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24.6.18 화 17:24 전체기사 l 기사쓰기 l 자유게시판 l 기사제보 l 구독신청 l 광고안내 l 회사소개
> 뉴스 > 피플·칼럼
     
김정형의 100년의 기록 100년의 교훈
2023년 04월 12일 (수) 12:53:59 김정형 webmaster@newsmaker.or.kr

이수만은 ‘K팝 아이돌 산업의 창시자’… 그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

SM엔터테인먼트(이하 SM)의 경영권을 둘러싸고 경쟁을 벌여온 카카오와 하이브가 3월 12일 SM 지분 확보를 위한 경쟁과 분쟁을 끝내기로 합의했다. 이로써 2월 7일 카카오의 SM 지분 매입 계획 발표와 이수만 SM 창업자의 반발로부터 촉발된 SM발(發) 엔터테인먼트 업계 치킨게임은 한 달여 만에 일단락되었다. 한편 하이브가 지난 2월 10일 이수만 전 SM 총괄 프로듀서의 보유 주식 14.8%를 4228억원에 인수하는 내용의 주식양수도 계약을 맺은 터라 SM의 창업주이면서 ‘K팝 아이돌 산업의 창시자’인 이수만의 시대도 막을 내렸다. 이수만의 70년 삶을 조명하고 SM 소속 아이돌 그룹의 활약상을 조명한다.

시대마다 각기 다른 이미지로 기억되는 팔방미인

▲ 이수만

이수만(1952~ )은 시대마다 각기 다른 이미지로 기억되는 팔방미인이다. 1970년대는 인기가수, 1970년대 후반~1980년대 중후반은 유명MC로 이름을 날렸다. 1989년부터 최근까지는 K팝 기획자나 기획사 대표로 활동했다. 그 중에서도 그가 우리 가요사에 남긴 가장 중요한 흔적은 ‘기획 가수’라는 새로운 영역의 개척이었다. 이수만의 등장 전, 1970년대는 몇 사람의 대형가수를 전속으로 하고 있는 레코드사가 대중음악계를 좌지우지했다. 1980년대는 가수들을 관리·보조하는 매니지먼트 전문가들이 레코드 회사를 설립해 영향력을 행사했다. 하지만 이수만의 등장 후 프로듀서, 매니지먼트, 자본의 힘이 결합된 새로운 형태의 기획사들이 가수를 육성·배출해 가요계를 장악하는 형태로 바뀌었다.
이수만은 1996년 데뷔한 아이돌 그룹 HOT의 성공 후 ‘미다스의 손’, ‘대중문화의 첨병’, ‘스타 제조기’로 불리며 우리 가요계를 쥐락펴락했다. 나아가 영향력을 아시아 전반으로 확대해 ‘K팝 한류 열풍의 개척자’로 자리매김했다. 그의 성공 방식은 이후 우리 K팝 산업의 표준이 되었다.
이수만은 서울에서 살던 부모가 6·25 때 피란간 부산에서 태어났다. 종전 후에는 부모가 둥지를 튼 서울 인왕산 자락의 종로구 부암동에서 성장했다. 이수만은 집에서 가까운 경복중을 거쳐 경복고에 입학했다. 이화여전에서 음악을 전공한 어머니 덕에 음악적 재능을 갖고 태어난 이수만을 대중음악 세계로 인도한 것은 작은형 이수영이었다. 형이 항공대 시절 결성한 ‘활주로(runway)’ 밴드는 이후 가수 배철수가 대학시절 ‘활주로’ 6기 멤버로 활동하면서 유명해졌다.
이수만도 경복고에서 밴드를 결성해 리더를 맡고 1971년 입학한 서울대 농과대에서는 교내 그룹사운드 ‘샌드 페블즈’ 2기로 활동했다. 1972년 백순진과 함께 그룹 ‘4월과 5월’을 결성하고 1972년 4월 데뷔 앨범을 발매했다. 그해 10월에는 첫 솔로 앨범을 취입, 본격적으로 가수의 길을 걸었다. 1974년 라디오 프로그램 ‘비바 팝스’의 DJ, 1976년 MBC 라디오의 ‘청춘은 즐거워’ DJ를 맡아 재치 넘치는 언변과 입심을 자랑했다. 가수로는 1976년 MBC 신인가수상에 뽑히고 1977년 자작곡 ‘행복’으로 MBC 10대가수로 선정되었다. 이수만의 입담과 프로그램 진행 능력은 TV로 이어졌다. 1977년 제1회 대학가요제 MC를 맡아 재치 있는 진행으로 강한 인상을 남겨 총 8번이나 진행을 맡았다.

유학 떠난 미국에서 대중음악의 변화 감지

이수만은 이렇게 국내에서 잘 나갔으나 1981년 2월 돌연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처음에는 미국 플로리다 공대에 입학했다가 캘리포니아주립대학(노스리지 캠퍼스) 전자공학과로 학적을 옮겼다. 유학시절 그에게 충격을 안겨준 것은 1981년 8월 1일 방송을 시작한 미국의 MTV였다. 그가 MTV를 통해 확인한 것은 대중음악이 듣는 음악에서 보는 음악으로 바뀌고 있다는 시대적 변화였다. 이수만은 MTV를 통해 마이클 잭슨이 단숨에 세계적인 스타로 부상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스타 발굴을 위해 바닥까지 샅샅이 뒤지는 기획자(프로덕션)와 대형 음반사의 분업화·전문화된 미국의 시스템도 그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 무렵 미국 시청자들이 MTV를 보는 이유가 스타의 패션과 가수의 율동이 우선이고 노래 감상이 세 번째라는 설문 조사는 이수만에게 새로운 인식의 문을 열어주었다.
이수만은 1984년 1월 미국에서 만난 한국 여성과 결혼하고 대학원에서 컴퓨터엔지니어링 석사학위를 마친 뒤 1985년 6월 귀국했다. 미국에서 돌아온 이수만이 선보인 장르는 테크노였다. 1987년 발표한 ‘뉴에이지’는 시대를 앞서간 실험적인 사운드였으나 대중적 인기를 얻는 데는 실패했다. 1989년 ‘뉴에이지2’ 앨범도 별 반응이 없자 가수 활동을 접고 앨범 제작과 엔터테인먼트 사업에 전념하기로 했다. 그 결과물이 1989년 2월 설립한 SM기획이었다.
이수만이 생각한 이상적 모델은 미국의 팝 스타 바비 브라운이었다. 이수만은 한국의 바비 브라운을 찾아나섰다. 당대 유명 춤꾼인 허현석, 이주노, 양현석를 눈여겨보다가 이태원에서 프로 댄서로 유명한 17살의 허현석을 낙점했다. 이수만은 허현석에게 현진영이라는 예명을 지어주고 2명의 백댄서를 붙였다. 강남 최고의 춤꾼이던 강원래와 구준엽이었다. 당시 춤은 청소년들의 또 다른 문화 언어였다. 현진영의 춤 실력은 이미 완성되었지만 춤을 추면서 노래를 부르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현진영은 1990년 8월 ‘야한 여자’를 타이틀곡으로 하고 바비 브라운 스타일의 힙합을 기반으로 한 1집 앨범 ‘뉴 댄스 1’을 발표했다. 열정적인 흑인 음악과 토끼춤을 장착한 ‘현진영과 와와’가 TV화면에 등장했을 때 현진영 손에는 전통적인 마이크가 들려있지 않았다. 마이크는 귀에 걸어 입 앞으로 연결되는 무선 마이크였다. 현진영은 두 손이 자유로워지자 역동적인 춤으로 무대를 장악했다. 그전까지 노래를 잘하는 남자 가수는 많았으나 현란하게 춤을 잘 추는 가수가 없었다는 점에서 현진영의 등장은 파격이었다. 1992년 2집 앨범 ‘뉴 댄스 2’(1992년)에 수록된 ‘현진영 Go 진영 Go’가 TV 화면에 등장했을 때도 10대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큼지막한 농구화, 엉덩이에 걸쳐진 헐렁한 바지, 가마니처럼 생긴 화려한 색상의 후드 티, 가슴에 커다란 X자 마크를 단 패션은 그 자체로 화젯거리였다.
문제는 현진영의 방만한 생활 태도였다. 현진영은 대마초 흡연으로 한 차례 위기를 넘기고도 1993년 10월 3집 앨범을 낸 후 또다시 마약 투약 혐의로 구속되었다. 이수만이 현진영을 통해 확실히 알게 된 사실은 인성에 관한 통찰이 부족했다는 뼈저린 자각이었다. 이수만이 움츠려 있는 동안 1992년 3월 데뷔한 ‘서태지와 아이들’이 청소년들의 혼을 빼놓으며 음악 시장을 완전히 새롭게 재편했다. 이수만은 서태지를 지켜보면서 예전보다 비중이 훌쩍 커진 문화 소비주체로서 10대의 위력을 간파했다.

‘HOT’는 먼저 기획하고 아이돌 그룹이 만들어지는 이정표

이수만은 현진영의 실패 후, 청소년들이 어떤 음악을 좋아하는지, 그들에게 어떻게 어필해야 하는지를 고민하다가 여론조사기관에 설문을 의뢰했다. 그래서 도출한 공식이 ‘고교생 그룹 + 춤 + 노래 + 새로운 변화’였다. 10대에게 댄스와 외모도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수만은 1995년 2월 SM기획을 ‘SM엔터테인먼트’로 확대·개편하고 회심의 프로젝트 ‘하이 파이브 오브 틴에이저(HOT)’를 가동했다. 외모와 춤은 기본이고 개성까지 갖춘 10대 춤꾼들을 물색하기 위해 모집 공고를 내고 중고생들이 많이 모이는 주요 길목으로 직원들을 보냈다. 이수만은 국내외에서 픽업한 10여명의 연습생을 집중적으로 지도했다. 그리고 5명의 고교생을 최종적으로 선발했다. 문희준, 강타, 이재원, 장우혁, 토니안 등으로 구성된 5인조 아이돌 그룹 ‘HOT’의 탄생이었다.
현진영의 모델이 바비 브라운이었다면 HOT의 벤치마킹 대상은 미국의 5인조 보이밴드 ‘뉴 키즈 온 더 블록’이었다. 이 음악그룹은 미국 아이돌 그룹의 창시자가 만들어낸 기획 상품이었다. 예쁘장한 백인 소년들이 부르는 흑인 정서의 음악은 순식간에 미국을 점령했다. 이수만은 ‘한국의 뉴 키즈 온 더 블록’을 만들기 위해 5명을 혹독하게 훈련시켰다. 데뷔를 준비하고 있던 1996년 1월 ‘서태지와 아이들’이 갑자기 은퇴 선언을 하면서 10대를 대상으로 한 가요 시장은 무주공산이 되었다. 이수만은 데뷔에 앞서 5명 멤버들의 개성을 살려 각기 다르게 포지셔닝했다. 문희준은 유머 가이, 강타는 핸섬 가이, 장우혁은 터프 가이, 이재원은 샤이 가이, 토니안은 무드 가이로 포장했다. 다양한 성향의 팬 들이 취향에 맞춰 팬덤을 형성하도록 다변화 전략을 구사한 것이다.
HOT는 ‘10대의 대변자’라는 이미지를 내세웠다. 1996년 9월 7일 ‘We hate all kinds of violence(모든 종류의 폭력을 반대한다)’라는 타이틀의 데뷔 앨범을 발매하고 같은날 MBC TV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를 통해 데뷔했다. 데뷔 앨범은 학원폭력을 고발한 갱스터랩 ‘전사의 후예’를 타이틀곡으로 내세웠다. 어린 팬들은 격렬한 춤과 랩, 그리고 R&B 창법을 소화하는 잘생긴 10대 소년에 열광하면서 HOT를 서태지를 잇는 그들의 새로운 대변자로 기꺼이 받아들이고 후원군이 되었다. 이로써 재능 있는 가수가 먼저 있고 그 후 기획이 필요했던 기존의 가요계 흐름에 역행하는, 먼저 기획이 있고 그 후 아이돌 그룹이 만들어지는 새로운 이정표가 세워졌다.
첫 앨범은 10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는 대히트를 쳤으나 타이틀곡 ‘전사의 후예’가 표절 시비에 휘말려 위기가 찾아왔다. 그러자 이수만은 곧바로 발랄하고 명랑한 소프트팝 ‘캔디’를 두 번째 타이틀곡으로 내세우는 순발력을 발휘해 인기를 이어갔다. 이수만은 여세를 몰아 팬덤을 조직적으로 관리하는 새로운 마케팅 기법을 도입했다. 이에 따라 1997년 5월 전국 34개 지역 팬클럽 회장이 모여 공식 팬클럽 ‘클럽 HOT’를 결성하고 그해 9월 10대 소녀 1만 5000명이 서울 올림픽 체조경기장에서 팬클럽 1기 창단식을 열었다. 이렇게 팬덤을 형성한 청소년들은 HOT의 든든한 방패막이 되어 주었다. 이후 SM과 같은 성격의 기획사가 속속 세워지고 그들의 기획으로 새로운 아이돌 그룹이 연이어 탄생함으로써 한국 가요계에는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HOT는 국내를 평정하고 2000년 2월 중국 베이징의 첫 콘서트에서 대박을 터뜨림으로써 K팝을 중국에까지 전파하는 첨병 역할을 했다. HOT는 2001년 5월, 5인의 멤버 중 장우혁, 토니안, 이재원이 5년 계약이 끝나 SM을 탈퇴하고 강타와 문희준 2명만이 남음으로써 5인조 아이돌 그룹은 사실상 해체되었다. HOT는 결국 해체되었지만 그래도 SM이 향후 20년 사업 모델의 단초를 마련하고 기획사 최초로 코스닥에 입성하는데 결정적 도움을 준 것은 HOT였다.
SM은 HOT 말고도 미국 걸그룹 TLC를 벤치마킹한 여고생 그룹 ‘SES’(1997)를 비롯해 HOT 업그레이드 버전인 보이 그룹 ‘신화’(1998) 등 스타급 아이돌 가수를 대거 발굴해 국내 아이돌 그룹 시장을 석권했다. 하지만 이수만은 1등에 만족하지 않고 아이돌 그룹이 벌어들인 수익을 일본 시장 개척에 쏟아부었다. 그가 회사 운명을 걸고 투자한 연습생은 12세 초등학생 보아였다. 보아는 2001년부터 일본 시장의 밑바닥부터 시작해 성장의 발판을 차근차근 밟아 나가 1년만에 오리콘 차트 주간순위 1위를 기록함으로써 오늘날 SM 해외시장 진출의 상징적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SM은 보아에 이어 2003년에 데뷔한 ‘동방신기’도 일본 시장에 투입했다. 동방신기는 일본에 이어 아시아에서 한류 전사로 활동했다. SM은 이후에도 슈퍼주니어(2005), 소녀시대(2007), 샤이니(2008), f(x)(2009), EXO(2012), NCT(2016), 에스파(2020) 등을 연이어 히트시켜 ‘K팝 종가’의 명성을 이어갔다.

황제경영의 빛과 그림자

SM은 화려한 실적 덕에 2000년 4월 엔터테인먼트사 1호로 코스닥에 입성하고 대박을 쳤다. SM의 코스닥 상장 성공을 지켜본 다른 연예 기획사들도 연달아 코스닥시장에 상장하면서 ‘엔터주’라는 투자 카테고리가 생겨났다. SM이 튼 물꼬 덕에 JYP, YG, 큐브엔터 등 다수 엔터사도 코스닥에 상장했다. 방탄소년단(BTS)을 보유한 하이브는 2020년 10월 엔터사 최초로 코스피시장 입성에 성공, K팝 기업의 역사를 새로 썼다.
오늘날 이수만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명암도 분명하다. ‘K팝 아이돌 산업의 창시자’ ‘한류 열풍의 개척자’ 소리를 들으며 오늘의 K팝 한류가 있게 한 것이 명(明)이라면 SM의 자금이 이수만 개인기업 라이크기획으로 빠져나가게 하는 등 황제경영으로 일관한 것은 암(暗)이다. 이수만과 SM의 대표적인 명(明)을 꼽으라면 첫째가 기획사의 ‘기획’이 있고 나서 아이돌 그룹이 만들어지는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고 팬덤을 조직적으로 관리하는 또 하나의 마케팅 기법을 개척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큰 공로는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한국 대중음악의 해외 진출을 개척하고 선도했다는 점이다. K팝의 세계화가 가능했던 것은 SM이 음악적으로 다양하고 새로운 시도를 했기 때문이다.
이런 혁신성에도 불구하고 SM의 발목을 잡은 것은 이수만 1인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1인 경영 시스템에 의한 ‘황제 경영’이었다. 해외진출에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이유로 연예인이나 연습생과 10년에 이르는 장기 전속 계약을 체결한 ‘노예 계약’으로도 논란을 빚었다. 2001년 HOT가 해체될 때도 SM을 떠나기로 한 세 멤버는 기자회견에서 음반 1장당 받는 인세가 1인당 고작 20원으로, 다섯 멤버의 것을 합쳐도 100원에 불과했다고 항변했다. SM은 성공이 불확실한 신인을 만들고 유지하는데 거액이 들어갔다고 억울함을 호소했으나 HOT 팬들은 한동안 분노했다.
이수만의 성격과 관련해 연예 관계자들이 공통적으로 언급하는 특징은 자기 사람은 철저히 챙기지만 분쟁이 생겨 그 사람과 헤어질 때는 가차없이 응징한다는 것이다. 승승장구 할 때도 검찰의 연예계 비리 조사를 받아 2004년 9월 1심에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황제 경영’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는 것이 이수만이 1997년 설립한 개인회사 ‘라이크기획’이다. 이 회사는 베일에 가린 채 SM으로부터 매년 수십에서 수백억 원에 달하는 외주기획료를 받아갔다. 이수만은 배당과 연봉은 받지 않았지만 라이크기획은 이수만의 실질적인 급여 통장 역할을 해왔다. 결국 매년 SM에서 거금이 라이크기획으로 새나가는 게 SM 내부적으로도 문제가 되어 이수만은 자신이 세운 회사의 경영진과 정면 충돌하고 급기야 자기 주식의 상당부분을 방시혁의 하이브에 넘기면서 SM에서 중도 하차하는 오점을 남기게 되었다.

---------------

‘서부전선 이상없다’ 美 아카데미 4부문 수상… 원작은 레마르크 소설

넷플릭스가 2022년 10월 세상에 내놓은 영화 ‘서부 전선 이상 없다’가 2023년 2월 영국 아카데미상 14부문 후보에 올라 작품상 등 7부문에서 수상한 데 이어 지난 3월 13일에는 미국 아카데미상에서도 9부문 후보에 올라 4부문 오스카 트로피의 주인이 되었다. ‘서부 전선 이상 없다’의 4부문 수상은 넷플릭스와 OTT 영화 최고 기록이다.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 있거라’와 함께 전쟁 문학의 쌍벽

영화의 원작은 ‘전쟁문학의 금자탑’으로 불린 에리히 레마르크(1898~1970)의 소설 ‘서부전선 이상 없다(All Quiet On The Western Front)’다. 레마르크 자신이 전쟁터에서 경험한 현장성과 감각을 생생하게 살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 있거라’와 함께 전쟁문학의 쌍벽을 이룬다는 평가를 받았다.

▲ 에리히 레마르크가 참전했을 때 모습(1917년)

레마르크는 독일 오스나브뤼크에서 태어나 사범학교에 재학 중이던 1916년 11월, 18살의 나이로 1차대전에 징집되었다. 1917년 6월 독일과 프랑스가 접전을 벌이던 서부전선에 배속되었으나 6주 만에 팔다리와 목에 포탄 파편을 맞는 큰 부상을 겪었다. 헤밍웨이도 1차대전에 참전했다가 포탄을 맞고 병원으로 실려 갔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경험은 유사했다. 레마르크는 1918년 10월 병원 치료를 끝내고 부대로 복귀했으나 한 달 만에 전쟁이 끝나 고향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전쟁이 남긴 트라우마가 좀처럼 치유되지 않았고 전쟁터에서 겪은 고통과 공포는 훗날 작품 속에 그대로 투영되었다.
레마르크는 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다 1920년 11월 교단을 떠났다. 이후 세일즈맨, 지방지 연극평론가, 스포츠 화보잡지 기자로 활동하면서 틈틈이 소설을 썼다. 그렇게 완성된 소설이 1929년 1월 29일 출간한 첫 장편소설 ‘서부전선 이상 없다’였다.
소설 속 화자인 파울 보이머는 허황된 애국심에 들뜬 담임교사의 선동에 끌려 전쟁이 뭔지도 모른 채 1916년 고교 급우들과 함께 특별지원병으로 전쟁에 뛰어들었다. 그들은 포화가 쏟아지는 와중에도 물리학을 공부할 만큼 전쟁이 곧 끝나 일상으로 돌아가리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들의 기대 대로 되지 않았다. 총성이 끊이지 않고 포화가 빗발치는 속에서 전우들은 하나둘 시체가 되었다. 중대원 150명이 전투에 투입되었지만 살아 돌아온 사람은 80명 남짓이었다. 야전병원은 고통을 참지 못해 고래고래 고함지르는 부상병들로 가득했다.
보이머는 친구들이 죽어가자 그때서야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몬 기성세대의 허위의식과 전쟁의 무의미함에 눈을 떴다. 그리고 자신이 죽지 않으려면 적을 죽여야 하는 자기방어 심리, 동료의 죽음에 대한 광기 어린 복수심, 죽음에 직면했을 때의 불안과 공포 등이 뒤섞여 결국 잔혹한 살인자로 변해갔다. 보이머가 전장에서 2년을 보냈을 때 급우들 중 살아남은 사람은 보이머 자신뿐이었다. 하지만 보이머도 종전을 바로 앞둔 1918년 10월 어느 날 유탄을 맞고 전사하고 만다. 그날은 모든 전선이 극히 평온하고 조용해 전선사령부는 본국 정부에 판에 박힌 전문을 보냈다. ‘서부전선 이상 없음’
레마르크는 전쟁으로 인한 참혹한 현실을 낱낱이 고발하면서도 격정적인 문장이 아니라 지극히 건조한 문체로 전쟁의 무의미와 공허를 담담하게 고발했다. 전쟁의 부당함을 보여주면서도 이를 정치나 국제 관계 측면에서 묘사하지 않았다. 젊은 병사들이 국가를 욕하는 장면이 나오긴 하지만, 그보다는 전쟁으로 인해 젊은이들의 마음이 얼마나 피폐해졌는지 그 상황을 집중적으로 보여주었다. 그가 소설을 쓸 때 사용한 기법은 자기 주장이나 감정 표현을 억제하고 사실 자체로 하여금 말하게 하는 신즉물주의적 기법이었다. ‘서부전선…’은 출간 후 1년 만에 독일에서만 50만 부가 넘게 팔리고 2년도 되지 않아 25개국 언어로 번역되어 350만 부 이상이 팔려 나갔다. 무명의 레마르크도 일약 세계적인 작가 반열에 올랐다.

참혹한 현실을 지극히 건조한 문체로 낱낱이 고발

‘서부전선…’은 러시아 태생의 영화감독 루이스 마일스톤에 의해 영화로도 제작되어 1930년 4월 21일 미국에서, 8개월 후인 1930년 12월 5일 독일에서 개봉되었다. 영화는 소설 원작의 의미를 살려 전쟁 자체를 혐오할 뿐 어느 편이 옳다거나 그르다고 말하지 않았다. 권력자들의 이해관계 때문에 일어난 전쟁의 참상, 이 때문에 보통 사람들이 겪는 고통을 사실적으로 그려 반독일적이거나 반나치적인 색채도 없었다. 그런데도 영화는 나치의 박해를 받았다.
첫 박해는 영화 개봉일에 일어났다. 2층 발코니석에 앉아 있던 한 남자의 신호를 시작으로 갈색 셔츠 젊은이들이 영화관 곳곳에서 난동을 부렸다. 신호를 보낸 자는 나치의 선전 책임자 요제프 괴벨스였다. 그들이 영화관에 풀어놓은 생쥐들 때문에 결국 영화는 중단되었다. 12월 11일에는 베를린시 영화심의위원회가 상영 금지 처분을 내려 영화를 본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다. 이런 소란과 방해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1931년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에 선정되었다.
레마르크는 1931년 4월 ‘서부전선…’의 속편 격인 ‘귀로’를 발표했다. 종전 후 고향으로 돌아온 귀환병들의 실의와 좌절을 그린 ‘귀로’ 역시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히틀러의 나치당이 점차 세력을 확대하자 레마르크는 1932년 스위스로 망명하고 2차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프랑스와 스페인 등지를 전전했다. 결국 후속작인 ‘세 전우’는 1936년 12월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출판했다. 나치당은 1933년 5월 10일 레마르크의 소설을 비롯, 통치에 방해가 되는 모든 서적을 불에 태웠다. 1938년 7월에는 레마르크의 국적마저 박탈했다.
레마르크는 2차대전이 임박한 1939년 3월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가 미국에서 체류하고 있던 1943년 12월 레마르크의 여동생 엘프리데 숄츠가 독일에서 사형선고를 받아 참수형을 당했다. 레마르크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오스나브뤼크시는 1968년 ‘엘프리데 숄츠 거리’를 조성, 이 비극적 죽음을 추모했다. 레마르크는 이후에도 여러 소설을 발표했다. ‘너의 이웃을 사랑하라’(1941), ‘개선문’(1945) ‘사랑할 때와 죽을 때’(1954), ‘하늘은 아무도 특별히 사랑하지 않는다’(1961) 등을 출간했는데 작품마다 명작으로 인정받았다. 이 중에서도 ‘개선문’은 200만 부나 판매되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레마르크의 소설이 전 세계 독자들의 사랑을 받은 것은 동시대인들에게 가장 절실하고도 고통스러운 체험을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명쾌한 문체로 다뤘기 때문이다. 레마르크의 대표작들은 대부분 영화로 제작되었다. 레마르크는 1958년 2월 할리우드 출신 여배우 파울레트 고더드와 세 번째 결혼했다. 고더드는 찰리 채플린의 세 번째 아내로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즈’, ‘독재자’ 등에 출연한 유명 배우였다. 레마르크의 고향인 오스나브뤼크는 1970년 9월 25일 스위스 로카르노에서 사망한 그를 기려 1991년 6월 ‘에리히 레마르크 평화상’을 제정했다. 뉴욕타임스와 타임지는 20세기 말 ‘서부전선…’를 20세기 최고의 책 100선으로 선정하는 것으로 레마르크의 업적을 기렸다. NM

 

김정형의 다른기사 보기  
ⓒ 뉴스메이커(http://www.newsmaker.or.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전체기사의견(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전체기사의견(0)
뉴스메이커About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법인명: (주)뉴스메이커 | 제호: 뉴스메이커 | 월간지 등록번호: 서울 라11804 | 등록일자: 2008년 1월 21일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서울 아 54731 | 등록일자: 2023년 03월 8일 | 발행인: (주)뉴스메이커 황인상 | 편집인: 황인상
우)110-999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문로1가 163 광화문오피시아빌딩 14층 뉴스메이커 | 전화 : 02-733-0006 | 팩스 : 02-733-0009
청소년보호책임자 : 안상호
뉴스메이커는 (주)뉴스메이커에서 발행하는 시사종합월간지로서 특정언론과는 전혀 무관한 완전한 자유 독립 언론입니다.
뉴스메이커를 통해 제공되는 모든 콘텐츠(기사 ·사진)는 무단 사용, 복사, 배포시 저작권법에 저해되며,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Copyright 뉴스메이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newsmaker.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