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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형의 100년의 기록 100년의 교훈
2023년 06월 19일 (월) 00:06:24 김정형 webmaster@newsmaker.or.kr

KBS TV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생방송 40주년

“그것은 통곡이었다. 기쁨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수만 개의 바늘과 칼끝이 가슴을 갈기갈기 저미는 아픔이었다.”(1983.7.3. 조선일보 사설) KBS가 6·25 특집의 일환으로 기획한 ‘지금도 이런 아픔이-이산가족을 찾습니다’가 생방송으로 전국의 시청자를 찾아간 것은 1983년 6월 30일 밤 10시 15분이었다. 방송 후 무심코 ‘이산가족…’을 보던 시청자들의 눈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출연자들이 가족을 만날 때는 마치 내 일처럼 함께 기뻐하며 밤잠을 설쳤다. 가수 패티김이 노래한 배경음악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까지 시청자의 심금을 울리면서 전국은 눈물바다가 되었다. 그날 밤 TV를 보고 울지 않은 사람은 한민족이 아니었다.

20시간 넘게 생방송 진행은 방송 사상 전무후무

‘이산가족…’은 우연한 계기로 만들어졌다. 6월 21일 KBS는 아침 프로그램 ‘스튜디오 830’에서 9명의 이산가족을 출연시켜 ‘아직도 내 형제를 못 찾았소’를 방송했다. 그들의 구구절절한 사연을 인터뷰해 방송했지만 9명 중 1명도 가족을 찾지 못했다. 그런데 방송 끝 부분에서 한 남자가 울음을 터뜨리자 시청자와 이산가족들도 덩달아 눈물을 흘렸다. 그 모습을 본 제작진의 머릿속에 이산가족을 위한 특별 생방송이 성공을 거둘 수 있겠다는 아이디어가 번개처럼 떠올랐다.
KBS는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를 6월 30일 밤 시간에 편성한 뒤 6월 28일부터 출연 신청을 받았다. 안국정·이원군 PD, 유철종·이지연 MC로 꾸려진 제작진은 성공 여부를 자신하지 못해 당사자들 모르게 10가족 이상의 상봉 케이스를 사전에 준비했다. 방송 시작 전 이산가족 150명을 초청한 방청석에는 1000명이 넘게 몰려와 피맺힌 한을 털어놓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밤 10시 15분 생방송이 시작되고 첫 번째 이산가족이 등장했으나 상봉 결과 이산가족이 아니었다. 두 번째도 세 번째도 실패해 제작진 얼굴에 당혹감이 역력한 가운데 다행히 첫 상봉이 이뤄졌다. 40살의 한 여성이 1·4 후퇴 때 헤어진 사촌남매 7명을 한꺼번에 만난 것이다. 이후 중앙홀에 설치된 접수대에는 늦은 밤인데도 신청이 쇄도했다. 밤 11시쯤 벌써 중앙홀이 거의 꽉 차버렸다. 밤 11시 50분까지 1시간 35분 동안 방송하려던 당초 기획은 긴급 대책회의를 통해 이튿날 새벽 2시 25분까지 연장되었다. 그사이 몰려든 신청자는 2000여 명에 달했고 4시간 10분의 방송 동안 850쌍의 가족이 출연해 36쌍이 극적으로 가족을 상봉했다.
7월 1일 밤 10시 15분 다시 시작된 ‘이산가족…’은 꼬박 밤을 새우고, 또 낮을 거쳐 7월 2일 밤 저녁 뉴스가 나가는 7시 30분에 일시 중단할 때까지 무려 20시간 넘게 생방송으로 진행되었다. 방송 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제작진과 사회자들도 체력의 한계에 다다랐지만 이산가족의 체력도 걱정이었다. 이산가족이 대부분 노인이었는데, 이들 중 상당수가 “가족을 찾을 때까지 안 가겠다”며 KBS를 떠나지 않았다. 아무리 설득해도 돌아가질 않아 “사고가 날 수도 있다”는 의견이 안팎에서 나오면서 적십자사와 여의도 성모병원 등에서 의사와 간호사가 현장 파견을 나왔고, 철야 중인 이산가족에게는 음식과 담요를 제공했다. 그 사이 8000여 명 이산가족의 이름이 전국에 메아리쳤고 감격적으로 해후한 사람만도 300쌍이 넘었다. 그날부터 방송은 방송사의 것이 아니었다. 눈물과 한으로 수십 년을 지내온 이 땅 이산가족들의 것이었다.

▲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한 장면.

장엄한 인간 드라마이자 한 편의 대서사시

첫 방송 시작과 함께 한맺힌 사람들의 행렬이 KBS가 있는 여의도를 뒤덮었다. KBS는 뉴스 등 주요 프로그램 외에는 모든 정규방송을 취소하고 ‘이산가족 찾기’라는 단일 주제로만 5일 동안 릴레이 생방송을 진행했다. 방송 6일째 4만 3000여 명이 신청하고 1101쌍의 가족이 재회의 눈물을 흘렸다. 지척이면 닿을 거리에서 30년을 떨어져 살던 모자가 극적인 상봉을 했다. 전쟁 통에 홀로 버려져 고아원을 전전했던 40대 중년 남성이 애타게 찾던 형님 품에 안겨 목 놓아 울었다. 흐트러진 몸짓과 자지러지는 절규에 사회자도 시청자도 함께 울며 밤을 새웠다.
KBS 본관 주변은 구름처럼 몰려든 이산가족들이 쏟아내는 비원의 광장으로 변했다. 방송사가 있는 여의도 일대는 온통 벽보 천지였다. 그것도 모자라 여의도광장의 아스팔트 바닥에까지 벽보가 깔렸다. 마네킹을 들고 와 벽보를 붙여 시선을 끌려고 하는 사람도 있었고 해가 뜨나 비가 오나 망부석처럼 벽보 곁을 지키는 사람도 있었다. 전두환 대통령도 두 번이나 현장을 방문해 담당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했다. 총리 등 각료를 비롯 100여 명에 달하는 국내외 고위급 인사들도 현장을 참관했다. 초반 시청률은 전 국민의 폭발적인 관심에 힘입어 80%가 넘을 때도 있었다.
세계 100여 개 언론이 이 비극적이고 감동적인 드라마를 ‘텔레톤’(텔레비전의 마라톤 방송)이라 부르며 밀착 보도했다. 세계 10여 개국 25개 방송사가 ‘이산가족 찾기’ 방송을 카메라에 담아 자국에 보도했고 전 세계 42개국이 하이라이트 장면을 방영했다. 이산가족찾기의 또 다른 화제는 음악이었다. 패티김이 노래한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가 방송 내내 배경음악으로 깔린 가운데 이산가족 상봉이라는 상황과 구슬픈 음악들이 절묘하게 분위기가 맞아떨어져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초기에는 음악감독이었던 이재석 감독이 6~7곡의 노래를 가져왔고 가수 김수희, 김연자, 김정구 등이 출연했다. 이미자는 ‘북쪽에 보내는 편지’를 불러 아픔을 함께 나눴다. 무명가수 설운도는 7월 6일 방송에 나와 ‘잃어버린 30년’을 발표해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설운도의 ‘잃어버린 30년’은 노래 발표 후 최단 기간에 히트곡이 된 사실로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다.
아나운서 김동건·신은경·황인용과 탤런트 강부자 등이 진행자로 합세해 잠도 잊은 채 마이크를 잡았다. 전쟁 통에 헤어진 이산가족의 사연을 소개하다 보니 예상치 못한 사건도 생겼다. 여동생을 찾던 한 여성에게 사회자가 “어떻게 헤어졌냐”고 묻자 “피란길에 사람들하고 남쪽으로 내려가는데 미군이 내 여동생을 쐈다”고 답한 것이다. 1980년대 초반 사회 분위기로는 방송에 나갈 수 없는 내용이었다. 사회자였던 김동건 아나운서가 놀라며 “기억이 확실하냐”고 묻자 이 여성은 “기억이 확실하다, 미군이 맞다”고 반복했고 이 내용이 모두 방송으로 나갔다.
‘이산가족…’은 138일 동안 453시간 45분이나 계속 방송되다가 11월 14일 새벽 4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이 기간 총 10만 952명의 이산가족이 출연을 신청했고 이 가운데 5만 3536명이 출연해 1만 189명이 그리던 가족을 찾았다. ‘이산가족…’은 1983년 제6차 세계언론인대회에서 ‘그해의 가장 인도적인 프로그램’으로 선정되고 1984년 세계평화협력회의 총회에서 세계 방송사상 처음으로 ‘골드 머큐리애드로 서램상’을 수상했다.
단일 프로그램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진행된 생방송으로 기네스북에도 오르고 관련 자료들은 2015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방송사적으로는 세계 방송사상 유례없는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방송매체의 새로운 가능성을 개척했다는 점에서 한국 방송사의 새로운 이정표로 기록되었다. 수많은 이산가족에게는 재회의 기쁨을 안겨주었고, 전쟁을 체험하지 않은 젊은이에게는 전쟁의 비참함을 일깨워주었다. 국민에게는 민족적 연대감을 불러일으켰다. 장엄한 인간 드라마였고 한 편의 대서사시였다.

 

1950년 6·25전쟁은 세계대전… 전개 과정과 전말

6·25전쟁은 세계대전이었다. 유엔의 깃발 아래 세계 16개국이 군대를 파견하고 한국과 북한, 중국과 소련까지 합하면 참전국이 20개국이나 된다는 점에서 부정할 수 없는 세계대전이었다. 사망자 수를 기준으로 하면 1500년대 근대 국가체제가 형성된 이래 발발한 모든 전쟁 중에서 7번째로 규모가 크고, 연평균 사상자 수로 비교하면 1차, 2차대전에 이어 3번째로 피해 규모가 컸다. 우리는 ‘6·25전쟁’, 미국을 위시한 서방 국가들은 통상 ‘한국전쟁’으로 부르지만 북한과 중국은 각각 ‘조국해방전쟁’, ‘항미원조(抗美援朝)전쟁’이라 부르며 자국의 관점을 드러내고 있다. 73년 전 6·25전쟁이 어떤 맥락 속에서 발발하고 전개되고 종전을 맞았는지 전후사정을 살펴본다.

6·25전쟁은 김일성, 스탈린, 모택동의 합작품

김일성이 소련의 스탈린에게 ‘남조선 해방’을 위한 전면전 의사를 처음 밝힌 것은 1949년 3월 5일 모스크바에서 스탈린을 만난 자리에서였다. 스탈린으로서는 북한을 앞세운 대리전을 통해 한반도 전체가 공산화되는 것을 굳이 거부할 이유가 없었으나 미군 일부가 아직 남한에 주둔하고 있는 상황을 의식해 “아직 때가 아니다”라며 승인하지 않았다. 당시 주한미군은 1948년 9월부터 1949년 1월까지 1만 6,000여 명 대부분이 철수했으나 제5연대 전투단은 아직 한국에 주둔 중이었다.
김일성은 스탈린이 주저하는 동안 중국에 있는 조선의용군 병력을 북한으로 보내줄 것을 모택동에 요청했다. 당시 중국에는 중국의 국공내전에서 실전 경험을 쌓은 조선의용군 3개 사단 병력이 있었다. 모택동의 승인이 있고나서 조선의용군 5사단과 6사단 병력은 1949년 여름과 가을 북한으로 들어왔고, 나머지 12사단은 1950년 3월에 입북했다. 반대로 한국에 주둔 중이던 나머지 미군은 1949년 6월까지 모두 한국에서 철수해 남한에 남은 미군은 500여 명의 군사고문단뿐이었다.
김일성은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중공)이 출범한 후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했으나 스탈린은 여전히 남침을 승인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주한미군이 모두 철수하자 1950년 1월 30일 북한 주재 소련대사 테렌티 스티코프를 통해 “김일성을 만날 용의와 도와줄 의사가 있다”는 뜻을 김일성에게 전달했다. 김일성은 1950년 3월 30일부터 4월 25일까지 북한 정권의 2인자인 박헌영을 대동하고 모스크바에 머물면서 스탈린을 설득했다. 스탈린은 김일성의 남침을 지지하면서도 “이 문제의 최종 결정은 중국과 북한 공동으로 이뤄져야 하며 만일 중국의 의견이 부정적이면 새로운 협의가 이루어질 때까지 결정을 연기해야 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이는 미국과의 직접 충돌을 피하고 미국과 중국의 대립을 유도함으로써 미국과 중국을 모두 견제하려는 속셈이었다. 김일성이 소련에서 돌아와 그해 5월 13일부터 16일까지 중국에 머물면서 모택동에게 남침에 대한 스탈린의 뜻을 전달하자 모택동도 김일성을 지원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로써 남침이 확정되고 구체화되었다.

개전… 군사 전력에서 북한이 압도적으로 우세

▲ 6·25전쟁 발발 3일 만에 서울에 나타난 소련제 탱크 T-34 전차

부슬비가 하염없이 내리고 있던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단잠에 빠져 있는 38선 인근의 한국군 부대 막사 위로 포탄이 우박처럼 쏟아졌다. 곧이어 소련제 T-34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 주력부대가 38선을 넘어 거침없이 남하했다. 이에 앞서 새벽 3시 30분쯤에는 북한군이 동해안의 옥계, 삼척, 임원 등 3곳을 기습공격했다. 민족상잔의 비극 6·25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북한군은 6월 25일 당일 서해안의 옹진반도 방어선을 무너뜨리고 의정부(6.26), 서울 창동(6.27), 미아리 방어선(28일 새벽 1시)을 파죽지세로 돌파했다. 그동안 개성, 김포, 문산, 포천, 춘천, 가평 등이 잇따라 북한군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군사 전력에서 북한은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국군은 9만 4,000여 명에 불과한 반면 북한군은 18만 2,000여 명이나 되었다. 북한의 전투장비 규모는 남한의 3배가 넘었다. 전차도 북한이 200대 이상 보유한 반면 국군은 단 한 대도 없었다. 북한은 전투기를 포함해 항공기가 211대가 있었으나 아군은 연락기와 연습기 22대가 전부였다.
서울을 향한 북한의 주공(主攻)은 4개 보병사단과 1개 전차여단으로 구성된 제1군단이 맡아 3개 방면으로 나뉘어 펼쳐졌다. 제1군단은 의정부와 문산 그리고 한강을 넘어 김포와 영등포로 진격했다. 3개 보병사단과 1개 모터사이클연대로 구성된 제2군단이 담당한 조공(助攻) 중 한 방향은 춘천~가평·홍천~수원 방향으로 진격해 서울의 동측방을 우회 공격하고 다른 한 방향은 동해안 축선을 따라 포항 방면으로 남진했다. 이에 맞서는 국군의 전방 방어 부대는 4개 사단과 1개 연대가 전부였다. 옹진반도에 보병 제17독립연대, 개성·문산에 제1사단, 의정부 북방에 제7사단, 춘천 북방에 제6사단, 동해안에 제8사단이 배치되어 있었다. 게다가 북한의 남침이 있기 하루 전인 6월 24일 0시를 기해 한동안 계속 이어지던 비상경계령이 해제되고 많은 장병이 휴가와 외박을 나가 부대에 남아 있는 병력은 절반에 불과했다.
6월 25일 오전 8시 30분, 김일성이 “남한의 도발을 반격하는 차원에서 전쟁을 시작한다”며 남한에 선전포고를 했지만 우리 국민은 38선에서 늘상 있어온 충돌 가운데 하나려니 생각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곧 북한 전투기가 서울의 용산 상공에 출현, 총격을 가하고 김포비행장을 폭격하면서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기 시작했다. 점점 가까워지는 포성에 서울은 혼란과 공포의 도가니로 빠져들었다. 우리 군은 제대로 된 저항 한번 못하고 6월 28일 서울을 내주었다. 이승만 정부는 서울 사수를 약속해놓고도 6월 28일 새벽 2시 30분쯤 한강 인도교를 폭파해 한강 이북의 서울 시민을 사지로 내몰았다. 4만 4,000여 명의 국군도 낙오병 신세가 되었다.
북한군의 전술도 처음부터 순조롭지는 않았다. 북한군은 6월 26일 오후 1시 의정부를 점령한 뒤 서울의 창동을 거쳐 28일 오전 1시에 미아리고개를 넘었다. 16㎞를 남하하는 데 36시간이나 걸린 것은 잘못된 도로 선택과 의정부에서 벌어진 북한군끼리의 교통체증 때문이었다. 그들의 진격을 지연시키는 데는 국군의 활약도 컸다. 개성 남쪽에서 한강을 건너 김포·영등포 방향으로 공격하려는 북한군 6사단을 가로막은 것은 한강이었다. 결국 북한군은 김포 쪽에서만 3일을 지체했고, 우리 군이 긴급 편성한 김포지구 전투사령부의 선전으로 북한군은 7월 3일에야 영등포에 진출했다. 국군 6사단은 춘천 지역으로 내려오는 북한군 2사단을 격퇴했다. 이 때문에 당일 춘천을 점령하고 수원으로 진출한 뒤 국군의 후방을 치려했던 북한군의 작전은 헝클어졌다.
6·25전쟁의 최대 '미스터리' 가운데 하나는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 후 6일 동안 지체한 일이다. 덕분에 국군은 한강 이남에서 전열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북한군이 한강을 건넌 것은 7월 3일이었다. 그들이 전면에 내세운 소련제 T-34 전차는 당시 최강의 전차였다. 국군은 57㎜ 무반동총과 2.36인치 로켓포로 맞섰지만 역부족이었다.

속전속결로 진행된 유엔 안보리 결의와 유엔군 참전

북한의 전면 남침 사실을 알리는 존 무초 주한 미 대사의 최초 전문이 미 국무부에 전달된 것은 1950년 6월 24일 밤 8시(한국시간 25일 아침 9시)였다. 애치슨 국무장관은 그날 밤 9시쯤 트루먼 대통령에게 북한의 남침 사실을 보고하는 한편 이 문제를 유엔 안보리에 상정하도록 국무부에 지시했다. 트뤼그베 리 유엔 사무총장은 6월 25일 오전(미국 시간), 한국에 파견되어 있는 유엔 한국위원단으로부터 “안보리에 상정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에 따라 유엔 안보리는 그날 오후 2시에 긴급 소집되었다. 전례 없는 일요일 긴급회의에서 유엔 안보리는 “즉각적인 전투 중지와 38선 북쪽으로 병력 철수”를 촉구하는 미국의 안을 9 대 0으로 채택했다. 소련은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이 1949년 10월 출범했는데도 중화민국(대만)이 중국 전체를 대표해 총회 안보리 의석을 차지하도록 한 유엔의 결정에 항의하며 1950년 1월 30일부터 안보리 회의를 보이콧하고 있었다.
장면 초대 주미 대사가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6·25 남침 소식을 전화로 전해들은 것은 6월 24일 밤 10시 30분쯤(미국 시간)이었다. 장면은 그날 밤 미 국무부로 달려가 유엔 안보리 회부를 논의한 후 바로 유엔본부가 있는 뉴욕으로 날아갔다. 6월 25일 오후 2시에 열린 안보리에서는 유엔의 지원을 간곡히 호소했다. 6월 26일 오후엔 트루먼 대통령을 찾아가 지원을 요청했다.
미국의 상하 양원 합동회의는 6월 26일 미군의 징병 기간을 1년 연장하는 결의안을 315 대 4로 통과시키고 트루먼은 6월 27일 12시쯤, 미 해·공군의 한국 파병을 대내외에 공표했다. 그날 밤 유엔 안보리도 소련, 이집트, 인도 대표가 불참한 가운데 7 대 1로 두 번째 결의안을 채택했다. ‘북한의 무력공격을 격퇴하고 필요한 자원을 한국에 제공할 것을 유엔 회원국에 권고한다’는 내용이었다.
6월 29일 도쿄에 주둔하고 있는 미 극동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가 전황 파악차 한국으로 날아와 한강 남쪽에서 전황을 살핀 뒤 지상군 투입이 필요하다는 보고서를 본국으로 타전했다. 트루먼이 6월 30일 오전, 미 2개 사단 투입을 결정함으로써 6·25전쟁은 국제전으로 비화했다. 가장 먼저 한국에 파견된 미군은 일본에 주둔하고 있는 제24사단 21연대였다. 제21연대 제1대대가 군용기로 부산에 도착한 것은 7월 1일 오전 8시 45분이었다. 최초의 미 지상군 부대였고 본격적인 참전의 시작이었다.
7월 7일 유엔 안보리가 유엔의 깃발 아래 미국이 통솔하는 통합사령부 설치에 관한 세 번째 결의안을 7 대 0으로 채택함에 따라 트루먼은 7월 8일 미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를 유엔 통합군사령관에 임명했다. 7월 14일 대전으로 피신한 이승만 대통령은 ‘현재와 같은 적대 상태가 지속되는 동안’이라는 단서조항을 붙여 ‘한국군에 대한 일체의 지휘권을 이양한다’는 이른바 ‘대전협정’을 맥아더에게 전달했다.
24사단의 주력부대는 경기 평택~안성선을 최초의 저지선으로 설정했으나 천안 일대의 사단 방어진지마저 단 하루 만에 붕괴되고 전의~조치원 방어선도 쉽게 무너졌다. 대전 사수에 총력을 기울였으나 결국에는 전투력의 절반 가까이를 잃고 사실상 붕괴되다시피 했다. 딘 사단장마저 포로가 되었다.
북한군 제6사단은 서해안을 따라 빠른 속도로 남하해 호남 지역 전체를 점령했다. 7월 25일에는 경남 하동을 거쳐 진주까지 점령했다. 미군은 북한군이 마산을 거쳐 부산으로 접근할 경우에 대비해 미 25사단을 마산 방어에 동원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1950년 7월 말 현재 유엔군은 경상도와 제주도를 제외한 한반도 전역을 북한군에 내주었다.

중공군 참전과 휴전

낙동강에 방어선을 친 국군과 유엔군은 한편으로는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반격작전을 준비했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고 9월 28일 서울을 탈환함으로써 북한군의 주 병참선은 차단되고 병력은 남북으로 양분되었다. 전세가 역전되자 10월 1일 국군이 38선을 넘고 10월 9일 유엔군이 뒤를 따랐다. 국군은 뒤이어 원산(10.10)과 평양(10.19)을 점령하고 10월 26일 압록강 초산에까지 도달했다. 곧 북한 전역을 장악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수십만 명의 중공군이 압록강을 넘어오면서 유엔군은 다시 수세로 내몰렸다. 중공의 참전은 맥아더 표현대로 ‘완전히 새로운 전쟁’이었다.
1951년 1월 4일 다시 서울을 내주는 1·4 후퇴가 시작되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평택~삼척선까지 망연자실 후퇴했다. 확전이냐 한국 포기냐의 갈림길에서 미군은 전쟁을 명예롭게 끝내기로 결론을 내렸다. ‘승리’ 대신 ‘휴전’을 선택한 것이다. 중국과 김일성 역시 피해를 감수하면서 전선을 남하시키기보다는 전쟁 전의 상태에서 휴전을 모색하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했다.
미 정부는 1951년 5월 38선을 기준으로 한 휴전을 공식 정책으로 확정했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북진 무력통일을 주장하며 휴전에 맹렬히 반대했다. 모든 전쟁 당사국들이 휴전에 동의하는 상황에서 이승만의 휴전 반대는 메아리 없는 고독한 외침이었다.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휴전회담이 시작되었다. 유엔군과 공산군 측은 11월 27일 “현재 쌍방간의 접촉선을 군사분계선으로 삼는다”는 원칙에 합의했다. 양측의 합의로 대규모 기동전은 멈췄으나 전쟁의 양상이 고지쟁탈전, 수색정찰전, 진지전으로 바뀌면서 사상자가 속출했다. 그러면서도 양측은 군사분계선 설정, 휴전 감시기구 구성 등에 대해서는 1952년 5월까지 합의를 도출했다. 다만 전쟁포로 문제만은 합의하지 못해 1952년 10월 8일 무기휴회에 들어갔다.
그런 가운데 한국전쟁의 조기 해결을 공약으로 내건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1953년 2월 미국의 새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전쟁 도발의 주요 당사자인 스탈린도 3월 5일 죽어 조기 종전을 바라는 분위기가 미소 양국 모두에서 고조되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휴전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여전히 높았다. 휴전 반대와 북진통일을 주장하는 대규모 군중시위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가운데 국회도 4월 21일 이승만의 북진통일을 지지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승만은 휴전조약 체결 전인 1953년 6월 18일 부산, 대구, 광주, 마산, 영천, 논산, 부평 등의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반공포로를 유엔군과 사전 상의 없이 일방적으로 전격 석방함으로써 얼마든지 휴전을 거부하고 그것을 파기할 의사와 능력이 있음을 미국에 확실히 보여주었다. 휴전협정의 체결을 무산시킬 수도 있는 반공포로 석방은 종전 후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에 대한 미국의 결단을 촉구하는 이승만의 승부수였다.
미국이 부랴부랴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약속하고 이승만도 휴전조약을 반대하지 않겠다고 화답함으로써 휴전조약은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비로소 체결되었다. 정전협정이 체결된 그날에도 양측은 협정이 발효되는 밤 10시까지 상대방을 향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밤 10시부터 72시간 이내에 현 전선에서 후방으로 2㎞ 물러나는 조치를 실행에 옮겼다. 3년 1개월 2일간을 끌며 250만 명의 남북한 한국인, 40만 명의 중공군, 3만 6,900여 명의 미군 등 모두 300만 명에 이르는 사망자를 낸 비극적인 전쟁이 ‘일시 중지’를 의미하는 ‘휴전’에 돌입한 것이다. 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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