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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형의 100년의 기록 100년의 교훈
2023년 05월 16일 (화) 12:24:23 김정형 webmaster@newsmaker.or.kr

메리 퀀트의 죽음을 계기로 살펴본 미니스커트의 등장과 유행

‘미니스커트의 아이콘’으로 불렸던 영국 디자이너 메리 퀀트가 2023년 4월 13일 영면했다. 그의 죽음을 계기로 미니스커트가 어떻게 탄생하고 어떤 과정을 거쳐 세계적으로 유행했는지를 살펴본다.

미니스커트 진원지는 퀀트와 쿠레주

유사 이래 여성의 발목을 덮었던 치마 밑단이 정강이 중간까지 오른 것은 1920년대 들어서였다. 그래도 여성들이 무릎을 드러내는 치마를 입으려면 수십년을 기다려야 했다. 그때까지 무릎을 가리지 않은 여성들은 정숙하지 않은 여인으로 손가락질을 받았다. 무릎이 보일 정도의 짧은 치마가 등장한 것은 1950년대 중반이었다. 1956년 개봉한 영화 ‘금단의 행성’에서 여배우가 짧은 치마를 입고나온 것이 미니스커트의 첫 사례로 꼽힌다. 메리 퀀트(1930~2023)라는 20대 여성이 영국 런던에 부티크를 열어 장차 ‘미니스커트의 아이콘’이 될 여정을 시작한 것도 1950년대 중반이었다.
퀀트는 영국 런던의 교사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침대보를 잘라 옷을 만들 정도로 손재주가 있었고 “물려받은 옷은 나답지 않다”며 거부할 정도로 개성이 넘쳤다. 고교 졸업 후 대학에서 패션 디자인을 전공하려 했으나 “패션의 미래가 깜깜하다”는 부모의 반대에 밀려 골드스미스 예술학교에서 미술을 전공했다. 퀀트는 예술학교 졸업 후 취업한 모자가게에서 모자를 팔거나 만들었다. 그가 만든 모자는 다음날이면 팔려나갈 정도로 인기를 높았다.
그러다가 대학에서 만난 남자친구가 물려받은 유산으로 구입한 런던 첼시 지역의 킹스로드 부근 3층 건물 1층에 ‘바자(Bazaar)’라는 이름의 부티크를 1955년 오픈했다. 2년 후 결혼하게 될 남자친구는 지하에서 레스토랑을 운영했다. 오픈 당시의 ‘바자’는 직접 옷을 만들어 파는 가게가 아니라 도매상에서 옷을 사다가 파는 소매가게였다. 그런데도 퀀트의 패션 감각과 기발한 쇼윈도 디스플레이 덕분에 젊은 여성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반대로 중절모를 쓴 도시의 신사들은 쇼윈도에 걸린 옷들이 부도덕하다거나 역겹다며 소란을 피웠다. 더 큰 문제는 퀀트가 원하는 스타일의 옷을 의류 제조업자들이 만들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퀀트는 감각적으로 튀는 옷을 원했지만 그런 옷을 만드는 곳이 없었다.
그 무렵, 패션은 프랑스 파리의 고급 맞춤복 디자이너가 지배했다. 그들이 만든 비싼 옷들은 그 해 세계 패션의 트랜드가 되었고 젊은 여성들은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아도 트랜드를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퀀트는 값싸고 활동하기 편한 원단으로 자신이 원하는 스타일의 옷을 직접 만들어 파는 것으로 기성 패션계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당시 퀀트가 표방한 것은 ‘편안함’과 ‘자유로움’이었다. 젊은 여성들 대부분이 좋아하는 밝고 개성적인 옷과 그들이 맘 편히 살 수 있는 합리적인 가격을 추구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옷들이 바자의 쇼윈도에 걸리면 젊은 여성들이 바로 달려들어 구매했다. 퀀트의 스타일에 반해버린 여성들이 늘어나면서 퀀트는 청소년 패션 모드의 중요한 인물로 부상했다. 패션 관련 잡지에서도 관심을 보이고 외국에서도 ‘바자’의 옷들을 구입했다.

“도덕성을 싹둑 잘라낸 옷” 비난도 받아

▲ 메리 퀀트 자서전 표지

그 무렵 젊은 여성들의 치마 길이가 점점 더 짧아지고 퀀트가 디자인한 치마도 그들의 요구에 맞춰 길이가 짧아졌다. 어느새 바자가 위치한 킹스로드에는 퀀트의 미니스커트를 입은 젊은 여성들로 가득 찼고, 퀀트 스타일은 ‘첼시 룩’, 런던 룩‘으로 불리며 젊은 여성들의 패션 유행을 주도했다. 치마의 밑단이 점점 높아져 1960년대 초반에 '미니스커트'라는 용어가 언론에 등장한 가운데 퀀트도 무릎 위로 더욱 올라간 짧은 스커트를 선보였다. 1964년 봄 파리에서도 프랑스 디자이너 앙드레 쿠레주(1923~2016)가 짧은 스커트를 특징으로 하는 꾸뛰르 컬렉션을 열어 눈길을 끌었다. 쿠레주는 ‘다리를 길게 늘리자’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모델들에게 무릎이 보이는 미니스커트를 입히고 하얀 부츠를 신겨 무대 위를 걷도록 한 춘하복 패션쇼를 열었다.
그래도 그 시절 여성들이 무릎 위 허벅지를 드러낸다는 것은 큰 모험이었다. “저질 디자인”이라는 항의가 빗발치고 “도덕성을 싹둑 잘라낸 옷”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무릎을 살짝 덮는 치마라인을 ‘가장 우아한 선’으로 고집했던 세계적인 디자이너 코코 샤넬조차 “무릎 노출은 흉측하다”며 반대하고 여배우 소피아 로렌은 “여성의 신비를 파괴했다”며 공개적으로 거부감을 드러냈다. “천박하고 허울만 넘친다”며 혹평하는 디자이너도 있었다. 그러나 퀀트는 “아름다움은 자랑스럽게 공개되어야 한다”는 신념의 소유자답게 미니스커트에 대한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젊은 여성들도 “엄마처럼 입기 싫다”며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그러다가 미니스커트를 비난하던 목소리가 서서히 잦아들면서 미니스커트는 영국과 프랑스를 거쳐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치마 밑단은 이후 더욱 높아져 1966년에는 허벅지까지 드러나는 치마를 입은 패션 모델이 등장했다. 독특한 의상을 선보인 퀀트의 ‘바자’는 서서히 ‘스윙잉 식스티즈’(활기찬 60년대·Swinging sisxties)의 심장이 되었다. 퀀트는 1967년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이 시대에 기계가 아닌 손으로 만든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발언으로 드라마틱한 패션을 추구한다면서 끝 모르게 가격을 올리는 고급 패션계를 저격했다.
퀀트는 미니스커트에 이어 핫팬츠도 유행시켰다. 훗날 인터뷰에서 “미니스커트와 핫팬츠는 맥시스커트(발목까지 내려오는 긴 치마)에 대한 반감에서 나왔다. 1950년대 등장한 맥시스커트가 진부하게 느껴져 그 스커트의 천을 토막 내 핫팬츠와 미니스커트를 만들었다. 코코 샤넬은 여성의 다리가 못생겼다며 미니스커트를 싫어했지만 나는 여성의 다리가 멋있다고 생각했다”며 자신의 미니스커트 철학을 드러냈다. 문제는 미니스커트 아래로 맨다리를 훤히 내보이는 것이 여전히 불편한 시대라는 사실이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퀀트가 개발한 것이 타이즈였다. 미니스커트에 항상 따르던 골칫거리가 타이즈를 통해 해결되면서 타이즈는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퀀트는 발랄함을 더하기 위해 생동감 있는 색깔을 사용했다.
패션의 변방이었던 런던은 퀀트 덕분에 전성기를 맞았다. 바자의 옷들은 ‘메리 퀀트’라는 이름의 브랜드로 탄생했다. 1966년 진출한 화장품에도 ‘메리 퀀트’ 브랜드를 사용했다. ‘미니스커트’의 어원은 ‘극소’라는 뜻을 지닌 ‘미니멈’에서 따왔다는 설이 일반적이지만 퀀트는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던 앙증맞고 깜찍한 초소형 승용차 ‘미니(Mini)’에서 따왔다고 주장했다. 사실이든 사실이 아니든 광고효과를 톡톡히 본 자동차 회사 로버에서는 ‘미니 메리 퀀트 에디션’을 출시하는 것으로 퀀트에게 감사를 표시했다.

미니스커트 원조 둘러싸고 벌어진 ‘미니 논쟁’

퀀트와 쿠레주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미니스커트를 선보이자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누가 ‘원조’인가를 둘러싼 ‘미니 논쟁’이 벌어졌다. 양국 국민들까지 가세해 신경전을 벌였다. 쿠레주는 “내가 미니를 발명한 사람이다. 메리 퀀트는 그 아이디어를 상업화했을 뿐이었다”라고 주장하고, 퀀트는 “설사 쿠레주가 처음으로 미니스커트를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어느 누구도 그의 미니스커트를 입지 않았다”며 반박했다. 그러면서 “미니스커트를 발명한 것은 나도 쿠레주도 아니며, 진정한 발명가들은 그것을 입었던 거리의 소녀들이었다.”고 쿠레주의 주장을 일축했다. 논쟁에 대해 전문가들은 미니스커트의 창시자가 누구인지는 논란이 있지만, 퀀트가 세계적으로 붐을 일으키고 유행시킨 점은 분명하다고 말한다. 사실 미니스커트가 새로운 별명과 발견이 아니고 시대적 흐름이었기 때문에 누가 먼저 시작했느냐를 따지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기도 하다. 분명한 것은 미니스커트를 대중적으로 유행시킨 장본인이 메리 퀀트라는 사실이었다.
퀀트는 미니스커트를 해외에 많이 수출해 불경기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던 영국 경제에 큰 도움을 준 공로를 인정받아 1966년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대영제국훈장(OBE)을 받았다. 그때도 미니스커트를 입고 버킹엄 궁전에 들어가 화제가 되었다. 퀀트의 디자인은 개점 후 10년도 안돼 영국에 150개 매장, 미국에 320개 매장에 입점하고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 캐나다는 물론 아프리카 등지에도 매장을 열어 세계적인 브랜드로 각광을 받았다. 바자는 개점 후 14년이 지난 1969년에 문을 닫았다. 그 사이 전 세계적으로 팔려나간 퀀트 브랜드는 700만 벌이나 되었다. 퀀트 화장품도 1970년대에 쇠퇴했지만 1984년 일본에서 라이선스를 받아 부활했다. 파리 패션계가 전 세계의 유행을 주도하고 있을 때, 파리 밖에서 독창적인 스타일을 이끌었던 메리 퀀트는 그 시절 영국 패션계의 자부심이었다.

트위기는 미니스커트의 전도사, 윤복희는 한국 미니스커트의 유행의 선도자

퀀트와 쿠레주가 미니스커트 열풍의 진원지였다면 영국 모델 레슬리 트위기(1949~ )는 미니스커트의 전도사였다. 고교를 졸업하고 런던의 미용실에서 보조 업무를 하던 트위기가 일약 스타덤에 오른 것은 17살 때이던 1966년이었다. 한 유명 미용실이 머리를 짧게 자르고 염색한 트위기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미용실에 사진을 걸었는데 그것을 본 영국 일간지 ‘데일리 익스프레스’지가 트위기의 사진과 함께 ‘1966년의 얼굴(The Face of 66)’ 제목의 기사를 싣고, 뒤이어 세계적으로 유명한 패션잡지 ‘보그’지가 그를 표지모델로 등장시키면서 트위기 열풍이 시작되었다.
트위기는 모델로서는 작은 키에 빼빼 말랐다. 키 168㎝, 몸무게 41㎏, 허리둘레 22인치였다. 워낙 말라 본명(레슬리 혼비) 대신 ‘잔가지처럼 연약하다’는 뜻의 ‘트위기(Twiggy)’라는 별명을 얻었다. 트위기는 미니스커트와 함께 자신의 숏 헤어 스타일인 ‘트위기 컷’까지 유행시켜 전 세계에 트위기 선풍을 불러일으켰다. 그녀의 등장은 단순한 유행을 넘어서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다. 긴 머리에 건강한 몸매를 지향했던 당시의 여성들은 모두 ‘트위기스러운’ 모습을 만들기 시작했다.
소년같은 숏컷 헤어스타일, 독특한 눈화장, 각선미를 강조하는 미니스커트, 그녀만의 개성이 드러나는 포즈까지 트위기는 트위기 컷, 트위기 메이크업, 트위기 룩 등 패션과 뷰티계에서 하나의 장르를 만들어내면서 영국 패션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1967년 ‘트위기 바비 인형’의 실제 모델이 되기도 했다. 이후 트위기는 프랑스, 일본, 미국 등에서도 활동했으나 “평생 옷걸이로 살 수 없다”며 1970년 돌연 모델을 그만뒀다. 이후 배우, 가수, 방송인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
우리나라 미니스커트의 선두 주자는 가수 윤복희(1946~ )였다. 1967년 1월, 4년 동안 해외활동을 하다가 휴가차 귀국한 윤복희가 미니스커트를 입고 거리를 활보하는 모습은 숱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흔히 윤복희가 귀국할 때부터 미니스커트를 입고 비행기에서 내린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윤복희 말에 따르면 귀국할 당시는 겨울이어서 털 코트에 장화를 신고 있었다. 또 미니스커트를 입고 비행기에서 내리는 사진이 그때 사진인 것처럼 알려져 있으나 당시는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이었고 공항에 새벽에 도착했기 때문에 사진을 찍은 사람이 없었다고 했다. 그럼에도 윤복희는 데뷔앨범 재킷을 비롯한 각종 행사 사진에서 미니스커트를 입고 등장한 사실이 확인되기 때문에 한국에 미니스커트를 유행시킨 선도자인 것은 분명하다.
‘빚어낸 다리’, ‘한국의 트위기’로 불리며 윤복희가 늘씬한 다리와 초미니의 경쾌한 차림으로 TV와 신문지상에 연일 오르내리고 있을 때, 미국 유학시절 미니의 유행을 목격한 디자이너 박윤정이 미니스커트를 주제로 한 패션쇼를 열었다. 1967년 3월 30일 세종호텔에서 연 작품발표회에 윤복희를 포함 미니스커트를 입은 다수의 모델을 등장시켜 미니스커트의 상품화에 시동을 건 것이다. 미니스커트 열풍은 대학의 캠퍼스를 벗어나 순식간에 전국의 거리를 휩쓸었다.
그러기를 수년여. 박정희 유신정권이 1973년 2월 ‘경범죄 처벌법’을 개정한 뒤 미풍양속을 명분으로 삼아 미니스커트를 단속하기 시작했다. 시행 첫날인 1973년 3월 11일 하루 동안만 전국에서 과다노출로 72건이 적발되었다. 경찰이 직접 줄자를 들고 다니며 무릎 위 20㎝ 이상이면 무조건 체포해 즉심에 넘기자 여성들이 직접 경찰에게 옷을 갖고 와 “이 정도면 어떠냐”고 묻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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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하, 가슴과 생활로 조선을 사랑한 아사카와 다쿠미·노리타카 형제

2023년 4월 4일 서울 중랑구 망우리 묘지 내에 있는 한 무덤 앞에서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의 92번째 기일을 맞아 추모식이 열렸다. 고인은 일제시대 때 조선총독부 산림과 직원으로 일하면서 한반도 조림(造林)에 앞장서고, 형 노리다카와 함께 조선백자 등 미술품 3000여 점을 수집해 경복궁에 세운 조선민족미술관에 기증했다. 봄비가 내렸는데도 추모식에 한국과 일본 인사 50여 명이 참석했다. 아사카와 다쿠미와 노리타카 형제가 어떤 인물인지를 알아본다.
 
다쿠미, 17년간 조선에서 살다 조선의 흙이 돼

일본의 민예연구가 야나기 무네요시가 머리와 지성으로 조선을 사랑했다면 아사카와 다쿠미(1891~1931)는 가슴과 생활로 조선을 사랑한 일본인이다. 다쿠미는 1931년 40살 나이로 요절할 때까지 17년간 조선에서 조선인처럼 살다 조선 땅에 묻혀 조선의 흙이 되었다. 그는 우리 자신이 전통미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알지 못할 때 우리보다 먼저 몸과 마음으로 조선의 미를 상찬했다.
다쿠미가 조선 땅을 처음 밟은 것은 23살이던 1914년 5월이었다. 당시 서울에는 1년 전 소학교 교사로 부임한 형 아사카와 노리타카(1884~1964)가 있었다. 형제는 야마나시현 키타코마군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감리교회에 다니고 조선으로 건너와서도 서울 회현동 경성감리교회에 다녔다. 형 노리타카는 1906년 현립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심상소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조각을 배우다가 조선의 공예품에 이끌려 서울의 심상소학교 교사를 자청해 1913년 5월 남대문심상소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조선 땅에서 그가 먼저 달려간 곳은 고려청자와 조선백자가 있는 창경궁의 이왕직 박물관이었다.

▲ 아사카와 다쿠미

조선백자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그는 틈틈이 백자를 사 모으며 조선 도자기를 연구했다. 방학 때는 도쿄로 건너가 조각을 배웠다. 1914년 9월 야나기 무네요시의 도쿄 집을 찾아가 조선백자 ‘청화백자추초문각호’를 선물한 것도 야나기가 보관하고 있던 로댕의 조각품을 보기 위해서였다. 지금 일본 민예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백자 항아리는 야나기가 조선을 방문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있다. 노리타카는 1919년 4월 교사를 그만두고 일본으로 건너가 조각에 몰두했다.
동생 다쿠미는 일본에서 1909년 현립농림학교를 졸업하고 국유림을 관리하는 관청에 근무하다가 1914년 5월, 형이 있는 조선으로 건너왔다. 다쿠미는 1914년 7월 조선총독부 산림과 산하 임업시험소(현 국립산림과학원)의 고용원으로 취직, 조선산 수목과 외국산 수종의 양묘 시험 재배에 종사했다. 이후 조선에서 눈을 감는 마지막 날까지 17년 동안 조선의 산림녹화 사업에 종사하면서 조선 낙엽송의 양묘(1916년)를 성공시키고 잘 자라지 않는 종자를 노천에 매장하는 방법으로 싹을 틔우는 ‘노천매장법’을 확립하는 성과를 거뒀다. 당시 조선 잣나무는 2년간 길러야 양묘에 성공할 수 있었지만 다쿠미가 고안한 양묘법 덕분에 1년으로 단축되었고 지금도 이 방법이 사용되고 있다. ‘싸리나무의 종류’, ‘민둥산 이용에 대해’ 등 여러 편의 글과 논문도 관련 회보에 발표했다.

형제는 가슴과 생활로 조선을 사랑한 일본인

다쿠미는 “조선 도자기의 신”이란 평을 들었던 형 노리타카의 영향을 받아 조선의 도자와 공예에도 관심이 많았다. 1916년 8월 조선을 처음 방문한 야나기 무네요시와 함께 조선의 골동품 가게를 뒤지며 안목을 키웠다. 조선의 전통 가마터도 직접 방문해 ‘조선 가마터 유적 조사 경과보고서’를 작성했다. 1920년 12월에는 조선민족미술관을 건립하자고 야나기와 뜻을 모았다. 야나기는 장소 확보와 자금 조달을 맡고 다쿠미는 전시품의 수집·관리 등의 실무를 맡았다.
야나기는 자신이 동인으로 참여하고 있는 일본의 문학예술잡지 ‘시라카바(白樺)’지 1921년 1월호에 ‘조선민족미술관의 건립에 대해’란 호소문을 발표해 미술관 건립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야나기의 일본 친구들은 물론 도쿄에서 조선인 유학생 운동을 주도하던 백남훈, 김준연, 백관수 등이 기부금을 보내왔다. 야나기의 아내이면서 유명 성악가인 가네코는 1921년 5월 조선에서 개최한 음악회 수입을 기부했다. 다쿠미 역시 넉넉하지 못한 살림에도 사재를 털어 미술관을 지원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도자기, 고미술, 민예품 등을 전시하는 아시아 최초의 공예미술관인 ‘조선민족미술관’이 1924년 4월 9일 경복궁 집경당 안에서 개관했다.
다쿠미는 생전에 ‘조선의 소반’(1929.3), 사후에 ‘조선도자명고’(1931.9) 등 2권의 저서를 냈다. ‘조선의 소반’에서는 한국 문화가 중국의 아류라는 일본인들 주장에 맞서 조선 사람은 실내에서 의자를 사용하지 않고 바닥에 앉아서 생활을 하는 까닭에 상(床)에 관해서는 중국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기술해 조선 문화의 독자성을 변론했다. 다쿠미가 세상을 떠난지 5개월 뒤에 출간된 ‘조선도자명고’는 조선 전체에 산재해 있는 가마터를 꿸 정도로 전국을 뒤지고 다닌 뒤 얻은 성과였다. 도자기를 만드는 도구와 원료, 가마터 조사 등을 세밀하게 수록해 지금까지도 우리 공예와 도자를 연구하는 사람에게는 보물 같은 책으로 평가받고 있다.
다쿠미는 조선말을 하고 바지저고리 차림에 망건을 쓰고 외출하는 등 진정으로 조선인과 하나가 되려고 했다. 집은 온돌방이었고 방안에는 조선 장롱을 두고 살았다. 조선 음식을 좋아해서 비빔밥도 만들 줄 알고 ‘조선의 김치’라는 논문도 썼다. 술도 막걸리만 마셨다. 마음도 따뜻해 남자 걸인을 만나면 면사무소로 데리고 가 무언가 일을 찾아주었고 여자 걸인을 만나면 주머니에 있는 돈을 모두 꺼내 주었다. 넉넉지 않는 형편에 몇몇 학생에게는 장학금도 주었다.

“죽어도 조선에 있을 것이니 조선식으로 장례 지내 달라”

다쿠미는 1931년 2월부터 한 달간 조선 각지를 돌아다니며 묘목 기르는 법을 가르쳤다. 무리했는지 서울로 돌아와 3월 27일 급성 폐렴으로 자리에 눕더니 결국 1931년 4월 2일 오후 6시 40세 나이로 순직했다. 숨을 거두기 전 “나는 죽어도 조선에 있을 것이니 조선식으로 장례를 지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유언에 따라 흰색 바지저고리 차림의 조선 옷을 입은 채 이문리 묘지에 안장되었다. 야나기는 일본에서 소식을 듣고 달려와 통곡했다. 추도문에는 “그는 진심으로 조선을 사랑하고 조선인을 사랑했다. 지금까지 그만큼 도덕적인 성실함을 지닌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썼다. 경성제대의 한 교수는 추도문을 경성일보에 5회 연재하는 것으로 애도했다. 아내와 딸은 다쿠미가 죽은 뒤에도 조선에 살다가 광복 후 일본으로 돌아갔다.
다쿠미가 죽은 지 11년이 지난 1942년 7월 이문리 묘지 근처에 새로 도로가 나게 되어 다쿠미의 묘는 교외 망우리 공동묘지로 옮겨졌다. 해방 후에는 묘를 돌보는 이가 없어 덤불로 가려지고 묘표도 넘어져 뒹굴었다. 그러자 한국임업시험장 옛 동료들이 안타깝게 생각해 1964년 6월 묘를 복원하고 수복제를 지냈다. 1984년 8월에는 “한국의 산과 민예를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속에 살다 간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라고 새긴 추모비가 세워졌다.
한편 조각을 배우기 위해 1919년 일본으로 건너간 노리타카는 일본의 미술전에서 입선하는 등 나름대로 조각에서 일정 지위를 확보했으나 조각계의 파벌 싸움이 싫어 1922년 4월 조선으로 돌아와 조선의 도자사를 본격적으로 연구했다. ‘시라카바’지 1922년 9월호에 발표한 ‘조선 도자기의 가치 및 변천에 관해’ 제목의 논문은 그 최초의 성과였다. 이후에도 조선 다완(茶碗)의 산지를 확인하기 위해 전국의 가마터를 조사하고 세종실록, 경국대전, 동국여지승람 등의 고문헌을 뒤져 조선 도자기의 산지들을 찾아냈다. 그렇게 찾아낸 도요지가 전국에 걸쳐 678곳이나 되었다.
그때마다 도편(陶片)의 채집지, 추정 연대, 형상 등을 꼼꼼히 기록하고 조사 시기와 유적의 수 등도 빠짐없이 정리해 조선 도자사에 중요한 자료로 남겼다. 1934년 7월에는 조선 도자기전을 도쿄에서 열어 그간의 조선 도자기 연구를 집대성한 결과물을 선보였다. 현대 한국 도예계의 거장인 지순탁이 도예에 뜻을 두는 계기를 만들어준 사람도 노리타카였다. 도자사를 연구하면서도 조각과 회화에 열심이어서 조선미술전에서 여러 편의 조각과 회화로 입선 혹은 특선을 차지했다. 도자기와 관련된 연구 논문도 수차례 발표하고 ‘항아리’, ‘석굴암에 머물다’ 등의 시를 발표했으며 일본의 단카와 하이쿠도 여러 편을 남겼다.
1945년 8월 일본의 패망 후에도 일본으로 바로 귀국하지 않고 미 군정청의 특별 허가를 얻어 조선 도요지의 조사를 계속했다. 그러다가 개인 소장의 공예품 3,000여 점과 도편 30상자를 민속박물관에 기증하고 1946년 11월 33년에 걸친 조선 생활을 청산한 뒤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때의 공예품들은 그 후 국립중앙박물관에 흡수되어 지금도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고 있다. 1964년 1월 일본에서 80세로 눈을 감았다. 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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