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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서 칼럼] 신문의 ‘꽃’, 시사만화의 이면사(裏面史)
0.006평에서 벌어지는 숨겨진 전쟁
2023년 02월 14일 (화) 01:12:18 박성서 webmaster@newsmaker.or.kr

신문만화는 특성상 만화이기보다는 ‘언론’으로 인정받는다. 때문에 신문만화는 곧잘 ‘제2의 사설’로도 불린다. 혹자는 오히려 사설보다 월등히 낫다고 추켜세우기도 한다. 진실을 알려야 할 기사들조차 채 꺼내지 못하는 ‘말’을, 때로 ‘능청스레’ 꼬집기 때문이리라.

그렇다고 신문 만화가 과연 온전히 언론 자유를 누리는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오히려 더 많은 제약과 간섭을 받아 왔다. 특히 우리네에서는 더욱 그렇다. 우리에게 회자되는 숱한 필화 사건들이 그걸 증명한다.

시사만화가들에게 가해지는 유형, 무형의 압력은 복잡해진 사회 구조 만큼이나 다양한 형태로 생겨나 ‘늘 누군가가 뒤에서 들여다보는 듯한 심정으로 작업을 하는’ 형국이 되었다. 일정한 의도를 가진 ‘전화 협박 부대’의 집단 이기주의에서부터 모처에서 제의해오는 ‘거절하면 큰일 나는 술자리’까지 수법도 교묘하고 다양해졌다.
그 0.006평 공간에서 벌어진 숨겨진 전쟁사.

글 l 박성서(저널리스트, 음악평론가)


기네스북에 오른 시사만화가, ‘해가 지지 않는 루리의 세계’

‘읽는 신문에서 보는 신문으로!’. 요즘 신문사들이 무한 경쟁 체제로 돌입하면서 내거는 가치이다. 대폭 증면, 전국 동시 인쇄 등 밖으로 드러나는 시스템 변화는 물론, 섹션화, 별지 부록을 통한 잡지화, 오락화해서 최근 신문들은 제법 많은 ‘볼’거리를 제공한다.

이 많은 볼거리 중 가장 인기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만화, 다시 말해 사단 시사만화와 ‘신문의 꽃’이라 불리는 만평이다. 0.006평 크기에 불과한 4컷 만화, 또는 가로, 세로 10Cm 크기도 안 되는 작은 공간을 통해 사람들은 그날그날의 세상과 만난다.

‘한번 보고 무릎을 치며 폭소하고, 두 번 보고 의미를 깨닫고, 세 번 보고 페이소스를 느끼게 하는’ 시사만화는, 그래서 언제나 서민들의 사랑과 지지를 받아왔다. 그날 톱뉴스의 정면과 이면을 동시에 보여 주는 시사만화는, 그만큼 영향력 또한 만만치 않다.

미국의 세계적인 시사만화가 ‘루리’를 보라. 그의 만평은 지금, 배급망인 ‘에디터스 프레스 신디케이터’를 통해 103개국 1105개 매체에 실리고 있다. 하루 1억 4백만 독자가 그의 만평을 보고 있는 셈이다. ‘해가 지지 않는 루리의 세계’라는 지도가 기네스북에 실릴 정도로 루리는 시사만화가로서의 영향력과 인기를 한껏 과시하고 있다.

그뿐인가, 세계적 정론지로 자리매김한 프랑스 최대 발행 부수의 ‘르몽드’지. 이 신문은 알다시피 창간 이후 보도 사진을 되도록 싣지 않는다는 편집 방침으로 유명하다. 조작, 오도의 우려 때문이다. 그러나 시사만화만큼은 1면 가운데 자리에 배정할 정도로 그 기능을 인정하고 있다.

또한 옛 전통과 자존심을 중시하는 영국인들조차 언제 어느 때부터 자기네 선조들이 ‘타임지’들의 신문 시사만화에 등장했는지에 관심을 갖고 있다. 일단 시사만화, 즉 만평의 소재가 되면 사정없이 긁히고 만신창이가 되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래도 그 원화를 작가로부터 구해 가보로 보관하는 것을 영광으로 여긴다.

김성환 화백의 ‘고바우 영감 1311회’ (동아일보 1958년 1월 23일 자)속칭 ’경무대 똥통사건‘으로 불리는 김성환 화백의 ‘고바우 영감 1311회(동아일보, 1958년 1월 23일 자)’ 분이다. 자유당 말기, ‘빽’에 대해 비굴하도록 아첨하는 무리를 풍자한 이 만화로 김화백은 경범죄 처벌법을 위반하였다 하여 즉결 심판에 회부, 벌금 450환의 처벌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오히려 이 사건을 계기로 고바우 영감은 국민적 사랑과 지지를 받게 되었다.

과태료 ‘450환’의 속칭 ‘경무대 똥통 사건’

우리나라 시사만화의 수난사를 얘기할 때 가장 먼저 이야기되는 것은 저 유명한 ‘고바우 영감’의 ‘경무대 똥통 사건’이다. 기록을 보자.

잘 알려진 것처럼 ‘고바우 영감’은 ‘만화신보’에서 시작되어 동아일보, 조선일보, 문화일보를 거쳤다.  1950년 12월 3일 발행된 ‘만화신보’에 처음 얼굴을 내민 뒤 1955년 2월 ‘동아일보’에 본격적으로 연재되기 시작했다. 이후 1980년부터 ‘조선일보’를 거쳐 이후 ‘문화일보’로 옮겨지기까지 총 1만4139회가 연재되었다. 무려 45년에 걸쳐 격동의 현대사를 담아 온 셈이다.

속칭 ‘경무대 똥통 사건’이라 불리는 이 만화는 자유당 말기인 1958년 1월 23일 자 동아일보에 실린 내용으로, 분뇨통을 진 경무대(지금의 청와대) 청소부를 등장시켜 ‘경무대 것이라면 똥통도 대접 받는다.’는 내용의 만화다. 즉 ‘빽’에 대해 비굴하도록 아첨하는 무리들을 풍자한 것. 결국 이 만화를 통해 경무대를 모독했다고 하여 작가 김성환 화백은 사흘간의 고초를 받고 과태료로 당시 돈으로 450환의 즉결 심판을 받는다.

그러나 오히려 ‘고바우 영감’은 이 일로 말미암아 인기가 폭등했고 국민적 지지를 받았다. 그뿐 아니라 주한 외교관들 사이에서도 늘 화젯거리가 되어 고바우 영감이 ‘신문에 실리지 못할 일’이라도 생기면 외신은 어김없이 이 소식을 세계에 알렸다. 한국의 정치적 상황을 대변하는 하나의 상징으로까지 된 것이다.

훗날 김성환 화백은 시사만화가로서의 삶을 이렇게 술회했다. “지난 세월 동안 시사 만화가로서의 나는.... 당국의 호통 소리와 어디선가 가냘프게 들리는 박수 소리의 불협화음을 들으며 살아왔다”고.

1980년 신군부의 검열로 삭제된 오룡 화백의 신문 만평. 검열자가 씀직한 ‘불가’라는 단어가 선명히 남아 있다. ‘부패 방지법’이라는 기치를 내건 중앙청을 향해 “소금(청렴) 사라”고 외치는 직설적인 표현으로 불가 판정을 받았다.

언론계 숙정 대상 1호는 시사만화?

‘중대 발표’와 ‘긴급 조치’가 곧잘 기승을 부리던 70년대 군사 정권, 그리고 ‘서울의 봄’으로 시작돼 5.17, 5.18을 거쳐 ‘정의 사회 구현’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출범한 80년대의 제5공화국 시절. 이때를 시사만화가들은 역사 이래 가장 불행한 ‘암흑기’였다고 주장한다. 당연히 이 두 정권은 시사만화의 위력이 얼마나 큰가를 잘 알고 있었다고도 한다.

이전의 필화 사건들은 ‘떳떳하게’ 신문 기사화 되어 오히려 또 다른 효과를 내곤 했는데, 군부 세력은 치밀할 정도로 비밀스럽게 보도 통제를 감행했다. 요즘도 때때로 거론되는 언론의 ‘사전 통제’ 개념이 이미 이때부터 생겨났다는 주장이다.

김성환 화백은 1986년 필자와의 인터뷰 당시 그때를 이렇게 말했다. “63년 민정 이양 때는 고바우 영감이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곤욕을 당한 적이 있었어요. 그날 신문이 나가고 하숙집으로 퇴근을 했는데, 정체 모를 괴한들이 하숙집을 에워싸고 ‘우, 우’ 괴성을 지르며 밤새도록 온갖 협박조의 신경전을 펴더군요. 신고를 했지만 경찰은 얼씬도 않았고...., 결국 이 사건으로 인해 신문사에서 8개월 간 정직 당했습니다.”라고.

신문의 시사만화는 단순한 웃음거리일 수도, 광야의 외침일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글로써 설명될 수 없는 통렬한 비판과 해학으로 관철되는 현실의 ‘해부도’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외압이 극심해 글 줄기가 ‘움찔’거리지 못할 때에도 시사만화는 그 기본 기능을 상실하지 않을 것이다.

당시 시사만화가들은 여타 언론인과 마찬가지로 몇 차례씩 중정 사무실에 불려 다니는 고초를 겪으며, 보다 직접적이고 집요한 공작 정치의 대상이 되었다.

탄압의 사례 역시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80년, 신군부가 등장한 계엄 기간 동안에는 시사만화가들이 원고를 직접 군인들에게 들고 가 검열을 받는, 일생일대의 수모를 겪기도 했다. 또한 ‘시국 안정에 불안 요소가 된다.’는 명목으로 김성환 화백(당시 동아일보)은 ‘언론계 숙청’이라는 철퇴를 맞고 각각 80년 8월 9일과 7월 30일에 해직되기도 했다.

오룡 화백의 ‘야로씨’ 미완성 원고 1996년 6월 19일 그려진 「조선일보」시사만화 ‘야로씨’의 미완성 원고. 이는 오룡 화백의 ‘절필’로 이어진 마지막 원고이다. 지금까지도 ‘속 시원히 밝히기 뭣한’ 이유로 인해 이 만화는 ‘야로씨’라는 이름으로 등록되지 못한 채 여러 경로를 통해 필자의 손에 건네졌다. 이 날 사표를 던진 오룡 화백과 그이의 만화들은 이후 「조선일보」와 「대구매일」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작가의 사정으로 당분간 쉽니다’라는 신문사 측의 ‘알림’만을 남긴 채. 1996년 6월, 그러니까 오룡 화백의 시사만화 데뷔 30년, 조선일보사 입사 23년 2개월 만의 일이었다.

‘개’와 ‘거지 차림’에도 신경 써야 하는 ‘발 저린 감시’

당시 신군부와 그로부터 탄생한 5공 정권은 시사만화와 만평을 어떻게 통제했을까? 그 실상은 십년쯤 뒤인 1992년 ‘일요신문’이 당시 검열로 삭제된 신문만화 160건을 공개하면서 알려졌다. 이 기사에서 오룡 화백(당시 조선일보)은 당시 상황을 ‘검열단과 작가들 간의 끊임 없는 숨바꼭질’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의미 전달을 함축적으로 하려면 강한 상징성이 요구됐고, 이 때문에 시간이 지나서 보면 무슨 뜻인지 전혀 알 수 없는 만화도 많았다. 때문에 시사만화가들은 점점 말이 없어지고 그림도 단순화되어 갔다. 그이는 반면 “검열단원들은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운 만화는 내용에 상관없이 빼 버렸고, 특히 상징성이 강한 만화는 검열에서 가차 없이 삭제했다”고 술회했다. 물론 당시의 검열은 뚜렷한 기준이 없었고 지극히 ‘자의적’이었다. 검열을 염두에 두고 되도록 싱거운 것을 그렸는데도 판단의 눈이 ‘사시’여서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특히 언론 담당 군인들은 시사만화에 대한 지나친 피해망상 증세를 보여 그림 속의 ‘개’는 다 자신들을 비꼬는 것으로 확대해 생각했고 ‘허름한 노동자’는 군대의 또 다른 표현으로 해석했다.

당시 모 신문사 사회부장이 검열단장에게 “우리가 봐선 괜찮은데 왜 안 되느냐”고 항의한 적이 있는데, 그때 그는 “그냥 통과시켰다가 나중에 문제가 되면 우리가 편치 못하다. 오히려 겁을 먹고 있는 것은 우리들”이라고 변명하며 스스로도 ‘발 저린 감시’임을 시인했다.

 

이홍우 화백의 ‘나대로 선생’ 스크랩북에 적힌 치열한 메모 평소 ‘소금은 짜야 소금이고, 만화는 재미있어야 만화’라는 지론을 가지고 숱한 히트작을 발표해 온 이홍우 화백의 스크랩북 중 일부다. 영원히 치유되지 못할 ‘피 말리는 작업’ 끝에 완성시킨 만화지만 신문 게재 후에는 그에 대한 자체 검토가 이루어진다. 아래 쓰인 작가의 메모가 치열한 투쟁의 흔적인 셈이다.

권력에 민감한 신문사는 고달프다

‘나대로 선생(이홍우 화백, 동아일보)’의 경우는 하루 동안 여덟 번이나 그림을 바꿔 그리며 검열단과 첨예한 신경전을 벌였고, 김성환 화백 역시 검열단과 줄다리기가 계속돼 “검열단의 삭제 때문에 일 년 동안 그린 네 칸짜리 만화가 일 년 정상 분량의 두 배 반이나 됐다”고 회고했다. 당시 이 인터뷰에 응하지 않았다고 명시된 이홍우 화백(당시 시사만화가협회장)은 그 거절의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당시 상황은 검열 군인들이 ‘게재 불가 판정’ 도장만 찍으면 그만인 단순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훨씬 교묘한 상태로 ‘보이지 않는 손’의 ‘은밀한 검열’이 진행되고 있다. 따라서 지금 옛날 얘기를 끄집어내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시사만화가들 역시 만화가이기보다는 언론인으로 인정받는다. 때문에 신문만화는 곧잘 ‘제2의 사설’로도 불린다. 혹자는 오히려 사설보다 월등히 낫다고 추켜세우기도 한다. 진실을 알려야 할 기사들조차 채 꺼내지 못하는 ‘말’을, 때로 ‘능청스레’ 꼬집기 때문이리라.

그렇다면 오늘날의 시사만화에도 외압은 여전히 존재한다는 걸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럴 수밖에 없지 않느냐’이다. 시사만화가들에게 가해지는 유형, 무형의 압력은 복잡해진 사회 구조 만큼이나 훨씬 다양한 형태로 생겨나 ‘늘 누군가가 뒤에서 들여다보는 듯한 심정으로 작업을 하는’ 형국이 되었다. 일정한 의도를 가진 ‘전화 협박 부대’의 집단 이기주의에서부터 모처에서 주기적으로 제의해 오는 ‘거절하면 큰일 나는 술자리’까지 수법도 교묘하고 다양해졌다.

신문의 성격도 시사만화에 있어 때때로 보이지 않는 ‘한계’로 작용한다. 사실 시사만화가는 그날그날의 편집 회의에 참석하고 또 편집 데스크와의 교감 내지 수위 조절을 하는 입장이기에 신문의 논조와 편집 방향의 지배를 받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이는 대부분의 시사만화가들이 편집국에 소속된 편집위원, 또는 기자(직원)이기 때문이며, 그것은 곧 소속 신문사의 집단 이익에 위배되는 일은 할 수 없다는 뜻도 되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권력의 편에 가까이 있는 신문일수록 풍자의 날이 무디며 공격의 영역도 제한될 수밖에 없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같은 맥락에서 지난 1996년 12월, ‘이달의 기자상’을 수상한 ‘문화일보’의 만평(장봉군 화백, 현 ‘한겨레 그림판’의 작가)은 새삼 돋보인다. 거침없는 풍자로 ‘날치기 정국’ 비판의 선봉에 섰던 이 ‘문화만평’은 ‘노동법 날치기 통과’라는 소재를 매일 연재하다시피 다루면서 날치기 정국을 가장 시원스럽게 그려 낸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글로 쓴 기사나 사설들이 미온적인 자세로 일관했던 반면에 이 작품은 강한 풍자 속에 분명한 메시지를 담아냄으로써 독자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주기에 충분했다”는 게 당시 심사평이었다.

당시 그는 체제에 대한 비판과 풍자의 영역을 폭넓게 보장받는(?) ‘한겨레 그림판’으로 자리를 옮겼지만, 역시 한때는 데스크인 편집국장들과 그림 내용을 둘러싸고 지속적인 갈등을 빚어 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달의 기자상’을 수상한 장봉군의 ‘문화만평’, 1997년 ‘날치기’ 비판의 ’사설 대 만평‘으로 이달의 기자상을 수상한 ‘문화만평’. 이 만평은 신문 만화가 사설의 삽화 쯤이 아님을 여실히 보여 준 사례이다. ‘날치기 정국’을 소재로 “강한 풍자 속에 분명한 메시지를 담아냄으로써 독자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주기에 충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시사만화가가 영업부로 가게 된 사연

그 무렵 시사만화계에 주목할 만한 또 하나의 사건이 생겼다. 그 진원지는 ‘기자협회 세계일보 지회’가 발행하는 ‘세계 기자회보’ 3호다. 1997년 4월 14일자로 발행된 이 기자 협회보에는 ‘세계일보’에 사단 만화 ‘허심탄’을 연재하는 조민성 화백의 ‘국장 검열에 유린당한 창작열의, 이제야 말한다’는 제하에 그동안 게재되지 못하고 서랍 속에 묻어둘 수밖에 없었던 만화 중에서 15편이 발췌, 게재되었다.

이 기사에서 당사자인 조민성 화백은 “그 동안 발표되지 못한 그림이 몇 백 편에 달할 만큼 전 편집국장(이즈음에서 편집국장이 바뀌었다)은 정부 비판을 무조건적으로 금지했으며, 세계일보는 유신 시대를 방불케 했다”고 밝혔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그해 7월 3일, 신문사 측으로부터 영업부로 발령 통보를 받았고 이를 거부하자 해고 조치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들이 불씨가 되어 세계일보는 지난 91년 ‘세계일보 사태’ 이후 휴면 상태로 있던 노조가 다시 출범했고, 이 과정에서 그는 당시 노조 사무국장직을 맡고 있었다.
세계일보 노조 사무실에서 만난 조민성 화백은 “청운의 꿈을 안고 세계일보에 입사했지만 그동안 마음이 편치 않았다. 데스크 검열을 통해 정부에 대한 비판이 조금만 강해도 여지없이 퇴짜를 맞았다”며, “문민 시대를 맞아 서민들의 입은 풀렸지만 언론의 입은 여전히 봉합 상태”라고 현실을 개탄했다. 심지어 지난 석가탄신일에는 부처를 소재로 그림을 그렸다 해서 데스크에 불려가 질책을 받기도 했다며, 특정 종교 언론에 몸담고 있으므로 해서 소재를 제한 당하는 입장을 강한 어조로 비판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허심탄’이라는 만화 제목은 세계일보 측이 일반에게 공모해 채택한 것으로, ‘허심탄회하게 말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탄’은 ‘탄알’이라는 의미와 ‘튀기다’, ‘반발하다’는 사전적 풀이가 가능한, 즉 ‘탄알처럼 시원하게 표적을 꿰뚫는 맛을 보여 달라’는 의미였다.

자체 검열 때문에 게재되지 못한 만화 ‘허심탄’ 중에서, 1997년 편집국장 검열에 걸려 게재되지 못한 「세계일보」 만화 ‘허심탄’ 중에서. “정부에 대한 비판이 조금만 강해도 여지없이 퇴짜를 놓았다”고 작가 조민성 화백은 주장한다. 그는 한 주일에 평균 한 개꼴로 거부당했다고 밝혔다.

‘피 말리는 전쟁’, 신문만화는 ‘신문만화’다

‘기·승·전·반전’의 사단 신문 만화, 그리고 만평들. 이를 위해 신문 만화가들은 영원히 면역이 어려울 듯 보이는 ‘피 말리는 마감과의 전쟁’을 치러야 한다. 매일 받아야 하는 스트레스 또한 만만치 않아 자기와의 싸움에서 먼저 이겨야 하는 것도 과제다.

늘 ‘이사 만루의 찬스에서 타석에 들어서는 심정으로 작업해 임한다.’는 ‘나대로 선생’의 이홍우 화백의 표현을 빌리지 않더라도 신문만화는 늘 팽팽한 긴장의 연속이다.

오룡 화백은 “검열단원들은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운 만화는 내용에 상관없이 빼 버렸고, 특히 상징성이 큰 만화는 검열에서 삭제했다”고 술회했다. 물론 당시 검열은 뚜렷한 기준이 없었고 지극히 ‘자의적’이었다. 검열을 염두에 두고 되도록 싱거운 것을 그렸는데도 판단의 눈이 ‘사시’여서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마감 후에도 데스크의 통과 절차가 남아 있고, 아울러 신문이 발행된 뒤에라도 거의 다른 모든 신문을 훑어야 한다. 세상 돌아가는 상황을 보다 확실히 짚어내야 함은 물론, 자신이 건져 올린 아이디어가 다른 신문 작가들의 그것과 치지 않는지도 살펴봐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작가는 늘 자신의 만화에서, 이렇듯 치열한 무대 뒤를 절대 눈치채게 해서는 안 된다. 누구나 편안한 마음으로 가장 쉽게 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몇백을 고쳐 그리게 되더라도 한 가지 잊지 않고 있어야 할 ‘작가 정신’을 온전히 보전하기 위해 수많은 장애와 맞서야 하는 사람들이 바로 시사만화가이며 그들의 작품인 것이다. 그래도 어려움을 이기고 해내야만 한다. ‘신문만화’이기 때문이다.

신문의 시사만화는 단순한 웃음거리 일 수도, 광야의 외침일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글로써 설명될 수 없는 통렬한 비판과 해학으로 관철되는 현실의 ‘해부도’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외압이 극심해 글 줄기가 ‘움찔’거리지 못할 때에도 시사만화는 그 기본 기능을 상실하지 않을 것이다.

신랄한 비판은 하되 대안 없는 비판은 하지 않으며, 풍자는 하되 공격의 대상이 다치지 않는, 그러면서도 ‘썩 괜찮고’ 동시에 ‘유쾌한 촌철살인’들, 시사만화가 늘 우리와 함께 있어 주기를 바란다.

[참고 자료] ‘오늘의 시사만화를 말한다(박성서, 샘이 깊은 물 1997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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