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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형의 100년의 기록 100년의 교훈
2023년 08월 13일 (일) 00:27:13 김정형 webmaster@newsmaker.or.kr

‘독립유공자’ 서훈 재검토 대상에 오른 조봉암의 정치 생애와 사형 집행

국가보훈부가 최근 “친북 논란 등에도 독립유공자로 포상돼 사회적 갈등을 일으킨 부분 등에 대한 기준을 명확히 하겠다”며 독립유공자 공적 심사 기준 개편안을 발표했다. 재검토 대상에 오른 인물 중에는 대한민국 초대 농림부 장관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죽산 조봉암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조봉암의 정치 생애와 억울한 죽음을 알아본다.

좌익과 우익, 제3의 길을 넘나든 팔색조 정치인

조봉암(1898~1959)은 좌익과 우익, 제3의 길을 넘나든 팔색조 정치인이었다. 일제시대에는 공산주의자로 민족해방운동에 투신했으나 1945년 해방 후에는 공산주의와 결별하고 중도파 현실 정치인으로 변신해 1948년 5월 제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을 때는 농림부장관으로 이승만 내각에 참여하고, 6·25전쟁 후에는 이승만에 맞선 진보 정치인으로 대통령 선거에 두 번이나 출마했다.
조봉암은 경기 강화에서 태어나 12세 때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15세에 농업보습학교를 졸업하고 강화군청에서 급사로 활동하다가 1919년 3·1운동 때 독립선언서를 배포한 혐의로 6개월간 복역했다. 1921년 일본으로 건너가 세이소쿠영어학교를 거쳐 12월 주오대 정치경제과에 입학했다. 재학 중이던 11월 29일 박열, 김약수 등과 아나키스트 모임 흑도회를 조직했다. 1922년 12월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하고 1923년 8월 폐결핵으로 학교를 자퇴한 뒤 귀국했다. 1924년 9월 조선일보 기자가 되고 1925년 4월 창당된 조선공산당의 창당 멤버로 참여했다. 1926년 1월 중국 상해로 건너가 조선공산당 해외부를 설치하고 활동하다가 1932년 9월 상해에서 체포되어 12월 고국으로 압송되었다. 1933년 12월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7년을 선고받아 복역하던 중 1939년 7월 가석방되어 인천에서 혁명가의 삶 대신 일상사에 매몰된 삶을 살았으나 1945년 1월 예비구금령으로 또다시 구금되어 감옥에서 해방을 맞았다.
해방공간에서는 1946년 5월 한성일보를 통해 박헌영을 강하게 비판하고 6월 23일 “비공산 정부를 세우자”는 전향 성명서를 발표하며 공산당과 결별했다. 대다수 좌익계와 김구 등 민족주의 세력이 거부한 1948년 5·10 총선 때는 인천에서 제헌의원으로 당선되어 8월 이승만 정부의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입각했다. 농촌 근대화를 목표로 삼은 그는 정부가 양곡을 매입해 중간상의 폭리를 배제하는 양곡매입법과 농지개혁법을 추진했다. 1950년 5월 제2대 총선에서 재선되어 국회 부의장으로 이승만과 또 다시 보조를 맞추고 1952년 7월의 발췌개헌 때도 이승만에 협조했다.
조봉암이 이승만과 사이가 틀어진 것은 1952년 8월 제2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하면서였다. 그러나 혁신계 민족주의자들은 ‘정치 곡예’를 일삼으며 때로는 현실주의적이고 때로는 기회주의적인 모습을 보이는 조봉암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이승만, 조봉암, 이시영, 신흥우의 4파전으로 치러진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조봉암은 79만 표(11.35%)를 획득해 2위를 차지했다. 524만 표(74.61%)로 당선된 이승만은 현격한 표차에 조봉암을 잠재적인 위협 인물로 여기진 않았다. 그러나 4년 뒤인 1956년 5월 치러진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조봉암이 상승세를 보이며 추격해오자 조봉암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진보당 창당은 화풀이를 하고픈 이승만에게 뺨을 들이댄 격

▲ 재판을 받고 있는 조봉암

1956년 3대 대통령 선거전은 이승만의 독주 속에 민주당의 신익희와 조봉암이 뒤를 쫓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선거 직전인 5월 5일 신익희가 급서해 조봉암 만이 이승만의 유일한 대항마가 되었다. 그런데도 조봉암의 변신에 실망한 일부 야당 인사들은 “조봉암에 투표하느니 차라리 이승만에게 표를 주라”고 호소했다. 5월 15일의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은 504만표(70%)를 획득해 무난히 당선되었지만 조봉암도 216만표(30.1%)나 얻어 여당인 자유당과 이승만에게 놀라움과 충격을 던져주었다. 더구나 헌법상 대통령 유고 시 승계권을 지닌 부통령에 야당인 민주당의 장면이 당선되어 위기감이 더욱 고조되었다.
조봉암은 선거 결과에 고무되어 1956년 11월 10일 반자본주의, 반공산주의, 평화통일 노선을 표방한 최초의 혁신정당 ‘진보당’을 창당했다. 조봉암은 창당대회에서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를 다같이 거부하고 사회 개조의 원칙인 진보사상을 지향할 것”을 주창했다. 이승만의 들러리인 자유당과 반공 친미를 모토로 한 보수 민주당에 끌려가던 당시의 정치구도 하에서 평화통일론을 내세우고 민주사회주의적인 개혁 노선을 추구하는 진보당의 결당은 한국 정치사에 큰 획을 그은 사건이었다. 혁신세력과 보수세력 간의 대립점이 통일론에 있고, 이승만과 집권 자유당의 통일정책이 무력 북진통일론이었음을 감안할 때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은 더욱 획기적이었다.
우파 정치인들에게 조봉암이 경계의 대상이고 함께 일해서는 안 될 인물로 분류된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민족주의 세력조차 조봉암의 그간 행적을 미덥지 않게 생각해 조봉암의 평화통일론을 곧이 곧대로 믿지 않았다. 더구나 진보당의 구성원들이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진보당에 집결했다기보다 조봉암이라는 개인의 매력과 1950년대라는 암울한 상황에 이끌려 참여한 측면이 크고 구성원들의 정치 성향이 다양했다는 점에서도 태생적 한계가 적지 않았다. 진보당 창당은 1956년 제3대 대통령선거 후 화풀이를 하고픈 이승만에게 뺨을 들이댄 격이 되었다.
1958년 1월 12일 경찰이 박기출(진보당 부위원장), 윤길중(간사장) 등 간부들을 잡아들인 것은 신호탄이었다. 조봉암은 경찰에 자진 출두했다. 검찰은 1월 13일 조봉암이 남파간첩 박정호 등과 수차례 밀회한 뒤 공산 평화통일과 부합하는 평화통일을 추진했다고 발표했다. 당초 검찰이 문제삼은 단서는 ‘중앙정치’라는 잡지(1957년 10월호)에 실린 조봉암의 글 ‘평화통일에의 길’이었다. ‘진보당의 주장을 만천하에 천명한다’는 부제가 붙어있는 이 논문 중에 ‘북과 동등한 조건으로 선거를 실시한다는 것은 다소 불쾌할 수도 있으나 한 번 시행해보는 것도 결코 나쁘다고만 말할 수는 없다’라고 한 대목이 대한민국의 존재를 부인하고 국시에 위배된다는 것이었다.
검찰은 구속된 진보당 간부들 전부를 기소하고 조봉암은 간첩, 간첩방조죄,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재판에 회부했다. 2월 25일에는 진보당의 등록을 취소하고 불법화했다. 사건은 계속 확대되어 진보당 관련자 20여명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추가 구속되었다. 붙들려간 진보당 관련자들은 물고문, 몽둥이 구타, 잠 안 재우기 등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심한 가혹행위를 당했다고 호소했다. 감옥 안팎에서 이 사건의 공판을 기다리고 있던 중 또 하나의 악재가 겹쳤다. 북한 간첩이라는 양명산의 등장이었다.

2심 재판은 징역 5년이었으나 대법원에서 사형 판결

1958년 2월 20일 육군 특무부대와 검찰은 대북 첩보기관인 HID의 대북공작원이 대남 간첩 임무를 수행했다며 양명산을 검거했다고 발표했다. 양명산이 6·25 전후 북괴를 10여차례 왕래하면서 북괴 중앙당 연락부장 박용길과 접선, 그의 지령을 받고 조봉암과 몇 차례 밀회한 일이 있으며, 조봉암의 생활 일체를 돌봐주고 돈 500만환을 주었다는 내용이었다. 조봉암은 “양명산과는 30년 전 상해 시절부터 친한 사이였으며, 그가 사업으로 돈을 많이 벌었다기에 몇 번에 걸쳐 500만환을 조건 없이 얻어 썼을 뿐, 그가 북괴의 간첩이라거나 그 돈이 공작금인 줄은 전혀 몰랐다”고 항변했다. 그래도 검찰은 양명산이 조봉암과 북한 간의 연락책이라고 주장하며 조봉암을 간첩죄로 기소했다. 양명산까지 검찰의 기소 사실을 법정에서 시인함으로써 누가 보아도 조봉암의 간첩 혐의는 분명해 보였다.
검찰은 조봉암·양명산에게 사형을, 나머지 피고인들에 대해서는 징역 12년 이상의 중형을 구형했다. 하지만 7월 2일 1심 선고 공판에서 유병진 재판장이 두 사람에게는 징역 5년을 선고하고 나머지 피고인 중 4명에게는 징역형의 집행유예, 17명에게는 전원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장은 공소사실 중 가장 큰 논쟁거리였던 평화통일론과 간첩죄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했지만 조봉암이 양명산으로부터 혁신세력 확대, 미군 철수운동 추진 등의 제의를 받고 금품을 수수했다는 점과 무기 불법소지 부분을 유죄로 인정해 양명산과 함께 징역 5년을 선고했다. 그러자 사흘 후인 7월 5일 반공청년단을 자처하는 200~300명의 괴청년이 법원에 난입해 “친공 판사 유병진을 타도하자”, “조봉암을 간첩죄로 처단하자”며 난동을 부려 판사가 피신해야 하는 사법사상 초유의 재판 파동이 벌어졌다. 사건 후 사회 각계에서 규탄의 목소리가 들끓어 경찰이 마지못해 난입 청년 두어 명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했으나 검찰은 이를 보류시킨 채 즉결심판에 회부하는 것으로 흐지부지 처리했다.
사법부가 위축된 가운데 열린 2심 재판은 양명산의 입장 변화로 난항을 겪었다. 양명산이 “1심 자백은 특무대의 고문·협박·회유·기만에 못 이긴 허위 진술이었다” “양심의 가책으로 견딜 수가 없었다. 죽산 선생은 아무 죄가 없다.”라고 진술을 번복했기 때문이다. 양명산은 “(특무대의) 고문관이 나에게 ‘너는 문제가 아니다. 조봉암을 잡자는 것이다. 당신은 살 수 있다. 하라는 대로만 해라’(고 했다).”라고 말했다는 증언도 했다.
상식대로라면 1심에서 양명산의 자백으로 5년형을 선고한 만큼 2심에서 양명산이 자백을 번복했기 때문에 검찰이 그에 대한 반증을 제시하지 못하면 간첩죄는 백지화되어야 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1심 무죄 판결로 석방되어 불구속으로 법정에 나온 피고인 전원까지 재구속시켰다. 그리고는 10월 25일의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이 국가보안법에 위반된다며 조봉암과 양명산 두 사람에게 간첩죄와 국가보안법을 적용해 사형을 선고했다. 나머지 피고들에게도 2명을 제외하고 모두 실형을 선고했다.

“내가 정치적 희생물로 마지막이 되기를 바란다” 유언 남겨

1959년 2월 27일 선고된 대법원 판결 역시 조봉암의 형량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윤길중 등 15명에게 무죄가 선고되는 등 전체적으로는 2심보다 형량이 가벼워졌으나 조봉암(간첩, 국가변란)과 양명산(간첩)에 대해서는 사형을 선고했다. 대법원은 진보당의 정강 정책이 헌법에 위배된다고 할 수 없고 평화통일에 관한 주장 역시 언론자유의 한계를 일탈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에 죄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했지만, 북한과 상통하고 대남간첩 양명산이 북한으로부터 밀파되었다는 점을 알면서도 그와 밀회하고, 그로부터 북한이 보내온 미화 2만2000달러의 공작금을 받고 간첩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사형을 선고했다. 조봉암 사형 판결의 증거로 작용한 이유 중에는 조봉암이 양명산에게 옥중에서 보낸 비밀쪽지도 있었다. 쪽지에는 “당신(양명산)의 말 한마디가 나와 우리 진보당 ‘만여명’ 동지들의 정치적 생명에 관계가 되어 결사적으로 부인하시오”란 대목이 있다.
조봉암의 변호인단이 재심을 청구했으나 7월 30일 기각되었고 조봉암은 기각 17시간 만인 7월 31일 오전 11시 소리 소문 없이 사형에 처해졌다. 양명산은 이틀 전 이미 사형이 집행된 상태였다. 조봉암은 “나에게 죄가 있다면 많은 사람이 고루 잘살 수 있는 정치운동을 한 것밖에 없다.… 내가 정치적 희생물로 마지막이 되기를 바란다”는 유언을 남겼다. 사형이 집행되기 전 그는 입회 목사에게 누가복음 23장 22~23절을 읽어 달라고 부탁했다.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에게서 죽을 죄를 찾지 못했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하니, 그들이 큰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
조봉암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48년이 지난 2007년 9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조봉암의 사형 집행을 ‘비인도적 반인권적 인권유린이자 정치 탄압’으로 규정하면서 그에 대한 사과와 피해구제, 그리고 명예회복을 위한 적절한 조치를 국가에 권고했다. 조봉암의 가족은 이에 근거해 재심을 청구했다. 2년여의 심리 끝에 재심을 받아들인 대법원은 2011년 1월 20일 국가변란과 간첩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그런데 주간조선이 2020년 5월 17일 <김일성, 조봉암에 1956년 대선자금 보냈다> 제목의 기사를 통해 김일성과 조봉암 간의 관계를 새롭게 제기해 관련 학계의 주목을 끌고 있다. 주간조선은 1968년 9월 김일성이 북한을 방문한 소련공산당 정치국원 겸 내각(각료회의) 부의장에게 1956년 남한 대선에 개입했다고 밝힌 구소련 외교문서를 입수해 기사화했다. 요지는 북한이 남한에 ‘진보당’이란 소위 ‘합법 정당’의 설립을 지원했고 1956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조봉암 후보 측에 자금을 지원하고 조언했다는 내용이다. 전문가들은 소련 측에 자신의 한반도 내 영향력을 과시하기 위한 일종의 ‘뻥튀기’가 김일성의 발언에 작용했을 수 있고, 김일성의 주장이 과장됐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입장이지만 그렇더라도 학계의 심층적인 연구로 사실 여부를 밝혀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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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저자 밀란 쿤데라의 작품세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쓴 체코 소설가 밀란 쿤데라가 2023년 7월 11일 프랑스 파리에서 94세로 생을 마감했다. 역사와 이데올로기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인간의 실존을 탐색하는 데 평생을 바친 그의 대표작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다. 프랑스 메디치상을 비롯해 숱한 문학상을 받고,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의 매년 거론됐으나, 이제 그 영예를 이룰 수 없게 됐다.

20대 시절 공산당에 매료돼 공산당원으로 활동

▲ 밀란 쿤데라

밀란 쿤데라(1929~2023)에게 세계적 명성을 안겨준 작품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1984년)이다. 소설은 주인공 토마시의 개인사와 체코의 불행한 역사를 포개놓으며 18년의 역사를 서술한다. 그 기간 토마시는 외과의사에서 트럭 운전사로 추락하고, 그의 조국 체코는 1968년 소련의 침공으로 몰락한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대목은 주인공 4명의 캐릭터를 통해 보여주는 쿤데라의 통찰과 철학이다. 얼핏 대중의 편안한 접근을 막을지도 모르는 이 철학적 주장을 위장하기 위해 쿤데라는 4명의 캐릭터에게 사랑과 연애에 관한 자극적 역할을 부여했다. 쿤데라는 이 4명의 주인공을 통해 사랑의 진지함과 가벼움, 사랑의 책임과 자유, 영원한 사랑과 순간적인 사랑 등 모순되고 이중적인 사랑의 본질을 드러냄으로써 궁극적으로 인간 존재의 한계를 드러내고자 했다.
소설은 묵직한 주제인데도 특유의 경쾌한 문체를 살려 산보하듯 가볍게 묘사했다는 평가를 들었다. 미국의 타임지가 ‘1980년대의 소설 베스트 10’에 선정할 정도로 특히 서구에서 각광을 받았다. 1988년 미국 감독 필립 코프먼이 연출하고 쥘리에트 비노슈와 대니얼 데이 루이스가 연기한 ‘프라하의 봄’ 제목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하지만 쿤데라는 “영화가 작중 인물의 성격이나 소설의 근본적인 주제와 영화 사이에 어떤 유사성도 없다”며 서운함을 드러냈다. 이후 그는 자신의 소설을 영상화하겠다는 모든 제안을 거절했다.
쿤데라는 1929년 체코슬로바키아 제2의 도시 브루노에서 태어났다. 그의 고향은 수도사 생활을 하던 그레고어 멘델이 1866년 완두콩을 이용해 유전의 법칙을 발견하고 세계적인 건축가 아돌프 로스가 태어난 곳이다. 아버지는 음악학교 교수이자 피아니스트였다. 쿤데라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피아노와 작곡을 공부했다. 이 과정에서 체득한 음악적 소양은 훗날 그의 작품에 녹아들었다.
쿤데라는 1948년 프라하 카를대에 입학, 문학과 미학을 공부하다가 프라하 국립영화학교(FAMU)로 옮겨 영화 연출과 시나리오를 전공했다. 1948년 2월 체코 공산당이 좌우합작 정권을 무너뜨리는 쿠데타에 성공하고 그해 6월 공산당 소속 클레멘트 고트발트가 대통령에 취임했을 때, 쿤데라도 공산당원이었다. 쿤데라는 공산당이 지배하는 새 질서를 찬양하는 시와 노래로 공산당을 열렬히 환영했으나 1950년 개인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 그의 성향이 ‘반공산당적’이라는 이유로 공산당에서 추방당했다. 이후 입당과 탈당을 반복했으나 1956년 소련의 흐루시초프가 스탈린을 비판한 비밀연설이 공개되고 체코 지식인들이 스탈린과 소련의 불법행위를 비판했을 때는 공산당원 신분이었다. 쿤데라는 훗날 자신의 에세이 ‘작가수업’에서 공산당원이었던 그 시절을 이렇게 회고했다. “스트라빈스키, 피카소, 그리고 초현실주의가 나를 사로잡았듯이 공산주의는 나를 매혹시켰다. 공산주의는 위대하고 기적적인 변형으로 완전히 새롭고 다른 세계를 약속했다.…”

‘프라하의 봄’ 때 개혁운동에 나섰다가 교수직에서 쫓겨나

쿤데라는 대학 졸업 후 프라하 국립영화학교(FAMU)에서 문학을 가르치면서 시와 소설과 시나리오를 썼다. 1950년 첫 시집 발간 후엔 주로 시를 썼으나 1960년대 들어서는 시 대신 평론과 희곡과 소설을 쓰다가 마지막에는 소설에 닻을 내렸다. 1963녀 첫 희곡 ‘열쇠의 주인들’과 첫 단편소설집 ‘우스꽝스러운 사랑’을 발표하고 1967년 첫 장편소설 ‘농담’을 선보여 유럽 문단의 주목을 끌었다. ‘농담’은 사소한 농담 때문에 강제수용소로 끌려간 지식인의 인생유전을 그린 소설로 사회주의 체제의 전체주의적 성격을 풍자했다. ‘농담’이 나중에 프랑스어판으로 번역되었을 때 프랑스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루이 아라공은 서문에서 “금세기 최대 소설가 중 한 사람으로, 소설이 빵과 마찬가지로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임을 증명해주는 소설가”라고 격찬했다.
1968년 체코에 ‘프라하의 봄’이 찾아왔다. 쿤데라도 극작가 바츨라프 하벨 등과 함께 민주적 개혁운동을 지지했다. 하지만 그해 8월 소련이 무력으로 자유화운동을 진압하고 결국 ‘프라하의 봄’도 혹독한 겨울로 바뀌면서 되돌아가면서 쿤데라는 교수에서 쫓겨났다. 그의 책들도 도서관과 서점에서 일제히 사라지고 책 출판은 금지되었다. 대신 그에게 주어진 직업은 재즈클럽 종업원이었다.
그 무렵 프랑스 브르타뉴의 렌대에서 교환교수 초청장을 보내왔다. 쿤데라는 ‘프랑스 거주 3년’ 허가증을 받아 1975년 프랑스로 갔으나 3년이 지나도 체코로 돌아가지 않아 1979년 체코 국적을 박탈당했다. 쿤데라는 1978년 파리로 거처를 옮기고 1981년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다. 그 사이, 소설 ‘이별’(1978)이 유럽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이탈리아 문학상 프레미오 레테라리오 몬델로 상을 수상했다. 다른 작품들도 탁월한 문학적 깊이를 인정받아 각종 상을 수상했다. 쿤데라는 1989년 체코 프라하 시민들이 성공시킨 ‘벨벳혁명’의 성공으로 공산정권이 무너진 뒤에야 고국을 방문하고 2019년 국적을 회복했다.

프랑스 망명 후엔 프랑스어로 작품 써

쿤데라는 프랑스에서도 한동안 체코어로 작품을 쓰다가 1978년부터 프랑스어로 작품을 썼다. 소비에트 체제에 저항하는 체코 시민들의 이야기를 그린 ‘웃음과 망각의 책’(1979)과 그를 세계적인 작가로 만들어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1984)은 프랑스어로 쓰였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체코에선 금서로 지정되었다가 1989년 ‘벨벳혁명’ 성공 후 금서에서 해제되었다. 쿤데라는 ‘소설의 기술’(1986), ‘배반당한 유언’(1993) 등 수필집과 ‘느림’(1995), ‘정체성’(1998), ‘무명’(2000) 등의 소설도 프랑스어로 발표했다.
쿤데라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준 작품들은 대부분 프라하를 무대로 쓰였다. 몸은 비록 파리에 있지만 정신세계는 여전히 프라하의 시가지를 배회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1981년 프랑스 시민이 된 후에는 자신의 작품을 ‘프랑스 문학’이라고 강조했다. 쿤데라는 1990년대부터 아예 프랑스어로 작품을 집필하고, 체코어로 쓴 그 이전 작품들은 자신이 직접 프랑스어로 번역했다. 특히 1990년 프랑스어로 출간한 ‘불멸’은 배경과 인물이 프랑스와 프랑스인일 뿐 아니라 등장인물의 사고방식과 세계관도 프랑스적이라는 점에서 쿤데라를 명실상부한 ‘프랑스 작가’라고 불리게 했다.
‘무명’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속편 격으로, 프랑스어로 써놓고도 프랑스에서 먼저 발간되지 않고 2000년 스페인과 한국(한국어 번역본 제목은 ‘향수’)에서 먼저 번역본이 나오고 프랑스에서는 27개국에서 번역된 후에야 2003년 발간되었다. 쿤데라는 프랑스에 정착한 후에도 과거 체코에서 겪은 비밀경찰의 감시를 의식해 사생활 노출을 극도로 꺼리고 대부분의 미디어 출연 제안을 거절했다.
세계적인 작가로 추앙을 받던 쿤데라에게 시련이 닥친 것은 2008년 체코의 한 주간지가 쿤데라의 공산정권 부역 사실이 기록된 문서가 발견되었다고 보도하면서였다. 문서에는 고국에서 서방 측 첩보원 역할을 하던 체코 출신의 한 청년이 1950년 쿤데라의 밀고로 경찰에 체포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체코 정부가 후원하는 전체주의정권연구소도 그 청년이 쿤데라의 밀고로 체포되어 14년을 복역했다며 이 같은 사실을 뒷받침했다. 쿤데라는 20년 만의 언론 인터뷰에서 “전혀 예상치 못했던, 지금도 전혀 알지 못하며 절대 일어나지 않았던 일 때문에 모함을 받고 있다”고 반박했으나 그의 젊은 날 친소적인 행태로 미루어 “결코 일어나지 않은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반론도 많다. 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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