 ‘롤링 식스’라는 이름의 패키지 쇼를 시작했죠.”

미군클럽에서의 패키지 쇼는 대략 45분으로 1부는 댄스 등 플로어쇼, 2부는 노래, 춤, 연주. 그리고 마지막 3부는 대부분 댄스뮤직으로 마무리되었다. 
“그 45분간 프로그램을 내가 직접 짜서 공연했죠. 정말 재미있었고 팀의 실력도 괜찮았어요. 처음 만들었음에도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받을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그는 팔군쇼에 있을 때가 가장 좋은 시절이었다고 회고한다. 안정된 수익 그리고 뭐니 뭐니 해도 항상 연습할 수 있는 여건이 되어 있었다.

“옛날 화양에 짐 넣는 창고가 있었는데 금요일만 되면 그 안에서 연습하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아. 열 몇 단체가 있었으니까. 그들을 보면서 지극도 받고,...” 그렇듯 미8군쇼단은 서로가 서로의 비교 대상이자 곧 연구 대상이었다.

“또 재미있는 기억 중 하나는 여름이면 필동 친구들이 한강에 텐트 치고 야영을 해요. 거긴 위험해서 아무나 텐트를 치고 야영할 수 없지만 이 친구들은 워낙 거칠기로 소문났으니 건드리는 사람이 없어. 그래서 밤에 일 끝나고 텐트로 간 적도 많아요. 가면 친구들이 부대에서 닭다리라도 싸왔나, 혹 먹을 것이라도 챙겨왔나 기대하며 기다리기도 하고... 거기서 자고 낮에는 수영하며 놀다가 저녁때 일 나가곤 했었죠. 그게 참 좋았고 그래서 여름만 되면 유독 생각나...”

▲ ‘탑드로우쇼’ 시절의 김광정씨(우측에서 두 번째), 우측부터 무용수 향해, 김은자. 가운데 선글라스 낀 인물이 최태원 단장. 그 옆이 드러머 이동원, 마스터 겸 트럼펫 이성호. 트럼본 노경수, 제일 왼쪽이 김영조씨.

탑드로우쇼 창단 멤버로 입단, 동시에 해병대 군예대 입대

1963년 초, 그는 새로 창단된 탑드로우쇼(단장 최태원)로 자리를 옮긴다. 탑드로우쇼는 기존의 KPK쇼단이 해체되면서 그쪽 단원들을 대거 영입해 만든 단체. 그에겐 마치 고향 같은 곳이었다.

탑드로우쇼에 입단과 동시에 그는 그동안 미뤄왔던 군에 입대한다. 단원인 선배 하나가 해병대 연예대 출신으로 더 이상 지체 말고 군 문제부터 해결하라고 조언했기 때문이다.

사실 입대를 미룬 가장 큰 이유는 가족 생계를 위해 돈을 벌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해병대 연예대의 지원 조건은 군인 신분으로 각종 위문공연이나 행사에 참여하면서 동시에 각자 연예 활동을 자유롭게 보장해 준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군 복무와 동시에 연예 활동을 이어갈 수 있다는 것.

1963년 4월 1일, 그는 해병대 연예대에 자원입대한다. 해병대 140기로 가수 오기택, 차도균, 기타리스트 김홍탁 등이 입대 동기다.

“해병대 연예대에 들어가 훈련받은 뒤부터는 음악 활동 이어가는 데 아무런 제재가 없었어요. 한 달에 한 번 한남동 막사에 가서 파견증 하나만 받으면 또 한 달 공연을 다닐 수 있었죠.” 당시 연예대 대장은 가수 도미였다.

특히 동기생인 가수 오기택과는 서로 배짱이 맞았다. 연예계에서 가장 주먹이 세기로 소문난 가수 오기택과의 일화를 들어보았다.
“한 번은 시민회관에서 기택이 공연이 있었어요. 공연을 마치고 함께 무교동 쪽을 걸어오는데 사람들이 한 50~60명 몰려서서 싸움 구경을 하고 있어요. 뭔 일인가 싶어서 보니 덩치가 산만한 중국집 주인이 돈을 안 내고 도망가는 사람을 붙잡아 무자비하게 패는 거야.”
유독 체구가 작은 그 사람은 몇 대 맞자마자 바로 그 자리에 쓰러졌다. 구경하던 사람들 모두 안타까워할 정도로 비참한 광경이었다. 

“순간 주먹을 불끈 쥐는데 기택이가 가로 막아요. ‘넌 빠져 있어’, 자기 펀치가 더 세다 이거지. 그러면서 기택이가 중국집 주인을 향해 주먹을 날렸는데 쉽게 안 넘어가. 중국집 주인은 십팔계로 단련된 몸이라나... 그래, 한 번 해보자. 주먹을 날리면서 이쪽으로 넘어오면 내가 치고... 그렇게 대여섯 번 오간 끝에 결국 그 덩치가 길바닥에 뻗더라구. 그래서 곧바로 줄행랑을 쳤죠. 나는 군복을 입고 있었으니까.”

그렇듯 가수 오기택씨와는 늘 배짱이 맞았다. “기택이와 함께 군대에 있으면서 웬만한 건 둘이 모두 해결했어요. 그와는 지금까지 한 번도 부딪치진 않았죠. 서로 잘 아니까 서로 피해야죠, 그 친구와 붙을 이유도 없고. 둘 다 명보극장 앞에 살았기 때문에 누구 하나가 지면 거기서 쫓겨 나가야 해. 하하...”

해병대 연예대와 탑드로우쇼 활동을 이어가던 그는 2년 6개월간의 복무를 무사히 마치고 1965년 10월, 제대한다.

▲ 해병대 연예대 시절 김광정씨. (사진 위) 우측에서 네 번째. (아래 사진) 윗줄 우측에서 네 번째.

월남연예위문단 일행과 함께 한 달간 월남 위문공연을 가다

1965년 월남 파병과 함께 우리나라 연예인들의 위문공연도 줄을 이었다. 김광정 역시 베트남 전쟁이 한창 치열하던 1968년 11월. 월남연예위문단 일행과 함께 월남 공연을 떠났다. 당시 문화공보부가 주관하던 주월국군 연예위문단에 합류한 것. 

1968년 11월 22일부터 12월 27일까지 한 달간 일정이었다.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펼쳤던 월남위문공연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처음 가장 놀랐던 것은 모 청룡부대에서였어요. 위문단을 태운 헬리곱터가 연병장에 도착할 때는 아무도 없었는데 헬리콥터에서 내리자마자 갑자기 사방에서 병사들이 새까맣게 몰려들어. 동시에 여가수에게 마구 달려드는 거야. 무슨 영문인지도 모른 채 난장판이 되었죠.”

‘여자 속옷을 몸에 지니고 있으면 부적처럼 총알이 피해 간다’는 속설로 인해 사병들이 새카맣게 몰려들어 속옷 한 쪼가리라도 서로 뜯어가려고 아수라장이 된 것. 

“미처 말릴 틈도 없이 난장판이 된 채 여가수는 비명과 함께 울고불고 난리를 치고... 이것이 제가 월남에서 받은 첫인상이었죠. 카니홍이라고 당시 일반 공연무대에서는 꽤 유명했던 민요가수였는데, 그 뒤 사령관에게 가서 울고불고 항의하며 난리를 쳐댔죠. 나중에 사정을 알고 난 후엔 그 치열했던 현장을 생각할 때마다 코끝이 찡해 오더군요.”

위문공연단은 한 달간 일정으로 함께 맹호, 청룡, 백마부대 주둔 지역까지 샅샅이 다녔다. 불과 몇십 명의 초소까지도 우리 장병이 있는 곳이라면 헬기와 트럭을 이용해 어디든지 달려갔다. 

“정신없이 다녔어요. 여기서 끝나면 곧바로 또 어디로... 헬리콥터로 이동하며 한 20~30회. 거의 매일 공연을 했죠.”

언제 월맹군(베트콩)의 습격이 있을지 몰라 늘 긴장을 늦출 수 없었던 전쟁터, 그는 두 차례나 공연을 다녀왔다. 

파월장병들에게 가장 인기 있던 것이 바로 위문공연이었다. 가는 곳마다 흥겨움과 함께 눈물바다를 이뤘던 감동의 순간들, 무엇보다 힘들고 고달픈 이역만리 전쟁터의 젊은이들에게 노래와 춤은 더욱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꼈다.

▲ (사진 위) 롤링식스의 멤버들. 좌측부터 김광정(기타), 김용년(오르간). 이숙(싱어), 이해숙(무용), 박용준(드럼), 김용학(베이스).

또다시 월남으로, 미군쇼 활동 이어가다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30여만 명의 미군이 주둔하던 한국은 급격히 5만여 명으로 미군이 줄어든다. 때를 같이해 미군쇼 단원들이 대거 월남으로 이동했다.

김광정 역시 월남 미군쇼 대행업체 ‘아주연예(대표 최태원)’를 통해 월남 미군쇼 공연을 떠난다. 이때가 1969년 8월. ‘롤링식스‘라는 또 다른 새로운 그룹을 결성했다. 

“어머니가 수술을 앞두고 계셔서 제가 계속 돈을 벌어야 했어요. 처음 월남으로 가기로 하고 계약한 팀에 문제가 생겨 무산되었죠. 때마침 탑드로우쇼 단장인 태원이 형이 아주연예를 만들었어요. 그래서 이곳을 통해 월남 미군쇼 공연을 가기 위해 급히 6인조 그룹을 만들었죠.”

이 무렵 베트남에서의 미군쇼는 더욱 활발해졌다. 대표적인 미군쇼 대행업체인 화양, 아주연예가 미군 주둔 지역인 사이공, 다낭, 퀴논에 지부를 두고 미군쇼단을 운영했다. 

“6인조 그룹 ‘롤링식스’의 싱어는 이숙, 그리고 이해숙(무용), 김용년(오르간). 김용학(베이스), 그리고 박용준(드럼)을 합류시켜 1년 계약으로 월남에 갔죠. 개런티로 매달 약 4백 불 정도 받았어요. 한국에서 공연할 때보다 배가 넘었죠.”

실제로 이 무렵 월남 미군쇼로 인한 외화가 연 2백만 달러로 증가하자 정부는 수출의 날을 맞아 이들 대행업체 측에 표창까지 수여했다. 

그러나 막상 낯설고 무더운 정글의 나라, 월남에서의 생활에 적응하기란 쉽지 않았다. 섭씨 40도를 오르내리는 폭염의 전쟁터. 특히 여성 단원들의 고생은 더욱 심했다. 

“머나먼 이국땅, 군인들 사이에서 동료 여성들을 지키기 위해 나는 무조건 거칠게 보여야 했어요. 나중에 이숙의 어머니에게서 편지가 왔더라고, 우리 딸이 무사히 돌아올 수 있게 지켜줘서 고맙다고...” 그는 스스로 여성 단원들의 수호천사가 되었음을 지금까지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1년 계약이 끝나자 롤링식스 멤버들은 다 귀국하고 혼자 남아 그때 남아있던 몇몇 팀을 모아 계약을 연장했다.

“미니걸스라는 팀이 있었는데 그 그룹이 깨졌어요. 노래하는 홍마리사, 여자 베이스 기타리스트 미스민... 이들을 내가 맡아 팀을 다시 이끌었는데 그다음부터 쇼가 확 달라졌죠.”

그렇게 그는 월남에서 1년 7개월의 일정을 마치고 1971년 3월 24일 귀국한다. 귀국 후 그는 ‘슈퍼스타’라는 단체에 합류, 리더 겸 단장으로 활동을 시작한다. 남자 다섯에 여성 싱어 한 명. 그 여성 싱어가 바로 당시 무명의 가수, 윤시내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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