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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형의 100년의 기록 100년의 교훈
2023년 02월 14일 (화) 01:54:11 김정형 webmaster@newsmaker.or.kr

美 로제타 셔우드 홀 가족이 한국에서 펼친 의료선교의 삶 60년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시절, 이 땅에서 의료봉사한 기간이 자그마치 60년에 달하는 벽안의 가족이 있다. 미국의 로제타 셔우드 홀과 캐나다의 윌리엄 제임스 홀 부부, 그리고 그들의 아들 셔우드 홀이다. 이들 가운데 최근 로제타 홀의 삶이 언론에 오르내려 새삼 화제가 되었다. 미국 실험극을 대표하는 리빙시어터가 우리나라 극단과 합작으로 1월 13~14일 광주의 국립아시아문화의전당(ACC)에서 연극 ‘로제타’를 시범공연했기 때문이다. 이들 가족은 현재 서울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묻혀있다. 로제타 부부 2명, 딸과 아들 2명, 아들(셔우드 홀)의 아내와 아들을 포함해서 모두 6명이다. 홀 가족이 구한말 한국 사회에서 어떤 의료활동을 했는지 그 지난했던 여정을 알아본다.

로제타 셔우드 홀과 윌리엄 제임스 홀의 사랑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서양에서 신약이 속속 개발되고 새로운 의술이 발전을 거듭해도 조선의 의료 상황은 여전히 절망적이었다. 특히 안타까운 것은 목숨까지 앗아가는 각종 질병이 활개를 쳐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치료를 받지 못한 채 죽어가는 여성들의 참담한 현실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감리교회가 파견한 여성 의료선교사 로제타 셔우드 홀(1865~ 1951)은 각종 질병으로 고통받는 조선의 여성과 아이들을 위해 하늘이 이 땅에 내려준 축복이었다. 로제타는 조선의 여성들이 다른 여성들을 치료하도록 여성 의료인도 길러냈다. 평양의 아동병원, 맹아학교, 농아학교와 서울의 여자의학강습소도 그가 흘린 피땀의 산물이다. 여자의학강습소는 오늘날 고려대 의과대학으로 발전해 국내 의학교육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로제타는 1865년 미국 뉴욕주 리버티에서 부유한 농장주 집안에서 태어났다.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사로 근무하던 1885년 인도에서 의료선교를 하는 여성 선교사의 강연을 듣고 해외 의료선교사의 꿈을 꾸었다. 1886년 10월 필라델피아의 펜실베이니아 여자의과대학에 입학한 것은 해외 의료선교의 길을 가기 위한 출발점이었다. 이 대학은 세계 최초의 여자의과대학으로 로제타가 입학할 당시에는 해외 의료선교사들의 메카로 명성이 자자했다.
로제타는 1889년 3월 대학을 졸업하고 맨해튼 소재 아동병원에서 인턴과정을 시작하면서 해외 의료선교사가 되겠노라고 미국 북감리교 여성해외선교회와 약속했다. 로제타가 장차 남편이 될 윌리엄 제임스 홀을 만난 것은 뉴욕 빈민가의 무료진료소에서 봉사를 시작한 1889년 11월 어느날이었다.
윌리엄 제임스 홀(1860~1894)은 캐나다 온타리오 주 글렌뷰엘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1877년 학업을 중단하고 직업 현장에 뛰어들었다. 10대 후반 사경을 넘나드는 병을 앓았다가 기적같이 회복되자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봉헌하기로 결심했다. 중단했던 학업도 1881년 다시 시작해 주경야독하면서 1883년 초등학교 교사 자격증을 땄다. 교사와 보험회사 세일즈맨으로 근무하면서도 의과대를 목표로 공부한 끝에 1885년 10월 마침내 캐나다 온타리오주 퀸즈대학 의과대에 입학했다. 해외선교를 꿈꾸고 있던 1887년 여름방학 때 해외 의료선교를 희망하는 학생에게는 학비와 하숙비를 지원한다는 한 선교회 회장의 말을 듣고 뉴욕의 벨레뷰 의과대학으로 적을 옮겼다. 1889년 4월 대학을 졸업하고 의사자격을 취득한 뒤에는 뉴욕 빈민가의 무료진료소 소장으로 근무했다. 윌리엄은 밤이든 낮이든, 범죄자든 아니든 빈민 모두에게 치유의 손길을 내밀었다.
1889년 11월 어느날 윌리엄은 로제타를 처음 보고는 첫눈에 반했다. 이후 사랑 고백을 하고 청혼했으나 로제타는 청혼을 받아들이지 않고 머뭇거렸다. 평소 결혼을 생각해본 적이 없고 성적 결합에 대한 결벽증 때문이었다. 여성해외선교회와 맺은 계약도 신경이 쓰였다. 당시 선교회 계약에 따르면 누구든 해외 의료선교사로 발령받을 경우 적어도 5년 동안은 독신으로 봉사해야 했다. 윌리엄은 이 사실을 알고 실망했지만 자신도 해외선교를 마음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5년을 기다리기로 했다. 로제타의 당초 의료선교 희망지는 중국이었다. 그런데 조선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다가 안식년을 맞아 뉴욕에 와 있던 메리 스크랜턴 여사가 로제타를 의료일손이 부족한 조선으로 파견하도록 선교회에 요청하면서 행선지가 중국에서 조선으로 바뀌었다.

▲ 로제타 홀(왼쪽)과 윌리엄 홀

로제타-윌리엄 부부의 조선행
로제타는 1890년 8월 23일 고향집을 떠나 10월 14일 제물포항에 도착했다. 여독이 풀리지 않았는데도 10월 16일 곧바로 서울 보구여관(普救女館)에서 홀로 진료를 시작했다. 보구여관은 메리 스크랜턴(1832~1909) 여사가 여성병원의 필요성을 미국 북감리회 본부에 제안하면서 추진되었다. 미국 여의사 메타 하워드가 1887년 10월 조선에 도착하고 10월 31일 이화학당 언덕 아래 기와집 한 채를 개조해 진료를 시작하면서 조선 최초 여성병원으로 이름을 올렸다. 오늘날 이화여대 의료원은 10월 31일을 의료원 설립일로 기념하고 있다. 하워드는 밀려오는 모든 환자를 돌보다가 결국 건강을 해쳐 2년 만인 1889년 9월 귀국했다. 보구여관은 한동안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로제타는 의사, 간호사, 약제사의 1인 3역을 수행했다. 내과, 외과, 산부인과, 소아과, 피부과 등 진료과목도 가리지 않고 각종 질병들과 씨름했다. 수술도 자궁수술을 비롯해 종양 제거, 언청이 수술, 종기 수술 등 다양했다. 로제타는 근무 첫날 4명의 환자를 시작으로 첫 10개월 동안 2359명을 진료했다. 화상으로 세 손가락이 붙어있는 환자를 위해 자신의 피부를 세 조각 떼어내 피부를 이식할 때도 있었다.
홀로 동분서주하는 로제타 옆에는 늘 13살의 김점동이 함께 했다. 점동은 이화학당에서 영어를 가장 잘해 뽑힌 아이였다. 로제타는 1891년 겨울방학부터 점동을 포함해 이화학당에서 영어를 잘하는 6명의 아이들로 의료보조훈련반을 꾸려 근대의학을 가르쳤다. 오와가(일본 학생), 장차 국내 최초 간호사가 될 이그레이스(한국명 복업), 진명여고 설립에 기여할 여메례   (한국명 여순) 등이 그들이었는데 그중에서도 로제타가 가장 의지하고 믿었던 아이는 점동이었다.
한편 미국에서 의료봉사를 하던 윌리엄은 1891년 12월 18일 서울에 도착, 1년 2개월 만에 로제타와 재회했다. 로제타는 이역만리 멀리서 찾아온 윌리엄과 결혼하겠다고 미국 북감리교 여성해외선교회에 보고했다. 선교회는 의료선교 계약 파기라며 관련 경비를 모두 반환할 것을 요구했다. 로제타는 자신을 대신해 누군가 파견된다면 그때 가서 경비를 반환하겠다며 반환 시기를 미뤘다. 로제타가 결혼을 한 후에도 후임자가 오지 않았다는 점에서 로제타의 대응은 합리적이고 지혜로운 결정이었다.
두 사람은 1892년 6월 27일 조선 최초의 서양식 결혼을 영국 공사관에서 올렸다. 윌리엄이 영국령 캐나다인이어서 법적으로 영국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결혼식은 영국령에서만 인정되는 것이어서 미국에서도 인정받을 수 있는 결혼식을 같은날 스크랜턴 여사의 집에서 다시 올렸다. 두 사람은 결혼 후 중국 치푸(현재의 옌타이)로 한달 동안 신혼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와 윌리엄은 메리 스크랜턴의 아들 윌리엄 스크랜튼이 일하는 시병원에서, 로제타는 보구여관에서 또다시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윌리엄, 1894년 평양에서 과로와 병으로 숨져
그러던 중 윌리엄이 감리교 평양 선교 책임자로 임명되어 결혼하고 3개월 만인 9월 30일 평양으로 올라갔다. 윌리엄이 1893년 사들인 땅과 건물에는 훗날 평양 최초의 교회가 될 남산현교회와 조선 최초의 근대식 학교인 광성학교가 세워졌다. 평양에서 펼친 윌리엄의 진료에는 하루에도 수십명씩 찾아왔다.
서울의 로제타는 1893년 3월 보구여관의 분원 격인 볼드윈 진료소를 동대문 부근에 개설했다. 자금을 지원한 볼드윈 부인의 이름을 딴 진료소는 1897년 릴리언 해리스가 맡아 운영했다. 그러나 해리스는 발진티푸스에 감염되어 안타깝게도 1902년 세상을 떠났다. 그후 볼드윈 진료소는 당시로서는 최대 규모인 현대식 건물을 동대문에 준공한 후 1912년 보구여관과 통합해 ‘릴리언 해리스 기념병원’으로 확대 개원했다. 이후 병원은 1930년 동대문 부인병원으로 바뀌고 해방 후에는 이화여대 부속병원으로 발전했다.
로제타는 1893년 11월 10일 첫 아들이면서 조선에서 태어난 최초의 서양인으로 기록된 셔우드 홀을 낳았다. 자신도 평양 선교사로 임명되어 1894년 5월 8일 평양으로 올라갔다. 하지만 청일전쟁의 전운이 감돌아 6월 6일 가족 모두 평양에서 철수했다. 청일 양군의 평양전투는 9월 15일 벌어져 다음날 일본군의 승리로 끝이 났다. 그러자 윌리엄은 쑥대밭이 된 평양에서 부상자를 치료해야 한다며 10월 1일 평양으로 돌아갔다. 당시 평양은 전쟁으로 전염병이 돌고 부상자들이 넘쳐났다. 윌리엄은 결국 과로가 쌓이고 발틴티푸스에 감염되어 11월 24일 34살의 나이로 서울에서 타계했다. 부부의 결혼생활도 2년 5개월만에 끝났다. 당시 로제타에게는 돌이 채 지나지 않은 아들 셔우드 홀이 있었고, 8개월 된 딸이 그녀의 몸 속에서 자라고 있었다.
로제타는 남편을 양화진에 묻은 후 충격에서 벗어나고 뱃속의 딸을 낳기 위해 1894년 12월 7일 김점동 부부를 데리고 조선을 떠났다. 일본과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미국 리버티 집에 도착한 것은 1895년 1월 14일이었다. 뱃속의 딸 에디스 마거릿 홀은 그로부터 4일 후 유복자로 태어났다. 로제타가 미국에 있을 때이던 1897년 2월 1일 로제타가 주요 자금을 대고 로제타의 친구들이 십시일반 도와준 돈으로 윌리엄 홀을 기념하기 위해 지어진 기홀병원이 평양에서 개원했다.
로제타는 자신이 집필한 남편의 전기 ‘윌리엄 제임스 홀 의사의 생애(The Life of Rev. William James Hall. M. D.)’를 1897년 8월 미국에서 출간했다. 조선의 맹아들을 위해서도 미국의 점자를 참고한 한글점자를 미국에서 고안했다. 그리고 1897년 9월 27일 미국의 고향집을 떠나 11월 10일 제물포항에 다시 내렸다.

박에스더(김점동)는 사실상 조선 최초 의사
김점동(1877~1910)은 가난한 선비 집안에서 태어나 10살 때이던 1887년 이화학당의 4번째 학생으로 입학했다. 영어를 잘 해 이화학당을 졸업한 1890년 10월 보구여관에서 통역을 맡고 의료보조원으로 일했다. 점동은 1891년 1월 에스더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후, 주로 점동 대신 에스더로 불렸다. 로제타는 눈치가 빠르고 명석한 에스더를 위해 신랑을 물색했다. 그러다가 찾은 인물이 윌리엄의 조수로 일하던 마부 출신의 박여선이었는데 로제타가 보기엔 정직하고 성실했지만 에스더는 남편이 자기보다 신분이 낮은 게 불만이었다. 두 사람은 1893년 5월 24일 기독교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에스더는 16살, 박여선은 25살이었다.
에스더는 로제타가 1894년 12월 미국으로 떠날 때 따라갔다. 미국에서는 남편 성에 자신의 세례명을 붙여 박에스더로 이름을 바꾸었다. 박에스더는 로제타의 도움을 받아 리버티공립학교를 거쳐 1896년 10월 조선 여성 최초로 서양 의과대학인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현재의 존스홉킨스대)에 입학했다. 남편은 농장 노동자로 식당 종업원으로 허드렛일을 하며 아내의 공부를 뒷바라지했다. 박에스더는 대학 입학 전인 1896년 2월 딸을 낳았으나 2년 전 한국에서처럼 아이가 수개월만에 숨져 박에스더에게 슬픔을 안겨주었다.
박에스더는 1900년 6월 대학을 졸업하고 조선 여성 최초로 양의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러나 기뻐할 수만 없었다. 자신을 뒷바라지 해준 남편이 학위를 받기 20여일 전인 1900년 5월 28일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박에스더는 서재필에 이어 우리나라 두 번째이자 여성으로는 첫 번째 의사로 기록되었다. 하지만 서재필이 국내에서 의료활동을 한 적이 없다는 점에서 박에스더야말로 사실상 국내 1호 의사였다.
박에스더는 1900년 11월 귀국, 보구여관에서 환자를 진료했다. 9개월 동안 3000명이 넘는 환자를 진료할 정도로 열정적으로 환자를 살폈다. 로제타가 1898년 6월 평양에 개원한 광혜여원에서도 환자를 진료했다. 치료 말고도 지방순회 선교활동과 성경학교 활동을 통한 복음화운동에도 앞장섰으나 안타깝게도 폐결핵에 걸려 1910년 4월 13일 34살의 나이로 요절했다.

로제타, 3살 딸까지 평양에서 숨져
로제타는 조선을 떠난 지 3년만인 1897년 11월 10일 아들과 딸을 데리고 다시 제물포에 도착했다. 서울 보구여관에서 진료를 이어가다가 평양 기홀병원에서 근무하기 위해 1898년 5월 1일, 두 아이를 안고 다시 평양에 들어갔다. 그런데 짐도 풀기 전에 가족 모두 세균성 이질에 걸렸다. 로제타와 아들은 회복했으나 3살난 딸 에디스는 5월 23일 세상을 떠났다. 남편을 잃은 뒤 아픈 세월을 메워주었던 아이마저 떠나버리자 로제타는 또다시 오열했다.
로제타는 아픔을 잊기 위해 미친 듯이 일에 매달렸다. 아내 치료를 고맙게 생각한 평양감사가 평양 최초로 지어준 여성병원은 1898년 6월 18일 ‘광혜여원’ 이름으로 개원했다. 광혜여원은 기홀병원과 통합되고 장로교와도 연합해 1922년 현대식 병원인 평양연합기독병원으로 재탄생했다. 로제타는 1900년 1월 광혜여원에 조선 최초의 소아과 병동을 짓고 자신이 미국에서 직접 고안한 한글점자로 맹인들을 가르치는 특수교육을 우리나라 최초로 시작했다. 1910년 역시 조선 최초로 평양농아학교를 세웠다. 좀더 많은 여성 의료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1912년 광혜여원 안에 실습을 병행한 의학강습반을 열었다. 교육 후 이들을 의학전문학교에 입학시키려 했으나 선교사들이 세운 세브란스의전에서조차 여학생 입학을 거부했다. 1914년 조선총독부의원 부속의원강습소에 사정한 끝에 여성 제자들을 청강생으로 입학시켰다. 이들 중 3명의 여학생은 경성의학전문학교(조선총독부의원 부속의원강습소 후신)의 교육과정을 모두 이수해 의사면허를 얻었다.
로제타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1928년 9월 조선의 유지들과 힘을 모아 개설한 여자의학강습소의 교장으로 부임했다. 1930년대에는 황해도 해주 구세병원에서 의료선교사로 헌신하는 아들 셔우드 홀의 사역을 도왔다. 그러다가 고향에서 마지막 생을 보내기 위해 43년 동안 조선에서 보낸 세월을 뒤로 한 채 1933년 10일 2일 한국을 떠나 11월 25일 뉴욕에 도착했다. 여자의학강습소는 경성여자의학강습소로 개명되었다가 경성여의전, 수도의대, 우석대를 거쳐 고려대 의과대로 변천했다. 로제타는 1951년 4월 5일 미국에서 눈을 감았다. 유해는 화장되어 남편이 묻혀있는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

아들 셔우드 홀은 한국 결핵퇴치의 선구자
로제타의 아들 셔우드 홀(1893~1991)은 서울에서 태어나 로제타가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설립한 평양의 외국인학교에서 8년의 중학교 과정을 마쳤다. 10대 중반이던 1907년 8월, 원산에서 열린 한 모임에서 하디 선교사의 설교에 감명받아 의료선교사의 꿈을 키웠다. 1910년 4월 13일 친 이모보다 더 가까웠던 박에스더가 결핵으로 허망하게 세상을 떠나자 결핵 전문의사가 되어 한국에서 치명적인 결핵 퇴치에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1910년 미국으로 건너가 1919년 오하이오주 마운트유니온대를 졸업했으나 부모가 걸어간 의료선교사의 꿈을 이루기 위해 다시 캐나다의 토론토대 의과대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1923년 졸업했다. 1926년 의사 아내와 함께 다시 한국을 찾은 후에는 1928년 아내와 함께 한국 최초의 결핵요양원인 황해도 해주 구세요양원(일명 노튼기념병원)을 건립하고 요양원 안에 결핵위생학교를 개교해 결핵퇴치를 위한 제도적인 교육을 실시했다. 1932년 12월 우리나라 최초로 크리스마스 씰을 발행, 결핵퇴치운동의 새 기원을 마련했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조선 총독과 일본 천황으로부터 표창을 받았으나 미일 간 태평양전쟁이 임박하자 1940년 8월 일제가 꾸민 간첩혐의로 체포되었다가 풀려나 1940년 11월 한국을 떠나야 했다.
하지만 미국이나 캐나다로 가지 않고 인도의 요양원에서 23년간 원장으로 활동하면서 한국에서 했던 것처럼 크리스마스 씰을 발행하고 결핵퇴치운동을 벌였다. 1963년 은퇴 후에는 캐나다에서 자선의사로 봉사하며 여생을 보내다가 1991년 눈을 감아 양화진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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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평준화 시행 50년… 학생과 학부모들 환호했으나 부작용도 많아

1950년대 중반 시작된 베이비붐은 1960년대 들어 초등학생 숫자를 급증시켰다. ‘콩나물 교실’, ‘입시 지옥’이라는 말이 등장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중학교에 진학하려는 학생이 크게 늘어났는데도 학교수가 이를 충족하지 못해 자연히 입시 경쟁이 치열해졌다. 초등학생 성장발육에 지장을 줄 정도로 일류 중학에 대한 지나친 집착도 문제였지만 툭하면 터져 나오는 볼썽사나운 입시부정과 파동도 문제였다. 재판까지 진행된 1965년의 ‘무즙 파동’과 1968년의 ‘창칼 파동’이 대표적인 예였다.

1969년 서울, 1971년 전국 중학교에서 입시제 폐지
학생 선발이 이처럼 재판에 의존하는 경우까지 생겨나자 입시의 국가관리안(案)이 논의되었다. 그래서 나온게 1968년 7월 15일 정부가 발표한 중학교 무시험 추첨제였다. 골자는 “1969년도부터 중학교 입시를 폐지하고 중학교 입학을 무시험 추첨제로 바꾼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따라 1969년 서울을 시작으로 1970년 부산.대구.광주.대전.인천.전주, 1971년 전국의 모든 중학교에서 입시제가 폐지되었다. 서울은 1969년 2월 5일부터 이틀간 무시험 추첨을 실시했다. 추첨에 앞서 정부는 삼류 학교에 배정받은 학생이 진학을 포기할 것을 우려해 자신이 추첨한 학교에 진학하지 않는 학생은 다음해 추첨권이 없다고 엄포를 놓았다.
1969년 2월 5일(남)과 6일(여), 서울에서 학군별로 일제히 실시된 추첨은 학생들이 추첨기를 오른쪽으로 두 번, 왼쪽으로 한 번 돌려 번호가 적힌 추첨알이 떨어지면 관리요원이 번호를 확인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추첨에 따라 서울시내 초등학교 졸업생의 90% 정도인 9만여 명의 학생들이 140개교에 배정되었다.
세칭 일류 중학도 단계적으로 폐지한다는 발표에 따라 경기.서울.경복.경기여중.이화여중 등 5개교는 1969년부터, 용산.경동.수도여중.창덕여중 등 5개교는 1970년도부터, 보성.중앙.숙명여중.진명여중 등 4개교는 1971년부터 신입생을 뽑지 않았다. 입시 철폐안이 발표되자 입시경쟁으로 인한 심리적 부담과 사교육비 부담으로 고민하던 학생과 학부모들은 환호했다. 그런데 막상 시행하고 보니 학생 간의 엄청난 실력 차와 교원.교실 부족, 소속감 결여 등 부작용이 만만치 않았다.
그래도 교육 기회의 실질적 확대, 아동의 정상적 발육의 촉진, 초등학교 단계에서의 과열 과외 해소 등의 긍정적인 요소가 공감대를 이뤄 오늘날까지 큰 무리 없이 운영되고 있다.

▲ 1969년 2월 서울시내 중학교 추첨 모습

1973년 고교평준화 발표하고 1974년 시행
중학생 증가는 다시 고등학교 진학을 위한 입시경쟁을 치열하게 만들었다. 세칭 일류고 진학을 위한 경쟁이 특히 심각했다. 인문계고 지원자의 40%만이 고교에 진학하는 문제점과 함께 과외망국론, 입시지옥, 중3병 등의 문제도 수시로 신문지상에 오르내렸다. 그러자 1973년 2월 28일 정부가 나서 획기적인 고교입시제도 개선안을 발표했다. 고교의 전형시기를 전후기로 나눈 뒤 전국적으로 실시하는 연합고사를 거쳐 전기인 실업계 고교는 종전대로 학교별로 뽑고, 후기인 인문계 고교는 학군제를 채택해 추첨으로 학교를 배정한다는 내용이었다.
서울의 경우 공동학군 1개, 일반학군 5개로 나눠 학생들이 원하는 지역에서 추첨으로 선발되도록 했다. 이처럼 중학교 무시험, 고교평준화와 같은 과감한 조치가 연이어 이루어진 것을 두고 근거는 없지만 박정희의 아들 박지만을 위한 것이라고 수근대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박지만은 1958년생으로 중학교   ‘뺑뺑이’로는 3기, 고등학교 ‘뺑뺑이’로는 1기에 해당하니 그런 말이 나올 만도 했다. 사립고까지 평준화에 포함시킨 것도 논란을 부채질했다. 명문고 출신 인사들의 반발도 적지 않았다.
평준화가 5대 도시로 확대된 가운데 중3 학생들의 연합고사 성적이 1974년 평균 171점에서 1975년 154점, 1976년 150점으로 곤두박질치자 하향평준화 논란이 거세게 일어났다. 특히 1975년 가을 이화여고에서 학업 능력이 떨어지는 22명의 학생을 자퇴 형식으로 퇴교시킨 것을 계기로 논란이 가열되었다. 폐지하자는 측은 학습 지진아 양산, 평균 학력 저하, 사학의 운영난 등을 들었다. 정부 보조금이 적은 사학에 배정된 학생의 부모들은 학생 실력의 평준화에 앞서 시설의 평준화와 교사의 평준화가 이뤄지지 않았다며 불만을 터뜨렸다. 당시 서울의 139개 학교 중 사립은 113개이고 부산은 55개교 중 36개일 정도로 사학의 비중이 높았는데도 초기에는 미처 시설이 열악한 사학까지 신경을 쓰지 못했던 것이다.
고교평준화는 1974년 서울과 부산에서 처음 시행된 것을 시작으로 이듬해 대구.인천.광주로, 1979년에는 대전.전주.수원.청주.춘천.마산.제주 등 7개시로, 1980년에는 성남.원주.목포 등 8개시로 점차 확대되었다. 평준화 지역이 가장 크게 확대되었던 1983년을 기준하면, 학교 비율로는 전체의 38.8%, 학생 비율로는 57.9%가 평준화의 적용을 받았다. 정부에서는 금지시켰지만 많은 학교에서 수준별 수업을 한다는 명목 아래 내놓고 우열반을 운영했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에 진행된 우열반 편성으로 열반 학생들의 상처가 컸다.
그러나 우수 학생을 하향 평준화시킨다는 비판은 여전했다. 그러자 1990년 정부가 외국어고 신설, 과학고 확충 등 고교의 다양화와 특성화를 추진하는 대책을 내놓았다. 그래도 평준화를 근본적으로 반대하는 측은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했다. 잠잠하던 평준화 해체 주장은 1999년부터 다시 불붙었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단골 메뉴로 등장했다. 평준화 폐지 측은 여전히 평준화 정책이 학력의 하향 평준화를 불러와 미래의 우수 인재 확보와 국가경쟁력 제고에 장애가 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학생의 학교 선택권 제한도 평준화의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반면 평준화 존속을 주장하는 측은 대안 없이 해체만 고집하는 것은 무책임할 뿐만 아니라 사교육을 부추기는 결과를 낳는다며 어린 학생을 다시 입시지옥으로 몰어넣자는 것이냐고 반문하고 있다. 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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