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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형의 100년의 기록 100년의 교훈
2023년 03월 14일 (화) 22:39:45 김정형 webmaster@newsmaker.or.kr

베델과 양기탁은 일제 침탈을 국제사회에 알리다 온갖 고초 겪은 의인(義人)


국가보훈처가 구한말 대한제국의 독립에 헌신한 영국 언론인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1872~1909·한국명 배설)의 동상을 베델의 출생지인 영국 브리스틀에 건립할 계획이라고 지난 2월 밝혔다. 영국에 한국 독립운동가의 동상이 건립되는 것은 처음이다.

베델의 인생이 바뀐 것은 1904년 러일전쟁 후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1872~1909)이 영국 남부의 항구도시 브리스틀에서 태어나 무역·광산학교를 졸업했을 때, 아버지는 손아래 동서가 일본 효고현 고베에 세운 무역회사에 근무 중이었다. 아버지는 사업이 궤도에 오르자 자신은 영국쪽 일을 맡고 큰아들 베델은 일본에서 활동하게 할 생각으로 1888년 베델을 고베로 불러들였다. 뒤이어 영국으로 돌아간 아버지는 베델이 고베에서 일본산 물품 등을 보내면 런던에서 되팔아 수익을 남겼다. 당시 베델 부자가 취급한 물품은 영국인이 쉽게 구하기 어려운 일본산 도자기나 골동품, 칠기, 장신구들이었다.
베델은 무역업을 하며 일본에서 10여년을 보내다가 아버지가 1899년 현업에서 물러나자 런던에 무역회사 ‘베델 브러더스’를 세워 자신과 바로 아래 동생은 일본에서 사업을 하고 막내동생은 런던 사무소를 지키도록 했다. 베델은 1899년 회사 설립을 위해 영국에 들렀다가 만난 여성과 1900년 고베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부부는 1901년 외아들을 낳았다. 베델은 무역업을 하며 번 돈으로 1901년 생산공장까지 차려 한동안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일본 업체들의 담합·소송에 휘말리고 형제들과도 관계가 나빠져 결국 일본 사업을 포기했다.
동생들과 하던 사업을 접고 새로운 일을 모색하던 베델의 인생을 바꿔놓은 것은 1904년 2월 발발한 러일전쟁이었다. 영국 신문 ‘데일리 크로니클’이 전쟁이 발발하자 베델을 임시직인 특별통신원으로 조선에 파견한 것이 인연의 시작이었다. 베델이 조선 땅을 밟은 것은 1904년 3월 10일이었다. 베델은 조선에 온 지 1개월이 막 지났을 무렵인 4월 14일 저녁 고종이 머물던 경운궁(현 덕수궁)에서 발생한 의문의 화재 사건을 추적해 ‘일본군이 방화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내용의 기사를 전송했다. ‘데일리 크로니클’은 베델이 쓴 기사를 4월 16일자 5면에 ‘조선 황궁의 화재’ 제목의 톱기사로 보도하면서 전 세계에 타전했다.
기사는 특종이었으나 베델에게 돌아온 것은 해고 통보였다. 친일 성향의 데일리 크로니클이 일본에 비판적 기사를 쓴 베델을 문책했거나, 전장인 한반도에 통신원을 두기보다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정식 기자들이 일본 정부에서 자료를 받아 기사를 쓰는 게 훨씬 효율적이라는 판단이 작용했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양기탁과 함께 ‘대한매일신보’ 창간

베델은 해고되자 곧바로 한·영 양국어로 된 신문을 창간할 생각을 했다. 중국과 일본에는 영자 신문이 여럿 있는데 조선에는 하나도 없다는 것에 착안한 결정이었다. 기왕에 한국어판도 만들 생각에 그동안 번역과 통역을 도와주던 양기탁(1871~1938)을 끌어들였다.
평양에서 태어나 한학을 공부하던 양기탁이 영어를 배우기 시작한 것은 15살이던 1886년 3월이었다. 미국인 선교사이자 의사인 호러스 알렌이 설립한 서양식 병원 ‘제중원’의 보조원 양성 교육을 받으면서 영어를 접한 것이 시작이었다. 양기탁은 6개월 만에 교육을 중단했기 때문에 자칫 영어와 멀어질 수 있었는데도 독학으로 영어 공부를 계속하고 아버지 양시영과 함께 제임스 게일의 ‘한영자전’ 편찬에 몇 년간 참여하면서 영어 실력이 일취월장했다.
게일이 사전 인쇄를 위해 1895년 12월 일본으로 건너갈 때, 양기탁도 나가사키상업학교 조선어 교사로 초빙되어 일본으로 건너갔다. 게일은 1897년 6월 서울야소교서회에서 발간한 ‘한영자전’ 서문에 양시영·양기탁 부자 등 편찬을 도운 8명의 이름을 기록하는 것으로 감사의 뜻을 전했다. 양기탁은 일본에서 2년 동안 체류한 뒤 1898년 귀국함으로써 영어에 이어 일본어까지 능통했다. 기독교 신자인데다 과거 동학에도 관계한 적이 있어 동·서양의 사상과 학문도 두루 섭렵했다. 베델이 통역과 번역을 요청했을 때 양기탁의 직업은 조선왕실 문서를 번역하는 궁내부 예식원의 번역관보였다.

▲ 영국 ‘데일리 미러’지 1908년 8월 15일자에 실린 베델(왼쪽)과 양기탁 사진

베델과 양기탁 두 사람이 우리 언론사에 길이 빛날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 데일리 뉴스(KDN)’를 창간한 것은 1904년 7월 18일이었다. 베델은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양기탁은 총무로 이름을 올렸다. 베델은 자신의 영어 이름과 발음이 비슷하면서 언론인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배설(裵說)’이라는 이름을 썼다. 창간 신문은 총 6개면 중 4개면은 영문(코리아 데일리 뉴스), 2개면은 순한글(대한매일신보)로 된 타블로이드판 신문이었다. 양기탁은 대한매일신보가 창간된 후에도 상당 기간 예식원의 번역관보 신분을 유지했다. 그러다가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사표를 던지고 신문 제작에 뛰어들었다.
창간 초기, 베델은 영어 위주로 신문을 발행했으나 점차 한국어 신문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1905년 3월 9일 휴간 후 일본에서 활자와 인쇄 시설을 들여와 8월 11일 국한문을 혼용한 ‘대한매일신보’(4면)와 영문판 ‘코리아 데일리 뉴스’(4면)를 분리·발행했다. 대한매일신보 제작은 양기탁에게 일임했다. 대한매일신보는 1905년 11월 을사조약 체결 후에도 거침없이 필봉을 휘둘렀다. 을사늑약 체결의 부당성을 전국에 알리고 조선의 외교권 박탈을 도운 을사오적을 끊임없이 비판했다.
베델은 1907년 7월 이상설, 이준, 이위종으로 구성된 ‘헤이그 특사 파견’도 집요하게 보도했다. 당시 일본은 국제 여론에 민감했다. 식민지로 삼으려던 조선에서 항일투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전 세계에 알린 KDN의 잇따른 기사에 일제는 화가 치밀었지만 달리 방도가 없었다. 통감부 초대 통감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는 “나의 수백 마디 말보다도 대한매일신보의 신문기사 한 줄이 더 힘이 세다”고 탄식했다. 대한매일신보는 기사에만 그치지 않고 직접 행동에도 나섰다. 대표적인 것이 1907년 2월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이다. 베델은 의연금을 보관하는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를 대한매일보사에 설치하고 운동을 주도했다. 양기탁은 각종 애국계몽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치면서 대한매일신보를 활용했다. 1907년 4월에는 비밀결사 조직 ‘신민회’의 총감독을 맡아 본부를 대한매일신보 안에 두었다.
당시 대한매일신보는 사주(베델)가 영국인이어서 한국이나 일본의 법을 적용받지 않았다. 대한매일신보와 KDN이 입주한 건물 역시 치외법권 지역으로 인정받았다. 일제는 기사가 못마땅해도 두 차례의 영일동맹 체결로 영국인을 함부로 대할 수 없고 신문이 영국인 소유여서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다만 양기탁은 신문사 밖으로 나가면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어 가급적 대한매일신보 건물 안에서 영문 기사를 한국어로 번역하거나 썼다. 대한매일신보가 일본에 비판적인 기사를 써도 치외법권을 인정받는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박은식, 신채호 등 명망 있는 논객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강경 항일 논설을 썼다.

일제의 베델 추방 공작

일제는 자신들의 만행이 대한매일신보와 KDN을 통해 전 세계에 타전되는 사실이 불편했다. 결국 베델을 조선에서 내쫓기로 하고 본격적인 공세에 나섰다. 당시는 1902년에 맺은 영일동맹으로 두 나라가 밀월관계를 유지하던 때여서 그의 행보는 영국 입장에서도 눈엣가시였다. 일제가 꾸민 꼼수는 외교 경로를 통한 베델의 추방 공작이었다. 일제는 도쿄 주재 영국대사에게 베델을 추방하거나 대한매일신보를 폐간하도록 요구했다. 하지만 영국 정부는 관련 규정이 없어 베델을 제재할 수 없었다. 그러자 1907년 10월 일제 통감부가 3건의 기사와 논설을 문제 삼아 서울 주재 영국총영사 헨리 코번에게 베델의 처벌을 요구하는 소장을 제출함으로써 외교적 압박을 가했다.
베델에 대한 첫 번째 재판은 1907년 10월 14일 서울 정동 주한 영국총영사관에서 열렸다. 판사는 주한 영국총영사 헨리 코번이 맡았다. 판사, 검사, 변호사를 한국인, 영국인, 일본인으로 뒤섞어놓은 동북아 최초의 국제재판이었다. 베델에게 적용된 혐의는 ‘치안 방해’였다. 코번 총영사는 베델의 행동에 큰 문제가 없다고 봤지만 본국의 제국주의 논리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코번은 10월 15일 베델에게 6개월 근신형을 명했다. 하지만 베델은 근신 처분 기간이 끝나자 더욱 강경한 논조로 돌아왔다. 이에 통감부는 1908년 4월 29일 대한제국의 이완용 내각으로 하여금 1907년 7월 제정된 신문지법을 개정토록 해 조선에서 발행되는 외국인 신문까지 발행·배포 금지, 압수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런데도 대한매일신보의 논조가 좀처럼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자 통감부가 1908년 5월 27일 베델을 다시 고소했다. 영국 정부는 일본과의 관계 악화를 우려해 베델을 재판에 회부하는데 동의했다. 이번에는 기존 ‘치안 방해’ 혐의에다가 ‘공금 횡령’을 추가했다. 베델이 국채보상운동 과정에서 모은 의연금을 마음대로 썼다는 죄목이었다. 베델은 곧바로 대한매일신보의 발행인 명의를 앨프리드 만함으로 바꿨으나 이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형식상의 교체일 뿐 대한매일신보는 여전히 베델의 영향 아래 있었다.
재판은 1908년 6월 15일부터 4일간, 서울 정동의 영국총영사관 구내에 있는 영국 경비대 건물에서 열렸다. ‘재팬 크로니클’지 기자가 “동양 역사상 이런 재판은 처음”이라고 기사를 쓰고 AP통신이 특파원을 파견할 정도로 재판은 국제적인 관심을 끌었다. 판사는 이번에도 영국총영사 코번이 맡았다. 고소인은 이토 히로부미 통감을 대신해 나온 일본인 서기관, 증인은 한국인, 검사는 중국에서 온 영국인, 변호사는 일본에서 온 영국인이라는 점이 눈길을 끌었다. 양기탁은 증인으로 참석했다. 한국어-영어 통역은 김규식이, 일본어-영어 통역은 일본인이 맡았다. 4일 동안 진행된 재판에서 통감부가 증거물로 제시한 논설은 3건이었다. 전 미국인 외교고문 더럼 화이트 스티븐스 암살을 찬양한 1908년 4월 17일자 논설과 ‘일백 매특날(메테르니히)이가 한 이태리를 압제치 못함’(1908.4.29), ‘학계의 꽃’(1908.5.16)이라는 논설이었다.
판사는 재판 4일째인 6월 18일 베델에게 3주일간 금고형, 복역 후 6개월간 근신, 350파운드 벌금을 선고했다. 문제는 당시 서울에 영국인을 구금할 수 있는 형무소 시설이 없다는 점이었다. 결국 중국 상해의 형무소로 호송해야 했는데 상해로 가는 배편이 일본을 경유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리되면 베델이 일본을 거쳐 상해로 갈 경우 일시적으로 일본의 사법권 관할하에 놓이게 된다는 문제가 생긴다. 결국 영국은 일본 요코하마에 있던 영국 군함을 인천으로 오도록 해 6월 20일 베델 한 사람만을 태우고 상해로 보냈다. 베델은 3주 후인 7월 11일 출옥해 17일 조선에 돌아왔다.

양기탁의 구속과 재판

일제는 베델이 형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기 전, 양기탁을 구속하는 공작에 착수했다. 일제는 베델이 감옥에서 나왔지만 아직 중국에 있던 7월 12일, 치외법권 건물인 대한매일신보 건물 안에 있던 양기탁을 “잠깐 물어 볼 말이 있다”며 밖으로 불러내 전격 체포했다. 이는 대한매일신보의 제작에 타격을 가하는 동시에 당시 전국적으로 번지고 있던 국채보상운동의 총본산을 와해하려는 2중의 포석이었다. 그러나 주한 영국총영사 헨리 코번이 “비겁한 행위”라며 석방을 요구하는 공문을 보내 통감부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영국 정부까지 맥도널드 주일대사를 데라우치 외무장관에게 보내 양기탁의 석방을 요구하는 상황에서 양기탁의 건강까지 악화했다. 결국 이토 통감은 8월 11일 양기탁을 병원에 입원시키는 것으로 영국과의 관계 개선을 꾀했다. 이런 상황에서 양기탁이 병원으로 이송 중 감시 소홀을 틈타 대한매일신보 사옥으로 피신하면서 양국 관계는 또다시 꼬이기 시작했다. 통감부가 코번 총영사에게 양기탁의 인도를 요구했으나 코번은 본국 정부에서 훈령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그러자 일본 정부가 코번의 경질을 영국 정부에 요구했다. 영국 정부는 양국 간의 관계가 긴장 국면으로 발전하는 것에 부담을 느껴 코번 총영사에게 양기탁의 재판에 협조토록 훈령을 내렸다. 양기탁은 8월 21일 다시 수감되었다.
8월 31일 시작해 9월 29일까지 5차례 열린 양기탁의 재판은 일본인 판사 2명과 한국인 판사 1명이 공동으로 진행하고 한국인 변호사 2명이 변론을 맡았다. 재판 결과 양기탁이 어떠한 돈도 부정으로 횡령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입증되어 검사는 공소를 취하했다. 양기탁은 9월 25일 풀려나고 9월 29일 무죄판결을 받았다. 이로써 영·일 양국 간 벌어진 64일간의 숨 막히는 드라마는 끝을 맺었다. 처음부터 의연금 횡령에 대한 수사가 아니라 국채보상운동을 무산시키고 다른 한편으로 대한매일신보를 탄압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을 지닌 수단이었음도 드러났다. 양기탁을 보호하려던 코번은 사건이 마무리되기 전에 본국으로 송환되어 사임했다. 1908년 7월부터 휴간되었던 KDN은 1909년 1월 30일 속간되었다.

베델의 죽음과 양기탁의 항일운동

베델은 옥고를 치른 후 건강이 크게 악화했다. 일제의 압박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독주와 담배로 달랜 탓이 컸다. 평소에도 몸을 돌보지 않는 성격인데다 오랜시간 소송에 시달려 몸과 마음이 망가졌다. 결국 1909년 5월 1일 서울 정동 애스터하우스 호텔(현 서대문역 농협중앙회 터)에서 37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의학적 사인은 ‘심장 팽창’이었다. 베델은 마지막을 직감한 듯 양기탁의 손을 잡고 짧은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더라도 대한매일신보는 영원히 살아남게 해 한국 동포를 구해 주세요.” 워싱턴포스트지가 “베델의 활동을 중단시키는 방법은 암살밖에 없을 것”이라고 기사를 쓸 만큼 온몸으로 일제에 맞섰던 베델의 황망한 죽음은 전국을 애도의 눈물로 넘쳐나게 했다. 5월 2일 서대문 자택에서 열린 장례식에는 수천 명이 모여들었고 그날 오후 서울 양화진 외국인 묘역까지 가는 운구 행렬은 1000여명이나 되었다. 한국인들이 한 외국인의 죽음을 이토록 애도하며 안타까워한 적은 일찍이 없었다.
일제 총독부가 양기탁에게 보복을 노골화한 것은 한일합병 후였다. 1911년 1월 양기탁·임치정·옥관빈 등 대한매일신보를 이끌던 핵심 인사들을 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하더니 그해 7월 양기탁에게 징역 2년을 선고했다. 그러나 그 무렵 더 큰 사건이 양기탁을 기다렸는데 양기탁이 옥중에 있던 1912년 2월 총독부가 양기탁 등에게 또 다른 혐의를 씌워 기소한 이른바 ‘105인 사건’이었다. 일제는 1912년 9월 27일 양기탁 등 4명의 보안법 위반자에게 사면령을 통보해놓고 이틀이 지난 9월 29일 ‘105인 사건’에 대한 형량을 대폭 늘려 선고했다. 양기탁 등 7명은 1심에서 징역 10년형, 2심과 3심에서 6년형을 선고받았다. 양기탁은 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된 후부터 4년여 동안 옥고를 치른 후 1915년 2월 특사로 석방되었다.
이후 양기탁은 만주, 블라디보스토크, 우수리스크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1918년 12월 중국 천진에서 다시 일경에게 체포되어 전라남도 고금도로 유배되었다. 1년 뒤 유배가 풀린 뒤에도 미국의 상하 양원 의원단이 중국을 거쳐 1920년 8월 24일 서울로 들어올 때 독립청원서를 제출하려 했다는 이유로 또다시 체포되었다. 양기탁은 모친의 작고로 석방되자 다시 만주로 가 각종 항일 독립운동 단체를 창설하는데 매진했다. 그러다가 일본의 중국 침략이 본격화하던 1938년 5월 21일 중국 강소성 담양에서 눈을 감았다. 정부는 사후 60년 만인 1998년 5월 중국에서 유해를 봉환, 국립묘지 임시정부 요인 묘역에 안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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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정환, 국내 최초 아동잡지 ‘어린이’ 창간 100주년    

방정환(1899~1931)에게 어린이는 숙명이었으나 선린상고를 중퇴할 정도로 집안이 가난해 한동안 뜻을 펼치지 못했다. 그런 그에게 새로운 인생을 열어준 것은 천도교 교주 손병희의 딸 손용화와의 결혼(1917년)이었다. 이후 방정환은 보성전문학교를 거쳐 1920년 3월 입학한 일본의 도요대에서 아동예술과 아동심리학을 공부했다. 귀국 후에는 1921년 5월 ‘천도교 소년회’를 조직해 어린이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천도교 소년회’는 1922년 5월 1일 창립 1주년 기념일에 맞춰 ‘십년 후 조선을 려(廬)하라’라는 전단을 시내에 배포하고 ‘어린이날’ 취지를 가두에서 선전했다.

‘어린이’지는 우리나라 동요 운동의 산실

1920년 8월 25일자 ‘개벽’지 3호에 게재된 방정환의 번역동시 ‘어린이 노래-불 켜는 아이’는 평생 어린이를 위해 살겠다는 방정환의 다짐이었다. ‘어린이’라는 말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방정환이 1923년 3월 20일 국내 최초 순수 아동잡지 ‘어린이’를 창간하면서였다. 개벽사에서 발간한 ‘어린이’지는 일제하 한국 근대 아동문학의 요람이었다. 아동문학에 대한 인식조차 없던 시절에, ‘어린이’는 아동문학을 문학의 한 장르로 격상시키고 고한승, 마해송, 윤극영, 이원수와 같은 1세대 아동문학가들을 배출했다. 사실 ‘어린이’라는 순우리말을 처음 창안한 것은 최남선이었다. 그는 1914년 10월 ‘청춘’지 창간호에 시 ‘어린이의 꿈’을 게재함으로써 늙은이, 젊은이와 대비되는 ‘어린이’ 용어를 처음 등장시켰다. 그 전까지 어린이는 동몽, 아동, 소년 등으로 불렸다.
‘어린이’지는 어린이들이 접할 수 있는 노래가 학교에서 배우는 일본 노래와 어른들이 부르는 민요밖에 없던 시절 우리나라 동요 운동의 산실 역할을 했다. 1970~80년대까지 초등학생이 학교에서 배운 동요 대부분은 ‘어린이’지를 통해 탄생했다. ‘오빠 생각’은 11세의 최순애, ‘고향의 봄’은 15세의 이원수가 응모해 뽑힌 것이다. ‘까치까치 설날’(윤극영), ‘반달’(윤극영), ‘고드름’(유지영), ‘따오기’(한정동), ‘오뚜기’(윤석중) 등도 모두 ‘어린이’를 통해 세상에 나와 지금껏 애창되고 있다. ‘어린이’는 아동잡지였는데도 일제의 검열에 걸려 번번이 기사가 삭제되었다. 그때마다 방정환은 경찰서를 드나들었다. ‘어린이’는 1934년 7월 자진 폐간했다가 광복 후 1948년 5월 속간되었지만 1949년 12월 통권 137호를 끝으로 완전히 문을 닫았다. 방정환은 ‘어린이’ 외에도 ‘학생’, ‘신여성’, ‘혜성’, ‘개벽’, ‘별건곤’ 등의 잡지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해 출판인으로도 능력을 인정받았다.

첫 어린이날 행사는 1923년 5월 1일 열려

1923년 4월 17일 개벽사 주필 김기전 등이 한국 최초의 소년단체 통합기구인 ‘조선소년운동협회’를 조직하면서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정하고 그날 행사를 벌이기로 했다. 방정환이 아동문학가 윤극영, 마해송과 함께 최초의 어린이 문화운동단체인 ‘색동회’를 창립한 것도 5월 1일이었다. 조선소년운동협회는 제1회 ‘어린이날’인 5월 1일 서울 천도교당에 모인 1,000여 명의 어린이와 함께 어린이날 축하식을 열었다. 뒤이어 200여 명의 소년 회원이 12만 장의 전단을 가가호호 돌리며 어린이에 대한 관심을 환기했다. 전단지에는 ‘어른에게 드리는 글’, ‘어린 동무들에게 주는 말’, ‘어린이날의 약속’이란 제목의 글이 실렸다. ‘어른에게 드리는 글’에는 ‘어린이를 내려다보지 마시고 쳐다보아 주시오’, ‘어린이에게 경어를 쓰되 늘 보드랍게 하여 주시오’ 등의 글이, ‘어린 동무들에게’에는 ‘돋는 해와 지는 해를 반드시 보기로 합시다’, ‘서로 존대하기로 합시다’ 등의 글이 열거되어 있었다.
초기의 어린이날 노래는 방정환이 가사를 쓰고 미국 남북전쟁 때의 행진곡 ‘조지아를 넘어서’ 곡에 맞춰 불렸다. 현재 불리는 ‘날아라 새들아…’로 시작하는 ‘어린이날 노래’는 해방 후 첫 어린이날인 1946년 5월 5일에 맞춰 윤석중 작사, 안기영 작곡으로 새로 만들어졌다가 곡이 어렵고 작곡가가 월북해 1947년 윤극영이 작곡한 곡으로 바뀌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어린이날’ 행사는 매년 열리다가 1927년 5월 조선소년운동협회의 주축인 천도교 측과 오월회의 분열로 각기 다르게 거행되었다. 그러다가 그해 10월 양측의 화해로 어린이날을 5월 첫째 일요일로 결의함으로써 어린이날을 계속 이어갈 수 있었다. 어린이날이 5월 5일로 변경된 것은 해방 후인 1946년 5월 첫째 일요일인 5월 5일에 어린이날을 기념하면서부터다.

▲ 1923년 개벽사가 펴낸 ‘어린이’지 창간호

방정환은 아동교육 사상가였다. 그의 아동교육철학이 이론으로 집대성되지는 못했지만 1920년대에 이미 아동 중심의 교육철학을 정립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겼다. 한 집에 시부모, 시동서, 삼촌 부부 등 여러 부부가 살게 되면 어른들 충돌에 애매한 어린이가 매를 맞는다며 핵가족 사회를 주창하기도 했다. 방정환은 가부장적 구습에 억압받고 있는 여성의 지위 향상에도 관심이 많았다. “여성도 스스로 일거리를 가져야 한다”고 하고, “조선 여인들은 한평생 빨래만 하다 죽는다”며 “흰옷이 아닌 염색옷을 입자”고 주장했다. 방정환의 재능은 청중을 사로잡는 구연동화에서도 발휘되었다. 동화 구연을 할 때마다 가득 찬 청중석을 눈물바다로 만들었으며 이야기를 듣지 못할까봐 도중에 자리를 뜨지 못한 어린이가 고무신에 오줌을 누었다는 등 에피소드가 무궁무진하다.
방정환은 사회주의 사상에 공감한 진보적 청년이기도 했다. 방정환의 개벽사에서 발행된 ‘개벽’ 잡지는 1920년대 신경향파 문학 운동의 중요한 베이스캠프였다. 그가 ‘개벽’에 연재한 풍자기 ‘은파리’ 시리즈에는 자본주의가 태생적으로 품고 있는 모순과 불평등 구조를 비판하는 대목이 많다. 도쿄 유학 시절 가장 가깝게 지낸 인물도 사회주의 청년이었으며 사회주의 평론가 김기진도 그의 문학적 동지였다. 이처럼 강연, 잡지 간행, 행사 기획 등으로 바쁘게 살다 보니 건강을 잃었고 결국 고혈압에 의한 신장염으로 1931년 7월 23일 32세의 짧은 나이에 눈을 감았다. 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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