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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서 칼럼] 용산어린이정원 기록관에서 열리고 있는‘미8군쇼 전시’를 보다[1]
‘미8군쇼 70년사 기록전’ 현장을 가다
2023년 06월 18일 (일) 23:50:56 박성서 webmaster@newsmaker.or.kr

2023년 5월부터 임시로 개방하는 ‘용산공원’. 이곳은 반환 직전까지 주한미군 기지로 사용되던 곳이다.

현재 이곳에는 일제강점기로 부터 해방 후 미군 주둔 그리고 반환 후 임시 개방까지, 120년의 기록전시 및 미군의 생활상, 그리고 ‘미군클럽’에서 태동했던 미8군쇼를 중심으로 우리나라 대중음악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기록관도 조성되어 있다, 이중 대중음악 역사기록관 전시는 필자가 맡았다.

▲ 용산어린이정원 기록관에서 열리고 있는 ‘미8군쇼 70년사’ 전시장 내부

우리나라 대중음악 제2의 르네상스 시대를 앞당겼던 미8군쇼, 다양한 장르의 음악과 많은 스타들을 배출한 미8군쇼는 ‘한국 속의 이방지대’였지만 우리 대중음악사의 거대한 흐름을 바꿔놓은 진원지이자 분수령이었다.

현재 K팝 한류의 원류로도 평가되고 있는 미8군쇼, 이 ‘기록으로 보는 미8군쇼 70년사 특별전’을 통해 그 의미를 되돌아본다. 미8군쇼가 우리나라 대중음악에 남긴 것은 무엇인가? 그 첫 번째.

글·사진 l 박성서 (음악평론가, 저널리스트)

용산어린이정원 기록관, ‘미8군쇼 전시’ 현장을 가다

120년 동안 일반인의 접근이 불가능한 ‘금단의 땅’으로 남아있던 서울 용산공원 일부가 ‘용산어린이정원’으로 다시 태어났다.

2023년 5월부터 임시로 개방된 ‘용산어린이정원’. 이곳은 주한미군부대 완전 반환 후 시민들에게 개방될 ‘용산공원’ 조성에 앞서, 이번 어린이날을 맞아 임시로 개방된 것.

120여 년 만에 국민의 품으로 돌아온 서울 용산 어린이정원. 현재 이곳의 기록관에서 '한국 대중음악의 산실' 역할을 하던 미8군쇼 70년사를 조명하는 뜻깊은 전시가 열리고 있다.

김시스터즈, 패티김, 윤복희, 한명숙, 현미, 최희준, 신중현, 키보이스, 장미화, 조용필 등 한국 가요 전성기를 열어젖힌 스타를 배출한 미8군쇼의 이모저모를 소개하는 자리다. 전시 구성은 필자가 맡았다.

6.25 한국전쟁과 함께 이 땅에 30여만 명의 미군이 주둔하던 1953년부터 베트남전쟁으로 미군 병력이 5만여 명으로 급격히 감축되던 1960년대 중반까지가 미8군쇼의 전성기이자 클라이막스. 이 미8군쇼가 우리나라 대중음악에 남긴 것은 무엇인가.

‘기록으로 보는 미8군쇼 70년사 특별전’의 생생한 기록과 증언을 통해 그 의미를 되돌아본다.

 

▲ 한창 전쟁 중이던 1951년, 피난지 부산의 병원선에서 박춘석 등 연주인들이 스윈밴드(스윙타임악단)을 조직해 UN군 부상병 위문공연 등을 함께 펼쳤다. 1951년 7월. 아래 사진은 피난지 부산에서의 현인 공연 장면

UN군 & 피난민을 위한 쇼, 6.25 전쟁터에서 꽃피우다

‘미8군쇼’는 통상 GI라고 부르는 주한미군을 대상으로 하는 무대다. 6.25 전쟁과 함께 한국에 주둔하고 있던 미 24사단을 확대해 창설한 ‘주한미제8군(駐韓美第八軍)’.

전국 각지의 미군 주둔 캠프 내 미군클럽, ‘한국 속 이방지대’인 이곳이 바로 미8군쇼의 주무대였다.

6.25 전쟁이 발발한 1950년부터 미국 본토 USO(United Service Organizations, 미국위문협회)에서 보낸 공연단이 내한, UN군을 위한 위문공연을 펼쳤다. 대표적인 스타가 ‘세기의 연인’ 마릴린 먼로(Marilyn Monroe).

1954년 겨울, 군용잠바를 입고 대구 동촌비행장에 도착한 먼로를 보기 위해 내외신 기자들과 UN군이 가득 몰려들었다.

그렇듯 젊은 군인들에게 춤과 노래, 오락과 쇼는 절대 필수조건이라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보여준 이 사례가 그렇듯 미8군쇼는 주한미군사령부의 주요정책이기도 했다.

아울러 6.25 전쟁과 함께 창설된 대한민국 육군군악대, 해군군악대, 공군군악대 대원들도 대구와 부산에 주둔하면서 낮에는 군악대원으로 공연과 시가행진을, 밤에는 스윙밴드를 조직해 UN군 전용클럽에서 활동했다.

부산에 피란 온 연주인들도 악단을 조직해 미군 후생부에 등록한 뒤 무대에 섰다. 미군적십자사에서는 악보집을 제작해 배포했다. 당시 일본 오키나와에 주둔하다 한국으로 온 미군들도 많았기 때문에 ‘In The Mood', 'Danny boy’ 등 재즈나 팝 외에도 ‘China Night’나 ‘도쿄 부기’ 같은 일본노래들도 요청이 쇄도했다.

당시 부산의 UN군 전용클럽 무대에 섰던 연주인들은 김광수, 김동진, 김인배, 박춘석, 손석우, 송민영, 엄토미 등을 비롯해 대구의 김호길, 그리고 가수 박단마, 송민도, 현인 등이 있었다. UN군 위문공연과 함께 부산시민과 피난민들을 위한 공연도 끊이지 않았다. ‘I Went To Your Wedding(눈물의 왈츠)’, ‘夢中人(꿈속의 사랑)’, ‘아마다미야’ 같은 외국곡들도 우리말로 번안되어 불리기 시작했다.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시레이션과 통조림 깡통으로 판잣집을 엮어 살아야 했던 만큼 시름을 달래줄 위안거리가 더욱 필요한 시기이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지치고 고달픈 삶의 현장에서 쇼는 더욱 활발히 꽃피우기 시작했다.

 

▲ 미8군쇼 활동 당시 NBC악단(단장 이준영)과 공연하는 김시스터즈. (사진 2) 블랙 캐츠쇼 무대에 선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의 가수 한명숙. (사진 3) First Highters쇼에서 메인 가수로 활동할 당시의 현미. (사진 4) 1958년, 미8군쇼단이 모여 탄생시킨 ‘KEAA(화양)’ 창립기념 사진. 안찬옥 대표를 비롯해 베니김(김영순), 김일광, 장덕원, 박용준, 가수 남인수 등의 모습이 보인다.

‘달러박스’로 부상한 1950년대 미8군쇼단과 연예인들

낯선 언어와 문화의 이방지대. 1953년 7월, 휴전과 함께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미8군쇼단은 전국 각지의 미군 캠프 내 미군 클럽을 중심으로 활약했다.

연주와 노래, 댄스, 코미디 등 버라이어티쇼를 펼쳤던 미8군쇼단의 멤버 구성은 대략 연주인(5~7명). 가수(2~3명), 무용수(3~5명), 그리고 MC, 음향, 조명, 매니저 등 17인 이내였다. 이 인원은 미군 트럭 한 대로 다 함께 이동할 수 있는 적정 인원으로 미8군 측의 지침이기도 했다.

쇼단은 주로 미군 부대에서 보낸 군용트럭으로 이동했는데 늦은 시간 공연을 마치면 통행금지로 인해 미군 측이 다시 출연자 전원을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초창기에는 개런티를 화폐 대신 미군 생필품으로 받아 단장이 남대문시장 등에서 현금으로 교환, 단원들에게 나눠주었다고 전해지기도 하지만 점차 규모가 커지면서 미8군쇼단은 말 그대로 ‘달러박스’로 부상한다. 1960년도를 기준으로 미8군쇼단의 한 해 총수입은 이미 1백만 달러를 넘어서고 있었다.

아울러 미8군쇼단을 체계적으로 운영, 관리하기 위해 1958년경부터 상공부 등록허가제로 바뀐다. 당시 쇼 공급회사의 허가 조건은 미8군쇼 연예인 명단이 수록된 공연자 수첩에 이름이 올려진 단원들로 구성된 쇼단이 다섯 개 이상이어야 했다.

따라서 각각 활동하던 쇼단들이 모여 ‘KEAA(Korea Entertainment Agency Association, 한국연예대행연합회)’를 탄생시킨다. 이 KEAA가 바로 미8군쇼 공급회사의 대표 격이자 5백 여 명의 단원이 소속되어있던 화양(한국흥행주식회사)이다. 아울러 유니버샬을 비롯해 고려, 공영, 극동, 동일, 대영, 삼진, 아주(그밖에 삼양, 신일, 한국) 등의 미8군쇼 공급대행업체가 잇달아 설립되었다.

미8군쇼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1960년대 당시 대행업체 소속 쇼단은 20여 개, 그리고 40여 개의 밴드가 활약하고 있었다.

당시 활동하던 쇼단으로는 베니김이 이끌었던 베니쇼, 스페셜 A(더블A)급의 에이원쇼(김희갑), 탑드로워쇼(최태원)를 비롯해 뉴스타쇼(김인배), 뉴요커쇼, 블랙아이스쇼(박성원), 라스베가스쇼, 세븐스타쇼, 쇼오브쇼(박선길), 스프링 버라이어티쇼(최태국), 실버스타쇼(아준영), 썸머타임쇼(최상용), 웨스턴 주빌리쇼(김동석), 어라운드 더 월드쇼(배상하), 에이 트레인쇼(강철구), NBC쇼(이준영), 20세기쇼(김일광), 탑스&팝스쇼, 토미아리오쇼(송민영), 파피쇼(김안영), 헐리우드쇼(이봉조) 등이었다.

 

▲ 용산어린이정원 기록관에서 열리고 있는 ‘미8군쇼 70년사’ 전시장

꿈의 무대이자 스타의 산실이었던 미8군쇼 무대에 서기 위해서는 미군 부대에서 파견된 쇼 관계자들의 직접 심사로 실시하던 오디션을 거쳐야 했다.

전체 쇼의 흐름과 구성, 그리고 편곡은 물론 영어까지 심사 대상이었던 이 결과에 따라 스페셜A(AA), A, B, C클래스로 등급이 매겨졌다. D는 탈락.

3개월마다 한 번씩 엄격히 실시되던 이 분기별 오디션 결과에 따라 지급액이 달랐다. ‘원쇼(One show, 1회 공연)’를 기준으로 스페셜 A는 140불, A는 120불, B는 100불, C는 80불 정도.

인기 척도의 바로미터였던 이 등급에 따라 서는 무대도 달라졌다. 미군클럽은 계급에 따라 장교들이 출입하는 장교클럽(Officers club), 하사관들이 이용하는 하사관클럽(NCO club), 일반 병들이 출입할 수 있는 사병클럽(EM club), 그리고 가족들이 이용할 수 있는 서비스클럽 등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클럽 분위기에 따라 자연스럽게 백인과 흑인이 주로 이용하는 클럽으로 나눠지기도 했다. 따라서 쇼단은 클럽의 성격이나 분위기에 따라 쇼의 구성, 음악 등을 바꿔가며 적응해야 했다.

분기마다 주기적으로 실시되던 이 오디션을 거치면서 점차 다양해지는 레퍼토리만큼이나 미8군 연예인들의 실력은 나날이 향상되었다.

최신곡들을 소화할수록 보다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늘 AFKN(현 AFN Korea)의 ‘아메리칸 탑40’에 귀 기울였고 미군 부대의 주크박스(Juke Box) 등을 통해 악보를 채보하고 멜로디를 익혔다.

공개 오디션 현장에서 펼쳐지는 쇼의 구성이나 음악성, 테크닉 하나하나는 서로의 비교 대상이자 곧 연구 대상이었다. 동시에 다른 단장이나 마스터의 눈에 띌 수 있는 캐스팅 기회의 장이기도 했다.

실전을 방불케 하는 오디션, 이 엄격한 시스템이 결과적으로 미8군쇼가 성장하는 힘의 원천이자 경쟁력이었다.

이 오디션은 한 번만 통과하면 되는 게 아니라 3개월마다 재심사를 받아야할 정도로 엄격했다. 이에 현미, 김희갑, 신중현, 키보이스, 윤복희 등 A 등급을 꾸준히 유지한 가수들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그야말로 '프로듀스 101'이나 '보이즈플래닛' 같은 K팝 오디션 프로그램 못지않은 시스템이었다.

 

▲ ‘짹키(재키)’라는 이름으로 활동할 당시 신중현 밴드의 공연 전단지. 신중현, 장미화, 전미라, 권순근, 한영현, 서정길 등 출연진이 눈에 띈다.

대중음악의 제2 개화기, 미8군쇼로 인해 르네상스시대 열려

미8군쇼는 이후 일반무대와 접목되며 우리나라 대중음악의 르네상스 시대를 열었다.

이 새로운 물결은 서구 문물이 처음 들어오던 1920년대 개화기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말 그대로 ‘갓 쓰고 자전거 타던’ 풍경이 그렇듯 미8군쇼 역시 영어를 전혀 모르면서도 한글로 토를 달아 부르는 등 이미테이션(copy)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이 ‘태생적 이미테이션’이라는 한계를 딛고 점차 실력을 쌓은 미8군쇼 연예인들은 이후 음반, 방송, 공연 등을 통해 우리 대중음악계 전면에 등장하면서 대중음악계에 일대 혁신을 몰고 왔다.

이봉조, 김인배, 김희갑, 신중현, 이동기 등 연주인들이 대거 레코딩에 참여함과 동시에 편곡을 맡으면서 새로운 리듬을 우리 가요에 접목, 다양한 장르로 대중음악을 리드했고 가수들 또한 뛰어난 가창력과 다양한 창법으로 가요계 전면에 부상, 인기를 구가했다.

‘미8군쇼의 꽃’이라 할 수 있는 탭댄서들의 활약 또한 주목할만하다. 캉캉과 탭댄스로 대표되는 미8군쇼의 경쾌한 춤은 50년대 맘보, 부기우기, 차차차를 거쳐 60년대 ‘꽈배기춤’이라 불리던 트위스트로 이어지며 우리 사회에 사교춤 붐을 몰고 왔다.

공연도 새로운 시대를 맞이한다. 미8군쇼 이전 50년대까지는 1부 악극, 2부 버라이어티쇼로 구성되었던 것이 미8군쇼 형태로 전환, 연극은 없어지고 쇼 위주로 바뀐다.
이렇듯 미8군쇼에서 시작된 변화의 물결은 기존 우리 대중음악의 형태를 일순간에 바꾸며 새로운 형상을 완성시키는 틀, 즉 ‘거푸집(Mould)’을 깨고나와 현 ‘세계 속 한류’를 향해 빠르게 진화하고 있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미국을 필두로 한 서구권 세계 음악의 흐름이 우리 가요계로 유입됐다. 현재 전 세계에서 사랑받는 K팝 한류의 원류가 미8군쇼에 있다는 말이 그래서 과장이 아닌 것이다.

실제로 초창기 어눌한 영어로 미국 음악 모방에서 출발한 미8군쇼는 차차 미군 부대를 넘어 우리 대중음악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출연 가수들이 남는 시간을 활용해 TV 방송, 음반 취입, 일반 무대 공연을 통해 일반 대중을 상대로도 활약했기 때문이다. 특히 1961년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한명숙)의 대히트는 미8군 가수들이 일반 무대로 대거 진입하게 된 일대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1965년, 베트남 전쟁으로 주한미군의 규모가 급격하게 축소되면서 미8군쇼도 쇠퇴했다. 과거의 영광은 사라졌어도 미8군쇼가 대한민국 대중음악의 판도를 바꿔 놓은 중요한 터닝 포인트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때문에 70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할 가치가 있다. (계속)

▲ 전시장을 찾은 ‘미8군쇼 & 그룹사운드 1세대 모임 예우회’ 회원들. 사진 앞줄 좌측부터 윤항기(키보이스), 장미화, 김광정(키브라더스), 조갑출(죠커스, 25시), 정명용(키브라더스). 뒷줄 좌측부터 윤신호 김혜정(검은나비), 박성서, 유재만, 김학우.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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