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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형의 100년의 기록 100년의 교훈
2023년 10월 17일 (화) 20:49:12 김정형 webmaster@newsmaker.or.kr

이언 윌머트의 별세를 계기로 살펴본 복제 양(羊)‘ 돌리’의 탄생 과정

인류 최초로 포유류인 복제 양(羊) ‘돌리’를 탄생시켜 세상에 충격을 안겼던 영국의 과학자 이언 윌머트가 지난 9월 10일 향년 79세로 별세했다. 그의 죽음을 계기로 복제 양 ‘돌리’의 탄생 과정을 알아본다.

“신이 정한 생명 탄생의 규범 흔들었다” 비난도 있어

1996년 7월 5일 오후 4시, 영국 에든버러대 로슬린연구소에서 6.6㎏의 새끼 양이 태어났다. 7개월 뒤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할 세계 최초 포유류 복제동물인  ‘돌리’였다. 돌리는 어른 암양의 유선(젖무덤) 세포에서 복제된 것을 강조하기 위해 젖가슴이 큰 것으로 유명한 미국의 여가수 돌리 파튼에서 이름을 땄다. 돌리의 탄생은 이언 윌머트(1944~2023)를 제1저자, 키스 캠벨(1954~2012)을 공동연구자로 내세운 연구 논문이 1997년 2월 23일자 네이처지에 공개 발표됨으로써 세상에 알려졌다. 제1저자인 윌머트에게도 전 세계 언론의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졌다. 윌머트는 영국에서 태어나 노팅엄대에서 동물 과학을 전공하고 1973년 케임브리지대 다윈연구소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스코틀랜드 애든버러대의 로슬린연구소에서 유전학적인 방법으로 축산의 생산량을 늘리는 연구에 열정을 쏟는 한편 성체 동물 복제에도 도전했다. 그리고 마침내 양의 복제에 성공했는데 사실 복제동물은 ‘돌리’가 처음은 아니었다. 다만 돌리가 성체 세포로 복제한 최초의 포유류이고, 돌리의 성공으로 동물 복제의 장벽이 사실상 모두 제거되었다는 점에서 세계 과학계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돌리의 성공 후 이론상으로 인류는 남자와 정자 없이도 난자와 자궁만 있으면 번식이 가능한 존재가 되었다. 암수 유전자가 합쳐져 새 생명체가 탄생한다는 자연의 섭리를 무너뜨린 것이다. 과학계는 왓슨과 크릭이 1953년 DNA 분자 구조를 밝혀낸 업적에 버금가는 또 다른 생물학의 혁명으로 평가했다.

▲ 이언 윌머트와 ‘돌리’

반면 “신이 정한 생명 탄생의 규범을 뒤흔드는 바벨탑과 같은 오만한 시도”라는 비난도 맹렬했다. 로마 교황청은 “신의 창조론에 배치될 뿐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과 결혼의 숭고함을 파괴하는 죄악”이라고 성토했다. 동물 복제는 유전자가 완전히 똑같은 동물을 만드는 것이다. 동물은 암컷의 난자와 수컷의 정자가 만나 수정을 통해 새끼를 낳는다. 새끼들은 부모와 닮지만 완전히 똑같지는 않다. 부모에게서 절반씩 유전자를 물려받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물 복제는 엄마든 아빠든 어느 한쪽과 완전히 똑같은 새끼를 만들 수 있다. 유전자를 양쪽에서 반씩 가져오는 대신 한쪽의 유전자만으로 새끼를 탄생시키기 때문이다. 이런 차이는 수정란을 만드는 방식에서 나타난다. 동물의 몸 세포는 자손을 번식하기 위한 ‘생식세포’와 여러 조직 기관을 구성하는 ‘체세포’로 구분된다. 생식세포는 정자와 난자를 가리키고, 체세포는 피부나 장기 등 나머지 인체에 있는 모든 세포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수정란은 생식세포인 정자의 핵과 난자의 핵이 하나로 합쳐져 만들어진다. 인간의 체세포에는 유전정보를 담은 염색체가 46개(23쌍) 있지만, 생식세포에는 그 절반인 23개밖에 없다. 인간의 몸이 정자와 난자가 만나 비로소 한 쌍의 염색체를 이루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정자가 난자 속으로 들어가면 두 핵이 만나 수정란을 만들고, 이것이 여성의 자궁에 착상한 후 점점 자라 배아(수정 후 약 8주까지의 수정란)가 되고 태아로 성장한다.

‘돌리’ 전에는 대부분 배아의 핵 이식 실험

수정란은 동물을 복제할 때도 사용된다. 다만 이때 수정란은 정자와 난자가 만나 만든 것이 아니다. 부모의 유전정보가 모두 필요한 게 아니기 때문에 한쪽의 체세포만을 사용한다. 먼저 피부 등에서 채취한 체세포에서 유전정보를 담은 핵을 꺼낸 뒤, 핵을 제거한 난자 속에 체세포의 핵을 넣는다. 그런 다음 난자에 미세한 전기 충격을 가하면 세포 분열이 시작되면서 ‘복제 수정란’이 만들어지고 이를 암컷(대리모)의 자궁에 착상시킨다. 복제 수정란이 자라면 체세포의 주인과 똑같은 새끼가 되는데, 이 과정의 기술을 ‘체세포 핵 치환’이라고 한다. 복제양 ‘돌리’가 탄생하기 전까지 동물 복제 개발사를 알아보면, 1952년 미국의 로버트 브릭스와 토머스 킹이 개구리의 난자에 있던 핵을 없앤 뒤, 배아에서 빼낸 핵을 그 자리에 넣은 것이 시초다. 배아의 핵 이식 실험은 성공했으나 성체를 복제하진 못했다. 그로부터 10년 뒤인 1962년 영국의 생물학자 존 거든이 개구리 난자에 있던 핵을 제거한 뒤 개구리 올챙이의 창자 체세포에서 빼낸 핵을 그 자리에 넣었다. 그 결과 올챙이와 유전적으로 똑같은 올챙이가 탄생했다. 이 두 건의 실험은 정자와 난자가 만나지 않아도 수정란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어 관련 학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또 창자 세포에서 추출한 체세포라 하더라도 그 핵을 꺼내 난자에 넣으면 완전히 새로운 줄기세포(신체 조직으로 분화할 수 있는 상태의 세포)가 된다는 사실(역 분화)도 확인되었다. 개구리 복제 후  ‘역(逆) 분화 줄기세포’ 연구와 ‘체세포 핵 치환’ 기술이 크게 발전하고 거든 박사는 이 실험 등으로 2012년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문제는 다 자란 성체 개구리의 세포핵을 이식했을 때 성공률이 너무 낮다는 점이었다. 이 때문에 복제 연구는 더 이상의 진전을 보지 못하고 포유류의 복제 실험은 더더욱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1979년 스위스 제네바대의 카를 일멘제가 핵을 제거한 생쥐의 난자에 배아 세포핵을 이식해 3 마리를 복제했다고 발표함으로써 사상 최초로 포유류 복제에 성공했다. 이후 과학자들이 일멘제의 연구를 재현하기 위해 달려들었으나 모두 실패만 거듭하자 포유류 복제는 불가능에 가깝다고 거의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던 중 1986년 덴마크 출신의 영국 과학자 스틴 윌러드슨이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윌러드슨은 양으로 실험을 했다. 초기 배아의 핵을 난자에 이식한 뒤 대리모에 착상시켰다. 두 마리는 사산하고 한 마리가 살아남았다. 이 사실이 세상에 제대로 알려지진 않았지만, 사실상 핵 이식으로 태어난 최초의 포유동물이었다.

이론상으로 인류는 남자의 정자 없이도 번식 가능해져

이렇게 배아 세포핵 이식에 성공했으니 다음 단계는 성체 세포핵 이식이었다. 그러나 체세포 복제는 수정란 복제와는 차원이 달랐다. 가장 큰 문제는 체세포에서 유전자를 추출해 핵을 제거한 난자에 넣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유전자 추출이다. 체세포는 세포 분열을 끊임없이 하므로 정지 상태의 유전자를 빼내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 로슬린 연구소의 이언 윌머트와 키스 캠벨은 체세포의 영양을 조절해 빈영양화(貧營養化)하면 세포 분열 속도가 늦어지거나 멈추는 것을 알아냈다. 즉 분화가 진행된 세포라도 세포 주기를 세포 분할 전 단계인 G0이나 그 다음 단계인 G1에 맞추면 초기 상태 재프로그램화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이는 세포 주기를 적절히 맞추면 분화된 세포를 이용해 포유류의 복제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입증한 획기적인 연구 성과였다. 사실 이 연구 성과에는 우리나라 강원대 정희태 교수가 큰 역할을 했다. 그는 1993년 발표한 박사 논문에서 생쥐 수정란 복제를 위해선 세포주기를 G1 상태로 맞춰 재프로그램화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윌머트 연구팀의 캠벨은 이 논문을 참고해 세포 주기를 되돌리는 데 성공하고 논문 인용 사실을 돌리 논문에서도 명백히 밝혔다. 윌머트와 캠벨은 성숙한 6년생 암양의 젖가슴 체세포인 유선 세포를 떼어내고 그 세포에서 다시 핵을 분리해, 난자에서 유전자가 들어 있는 세포핵을 제거한 자리에 집어넣는 ‘핵치환’을 한 뒤 전기 자극을 주는 방법으로 돌리를 복제했다. 돌리는 핀란드 양에서 세포핵을 얻고 폴란드 양에서 얻은 난자의 핵과 치환하고 이것을 스코틀랜드 양의 자궁에 착상시키는 과정을 거쳐 5개월 만에 탄생했다. 연구소는 돌리를 복제한 방법이 외부로 새 나가지 않도록 보안을 강화하고 특허 절차를 밟았다. 그리고 1997년 2월 23일자 ‘네이처’지를 통해 이 사실을 발표했다.

윌머트가 스포트라이트 받았으나 제1저자 아냐

돌리 탄생 후 세계 곳곳에서 복제 실험이 유행처럼 번졌다. 1998년 송아지와 쥐, 2000년 돼지가 복제되었다. 우리나라의 황우석 교수도 1999년 2월 세계 4번째로 복제소 ‘영롱이’를 탄생시켜 한동안 우리 국민에게 자부심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2004년과 2005년 ‘사이언스’지에 게재한 논문이 조작된 것으로 밝혀지면서 ‘영롱이’의 복제 사실까지 불신을 받았다. 2002년 미국 A&M대 연구팀이 고양이를 복제했을 때는 우리나라의 신태영 박사가 논문의 제1저자로 참여했다. 2005년에는 황우석 연구팀이 복제개 ‘스너피’를 탄생시키는 데 성공했다. ‘스너피’는 ‘영롱이’와 달리 복제가 사실인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현재는 복제 소의 체세포를 다시 이용한 2차 복제 소가 나오는가 하면 돌리처럼 2세를 낳는 복제 동물이 생겨나는 등 복제 기술은 해를 거듭할수록 발전하고 있다. 하지만 크고 작은 결함이 있고 수명도 짧아 여전히 생명공학계의 과제로 남아 있다. 돌리 역시 태어난 지 3년이 지나지 않아 각종 질병에 시달렸다. 특히 나이 든 양에서 나타나는 관절염 등의 질병도 앓았다. 결국 노환에 따른 폐질환 증세를 보여 2003년 2월 14일 보통 양의 정상 수명의 절반에 불과한 6살에 안락사되었다. 돌리의 사체는 박제로 만들어져 지금 에든버러의 왕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돌리의 성공으로 제1저자인 윌머트는 세계 언론과 과학계의 찬사를 받으며 복제 기술의 대부로 부상했다. 그러던 그가 2006년 3월 “공동연구자인 키스 캠벨 박사가 돌리 탄생에 3분의 2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나는 전체 연구를 감독하는 역할만 했다”는 폭탄 발언을 했다. 학계에 따르면 돌리의 탄생이 있기 전 윌머트는 캠벨과 공동연구를 진행했다. 둘은 논문을 발표할 때 제1저자를 한 번씩 돌아가며 하기로 했다. 저자 문제로 시비를 벌이지 않고 공동연구를 지속할 수 있도록 미리 정해둔 것이다. 이들의 약속은 발표 논문 수준이 비슷비슷한 초기에는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돌리 탄생 때 제1저자가 윌머트 차례가 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양의 난자에 체세포 핵을 이식하고 자궁에 집어넣어 출산시킨 연구자는 캠벨이었는데도 약속에 따라 윌머트가 제1저자를 맡고 캠벨은 공동저자로 이름을 올렸기 때문이다. 초기에는 윌머트와 캠벨의 공동 작품으로 소개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윌머트에게만 언론의 관심이 쏟아지고 윌머트도 홀로 언론의 조명을 받는 데 익숙해지면서 둘의 사이가 틀어져 결국에는 결별했다. 그러다가 로슬린연구소에서 윌머트와 함께 연구하던 인도 출신 프림 싱이  “인도 출신이라는 이유로 해고당하고 내 아이디어를 도용당했다”고 2005년 11월 윌머트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제기하자 윌머트는 결국 모든 사실을 실토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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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차 중동전쟁과 제1차 오일쇼크 발발 50주년

1967년의 ‘6일 전쟁’ 때 시나이 사막과 골란고원을 이스라엘에 빼앗긴 이집트와 시리아에게, 영토가 회복되지 않는 한 다음 전쟁은 필연적이었다. 6일 전쟁 후에도 양측의 소모적인 보복전으로 이집트가 큰 피해를 보았지만 이스라엘도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미국의 중재로 1970년 8월 8일부터 90일 간의 정전협정이 맺어졌다. 그 사이, 설욕을 준비하던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가 심장마비(9월 28일)로 죽고, 안와르 사다트가 새로 권력을 차지했다.

이스라엘, ‘6일 전쟁’(1967년) 승리 후 자만에 빠져

사다트는 “이스라엘이 점령지에서 철수하지 않으면 전쟁도 불사하겠다”고 수 차례 엄포를 놓았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긴장하기는커녕 오히려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평화협상과 외교적 노력으로 실지를 되찾으려던 사다트는 이스라엘의 무반응에 전쟁을 선택했다. 그의 권위에 도전하려는 국내 세력과 아랍세계에서의 우월적 지위 확보를 위해서도 전쟁은 불가피했다. 사다트는 1967년의 ‘6일 전쟁’ 때 드러난 이스라엘의 막강한 공군력을 무력화하기 위해 요소요소에 지대공 미사일을 설치해 방공 체제를 강화했다. 훈련도 반복했다. 이스라엘도 수에즈 운하 동쪽에 견고한 방어선 ‘바레브 라인’을 세워 이집트의 진격에 대비했다. ‘바레브 라인’은 기갑차량이 통과하기 어렵도록 모랫둑을 6m 높이로 쌓은 이스라엘식 마지노선이었다. 이스라엘은 시리아 쪽 골란고원에도 방어를 강화하긴 했으나 이집트 방향 보다는 상대적으로 무관심했다. 문제는 ‘6일 전쟁’ 승리 후 팽배해진 과신과 교만 그리고 아랍군에 대한 멸시였다. 이스라엘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시나이 반도와 골란고원을 차지했다는 안도감, 그리고 국제사회로부터 침략자라는 비난을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 공세적 방어에서 수세적 반격으로 전략 개념을 바꾸었다. 아랍 측은 실지 회복을 위해 몇 가지 원칙을 세웠다. 이집트·시리아의 양면 작전을 구사하고, 아랍 측에 유리한 전쟁 방식 즉 이스라엘에 유리한 단기 결전을 피하고 지연전을 펼친다는 전술이었다. 이집트와 시리아는 공격 개시일을 1973년 10월 6일로 잡았다. 이 날은 623년 이슬람교 창시자 무함마드(마호메트)가 메카에 진입하는데 성공하고 이슬람을 펼치기 시작한 역사적인 날이지만 이스라엘에도 성스러운 명절인 ‘욤 키푸르’(대속죄일)였다. 유대인들에게 이 날은 금식을 하며 한 해 동안 저지른 잘못을 회개하는 경건한 안식일이었다. 모든 노동이 금지되어 관공서는 물론 대부분의 상점이 문을 닫고 대중교통도 운행하지 않았다. 이집트와 시리아는 바로 이 점을 노려 결전일로 택했다. 이집트.시리아군을 합친 군사력은 군인.전차.항공기에서 이스라엘의 거의 2배에 가까웠다. 그래도 공군의 전투력만은 이스라엘에 비해 약세여서 지대공 미사일로 대처했다. 공격이 있기 전, 이스라엘 첩보기관 모사드가 아랍 측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보고했으나 정부는 안일한 준비로 대응했다. 아랍 측의 일제 공격은 1973년 10월 6일 오후 2시 5분에 시작되었다. 이집트군이 간단히 수에즈 운하를 도하하고, 시리아군 역시 골란고원 방어선을 손쉽게 뚫으면서 기습은 성공하는 듯했다. 이집트 공병대는 독일산 초고압력 펌프를 운하에 띄워 모래 제방인 ‘바레브 라인’을 무너뜨리고 부교를 건설해 운하 건너편으로 밀고 들어갔다. 이스라엘 공군기가 반격하면 지대공 미사일로 대응하고 이스라엘 전차가 다가오면 대전차 미사일로 저지했다. 무엇보다 이스라엘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은 골란고원에서 다가왔다. 이집트 쪽 수에즈 전선은 150마일의 시나이 사막이 방패가 되었으나 골란고원은 이스라엘 심장부에 근접해 있었기 때문이다. 시리아군은 헬기를 이용한 특수부대를 동원해 헤르몬산에 있는 이스라엘군 진지를 1시간 만에 점령하고 갈릴리 호수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지점까지 내려갔다. 결국 이스라엘은 개전 48시간 만에 17개 여단이 전멸되었다. 이스라엘은 골란고원을 먼저 안정시킨 뒤 시나이 전선으로 돌아간다는 전략을 세웠다. 이집트군에 비해 시리아군이 상대적으로 약하다는 점도 고려되었다. 한동안 고전하던 이스라엘은 10월 10일부터 본격적으로 반격에 나서 다음날 전세를 역전시켰다. 이스라엘군은 골란고원의 휴전선을 넘어 시리아로 침투했고, 16일에는 이집트 쪽의 수에즈 운하를 역도하 하는 데 성공해 전세를 뒤집었다. 전쟁은 10월 24일 휴전협정의 체결로 끝났으나 절대 우위를 자랑해온 이스라엘군은 2,656명이 전사하고 7,250명이 부상을 당했다. 아랍의 피해가 더 컸지만 이스라엘로서는 부끄럽기 짝이 없는 결과였다.

전쟁 후 오일 쇼크가 몰아쳐 세계는 깊은 시름에 빠져

▲ 시나이 반도 전투에서 파괴된 이스라엘군 M60 탱크

전쟁이 시작되기 전, 중동 지역에서 이상 기운이 감지된 것은 1973년 9월 초였다. 리비아가 9월 1일 자국 내 외국 메이저 석유회사들의 주식 51%를 국유화하고 9월 3일 원유 가격을 배럴당 6달러로 2배 이상 올린다고 발표한 것이다. 그러자 중동 최대 산유국인 사우디의 파이살 국왕도 9월 3일 “미국이 이스라엘 편중 정책과 이스라엘에 대한 무제한 원조 제공을 중단하지 않을 경우 원유 생산을 줄이는 결과를 초래할지 모른다”며 미국에 경고했다. 9월 16일에는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11개국 석유 장관들이 오스트리아 빈에서 회담을 열고, 그동안 원유 기본가격을 규정해온 ‘테헤란 협정’을 무시하고 원유 가격을 대폭 인상하기 위해 10월 8일부터 서방 메이저 석유회사들과 가격 인상 협상을 벌이겠다고 발표했다. 산유국과 서방의 메이저 석유 회사들이 1971년에 체결한 ‘테헤란 협정’은 원유 가격의 연간 인상율 2.5%에 세계의 예상 인플레율 4~5%를 합해 6.5~7.5%만의 연간 인상을 규정하고 있어 산유국 입장에서는 일종의 족쇄나 다름없었다. OPEC 11개국 석유 장관들은 또한 리비아의 석유 국유화 조치를 지지한다며 서방 세계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집단 행동에 돌입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집트와 시리아가 10월 6일 이스라엘을 공격해 시작된 제4차 중동전 발발 이틀 후인 10월 8일 이란,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아부다비, 카타르 등 걸프만(페르시아만) 연안 6개 산유국과 메이저 석유 회사 대표들이 만나 새로운 원유 가격 협상을 시작했다. 그러나 협상은 며칠 만에 결렬되었다. 과거에는 협상 결렬이 종결이나 연기를 의미했으나 이번의 경우는 달랐다. 10월 16일 쿠웨이트에서 회동한 페르시아만 연안 6개 산유국 대표들이 원유 가격을 배럴당 3.02달러에서 3.65달러로 17% 인상한다고 일방적으로 발표한 것이다. 이는 메이저 석유회사와 합의를 거쳐야 했던 그 동안의 관례를 깨고 일방적으로 발표했다는 점에서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10월 17일에는 아랍석유수출국기구(OAPEC) 가맹 10개국이 “이스라엘이 아랍 점령지에서 철수할 때까지 9월로 소급하여 매월 5%씩 원유를 감산하고 1975년 5월부터는 원유 생산을 완전 중단한다”고 경고했다. 이는 그동안 선진국과 석유 메이저들이 쥐고 있던 원유가 결정 주도권을 아랍 산유국이 빼앗아가는 중대한 변화였다. 그런데도 닉슨 대통령은 고립 상태에 있던 이스라엘에 220만 달러를 원조하겠다고 10월 19일 발표했다. 미국의 이 같은 조치는 아랍권의 대미 감정을 더욱 악화시켰다. 10월 24일 아랍과 이스라엘 간의 휴전이 성립되었으나 소리 없는 전쟁인 자원전의 파고는 전 세계를 뒤덮을 기세로 높아갔다.

이슬람 민족주의와 자원 민족주의가 세계사 전면에 등장

한번 불이 붙은 원유가 인상 러시는 꺼질 줄 몰랐다. 페르시아만 6대 산유국들은 11월 1일 원유가를 다시 배럴당 5.179달러로 인상하기로 합의했다. 아랍 최대 산유국인 사우디는 11월 3일 세계 각국을 우호국, 비우호국, 기타 비우호국의 3등급으로 분류해 원유를 차등 공급하겠다고 발표했다. 사우디의 3등급 분류 기준은 전적으로 이스라엘과의 친소 정도에 따른 것으로 비우호국에는 원유 수출을 전면 중단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이스라엘, 미국, 남아공, 남예멘, 캐나다, 포르투갈, 네덜란드, 카리브 제국은 ‘비우호국’으로 분류되어 원유를 공급받지 못한 반면 프랑스, 영국, 스페인, 터키, 레바논, 말레이시아, 파키스탄, 인도, 튀니지, 이집트, 브라질 등은 ‘우호국’으로 분류되어 9월 수준대로 원유를 공급받았다. EC(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제외)와 일본, 한국, 필리핀, 태국 등은 ‘기타 비우호국’으로 분류되어 5~20% 감량 공급국으로 지정되었다. 이후 수출금지국과 감량공급국에 포함된 국가들은 초긴장 상태에 들어갔고 사우디의 움직임에 촉각을 세우며 전전긍긍해야 했다. 11월 6일 OAPEC의 10개국 각료 회의가 9월 대비 원유 생산량의 30% 감산을 결정함으로써 세계를 또다시 충격에 빠뜨렸다. 선진국들은 아랍의 이슬람 민족주의와 자원 민족주의가 세계사 전면으로 등장하고 있는 엄연한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EC 9개국은 미국의 노골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11월 18일 아랍 지지를 발표했다. 11월 22일 일본까지 ‘아랍 코스(팔레스타인의 해방과 독립 인정 및 이스라엘 불인정)’ 지지 성명을 발표하자 필리핀, 태국 등 기타 비우호국으로 묶였던 국가들도 잇달아 친아랍 정책을 선언했다. 우리나라는 미국의 눈치를 살피다가 12월 15일 아랍 지지 선언을 발표했다. 그래도 OPEC는 12월 23일 ‘사우디아라비아산 경질 석유’의 고시 가격을 1974년 1월을 기해 배럴당 5.119달러에서 11.651달러로 128% 인상한다고 발표함으로써 ‘석유 무기화’의 고삐를 더욱 조여나갔다. 3개월 만에 원유 가격을 4배나 올려 석유 소비국의 생사 여탈권이 산유국 손에 달려 있음을 분명히 확인시켜준 아랍국들의 원유가 인상에 세계는 속수무책이었다. 각국의 위기 대처 방식은 필사적이었다. 영국은 비상사태를 선언해 회사.공장에 대한 전력공급을 주 3일로 제한하고, 상점.사무실의 전등이나 난방용은 전기를 사용하지 못하게 했으며 TV는 밤 10시까지만 방송하도록 했다. 네덜란드는 허가증 없이는 일요일에 차를 몰 수 없도록 하고 미국은 자동차 제한속도를 80km로 낮추고 휘발유 배급전표제를 시행했다. 다행히 1974년 3월 17일 OAPEC 회의가 미국에 대한 석유금수를 해제하고 아랍에 대한 우호.비우호국 분류를 폐기함으로써 산유국의 석유 무기화는 일단락되고 제1차 오일 쇼크는 막을 내렸다. 하지만 세계는 한동안 석유파동이 몰고온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전 세계의 석유 소비국들은 1974년부터 오일 쇼크의 영향을 구체적으로 받기 시작해 세계 평균 경제성장률은 1974년 1.6%, 1975년 0.3%로 급격하게 떨어졌다. 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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