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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서 평론] ‘가는 세월’의 작곡가 겸 가수, 기타리스트 김광정의 삶과 노래[1]
‘가는 세월’이 있으니 당연히 ‘오는 세월’도 있는 거죠
2024년 01월 09일 (화) 11:54:34 박성서 webmaster@newsmaker.or.kr

‘가는 세월 그 누구가 막을 수가 있나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사랑받는 노래 ‘가는 세월’이다.

이 노래의 작곡자 겸 가수인 기타리스트 김광정씨(82세).

1950년대 말 KPK쇼단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 뉴요커쇼, 베니쇼, 탑드로우쇼 등 미8군쇼단에서 활동했다. 아울러 그룹사운드 롤링식스, 수퍼스타, 키브라더스 등을 거쳤다.

어느덧 데뷔한 지 65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음악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최근 ‘가는 세월’의 후속작인 ‘오는 세월’을 발표했다. ‘가는 세월’ 발표 이후 47년 만이다.

우리나라 미8군쇼와 그룹사운드 1세대 모임인 ‘예우회’ 회원 20여 명이 함께 참여한 옴니버스 음반에 수록된 것. 작사, 작곡은 물론 노래까지 직접 불러 80대의 노익장을 과시했다. 
2006년 3월에 창립된 예우회는 김광정씨가 초대 회장을 맡은 이후 10여 년간 모임을 이끌어 왔다.

우리나라 그룹사운드 1세대의 살아있는 전설, 1959년 KPK쇼단에서부터 시작된 그의 길고 긴 음악 여정을 따라가 본다. 김광정의 삶과 노래, 그 첫 번째.

글l박성서(음악평론가, 저널리스트)

 

▲ 자작곡 ‘가는 세월’이 수록된 김광정 독집 음반. 1977년

시간이 갈수록 더욱 공감되는 노래 ‘가는 세월’

‘가는 세월 그 누구가 잡을 수가 있나요/흘러가는 시냇물을 잡을 수가 있나요/아가들이 자라나서 어른이 되듯이/슬픔과 행복 속에 우리도 변했구려/하지만 이것만은 변할 수 없어요/새들이 저 하늘을 날아서 가듯이/달이 가고 해가 가고 산천초목 다 바뀌어도/이내 몸이 흙이 되도 내 마음은 영원하리. -가는 세월(김광정 작사, 작곡, 노래)’

시간이 지날수록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명곡, ‘가는 세월’이다. 이 노래는 기타리스트 김광정씨가 1975년에 만들었다.

당시 그는 그룹 키브라더스 기타리스트로 서울 타워나이트클럽에 출연 중이었다.

그날 세 살 터울의 동생, 광수가 미국으로 떠났다. 먼저 가 있는 둘째 형으로부터 들어오라는 권유를 받고 떠난 것.

동생은 영주권 없이 비자만 든 채 확실한 보장도 없는 미국 땅으로 그렇게 떠났다. 막상 형을 믿고 떠났지만 형도 영주권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앞으로 어떤 고생을 하게 될지 한편 착잡했다. 미국행 비행기로 동생을 떠나보내고 돌아올 때의 그 허전함과 착잡함.
그 순간 그런 마음을 대신하듯 어떤 멜로디가 뇌리를 스쳐갔다. 이거 괜찮은데.., 순간 마음에 와닿았다.

행여 그 멜로디를 잊을까 계속 흥얼거리며 오다가 중간에 동료인 박명수 집에 급히 들러 다짜고짜 기타를 가져오라고 했다. 줄을 튕기며 코드를 만들고 멜로디를 악보에 그려나갔다.

그렇게 만들어진 악보는 그날 밤 타워나이트클럽 무대에서 키브라더스에 의해 연주되었다. 멤버들은 저마다 ‘멋지다’며 엄지손을 치켜세웠다. 스스로도 근사하게 느껴졌다.

결국 이 노래는 키브라더스의 주요 레퍼토리이자 인기 레퍼토리로 자리 잡았다.

김광정씨가 직접 마이크를 잡았다. 그는 대부분의 노래를 리듬 & 블루스 스타일로 부른다. 팀의 보컬이었던 윤항기씨가 솔로 활동에 치중했기 때문에 언젠가부터 노래는 그의 몫이 되었다.

어느 날인가, 그날도 어김없이 무대에서 ‘가는 세월’을 부르고 있는데 갑자기 한 사내가 무대 정면을 향해 걸어왔다. 가수 서유석이었다.
“형, 지금 부르는 노래 뭐야?”
“응. 이거 내가 만든 노래야”
“형. 노래 끝나고 잠깐 봐”

서유석씨는 이 노래를 본인이 취입하게 해달라고 했다. 그래서 한번 불러보라고 했더니 서유석 특유의 통기타 노래 스타일로 불렀다.

“넌 안돼, 이 노래는 착착 감기는 리듬 & 블루스풍으로 불러야 하는데 네 필(Feel)과는 너무 안 맞아.”

한마디로 거절했다. 그러나 집요하게 찾아왔다. 3개월을 시달린 끝에 결국 허락했다.
서유석 음반이 나오고 얼마 뒤 한 음반사에서 찾아왔다. 작곡자가 직접 부르는 노래도 매력 있게 와닿는 것 같은데 음반 낼 의향이 없느냐고 물어 왔다.

고심 끝에 음반을 내기로 결정한 그는 그동안 만들어 놓은 7곡을 포함해 총 12곡이 수록된 독집 음반을 취입했다.

음반 재킷 사진을 찍기 위해 트레이드 마크였던 콧수염도 깎았다. 그리고 음반을 발표했다. 드디어 기타리스트에서 작곡가로 그리고 가수로 변신한 것이다.

▲ 미8군쇼와 그룹사운드 1세대 모임인 ‘예우회’. 2006년 3월에 창립된 예우회는 김광정씨(아래 좌측에서 세 번 째)가 초대 회장을 맡은 이후 10여 년간 모임을 이끌었다

만주에서 출생, 1.4후퇴 때 피란 내려와

김광정(金光政). 그는 1941년 9월 7일 부친 김성진, 모친 안완칠 사이에 4남 2녀 중 3남으로 만주 안동에서 태어났다. 
“애를 낳는다고 하니까 동네 아주머니들이 모여 이만한 버치(큰 대야의 이북 사투리)에 물을 가득 채우더래요. 그리고 애가 나오자마자 그 안에 집어 던졌대. 옛날 몽고인들은 아기가 태어나면 먼저 찬물에 넣었는데 그게 징기스칸 풍습이라나, 그래서인지 어릴 때부터 아주 건강하게 자랐다고 어머니가 종종 말씀하셨죠.”

부친이 운전 취업으로 잠시 중국에 머물렀을 때 태어난 그는, 얼마 후 고향인 평안북도 박천군 박천면 동구리로 돌아와 그곳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바로 청천강이 흐르는 곳이었다.
“박천에서 할머니가 냉면집을 크게 하셨어요. 그래서 냉면을 특히 맛있게 먹던 기억도 많이 나고... 또 우리 집은 형제들이 많아 돌보기가 쉽지 않았다는데 나는 그냥 앉혀놓으면 내내 그대로 앉아 있어 아주 편안하게 키웠다고 하더군요.”

1.4 후퇴 때 큰 형만 두고 가족이 모두 피란 내려왔다. 
“형이 인민군에 징집되지 않으려고 숨어 다니다가 밤에 이장에게 걸렸대요. 그래서 그날 밤 만주로 도주했는데 한 2주 지나니까 미군들이 우리 동네에 들어왔어요. 조금만 더 숨어있었더라면 같이 나올 수 있었는데, 참으로 안타깝죠.”

그의 나이 10살,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그때 넘어오면서 고생한 생각하면 말도 못하지. 걷고 걸어 영등포역까지 왔어요. 삼팔선을 지나면서 보니까 돈이 길바닥에 새빨갛게 깔려 있는데 아무도 줍질 않아요. 이제는 쓸모가 없는 돈일 테니까.”

그걸 보며 이제 이남으로 가면 모든 게 바뀌겠구나, 한편으로는 두려움이 앞섰다.
“영등포역에 도착해 기차를 타는데 자리가 없어서 지붕 위에 올라탔어요. 간혹 사람들이 떨어져 죽기도 한다는 소리를 들은 아버지가 새끼줄로 밧줄을 만들어 식구들을 묶으시던 생각도 나고, 굴속에 들어갈 때는 이불 뒤집어쓰고, 기차가 잠깐 서면 재빨리 내려가서 나뭇가지를 주워 생밥을 해 먹으면서 그렇게 부산 영도까지 갔어요. 얼마나 걸렸는지 생각도 잘 안 나.”
또렷한 기억도 있다. “새카맣게 때 묻은 이부자리 짊어지고 개성을 지나는데 한 치과병원이야, 문을 못으로 박아놨는데 아버지가 그 문을 뜯고 들어가시더라고. 들어가서 보니까 사람들이 얼마나 급하게 떠났는지 밥상에 숟가락을 그냥 놓은 채 떠났더라고. 마침 우린 쌀도 다 떨어졌지. 그런데 아버지가 막대기를 들고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다가 부엌 바닥에 숨겨둔 쌀을 찾아냈어요. 그래서 가져갈 수 있는 만큼 다 짊어지고 이불 새카만 거 다 버리고 새 거로 바꾸고. 괜찮은 옷들은 죄다 입고 나오고... 워낙 식구가 많다 보니 웬만한 옷은 다 맞더라고요. 난 어렸지만 힘이 세서 쌀 다섯 말을 등짝에 지고 나오더래. 하하....”
부산에 도착해서는 그나마 괜찮게 지냈다. “아버지는 미군 부대 일을 하셨고 어머니는 장사를 해서 억척같이 돈을 모았죠. 난 국민학교에 들어갔지만 학교를 못 갔어요. 부산 애들이 얼마나 드세고 텃세를 부리는지, 싸우기 싫어서 그냥 책가방 들고 바닷가에 가 놀곤 했죠,”


지금까지 따라다니는 별명 ‘오장동 깐디’

그의 별명은 ‘오장동 깐디’다. 휴전 후 서울로 올라온 가족이 처음 터를 잡은 곳이 바로 오장동, 지금의 중부시장 자리다. 그곳에서 자라 얼굴이 검다고 해서 지어진 별명이다.

“당시 오장동은 정말 험한 동네였어요. 사람들이 못되게 구는 데가 바로 그곳이었는데 허허벌판에 아주 무서운 동네였죠.”

오장동에서 부친은 운전 기술을 바탕으로 자동차 서비스 공장을 차렸다. 그러나 부산에서 조금 벌었던 거 고생만 하다가 끝났다고 했다.

“넝마주이, 아편쟁이들이 늘 눈에 보일 정도로 위험한 동네였어요. 제일 심한 데가 화신 백화점 건너편으로 그쪽에 ‘걸다리’들이 많이 살았어.”
집도 없이 천막, 땅굴을 파놓고 살던 사람들을 ‘걸다리’라고 불렀다. 

“그들은 우리가 모자를 쓰고 다니니까 학삐리(학생)라고 불렀는데. 그 무리들이 특히 우릴 많이 괴롭혔어요. 이들은 저녁에 도둑질해서 아침에 물건 넘긴 뒤 아편 주사 한 대 맞고 길에 나와 노상 저렇게 뻗어있는 거야. 매일 그런 것만 눈에 보이니까 나도 좀 거칠게 놀 수밖에 없었죠. 패싸움도 많이 하고...”

이들 대부분은 넝마주이로 생계를 유지했다. 갈쿠리(갈고리의 방언)로 이것저것 찍고 다닌다고 해서 사람들은 ‘갈쿠리쟁이’라고도 불렀다.

▲ KPK쇼단 기타리스트로 활동하던 시절의 김광정씨


‘김보이즈’의 김영일 만나 KPK 쇼단에 들어가

오장동 생활이 일순간에 변한 건 동갑내기 친구 김영일씨를 만나면서부터다. KPK쇼단의 대표였던 가수 이난영씨의 차남이기도 한 그와 어울려 거의 매일 아침 남산에 오르곤 했다.

“영일이는 필동, 남산 올라가기 바로 직전에 집이 있었어요. 아침이면 운동 겸 매일 남산에 올라가는 거야. 추운 겨울에 기타통 들고 뛰다 보면 수건에 온통 얼음이 얼어요. 남산 올라가는 중턱에 약수터가 있는데 거기가 우리 놀이터였죠. 이 친구 때문에 내가 음악에 눈뜨게 되었지요.” 

무엇보다 악기를 만지는 것이 재미있었다. 시간 날 때마다 잡은 기타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영일이가 악보를 못 봐요. 그래서 기타를 내게 가르쳐줄 수가 없는 거야. 악보는 볼 줄 몰랐지만 ‘대니 보이(Danny boy)’를 틀어놓고 색소폰을 똑같이 불 정도로 청음이 아주 뛰어났죠. 그때 난 명보, 스카라, 중앙극장 쪽에서 난다긴다하면서 못되게 살던 때였어요. 그야말로 망나니로 지냈는데 영일이가 마음 잡아주려고 무척 애를 썼지요.”

오장동 생활을 벗어나기 위해 죽기 살기로 기타에 매달렸다고 그는 회고한다. 그러다가 KPK 쇼단에 들어가게 된다.

“사무실이 서대문 쪽 아파트 지하실에 있었어요. 처음 KPK에 들어가서 짐, 악기 등을 날라주며 고생을 많이 했죠. 공연 전 앰프 셋업 해주고 기타 튜닝을 마치면 쇼가 시작돼요. 그걸 모두 내가 했어요. 집이 없는 것도 아닌데 기타 연습하느라 집에 들어가지 않았죠. 김복식이라는 조명 담당 친구가 거기서 자니까 같이 먹고 자고 그랬어요.”

1959년 김시스터즈가 미국에 진출하고 얼마 후 ‘김보이즈(도미 후 김브라더스로 개명)’가 결성, KPK를 통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혼자 기타 연습을 엄청나게 했어요. 코드서부터 악보 그려놓고 연습하고, 얼마나 연습했나 하면 ‘블랙 사파이어 핑거 온 파이어(Black sapphire fingers on fire)’라는 기타 솔로곡이 있어요. 당시에 그걸 할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었죠. 그걸 마스터하라며 이인표 형님이 진짜 귀한 악보를 구해주었어요. ‘손가락에 불이 나다’라는 제목의 노래인데 그야말로 손가락에 불이 날 정도로 연습했죠. 끝내 마스터하지는 못했지만...”

당시에 가수 윤복희씨가 KPK 사무실에 가끔 놀러 왔었는데 올 때마다 시끄럽다며 기타 좀 그만 만지라고 잔소리하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고 강조한다.

“비단 복희 뿐이었겠어요? 오는 사람마다 다들 한마디씩 했죠. 제발 좀 그만하라고...”

 

▲ (사진 위) KPK 시절의 김광정(아래). 우측으로부터 김복식(조명), 최태원, 매니저, 김태성(김보이즈 막내), 밴드(드럼). (사진 중간) KPK쇼단의 김보이즈와 김치켓. (사진 아래) 도미를 앞둔 김보이즈의 고별 공연 광고, 1962년

KPK쇼단의 정식 기타리스트가 되어 무대에 오르다

“야, 유니폼 입고 저 옆에 서봐” 

어느 날 갑자기 쇼무대에 서라는 허락이 떨어졌다. 포지션은 KPK 쇼단의 세컨드 기타리스트. 마스터는 클라리넷 이동기씨였다.

“그동안 했던 고생과 수모를 한꺼번에 보상받는 기분이었죠. 당시 정말 고생을 많이 했어요. 사무실에 일찍 나오게 되면 배가 고파서 누가 짜장면 시키면 뛰어가 내 것도 꼽사리 끼워서 얻어먹곤 했으니까.”

처음 세컨 기타로 무대에 섰지만 그에 따른 대가는 없었다. 공연을 마치고 미군이 서울역까지 데려다주면 매번 청량리에 있는 집까지 뛰어야만 했다.
 “미군이 서울역에 밤 열두 시 20~30분 전에 내려줘요. 그때부터 집까지 뛰어야 해. 통행금지에 걸리면 안 되니까. 난 항상 버스비조차 없었어요.”

그러나 공연 다니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KPK는 미8군쇼 뿐 아니라 일반 공연도 많이 했다.

“KPK 간판스타가 이난영, 남인수씨였어요. 그런데 트로트 노래 반주가 의외로 어려워요. 한 번은 남인수 선생이 ‘낙화유수’ 반주를 부탁하셨는데 멜로디는 단순한 것 같지만 그 맛을 내기가 결코 쉽지 않아요. 야단도 많이 맞았지요. 제 경우 서양음악 위주로 기타를 연주해 왔으니 더더욱 잘 안되죠. 그만큼 음악의 세계는 무한하고 또 할수록 어렵더군요.”


음악 인생을 바꿔준 또 한 명의 기타리스트, 양인환

얼마 뒤 KPK에서 퍼스트 기타를 맡았던 이난영씨의 장남, 김영조씨가 빠지고 새로운 연주자가 들어왔다. 

“영조 형은 쇼 프로그램만 맡고 그 자리에 양인환이라는 경상도 출신 기타리스트가 들어왔어요. 아마 돈을 많이 받고 온 모양이라. 미8군쇼단은 3개월에 한 번씩 오디션을 보기 위해 연습하는데 그때 보면대 악보를 둘이 같이 보잖아요. 나는 연습을 많이 해서 악보를 휙휙 보며 지나가는데 이 친구는 연주를 제대로 못 해. 연습을 마치자마자 그 친구가 다짜고짜 물어요. ‘니 월급 얼마 받노?’”

돈을 안 받는다니까 눈이 휘둥그레진 그가 얼마 후 계약금을 도로 반납하고 단체에서 나갔다. 양인환은 탭 댄서 양철의 동생으로 8군쇼에서 제법 발이 넓었다.

“KPK에 기타 기가 막히게 치는 새카만 놈이 하나 있는데 더 기가 막힌 건 돈을 안 받고 일한대”

이 말이 순식간에 8군쇼단들에게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 소문 때문이었을까. 곧바로 스카웃 제의가 들어왔다.
바이올린 연주자로 유명한 박형진씨가 새로 만든 단체였다. 이 팀은 곧 있을 오디션을 준비하고 있었다.

“박형진, 그 양반은 당시 우리나라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로 손꼽히는 분이었어요. 그분이 만든 신생팀에서 상상도 못 할 계약금을 제시해 왔죠. 계약서를 쓰자고 해서 그 자리에서 곧바로 사인한 뒤 난생처음 쥐어보는 큰돈을 받자마자 어머니께 갖다 드렸죠.”

신생팀에 들어가자마자 오디션에 대비해, 화신백화점 꼭대기 층에 있는 클럽에서 세 차례에 걸쳐 연습에 돌입했다. 오영이라는 기타리스트와 듀엣 연주였다.

이 소식을 뒤늦게 알게 된 KPK에서는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갑작스러운 탈퇴에 가장 당황한 건 친구 김영일이었다.  

그때까지 KPK로 부터 월급을 전혀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영일은 노발대발, 단체와 상의해 계약금을 돌려주고 영수증까지 찢어버리며 씩씩거렸다. 

친구들도 설득해 왔다. 낯선 곳에서 새로 적응하느라 고생하느니 그동안 손발을 맞춰온 KPK에서 편하게 음악을 하라고 한마디씩 거들었다. 월급도 제대로 대우해 주지 않겠느냐고도 했다. 

고심 끝에 김광정은 결국 KPK에 다시 남기로 결정을 내린다. 동시에 이제 더 이상 청량리까지 뛰지 않아도 되었음은 물론이다.

 

▲ ‘가는 세월’ 발표 이후 47년 만에 후속작 ‘오는 세월’을 발표한 김광정씨. 어느덧 데뷔 65년 차지만 여전히 음악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KPK, 서스펜드 되어 임시로 미군클럽 하우스밴드로 무대에 오르다

다시 KPK쇼단에 합류했는데 얼마 후 KPK가 미군 측으로부터 서스펜드(suspend, 일시 중지) 당한다. 

‘서스펜드’란 어떤 잘못, 혹은 문제로 인해 단체가 3개월 동안 미8군쇼에 들어가지 못하는, 일종의 벌칙 제도다. 할 수 없이 KPK는 그 기간 동안 시공관 등 일반 공연으로 스케줄을 돌렸다.

김광정은 일반 공연무대에는 합류하지 않았다. 대신 운천에 있는 한 미군클럽 하우스밴드에 임시 기타리스트로 들어간다. 스케줄이 비게 된 걸 알고 그쪽에서 먼저 제의해 온 것. 그런데 막상 운천에 가서 보니 이 미군클럽은 험하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공연 첫날부터 담배꽁초가 무대로 휙휙 날아 오더라고요. 대체 무슨 일인가 했더니 새로운 멤버를 양공주끼리 서로 낚아채려고 작업 거는 거래. 그러면서 멤버들은 ‘애들이 오늘밤 노리고 있으니 조심하라’는 거예요.”

부대 주변의 기지촌 미군클럽은 부대 안 미군클럽과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양공주들로 인해 클럽 안에는 활기가 넘쳤지만 한편 매우 거칠었다.
 “말을 잘 안 들으면 손바닥에 면도날 끼고 다가와 ‘안녕하세요’ 하면서 얼굴 쓰다듬는 척 그어댈 정도로 살벌한 곳이라더군요. 실제로 느끼기에도 무서운 곳이었지요.” 

그렇게 살벌한 운천의 미군클럽에서 한 달 반 정도 일하고 다시 KPK로 돌아왔다.

KPK에서는 그사이 김보이즈가 미국으로 무대를 옮기기로 결정하고 고별 순회공연을 하는 중이었다. 

곧 김영일과도 헤어지게 될 이 무렵 김광정은 미련 없이 KPK를 나온다. 그리고 곧바로 대형 미8군쇼 기획사 ‘화양’ 소속의 단체, 뉴요커쇼단에 기타리스트로 들어간다. 

비로소 꿈의 무대, 본격적인 미8군쇼 인생이 시작된 것이다. (계속) 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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