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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형의 100년의 기록 100년의 교훈
2023년 12월 19일 (화) 23:51:46 김정형 webmaster@newsmaker.or.kr

세계적인 오페라 가수 마리아 칼라스 출생 100주년

오페라 연출가 프랑코 체피렐리는 오페라 가수 마리아 칼라스(1923~1977)를 가리켜 “오페라 역사에서 칼라스 이전(Before Callas)은 기원전(BC)”이라고 칭송했다. 그의 말을 기준으로 하면 칼라스의 BC와 그 이후를 구분하는 경계는 1947년이 된다. 칼라스가 자신의 데뷔 무대인 이탈리아 오페라 무대에 입성한 것도, 무명의 설움을 떨쳐버리는 데 재정적 후원을 아끼지 않은 남편 조반니 바티스타 메네기니를 만난 것도 1947년이기 때문이다.

오페라史에서 칼라스 이전(Before Callas)은 기원전(BC)

칼라스는 1923년 12월 2일 미국 뉴욕에서 그리스 이민자의 딸로 태어났다. 노래에 재능이 있었으나 지독한 근시에 심한 비만이어서 주목을 끌진 못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딸을 오페라 가수로 키우겠다는 일념으로 1937년 이혼 후, 14살의 칼라스를 데리고 자신의 고국 그리스로 돌아갔다. 칼라스는 아테네 국립음악원에서 성악을 공부했다. 타고난 재능 덕에 곧 프리마 돈나로 가다듬어져 아테네 오페라단에 입단했다.
자신감을 찾은 칼라스는 1945년 미국으로 돌아가 오페라 무대를 두드렸다. 하지만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오디션에서 탈락하고 어렵게 따낸 계약도 기획사의 도산으로 물거품이 되는 등 하는 일마다 풀리지 않아 이탈리아의 오페라 무대를 두드렸다. 이탈리아에선 베로나 오페라 음악제의 ‘라 조콘다’ 오디션을 통과해 1947년 8월 2일 어렵게 무대에 올랐으나 극도의 긴장으로 가창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해 기대 만큼의 반향을 끌어내진 못했다. 그래도 이 공연을 계기로 2년 후 남편이 될 메네기니와 당대 최고의 오페라 지휘자 툴리오 세라핀을 만났으니 수확이 없지는 않았다.
칼라스와 메네기니는 예술적 동지 관계를 거쳐 27세의 나이 차를 극복하고 1949년 4월 결혼했다. 남편은 칼라스가 재능을 발휘하도록 물질적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칼라스는 남편의 도움 덕에 유럽 각지의 무대에 섰다. 1951년에는 콧대 높은 라 스칼라 무대에도 당당히 데뷔했다. 1954년에는 90㎏이나 되는 체중을 23㎏이나 줄이는 데 성공, 오페라 여가수는 뚱뚱하다는 통념을 깨뜨리며 호리호리한 몸매에서도 뛰어난 목소리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해보였다.
유럽 성공은 미국 무대로 이어졌다. 1954년 11월 1일 시카고 오페라 극장 무대에 섰을 때의 칼라스는 7년 전 미국 무대에서 퇴짜를 맞고 화물선을 타고 이탈리아로 떠났던 그 칼라스가 아니었다. 1956년에는 벨리니의 오페라 ‘노르마’로 과거 자신을 거부한 뉴욕의 메트로폴리탄에서도 성공을 거두었다. 같은 해 열린 ‘토스카’ 공연에서는 10여 차례 커튼콜을 받는 등 무대마다 절찬을 받았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루치아’를 공연할 때는 1만여 명의 관객이 2,000석뿐인 좌석을 차지하기 위해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칼라스는 강렬하고 개성이 넘치는 목소리, 배역에 완전히 몰입하는 흡인력, 무대를 장악하는 강력한 카리스마로 점차 전 세계 오페라 팬들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무대 밖의 칼라스는 변덕과 질투심, 탐욕과 우월감, 자기중심적 성격들로 인해 조용한 날이 없었다. 동료 음악가와 불화하고 극장주와 분쟁이 끊이지 않았으며 언론과는 삐걱거렸다. 1958년 1월 이탈리아 대통령이 참석한 공연 때는 몸이 아프다며 1막이 끝난 후 집으로 가버렸고 1958년 5월에는 자신을 스타로 만들어준 라 스칼라 극장의 예술감독과 크게 다퉈 라 스칼라와도 결별했다.

▲ 마리아 칼라스

남편의 지극 사랑에도 ‘선박왕’ 오나시스에게 빠져

무대 밖에서는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들과의 사랑을 갈구했다. 1954년 영화감독 루키노 비스콘티에게 마음을 빼앗겼다가 비스콘티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알고 마음을 접기도 했다. 칼라스의 인생 행로에 중대한 변화가 찾아온 것은 1958년 파리 공연에서 그리스 선박왕 아리스토텔레스 오나시스를 만나고부터였다. 1959년 7월 오나시스가 초대한 화려하고 호화스러운 유람선의 항해 여행이 끝나갈 즈음 칼라스와 오나시스는 어느새 연인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세계적인 오페라 가수로 만들어준 남편에 대한 고마움도, 뚱뚱하고 유명하지도 않은 자신을 감싸 안은 남편의 사랑도, 오나시스가 유부남이라는 사실도 모두 잊은 채 오나시스에게 빠져들었다.
칼라스는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하지만 남편이 받아들이지 않자 오나시스와 동거에 들어가 공식적으로 오나시스의 정부(情婦)가 되었다. 사랑에 빠진 칼라스는 무대보다는 상류층 파티에 빠져들고 자신의 공연 스케줄보다는 오나시스의 일정에 관심을 보였다. 노래와 무대도 멀리했다. 지인들의 권유로 1964년 다시 무대에 섰으나 이미 노래도 시들해지고 목소리도 예전 같지 않았다. 결국 칼라스는 1965년 7월 5일 로열 갈라 콘서트를 마지막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1966년에는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고 그리스 국적을 획득하면서까지 오나시스와의 결혼을 갈망했다. 당시 그리스는 그리스정교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지 않은 혼인은 법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스 국적을 취득하는 순간 메네기니와의 결혼은 취소되었다. 오나시스는 값비싼 보석과 옷, 부동산을 선물하며 칼라스에게 사랑과 애정을 쏟았지만 그녀가 아기를 갖는 것만은 극구 반대했다. 이 때문에 칼라스는 43세에 임신했는데도 오나시스의 강요로 유산해야 했다.
그러던 1968년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칼라스에게 날아들었다. 오나시스가 케네디 전 미 대통령의 미망인 재클린 케네디과 재혼한다는 소식이었다. 오나시스와 재클린은 1968년 10월 20일 결혼했다. 칼라스는 이후 음악 전문지보다 주간지 가십난에 더 자주 등장하는 처지가 되자 파리의 아파트에 칩거하면서 세간의 동정과 비웃음을 피해갔다. 1969년 이탈리아 영화 ‘메데아’에 출연하고 줄리아드 음악학교에서 후학을 가르치며 재기를 시도했지만 우울증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옛 동료이자 절친인 주세페 디 스테파노를 비롯한 지인들의 설득으로 1973~1974년 미국, 유럽, 아시아를 경유하는 세계 투어를 시작했다. 한국도 방문해 1974년 11월 이화여대 강당에서 ‘카르멘’, ‘라보엠’, ‘토스카’ 등을 선보였다. 목소리는 과거의 칼라스를 연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상태였지만 칼라스는 역시 명불허전이었다. 특유의 음악성과 표현력으로 무대를 장악한 그의 공연은 연일 성황을 이뤘다. 관객은 칼라스의 주옥같은 음악을 듣는 것이 아니라 무대에 서 있는 칼라스의 전설적인 아우라에 심취했다. 1차 투어를 통해 자신이 돌아가야 할 고향이 무대라는 것을 깨닫고 2차 투어를 계획하던 칼라스에게 1975년 3월 또다시 충격적인 소식이 날아들었다. 마지막까지 결합을 기대했던 오나시스가 죽었다는 것이다. 칼라스는 생의 의욕을 모두 상실한 채 2년 동안 파리에서 은둔하다 1977년 9월 16일 자신의 아파트에서 쓸쓸하게 53년의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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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 나치 정부의 ‘수정(水晶)의 밤’은 유대인 대학살의 전주곡

1919년 출범한 바이마르 공화국 때부터 독일에는 막연히 ‘세계 유대인의 음모’라는 소문이 퍼졌다. 평범한 시민들까지 음모론에 혹했다. 1923년 엄청난 인플레이션이 독일 전역을 강타했을 때도 ‘유대인 음모론’이 전염병처럼 번졌다. 음모론은 1933년 1월 히틀러가 집권하면서 더욱 활개를 쳤다.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한 1933년, 당시 독일에 살고 있는 유대인은 독일 인구의 0.76%쯤 되는 50만 명이었다. 이들은 상업, 금융업, 의사, 변호사 등에서 두각을 나타내 독일인들의 질시를 받았다. 1933년 4월 나치 정부가 발표한 유대인 상점과 기업에 대한 보이콧은 이후 십수 년 동안 나치가 유대인에게 가할 탄압의 서막이었다.

‘유대인 음모론’ 전염병처럼 독일 전역에 퍼져

나치 정부는 출범하자마자 유대인의 운신 폭을 좁혀나갔다. 1933년 10월 유대인을 언론사에서 쫓아내고 1935년 9월 이른바 ‘뉘른베르크법’으로 통칭되는 ‘독일제국 시민법’과 ‘독일 혈통 및 명예보존법’을 제정해 유대인과 독일인 간의 결혼은 물론 성행위를 금지했다. 유대인의 선거권과 공직취임권 등 시민권도 박탈했다. 1938년 7월에는 유대인을 구분하기 위하 특별 식별카드를 도입하고, 8월에는 유대인 이름에 ‘이스라엘’(남자), ‘사라’(여자)를 강제로 추가하는 법령을 발표했다. 10월에는 유대인의 통행증과 여권에 ‘J’(Jude·유대인)라는 붉은 글자의 낙인을 찍고 11월 중순엔 유대인 아이들의 공립학교 출입을 금지했다.
그러던 중 1938년 11월 3일 프랑스 파리에 살고 있는 헤르셀 그린스판이라는 17세 유대인 소년에게 한 통의 편지가 배달되었다. “17년 전부터 독일에서 살아온 아버지가 독일에서 쫓겨났으나 폴란드가 받아주질 않아 무국적자로 수용소에 강제 수감되었다”는 누나의 편지였다. 아버지의 추방은 1938년 10월 중순, 나치 정부가 독일에 사는 폴란드계 유대인을 강제추방하는 정책을 취했기 때문이다. 그에 앞서 나치 정부는 1938년 3월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후, 오스트리아에 살고 있는 수많은 유대인을 추방했다. 폴란드 정부는 추방이 더 이상 확대되지 않도록 폴란드계 유대인들의 귀국을 강제로 막았다. 폴란드 법에 따라 5년 이상 왕래가 없는 해외 거주 폴란드계 유대인들의 여권은 무효가 되었다. 결국 폴란드계 유대인은 독일에서 쫓겨났어도 갈 곳이 없었다. 더구나 유대인들은 쫓겨나면서 수십 년간 독일에서 쌓아놓은 모든 재산을 빼앗겨야 했다. 가구와 식기, 리넨, 침대, 난로, 책도 강탈당했다. 폴란드 정부는 독일을 향해 “폴란드계 유대인을 추방하면 우리도 독일인들을 추방한다”고 협박했지만 막무가내였다. 
나치 정부는 폴란드계 유대인들을 추방해도 폴란드 정부의 거부로 추방이 순조롭지 않게 되자 비밀경찰(게슈타포)에 임무를 맡겼다. 비밀경찰은 폴란드 정부가 가로막든 말든 1만 2000여 명의 폴란드계 유대인들을 국경 너머로 내몰았다. 이들 중 4000명은 폴란드로 입국했지만 8000 명은 입국을 거부당했다. 이 가운데 7000명가량은 독일과 폴란드 접경지의 난민수용소에 갇혀 폴란드 정부가 자신들을 받아줄 때를 기다렸다. 폴란드 정부가 입국 허가를 주저하는 동안 추방자들은 배고픔과 심적 고통, 혼란과 분노 속에서 기다리다 최소 5명이 자살했다. 17세 유대인 소년의 아버지가 화물열차에 실려 난민 수용소에 강제 수감된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었다.

유대인 소년의 범행은 치명적 실수

유대인 소년은 파리의 이디시어( 유럽에 거주하던 유대인 그룹이 사용했던 서게르만어군 언어) 신문에서 유대인 추방자들이 미치거나 자살한 사례들을 읽고 격분했다. 11월 6일 일요일 아침, 소년은 권총을 사서 11월 7일 독일 대사관으로 갔다. 그의 계획은 독일 대사를 죽이는 것이었다. 소년이 현관 안내인에게 중요한 서류를 전하러 왔다고 말하자, 안내인은 그를 대사관 3등 서기관이던 에른스트 폼 라트의 방으로 안내했다. 소년은 “이 더러운 독일 놈아, 박해받는 1만 2000명 유대인의 이름으로 네가 받아야 할 서류는 바로 이거다”라고 소리치며 5발을 쏘았다. 그중 2발이 폼 라트의 몸에 맞았지만 죽지는 않았다. 그러나 부상이 심해 급히 가까운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그런데 죽은 서기관은 평소 반 나치 운동으로 게슈타포의 감시를 받던 인물이었다. 더구나 그는 반 유대 사상도 없었다. 그런 점에서 소년의 범행은 치명적인 실수였고 서기관으로서는 얄궂은 운명의 장난이었다. 히틀러는 총격 사실을 알고 자신의 주치의와 뮌헨 대학병원 병원장을 파리로 급파했다.
11월 8일 독일 신문들이 유대인은 살인자라고 비난하는 기사를 대대적으로 실었다. 신문들은 유대인들이 지속적으로 나치 독일을 반대하는 선전을 해왔다는 증거로 3년 전 독일 유대인 다비트 프랑크푸르터가 스위스에 거주하는 독일인들의 나치 조직 대표였던 빌헬름 구스틀로프를 총으로 사살했던 점을 환기시켰다. 나치 정부는 11월 8일 첫 조치로 모든 유대신문과 잡지 발행을 중단시켰다. 이로써 유대인들의 언로(言路)가 막혀버렸다. 나치 정부는 또한 유대 어린이들은 독일인들이 다니는 초등학교에 다닐 수 없다고 발표했다. 동시에 유대인들의 모든 문화 활동도 중단시켰다.
이 사건이 아니더라도 히틀러는 어차피 예정된 수순을 밟았겠지만 어쨌든 이 사건은 ‘포그롬’의 촉발제가 되었다. ‘포그롬’은 1881년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2세의 죽음을 둘러싸고 유대인 음모론이 대두하면서 러시아에서 일어난 유대인에 대한 박해 사건을 지칭했던 말로 유대인의 언어로 ‘대학살’이라는 뜻이다. 이후 유대인의 박해 사건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이틀 후 파리 주재 외교관이 사망했다는 사실이 독일에 알려지면서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었다. 독일 라디오 방송국들은 2분간 묵념의 시간을 가졌다. 물론 3등 서기관이 숨을 거두기도 전인 11월 8일부터 이미 전국적으로 시나고그(유대인 예배당)과 상점, 주택에 대한 무분별한 폭력 행위가 시작되었다. 이를 주도한 것은 사실상 독일 지역의 정치깡패로 전락한 돌격대(SA)였다. 여기에 괴벨스의 통제를 받는 언론은 유대인에 대한 증오와 폭력을 부추겼다. 11월 8일 밤과 9일 아침, 부헨발트 강제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던 유대인들에 대한 사형 집행이 있었는데 이 사실은 1주일 뒤 세상에 알려졌다. 
3등 서기관의 사망 소식은 1938년 11월 9일 밤, 뮌헨 구 시청에서 열린 집회 참가자들에게도 알려졌다. 나치 선전부장 괴벨스는 정확히 15년 전인 1923년 11월 9일 밤, 히틀러가 뮌헨에서 일으킨 비어홀 폭동을 기념하는 이 집회에서 유대인에 대한 피의 보복을 주장하는 연설을 했다. 독일 제국 곳곳에서 폭력이 난무하는 가운데 다음날(10일) 새벽까지 진행된 나치당 지도부 회의에서도 보복이 논의되었다. 괴벨스는 그날 히틀러의 반응을 일기에 적어놓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결정했다. 시위는 계속되도록 놔두어야 한다. 경찰은 철수해야 한다. 한 번쯤은 유대인들이 군중의 분노를 느껴야 한다.”

▲ 불타는 유대인 회당(시나고그)

정부가 주도했다는 점에서 전과는 차원이 다른 박해

히틀러의 지침을 받은 괴벨스에게 폭력은 ‘자연발생적인 폭력’이어야 했다. 괴벨스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에게 “9일 밤 안으로 ‘자연발생적 폭력’을 조직·실행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하이드리히는 친위대(SS) 산하 비밀경찰(게슈타포)과 보안부대(SD)를 관할하는 국가보안본부 책임자였다. 하이드리히는 10일 새벽, 그의 수하 조직에 긴급 훈령을 내렸다. ▲독일인의 생명과 재산에 위험과 손해가 미치지 않도록 수단 방법을 택하라. 유대인 회당은 주변이 연소될 염려가 없을 경우에 한 해 불을 질러라. ▲유대인의 상점과 주택은 파괴해도 좋다. 다만 약탈은 안된다. ▲경찰은 폭동을 저지하지 말라. ▲유대인 중에서도 특히 부유한 유대인을 체포하고 수용소로 보내 구금하라.
이후 히틀러의 제3제국은 돌이킬 수 없는 야만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이전에도 수많은 유대인이 죽음과 고문을 당하고 약탈을 당했지만 대부분은 갈색 셔츠 망나니들이 자신들의 사디즘과 탐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자행한 것들이었다. 정부는 방관하거나 모른 척했다. 그러나 이제는 나치 정부 스스로 대규모 유대인 박해를 조직하고 실행했다는 점에서 전과는 차원이 달랐다. 국가기관이 만행을 부추기는 차원을 뛰어넘어 직접 만행에 가담한 것이다. 야만 행위는 독일제국에 반대하는 ‘세계 유대인 음모’에 대한 정당성으로 홍보되었고 모든 사회·경제 분야에서 독일 유대인을 궁극적으로 축출하는 서곡으로 이용되었다.
긴급 훈령이 전달되고부터 시나고그, 주택, 상점이 삽시간에 불바다가 되었다. 만행이 일어나기 5개월 전인 1938년 6월 나치 정부가 모든 유대인 상점들은 이름을 알아보기 쉽도록 하라고 발표했기 때문에 독일 군중이 공격 대상을 찾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수백 곳의 유대인 지구에서 나치의 준군사조직인 돌격대가 일부는 갈색 셔츠 제복 차림으로, 또 일부는 사복을 입은 채로 방화를 저지르고 시나고그와 민간인 주택의 가구와 책을 끄집어내어 화염 속으로 던져 넣었다. 불길이 근처의 비유대인 건물까지 번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군중들은 해머와 도끼로 시나고그들을 때려 부쉈다. 거리에서는 유대인들이 쫓겨 다니며 욕설과 구타를 당했다. 수만 개의 유대인 상점과 가정이 약탈되었다. 경찰은 도와달라는 호소를 듣고도 어깨를 으쓱할 뿐 개입을 거절했다.
다음날(11일) 하이드리히가 상부에 제출한 비밀보고에는 이틀 동안 815개 점포를 파괴하고 171동의 주택을 불지르거나 파괴했으며 117개소의 시나고그가 불타고 36명이 죽고 36명이 다쳤다고 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중에 밝혀진 피해 상황은 비밀보고보다 몇 배 더 심각했다. 7500여 개의 유대인 상점과 거의 모든 시나고그가 불에 타거나 파괴되었다. 나치당은 나중에 유대인 사망자가 91명이라고 추정했지만 훗날 영국의 홀로코스트 학자는 자살한 유대인 300명을 포함해 2,000명의 유대인이 학살되었다고 추산했다. 독일 역사박물관은 목숨을 잃은 유대인은 약 1,300명이고, 체포되어 강제수용소에 수감된 유대인 남성이 3만 명에 달한다고 밝혔다. 유대인들은 그곳에서 여러 달 동안 고문에 시달렸다. 1,000명 이상이 강제수용소에서 죽었다. 부상자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깨진 유리 조각들이 수정같다고 해서 ‘수정의 밤’

독일의 유대인을 공포로 몰아넣은 이 사건에는 ‘수정의 밤(Kristallnacht·크리스탈나흐트)’ 혹은 ‘깨진 유리의 밤’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유대인 가게와 교회에서 깨져 나온 유리 조각들이 수정처럼 빛났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당시 독일에는 세계의 주요 언론사에서 파견된 수백 명의 외국 언론인들이 있었고, 당시는 전시가 아니었기 때문에 직접 보고 들은 바를 자유롭게 보도했다. 1933년부터 1945년 사이에 독일 유대인들이 겪은 운명의 역사에서, ‘수정의 밤’ 사건처럼 신문 지면을 그토록 광범위하게 뒤덮었던 사건은 없었다. 유대인과 유대인 재산에 가해진 그 광범위하고 악랄한 공격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전 세계 민주국가들에게 충격파를 일으켰다.
‘수정의 밤’에서 살아남거나 추방되지 않은 유대인들은 자기 재산이 파괴되었는데도 자신이 대가를 부담해야 했다. 당시는 보험회사가 피해를 당한 유대인에게 보험금을 지급하면 금액이 워낙 엄청나 보험회사가 파산해야 하고 지급하지 않으면 보험회사에 대한 국내외 신용도에 문제가 되는 상황이었다. 보험회사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담당 장관 헤르만 괴링이 “보험회사가 피해를 당한 유대인들에게 보험금을 지급하면 정부가 유대인에게서 보험금을 몰수해 보험회사에 되돌려주라”고 하면서 인적 경제적 피해도 고스란히 유대인의 몫이 되었다.
이후 수 주 동안, 나치 정부는 유대인의 재산과 생활 수단을 박탈하기 위한 법령을 공표해 유대인들을 더욱 옥죄었다. 유대인 소유 기업과 재산은 모두 독일 아리안족의 손에 넘어갔다. 유대인 노동자들은 직장에서 해고되고 아이들은 학교에서 퇴학당했다. 운전면허증 보유나 자동차 소유 권리를 박탈당하고 대중교통 이용도 제한되었다. 유대인에 대한 차별과 학대는 1939년 9월 2차대전이 발발하고 독일이 국가비상전시상태에 돌입하면서 더욱 험악해졌다. 유대인들은 모든 공공시설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고 1941년 9월에는 유대인 식별 표지에 관한 법령 제정으로 죽음의 표지인 ‘다윗의 별’ 배지를 달고 살아야 했다. 종국에는 거주 이전의 자유도 빼앗겨 ‘게토’로 불리는 특정 지역 안에서 살다가 절멸수용소로 옮겨져 죽음의 날을 기다려야 했다. 유대인 소년 헤르셀 그린스판은 교도소에 갇혔다가 2차대전 중 행방불명되었다. 1960년 “1944년쯤에 교도소 측의 학대 및 질병으로 죽었으며 시체는 대충 파묻혔다”는 교도관들의 증언이 있은 후 법원에 의해 1944년 사망한 것으로 공식 인정되었다. 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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