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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형의 100년의 기록 100년의 교훈
2024년 01월 09일 (화) 12:06:13 김정형 webmaster@newsmaker.or.kr

가수 김창완… 음악적 재능과 예인 기질을 타고난 ‘영원한 청년’

밴드 ‘산울림’ 출신 가수 김창완이 최근 새 음반 ‘나는 지구인이다’를 발매했다. 2020년 발표한 ‘문(門)’ 이후 3년만이다. 앨범은 신곡 3곡과 기존 발표곡을 재해석한 10곡을 한 데 엮어 총 13개의 트랙으로 구성했다. 

“죽어 있던 음악시장에 활기를 불어넣은 활화산”

1970년대 후반은 한국 대중음악의 암흑기로 불린다. 이른바 ‘긴조 시대’로 불린 잇따른 긴급조치 등의 시대적 상황과 가수들의 대마초 파동 등으로 음악적 명맥이 사실상 끊어졌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 속에서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3형제 보컬그룹 ‘산울림’은 어느 평론가 말마따나 “죽어 있던 음악시장에 활기를 불어넣은 활화산”이었다. 그들의 존재가 새삼 각별했던 것은 국내는 물론 해외 음악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고 자신들만의 독창적인 음악세계를 구축했다는 점이었다. 여기에 기존의 가요형식을 파괴하고 가요 소비계층의 주류를 성인에서 청소년으로 옮겨놓았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산울림’의 산파는 맏형 김창완(1954~ )이었다.
김창완은 늘 부스스한 머리 모양과 얼굴로 인해 ‘자다가 부스스’라는 별명이 생겼다. 트레이드 마크는 순수하고 천진난만한 표정의 ‘털털한 동네 형’, ‘이웃집 아저씨’의 이미지다. 사진이든 TV 화면이든 직접 대면하든 그의 미소 띤 얼굴을 보노라면 마음은 절로 푸근해지고 경계심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그러나 태평해 보이는 그의 얼굴 뒤에는 다양한 재능과 열정이 숨어 있어 하루하루가 긴장의 연속이었다. 그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음악 활동은 물론 연기, 라디오 DJ, 화가, 시인, 수필가 등으로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종합 예인(藝人)의 면모를 자랑하며 종횡무진하고 있다. 

김창완의 성장기

김창완은 서울에서 태어났다. 만 5세가 되었을 때 동네에서 함께 놀던 1~2살 많은 친구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것을 보고 무작정 그들을 따라가 이른바 ‘청강생’ 식으로 학교 수업을 들었다. 김창완이 다음 해 정식으로 입학했을 때 1학년 과정이 이미 배운 내용이어서 교장 선생님의 재량에 따라 2학년으로 월반했다. 결국 1살 먼저 입학하고 생년월일도 2월 생이어서 친구들보다 2살 어린 나이로 학교 생활을 했다. 김창완은 1971년 중앙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농대 잠사학과에 입학했다. 같은 해, 서울대 농대에 입학한 가수 겸 기획자인 이수만도 김창완보다 2살 위다.
1971년 대학 1학년 첫 학기가 끝나갈 무렵 악기점에서 구입한 통기타는 김창완을 음악 세계로 이끌어준 일등 공신이다. 통기타를 독학으로 마스터한 뒤 한 달 만에 작곡한 게 ‘왜! 가’ 노래였다. 당시 고등학생·중학생이던 두 동생 김창훈(1956~ )과 김창익(1958~2008)도 형의 어깨너머로 기타를 배워 형제는 음악을 통해 우애를 다졌다. 김창완은 이후 1977년 ‘산울림’으로 데뷔할 때까지 100곡 정도를 작곡했다. 1975년 둘째 김창훈이 서울대 농대 식품공학과에 합격한 것을 축하한다며 부모님이 일렉트릭 기타와 드럼을 선물로 사 주면서 세 형제는 록밴드 가수의 길을 준비했다. 김창완은 리드 기타, 둘째는 베이스 기타, 막내는 드럼을 담당했다. 1977년 막내까지 고려대 기계공학과에 들어가자 세 형제는 그해 8월 열린 제1회 대학가요제에 ‘무이’라는 그룹명으로 출전했다. 김창완이 작곡한 ‘문 좀 열어줘’가 예선 1위, 동생 김창훈이 소속된 서울대 농대 보컬그룹 ‘샌드 페블즈’의 ‘나 어떡해’가 2위였다. ‘나 어떡해’는 김창훈의 곡이니 산울림 노래가 예선 1위, 2위를 차지한 것이다. 그러나 김창완이 대학 졸업생이라는 사실이 밝혀져 ‘무이’는 9월 3일 치러진 본선에는 진출하지 못했다. 대신 ‘샌드 페블즈’가 ‘나 어떡해’로 그해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의 영예를 안았다.

‘산울림’과 ‘김창완 밴드’ 시절

▲ 김창완

3형제는 1977년 말 자신들만의 기념 음반을 만들기 위해 종로 2가 서라벌레코드사를 찾아갔다. 레코드사 사장은 파격적인 이들의 노래를 듣고 음반을 내주겠다며 밴드 이름을 ‘산울림’으로 지어주었다. 이렇게 해서 데뷔 앨범 1집에 수록될 9곡을 녹음했다. ‘아니 벌써’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 ‘골목길’ ‘문 좀 열어줘’ ‘소녀’ ‘불꽃놀이’ 등 9곡이 수록된 1집 타이틀곡은 ‘아니 벌써’였다. 그러나 당초 제목은 ‘아니 벌써’가 아니었다. 어느 여름날 아침의 퇴폐적인 술판을 그린 ‘아니 벌써’는 심의에서 퇴폐적이라는 판정을 받아 가사는 물론 제목까지 통째로 수정해야 했다. ‘소녀’의 원래 제목도 불안정한 젊음을 노래하자는 의미의 ‘늑대’였으나 역시 심의에 걸려 늑대와는 정반대 이미지인 ‘소녀’라는 제목으로 심의를 통과했다.
이런 우여곡절을 거쳐 완성된 데뷔 앨범은 1977년 12월 15일 발표되었고 발매와 함께 전국 청춘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젊은이들은 산울림 음악의 파격과 동적인 에너지에 환호하고 신선함에 갈채를 보냈다. 1주일 만에 신문 만화에 ‘아니 벌써’라는 말이 등장하고 20일 만에 전국적으로 40만 장이 팔려나갔다. 김창완은 훗날 산울림의 의미에 대해 “당시는 주류였던 팝송이 대단해서 들은 게 아니라 우리 가요에서 들을 게 없어서였다. 산울림은 우리 젊은이들을 팝송의 사정권에서 벗어나게 해준 음악이었다”고 자부했다. 김창완이 직접 쓴 노랫말 역시 파격적인 사운드만큼이나 청춘들을 사로잡았다.
산울림은 1978년 5월 10일 ‘어느 날 피었네’, ‘이 기쁨’,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나 어떡해’, ‘안갯속에 핀 꽃’ 등 10곡을 수록한 2집을 발표하며 인기를 이어나갔다. 1978년 11월 1일에는 ‘내 마음’, ‘한 마리 새되어’ 등이 수록된 3집을 발표함으로써 초기 산울림의 대미를 장식했다. 산울림은 이렇게 1978년까지 휩쓸었으나 김창훈과 김창익의 군 입대로 4~6집은 김창완 솔로 체제로 발표되었다. ‘오솔길’, ‘창문 너머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 ‘빨간 풍선’ 등이 그 시기에 발표된 곡들이다. 산울림은 1981년 김창훈과 김창익이 복귀한 7집 ‘가지 마오’를 발표하고, 1982년과 1983년 각각 8집과 9집을 냈다. 1984년 10집을 발표한 뒤에는 두 동생의 취업으로 인해 실질적으로 김창완 혼자 하는 프로젝트가 되었다. 김창완이 혼자 취입한 11집(1986년)과 12집(1991년)에 이어 1997년에는 3형제가 잠시 모여 13집이자 산울림 이름으로 된 마지막 음반을 발표했다. 세 형제는 2006년 7월 데뷔 30주년을 기념하는 공연을 펼쳐 그들의 활동을 목말라하던 팬들을 즐겁게 해주었으나 막내 김창익이 2008년 1월 캐나다에서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 산울림은 영원히 팬의 곁을 떠나고 말았다.
김창완은 2008년 11월 후배 뮤지션 4명과 함께 5인조로 구성한 ‘김창완 밴드’를 결성, 첫 앨범 ‘더 해피스트’를 출반하면서 새로운 음악 인생을 시작했다. 이후 김창완 밴드는 정규앨범, EP 음반, 싱글 앨범 등 가리지 않고 곡을 발표하며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그렇게 낸 음반은 2023년 현재 산울림 13집, 김창완밴드 6집 등을 포함해 30여 장이나 된다. 아이들에 대한 사랑도 각별해 1979년 ‘개구장이’가 실린 ‘어린이에게 보내는 산울림의 동요 선물 제1집’ 이후 ‘산 할아버지’ 등 직접 지은 동요 음반을 여럿 발표했다.

전방위 예인(藝人)

김창완의 어투는 조곤조곤하고 구수하고 편안하다. 하여 일찌감치 라디오 DJ로 진출, 지금까지 수십 년 동안 끈질기게 DJ로 활동함으로써 현역 최장수 DJ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시작은 1978년 TBC 라디오 ‘7시의 데이트’였다. 이후 1988년 CBS 라디오의 ‘꿈과 음악 사이에’를 맡고 1990년대 초반에는 MBC 라디오에서 ‘김창완의 추억의 팝송’을 진행했다. 지금은 2000년부터 매일 생방송으로 진행하는 SBS 파워 FM ‘아름다운 이 아침 김창완입니다’에서 예의 정겨운 목소리로 팬들과 만나고 있다. 그 세월이 어느덧 24년째다. 놀라운 것은 방송 오프닝 원고를 하루도 빠짐없이 자신이 직접 손글씨로 쓴다는 것이다. 그렇게 술을 사랑하고 즐기면서도 아침 방송 시간만큼은 칼같이 지켜 방송가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방송이 6000여 회에 달했을 때, 그는 이른바 ‘창완 체’로 쓴 오프닝 멘트를 모아 2016년 ‘안녕, 나의 모든 하루’를 펴냈다. 또박또박 반듯한 ‘창완 체’는 군더더기 없는 문체와 어우러져 단정하면서도 고소한 인간미를 풍긴다.
1985년 MBC 어린이 특집극 ‘바다의 노래’로 드라마와 처음 인연을 맺은 그는 1995년 첫 주연작인 KBS 드라마게임 ‘야채식빵 굽는 남자’를 거쳐 같은 해 ‘연애의 기초’로 명실상부한 탤런트 반열에 올라섰다. 이후 ‘카이스트’, ‘하얀 거탑’ 등 다수 드라마에 출연했다. 1996년 영화 ‘정글 스토리’에 출연한 것을 계기로 영화에서도 연기력을 뽐냈다. 2012년에는 공포영화 ‘닥터’의 주연배우로도 발탁되어 성형외과 의사 역을 소름 돋게 연기했으나 영화는 흥행에 실패했다. 이후 김창완은 영화에 출연하지 않고 있다. 연기자로 출연한 드라마와 영화가 70편이 넘는다. 그러다 보니 지금의 20~30대 중에는 그를 가수라기 보다 연기자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김창완은 글도 맛깔나게 쓴다. 2013년 국내 유일 동시 전문지 ‘동시마중’에 ‘할아버지 불알’ 등 5편이 실려 동요 시인으로 정식 등단하고 2019년 동시집 ‘무지개가 뀐 방이봉방방’을 냈다. 산문집 ‘이제야 보이네’(2005년), 동요 동화책 ‘개구쟁이’(2022년)도 펴냈다. 김창완은 그림에도 소질이 있다. 1977년 그의 손에서 만들어진 ‘산울림’ 첫 앨범 커버를 시작으로 후속 앨범은 물론 공연 포스터까지 크레파스로 직접 그린 그림들이 노래와 만나면서 하나의 작품이 되었다. 그 결과물이 2023년 ‘김창완 초대 개인전’과 ‘붓으로 보다’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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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그 평화회의 찾아간 세 밀사… 이준 열사는 그곳에서 병사(病死)

윤석열 대통령이 네덜란드를 방문, 2023년 12월 13일 헤이그에 있는 이준 열사 기념관을 찾아가 묵념했다. 한국 대통령이 이곳을 방문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해당 기념관은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이위종과 함께 고종 황제의 특사로 파견된 이준 열사가 순국한 장소인 드 용 호텔에 설립되었다.

이상설·이준·이위종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1906년 8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릴 예정이라는 소식이 들려온 것은 러일전쟁 승전으로 일본이 기세등등할 때였다. 고종은 세계 44개국 대표단이 모이고 러시아가 주관하는 제2차 평화회의야말로 일본의 불법적인 국권 침탈을 국제적으로 공론화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1905년 10월 말 관립 법어학교 교사 에밀 마르텔을 북경 주재 러시아 공사에게 보내 자신의 뜻을 전달했다. 러시아 외무부는 11월 1일 자로 “헤이그 국제회의에 대한제국 대표를 초청한다”는 의사를 북경 주재 러시아 공사를 통해 전달했다.
고종은 러시아 측 태도에 고무되어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이용익에게 러시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서 니콜라이 2세 황제에게 도움을 청하고 헤이그 평화회의에 참석할 것을 지시했다. 그런데 1906년 8월에 열릴 예정이던 제2차 평화회의가 강대국들의 사정으로 1년 연기되고 그 1년 동안 러시아의 입장이 바뀌었다. 1906년 4월 3일 자로 헤이그 주재 러시아 대사가 네덜란드 외무부에 보낸 서한에 따르면, 대한제국은 초청장을 발송한 47개국 중 12번째로 명단에 있었다. 그런데 그 후 러시아가 동아시아 전략을 일본과 타협하는 쪽으로 바꿔 헤이그 평화회의에 대한제국을 불참시키는 쪽으로 입장을 바꾼 것이다.
러시아의 태도 변화에도 불구하고 고종에게는 여전히 평화회의 특사 파견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런데 고종의 특사로 밀명을 받았던 이용익이 1907년 2월 급서하는 바람에 고종은 다른 밀사를 물색해야 했다. 그래서 결정한 특사가 전직 의정부 참찬 이상설(정사)과 전직 검사 이준(부사)이었다. 당시 이상설(1870~1917)은 블라디보스토크에 있었기 때문에 이준(1859~1907)이 대표로 고종의 부름을 받았다. 고종은 이준에게 “블라디보스토크에 체류하고 있는 이상설과 함께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서 주러 공사 이범진을 통해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짐의 친서를 전하고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가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1907년 4월 20일 수결과 국새가 찍힌 백지 위임장을 작성해 전달했다. 
이준은 조선 최초의 근대적 사법교육기관인 ‘법관양성소’의 제1기생 출신으로 법관양성소에서 6개월간 교육을 마치고 수료 이듬 해인 1896년 한성재판소 검사시보로 임관한 법조인이었다. 그러나 조정 신하들의 불법과 비행을 파헤치다 한 달 만에 면직되자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 법과에서 체계적으로 법을 다시 공부했다. 1898년 귀국 후 대한적십자사 초대 총재(1905) 등 사회 활동에 전념하다 1906년 대한제국 최고 사법기관인 평리원(대법원) 예심판사(검사)로 임용되었다. 걸음마 단계였던 개화기 검찰의 부패를 적발하는 검찰 내 포청천 역할을 했으나 항명 파동으로 체포·수감되었다. 종친인 고종의 감형 조치로 곧 석방되긴 했지만 평리원 검사직에서는 쫓겨났다. 그러던 중 고종의 밀명을 받은 것이다.

헤이그 밀사, 만국평화회의 주최 측에 문전 박대 당해

이준은 고종의 위임장을 품에 숨긴 채 1907년 4월 22일 서울을 출발했다. 부산에서 배를 타고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이상설을 만났다. 두 사람은 5월 21일 함께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보름 후인 6월 4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 이범진(1852~1911)을 만났다. 1901년 주러시아 공사로 부임한 이범진은 1905년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된 후에도 일제의 소환 명령을 거부한 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남아 항일 외교 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이상설·이준 두 밀사는 이범진 공사와 함께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대한제국의 국권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 달라”는 내용의 고종의 친서를 전달하기 위해 15일간 체류하면서 교섭을 벌였지만 결국 니콜라이 2세를 만나진 못했다. 당시는 1907년 7월 30일에 타결된 러일 협약을 앞두고 있던 시점이었다. 러시아는 일본과 비밀협상을 통해 몽골에서 특수 이해를 보장받는 대신 대한제국에서 일본의 자유행동을 인정하기로 합의한 상태였기 때문에 대한제국의 지원 요구를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러시아는 이에 그치지 않고 헤이그 평화회의 의장을 맡은 러시아 넬리도프에게 전문을 보내 대한제국의 두 밀사가 헤이그에 도착해도 협조하지 말도록 지시했다. 두 밀사는 어쩔 수 없이 이범진의 둘째 아들 이위종(1887~?)과 함께 6월 19일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나야 했다. 당시 20세였던 이위종은 9세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외국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영어·불어·러시아 등 7개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했고 국제 정세에도 밝았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 군사학교에 입학했으며 1905년 러시아 귀족의 딸과 결혼했다. 당대 최고의 청년 국제 엘리트이자 차세대 글로벌 리더로 손색이 없었다. 세 밀사가 헤이그에 도착한 것은 평화회의가 개회하고 열흘도 더 지난 6월 25일이었다. 만국평화회의는 비넨호프궁 회의장에서 6월 15일부터 10월 18일까지 열렸다.
세 밀사는 투숙지인 더 용 호텔 앞 현관에 태극기를 내걸고 공개 활동을 시작했다. 밀사들은 6월 26일 대회 의장인 러시아의 넬리도프에게 고종의 옥새가 찍힌 전권위임장을 내보이며 면담을 신청했다. 그러나 러시아 정부가 이미 넬리도프 의장에게 대한제국 특사들과의 접촉을 삼가라는 전문을 보내놓은 탓에 면담은 성사되지 않았다. 특사들은 영국·프랑스·독일·중국 대표 등도 만나 협력을 요청했지만 그때마다 문전 박대를 당했다. 일본의 집요한 방해까지 있어 특사들은 끝내 회의장에 입장하지 못했다.

일본의 국제법 위반 행위 폭로

▲ 헤이그 세 밀사(왼쪽부터 이준·이상설·이위종)

결국 특사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회의에 참석한 각국 대표들에게 회의장 밖에서 프랑스어로 번역한 독립 호소문을 배포하는 등의 선전 활동뿐이었다. 특사단은 ‘만국평화회의보’ 6월 27일 자 지면을 통해 일본의 국제법 위반 행위를 폭로했다. 호소문은 만국평화회의보뿐만 아니라 ‘런던 타임스’, ‘뉴욕 헤럴드’ 등에도 전재되었다. 만국평화회의보 6월 30일 자에는 일본의 강압을 낱낱이 고발한 이위종의 호소문이 ‘왜 조선을 제외시키는가’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영국의 로이터통신도 특사들의 활동 상황을 세계로 전파했다.
특사들은 7월 8일 국제기자클럽에도 초청되었다. 그 자리에서 이위종이 프랑스어로 ‘한국을 위한 호소’라는 제목의 연설에서 “대한제국 황제의 서약이 없는 을사조약은 명백한 불법”이라고 열변을 토하자 각국 언론이 뜨거운 관심을 보였다. 이날의 연설회 장면은 ‘헤이그 신보’ 7월 10일 자에 상세히 보도되었다. 유창한 영어 실력과 서양식 매너가 몸에 밴 이위종이 황제와 같은 전주 이씨라는 점을 들어 ‘프린스(Prince)’라고 보도한 언론도 있었다. 일본의 수석대표는 “청중 앞에서 프랑스어로 1시간 동안 웅변조로, 격렬하게 일본을 공격하는 연설을 했다”고 본국 외무부에 보고했다. 일본에서 유일하게 대회를 취재한 일본의 한 기자는 이튿날 오사카마이니치신문 1면에 ‘대한(對韓) 조치 단행할 시기-헤이그 한인의 괴운동’이란 제목으로 일본 정부에 강력 대응을 촉구하면서도 “그들 3명은 진실로 애국의 지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궁핍해 보였으나 풍채와 언어, 거동을 보면 나라의 쇠망을 우려해 자진해서 임무를 떠안은 것 같았다”고 보도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이준 부사가 7월 14일 이역만리 네덜란드 땅에서 눈을 감았다. 이준의 죽음은 7월 17일 자 ‘만국평화회의보’, ‘헤이그 신보’, ‘더 텔리그라프’ 등에 실렸다. 한 현지 신문은 이준이 7월 14일 ‘호텔방에서 갑자기 죽었다. 뺨에 난 종양을 제거했지만 살리지 못했다.’고 기록했다. 7월 17일 일본 외무차관은 이준 사인이 상처가 연쇄상구균에 감염된 단독(丹毒)이라고 통감부에 보고했다. 더 용 호텔에 2일간 안치되었던 시신은 7월 16일 장례식 후 이상설과 호텔 주인에 의해 헤이그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 만국평화회의보 발행자인 미국인 저널리스트 윌리엄 스티드는 “유일하게 이준의 최후를 지켜본 이상설이 영어로 ‘너무나 슬프다, 슬프다(So sad, so sad)’는 말을 되뇌었다”고 7월 17일 자 만국평화회의보’에 기록했다.

이준의 병사(病死)가 ‘분사’나 ‘자살’로 알려진 전말

이준의 죽음을 국내에서 처음 보도한 신문은 ‘대한매일신보’였다. 7월 18일 발행한 호외의 핵심 내용은 이랬다. ‘이씨가 충분(忠憤)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이에 자결해 만국 사신 앞에 피를 뿌려서 만국을 경동케 하였다더라.’ 첫 보도를 경쟁지 ‘대한매일신보’에 빼앗겼던 ‘황성신문’은 이날 ‘이씨 자살설’ 제목으로 ‘자기 복부를 칼로 잘라 자살했다는 전보가 도착했다는 설이 있더라’라고 기사를 보도했다. 정확한 근거는 없었다.
일본은 7월 19일 헤이그 밀사를 빌미로 고종을 퇴위시키고 순종을 왕위로 올렸다. 꼭두각시 순종은 다음날 세 밀사를 ‘거짓으로 밀사라고 칭한 죄’로 처벌하라고 명했다. 일본은 조선의 재판소가 궐석재판을 열도록 압력을 가해 8월 8일 이상설에게는 사형, 이준과 이위종에게는 종신징역을 선고하도록 했다. 대한매일신보는 이후에도 이준의 장거를 미화하는 기사를 계속 쏟아냈다. 8월 31일에는 ‘헤이그의 외로운 혼, 대한 열사 이준을 조상함’이라는 제목으로 만가를 게재했다. 대한매일신보가 주도한 ‘이준 자결 순국’ 보도는 황현의 ‘매천야록’을 비롯한 여러 문서에 인용되어 사실로 완전히 굳어졌고 백성들은 분노했다.
그로부터 수십 년 후 해방이 되었다. 1956년 사학자 이병도가 ‘국사대관’에서 병사설을 처음 제기했다. 여론이 들끓자 국사편찬위원회가 그해 조사위원회를 만들고 6년 만인 1962년 10월 27일 보고서를 내놓았다. ‘이준열사사인조사자료’ 제목의 보고서는 일제 강점기에 작성된 자료와 헤이그 현지 신문과 공문서, 해방 후 각종 매체 보도와 증언을 수집 비교해 사실상 병사(病死)인 ‘분사(憤死·분에 못 이겨 죽음)’로 결론을 내렸다. 다만 국민 사기를 의식해 용어는 ‘분사’도 ‘할복자살’도 아닌 ‘순국(殉國)’으로 결정했다. 이준의 시신은 네덜란드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가 1963년 10월 서울 수유리에 안장되었고 헤이그에서 특사 일행이 묵었던 호텔은 1995년 이준 열사 기념관으로 꾸며졌다. 국가보훈처는 2015년 더글러스 스토리 기자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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