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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왕실도자기의 우수성과 도자예술을 널리 알리겠다”
2023년 03월 07일 (화) 22:51:03 차성경 기자 biblecar@newsmaker.or.kr

민족의 성패는 전통문화와 세계조류의 흐름을 어떻게 잘 조화시키고 유지하느냐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계화라는 이름아래 우리의 전통문화가 사라져 간다면 우리 민족을 지탱하는 정신도 없어지게 된다.

차성경 기자 biblecar@

전통문화를 계승하는 것은 우리 조상의 지혜와 전통을 보존하는 것이기에 가치 있는 일이다. 때문에 우리는 계속해서 들어오는 외래문화 속에서도 전통문화의 가치를 계승할 필요가 있다. 세계가 좁아지고 가까워질수록 민족의 정체성 확립을 위해서도 전통의 보존은 더욱 필요한 일이다.

▲ 박부원 명장

전통 계승하며 새로운 시도 이어나가다
광주는 조선시대 왕실자기를 제작한 분원관요(分院官窯)가 운영됐던 곳이다. ‘분원’이란 조선시대 궁중에서 왕에게 올려지는 모든 진상품 및 식사를 담당하는 중앙관청인 사옹원(司饔院)의 하급기관을 뜻한다. 왕이나 궁중에 음식을 공급해오다 백자 수요가 증가하면서부터 그 역할이 확대됐다.
왕실 및 관청용 그릇 제작을 직접 주관하게 됐고, 광주에는 1467~1468년경 분원이 설치됐다고 한다. 이후 조선 후기까지 왕실과 관청에 필요한 백자를 제작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광주 분원에서 만든 작품 중에 국보를 지정된 작품이 18점, 보물이 36점 이다, 최근 주목을 받고 있는 도원요의 지당 박부원 명장은 광주왕실도자명장의 칭호를 받은 광주왕실도자 1대 명장이다. 둥근 모양에 가운데가 텅 빈 순백의 달항아리 작품은 그의 도예생활을 집대성한 작품이다. 지당 박부원 명장은 “내 개인의 정서로는 분청이나 백자을 더 좋아한다,  백자나 분청에선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인간미가 느껴진다. 따뜻함이 담긴 자기다. 게다가 실용성을 강조하고 있고 튼튼하며 조형미가 아름답다”고 덧붙였다. 조선왕실도자기를 대표하는 백자 달항아리 제작에 반세기가 넘는 세월을 바친 박부원 명장은 “달항아리는 도교 사상에서 말하는 마음을 비운 상태, 즉 공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며 “중국과 일본을 비롯해 세계 어느 도자기 역사에서도 달항아리는 없고 우리나라만 유일하게 있다”고 자부심을 나타냈다. 왕실도자기의 고장 광주에서 영감을 받은 박부원 명장은 수많은 작품을 만들어냈다. 겸허히 자신만의 도자기를 묵묵히 만들어온 그는 도자기를 빚는 과정에서 전통을 계승하며 새로운 시도도 계속 이어갔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거친 불길의 흔적이 가변적으로 나타나는 요변 달항아리와 현대적 무늬를 새기거나 고대 암각화를 표현한 항아리 등의 실험적인 작품들이다.

자신의 산방에 전시된 청동채귀달린편병은 왕의 곤룡포의 색감을 떠올리며 제작했다. 조선시대에 제작됐던 달항아리는 두 개의 그릇을 합쳐 만들어졌다. 덩치가 워낙 크다 보니 제아무리 노련한 도공도 당시의 기술로는 한 번에 구워낼 수 없었던 것. 그렇기에 많은 이들이 여전히 달항아리는 두 쪽으로 붙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이에 대해 박부원 명장은 “18세기엔 18세기 방법이 있고 지금은 지금의 방법이 있다. 지금은 기술도 발전했으니 하나로 만드는 게 당연하다. 더 좋은 달항아리를 만드는 것은 우리의 사명이다”면서 “전통을 따르는 것은 그 시대의 형태가 아니라 그들의 정신을 계승하는 것이다. 똑같은 것을 만드는 것은 재현하는 것일 뿐이다. 그들의 정신문화를 21세기에 맞게 발전·계승하는 데 의미가 있다”고 반박했다.

시대와 세대를 초월하여 꾸준히 사랑받는 작품
“늘 똑같은 그릇이 나오면 설렘도 없다. 그러나 가마에서 꺼낼 때마다 다른 게 나오기에 늘 궁금하고 설렌다. 달항아리가 식기 전 가마를 열면 깨지는데 지금도 궁금증을 참지 못할 정도다. 그 설렘이 있기에 좋은 작품이 나온다. 설렘이 있기에 좀 더 좋은 작품을 만들려고 노력한다.” 스물넷의 나이에 처음 도자의 길에 입문한 박부원 명장은 최초로 고려청자 재현에 성공한 故 도암 지순탁(1912~1993) 선생을 사사했다. 이후 1975년 광주시 초월읍에서 작품 활동을 해온 그는 “도예가로 성공해야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그게 가능하지도 않은 사회였다”면서 “사람은 평생에 한 번은 뜻을 세운다. ‘도자기를 만들어 무엇을 이루어야겠다’가 아닌 ‘도자기를 만들어야겠다’가 제 뜻이었다”며 지금껏 걸어온 도자인생에 대한 소회를 밝혔다.

한편 왕실도자기협회 회장, 세계도자기엑스포 추진위원을 역임하며 광주왕실도자기의 우수성과 도자예술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려온 박 명장은 해외에서도 활발한 작품 활동을 펼쳐왔다. 1976년 일본 오사카에서 개최된 ‘한국 도예 5인 초대전’을 시작으로 1997년 러시아의 ‘한국전승도자전’ 2016년 미국 맨하튼의 ‘Body&Spirit 코리아소사이어티 초대전’ 등 다수 작품전을 통해 세계 각지에 한국도예문화를 알렸다. 현재 박 명장의 주요작품 중 일부가 영국 ‘빅토리아·앨버트 박물관’과 미국 ‘스미소니언 박물관’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그시 민속박물관’ 등에 소장돼 있어 해외에서도 인정받고 있다. 올해로 그의 나이 85세. 하지만 여전히 그의 가슴 속에는 도자기를 향한 예술혼이 뜨겁게 불타오르고 있다.

박부원 명장은 “일생이 설렘이다. 늘 더 좋은 작품을 기대하면서 작품을 만든다. 기대와 설렘이 있기에 생각을 바꿨고 생각을 바꾸면 또 모든 게 바뀐다. 그런데 그렇게 나온 작품은 영원히 간다”면서 “우리는 오래 살면 인생을 하직하지만 도자기는 깨지지만 않으면 수천 년을 간다. 바다 속에서건 땅 속에서건 그대로 간다. 오래되면 세월의 흔적이 느껴져 오히려 더 매력적이다”고 전했다. 이어 “반평생을 도자기에 몰두한 제가 앞으로 얼마나 작업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나에게는 여전히 버리지 못하는 욕심이 있다”면서 “시대와 세대를 초월하여 꾸준히 사랑받는 작품을 남기고픈 깊은 열정이 있기에 마음과 손은 자연이 준 고귀한 흙을 놓을 수 없다”고 피력했다. 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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