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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형의 100년의 기록 100년의 교훈
2023년 01월 13일 (금) 12:31:35 김정형 webmaster@newsmaker.or.kr

김상옥 열사 의거 100주년…

일경과 시내에서 총격전 벌이다 11발의 총탄 맞고 자결

일제하 서울의 종로경찰서는 일제 경찰력의 심장부이자 조선인을 고문하고 탄압한 강압 통치의 상징이었다. 1920년대 종로경찰서는 현재 종로2가 서울YMCA 건물 바로 옆에 있던 서양식 2층 건물이었다. 미국인 콜브란의 한성전기회사가 1901년 준공한 사옥을 매입해 경찰서로 사용했는데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이 악명 높은 종로경찰서 서편 담벼락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폭발물이 터진 것은 1923년 1월 12일 저녁 8시 10분경이었다. 폭발로 건물의 일부 유리창이 산산조각 나고 경찰서 게시판과 벽 일부가 무너졌다. 다친 사람은 애꿎게도 모두 민간인이었다. 부근을 지나가던 매일신보 직원 5명은 파편을 맞아 병원으로 실려가고 기생 1명과 하인 신분의 소녀 1명은 부상이 경미해 간단한 치료 후 귀가했다.
퇴근 후 일어난 일이라 피해가 이 정도에서 그쳤지만 일제에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중대 사건이었다. 총독부와 경찰은 경성 시내 한복판에서, 그것도 총독부의 대표적 통치기구인 경찰서가 폭탄 공격을 받았다는 사실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시내 요소요소에 경계망을 펼치고 수사를 대대적으로 전개했으나 폭탄을 던진 사람을 목격했다는 신고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범인으로 의심되는 사람이 삼판통(현재 후암동) 304번지에 은신해 있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일경은 첩보를 토대로 탐문 수사를 벌였다. 그 결과 그 집은 고봉근의 집이고 고봉근의 손윗 처남인 김상옥이 은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김상옥이라면 일경도 잘 알고 있었다. 3년 전 수배 대상자에 올랐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일제 경찰과 총격전을 벌인 것은 3·1운동 후 처음

▲ 김상옥 열사

김상옥은 서울 종로구 효제동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집안 탓에 어려서부터 직공이나 대장장이로 일을 하며 돈을 벌었다. 15세 되던 해에 동대문교회 부설 야학교에서 배움의 갈증을 달래고 민족의식에 눈을 떴다. 주경야독하는 고단한 일상 속에서도 악착같이 돈을 모아 19세에 대장간을 차리고 22세에 창신동에 ‘영덕 철물상’이라는 번듯한 2층 가게를 냈다. 23세이던 1913년 한훈 등 동지들과 ‘대한광복단’을 조직하고 그해 10월 동대문교회에서 정진주와 결혼했다. 둘 사이에 1남 1녀가 태어났다.
경제적으로는 먹고살 만 했다. 하지만 일제의 국권 침탈과 강압 통치에 대한 분노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26세이던 1916년 한훈 등과 전남 보성군 조성면의 헌병대를 기습, 무기를 탈취하고 반민족분자 2명을 처단했다. 1918년 일본 상권에 맞서 조선물산장려운동에 앞장서고 1919년 3·1운동 때 파고다공원에서 독립 만세를 외쳤다. 1919년 4월 1일에는 동대문교회 청년부 학생들과 함께 항일운동 조직인 ‘혁신단’을 결성하고 사재를 털어 지하신문 ‘혁신공보’를 발간했다. 1919년 8월 체포되어 종로경찰서에서 고초를 겪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40여 일 만에 풀려났다.
김상옥은 더 적극적인 투쟁 방법을 모색했다. 1920년 1월 혁신단의 여성단원 이혜수의 종로구 효제동 집에 동지들과 비밀리에 모여 총독, 고관, 친일파를 처단하기로 뜻을 모으고 암살단을 조직했다. 당시 북만주 일대에서 항일 투쟁을 벌이고 있던 김좌진의 북로군정서에서 권총 3정과 탄환 300발을 지원받아 북한산 깊숙한 곳에서 사격술도 연마했다.
그러던 중 미국 상하원 의원단과 가족 등 40여 명이 중국을 거쳐 1920년 8월 24일 경성을 방문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김상옥은 입국에 맞춰 행사장에 나올 사이토 마코토 총독을 비롯 일제 고관들을 처단함으로써 일제의 침탈을 세계에 알리고자 했다. 일경은 혹시 있을지 모르는 불상사에 대비해 예비검속을 실시했다. 시위를 주도할 것으로 예상되는 주요 인물들을 사전에 잡아들여 감금하는 등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김상옥도 혁신단 사건 이후 경찰의 요시찰자 명부에 오른 터라 예비검속 대상자였다.

상해로 망명… 김원봉의 의열단에 가입

일경이 김상옥의 집에 들이닥친 것은 1920년 8월 23일 오전이었다. 당시 김상옥은 집과 붙어 있는 철물점 2층에서 무기를 가져올 한훈 대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경이 닥쳤을 때 2층에서 일경의 태도를 살펴보니 무슨 단서를 잡고 찾아온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예비검속에 응했다가 거사가 수포로 돌아갈 것이 우려되어 옆집 지붕을 타고 달아났다. 일경은 김상옥이 보이지 않자 집을 샅샅이 뒤져 암살단 취지문, 경고문, 암살단 가입서와 명부, 암살 대상자 목록 등 각종 기밀 서류를 찾아냈다. 한훈은 이 사실을 모른 채 권총과 실탄을 소지하고 김상옥의 집에 갔다가 일경에 체포되었다. 이후 10여 명의 다른 대원들도 체포되고 일부는 수배되었다.
일제는 서울시내 전역의 경계를 강화하고 8월 24일 경성역에서 예정된 미 의원단 환영 행사를 취소했다. 김상옥은 경찰의 수사망에서 피해 있다가 1920년 10월 상해로 망명, 김원봉의 의열단에 가입했다. 그리고 김원봉에게서 권총 3정, 신익희에게서 권총 1정, 임시정부 등에서 폭탄 6개와 실탄 800발을 받아 1922년 12월 1일 안홍한 동지와 함께 국내로 잠입했다. 임무는 총독·고관 암살과 관공서 등 주요 시설 폭파였다. 1923년 1월 12일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것도 임무의 일환이었다. 김상옥은 종로서에 폭탄을 투척한 후 은신처에 숨어 있으면서 1월 17일 남대문역에서 열차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가는 사이토 마코토 총독을 저격할 계획 짜기에 골몰했다. 은신처는 남대문역에서 가까운 삼판통의 한 집으로 바꾸었는데 막내 여동생과 매제 고봉근의 살림집이었다.
일경 20여 명이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김상옥을 잡기위해 삼판통 고봉근의 집을 에워싼 것은 영하 18.8도의 추운 날이던 1월 17일 새벽 5시 경이었다. 일경의 돌격조가 널빤지를 잇대 만든 허술한 담장을 뛰어넘는 동안 나머지 일경들은 집을 에워싼 채 매복했다. 그러나 김상옥은 일경에게 총을 쏘고 현장을 빠져나왔다. 김상옥의 총에 맞아 일경 1명이 즉사하고 3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김상옥은 집 뒤쪽 담을 넘어 산속으로 도망쳤다. 일경이 추격하려 했으나 어둠이 가로막았다. 일경은 날이 밝자마자 남산을 중심으로 광역 포위망을 구축했다. 당시 신문 기사에 따르면 “각처에 비상선을 늘어놓고, 쥐새끼 하나 도망하여 나갈 틈이 없이 엄밀히 경계”가 이뤄졌다. 당시 남산의 등성이와 골짜기에는 이틀 전 내린 눈으로 가득했다. 일경은 추격대를 조직해 김상옥의 발자국을 뒤쫓았다. 발자국은 삼판통에서 시작해 산을 넘어 왕십리까지 이어졌다가 희미해져 김상옥의 소재를 찾지 못했다.

일제 하에서 가장 장렬한 ‘항일 시가전’

김상옥은 서빙고, 한강리, 장충단 고개를 거쳐 왕십리 안정사에서 승려로 변장한 뒤 짚신을 거꾸로 신고, 마장동, 청량리를 거쳐 미아리 근처 이모집에서 유숙한 뒤 1월 18일 과거 암살단을 함께 조직했던 이혜수 동지의 종로구 효제동 집으로 은신처를 옮겼다. 그런데 너무 정신없이 도피하는 바람에 장충단 부근에서 권총 2자루를, 남산 소나무 숲에서 편지 봉투 한 장을 잃어버렸다. 이혜수는 김상옥이 분실했다는 곳에서 2자루의 권총 중 모제르 7연발 권총을 찾아 가져왔다.
이 권총에는 김상옥의 아픈 사연이 담겨 있었다. 1920년 8월 김상옥의 암살단 사건이 실패로 끝났을 때 도주한 김상옥 대신 가족과 동지들이 모진 고문을 당했다. 김상옥과 가깝게 지내던 24살의 여성 장규동도 혹독한 고문을 받고 한 달 만에 풀려났다. 몸은 고문 후유증으로 만신창이가 되었다. 김상옥은 1921년 7월 군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국내에 잠입했다가 장규동을 데리고 상해로 갔다. 그러나 장규동은 건강이 좀처럼 회복되지 않아 1922년 5월 10일 상해에서 생을 마감했다. 김상옥은 상해의 독립운동가들이 건넨 장례비로 사라는 관은 사지 않고 모제르 7연발 권총을 구입했다. 이처럼 모제르 권총은 김상옥에게 호신용 무기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문제는 김상옥이 분실한 편지였다. 일경은 편지를 찾아 분석하고 김상옥의 혁신단 동지(전우진)를 고문한 끝에 김상옥이 이혜수 집에 은신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1,000여 명의 일경이 이혜수의 집을 포위한 것은 1월 22일 새벽이었다. 특공대가 지붕을 타고 마당으로 내려와 일제사격을 가하면서 효제동 일대는 시가전을 방불케 하는 총성으로 뒤덮였다. 이렇게 많은 무장경찰이 출동해 총격전을 벌인 것은 3·1 운동 후 처음이었다.
김상옥은 인근 가옥의 지붕을 타고 넘나들며 일경과 신출귀몰한 접전을 벌였다. 총구는 쉴 새 없이 불을 뿜었고 일경은 속수무책이었다. 김상옥이 항복하지 않고 인근 집에서 계속 대치하자 일제사격이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집주인이 유탄에 맞아 죽고 김상옥은 온 몸 수십 군데에 총상을 입었다. 일경은 3시간에 걸친 총격전으로 15명이 죽거나 다쳤는데도 계속 포위망을 좁혀 들어갔다.
김상옥으로서는 중과부적이었고 탄환도 다했다. 결국 자신의 머리를 향해 모제르 권총 방아쇠를 힘껏 당겼다. 일제하 국내외에서 전개된 의열 투쟁 가운데 가장 장렬하고 대표적인 ‘항일 시가전’은 이렇게 끝을 맺었다. 가족이 시신을 수습하면서 확인한 총상이 11군데나 되고 눈을 감는 최후의 순간까지도 손에서 권총을 놓지 않을 정도로 김상옥의 저항은 초인적이었다.

 

골든글러브(구 야신상)의 주인공 래프 야신은 축구 골키퍼들의 영원한 우상

2022 카타르월드컵이 아르헨티나의 우승으로 끝났다. 최고의 골키퍼에게 주는 골든글러브 역시 아르헨티나의 에밀리아노 마르티네즈에게 돌아갔다. 골든글러브는 1994년 미국 월드컵 때 소련의 전설적인 골키퍼인 레프 야신의 업적을 기념해 ‘야신상’으로 제정되었다가 2010년 남아공 월드컵부터는 골든글러브로 바꿔부르고 있다. 그런데도 여전히 야신상으로 보도하는 언론이 많다. 레프 야신에 대해 알아본다.

‘거미손’, ‘문어발’, ‘신의 손’ 별명의 주인공

레프 야신(1929~1990)은 전 세계 축구 골키퍼들의 영원한 우상이다. 골키퍼로서는 완벽한 189㎝·82㎏의 체격에 동물적인 반사신경과 순발력까지 갖춰 도무지 틈을 주지 않았다. 유난히 팔과 손가락이 길고 검은색 유니폼을 자주 입어 ‘검은 거미손’으로 불렸다. 오늘날 뛰어난 골키퍼를 지칭하는 ‘거미손’, ‘문어발’, ‘신의 손’ 등의 별명도 모두 그에게서 비롯되었다.
야신은 소련 모스크바의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10대 초반부터 공장에서 일을 하면서도 육상, 권투, 농구 등 각종 운동을 섭렵했다. 1949년 군 복무를 마치고 디나모 모스크바에 입단한 그에게 주어진 역할은 아이스하키팀의 골키퍼였다. 1950년부터는 축구팀 골키퍼도 병행했으나 당시 디나모 축구팀에는 명골키퍼가 따로 있어 후보 요원으로 활약했다. 그러던 중 1953년 주전 골키퍼가 부상으로 클럽을 떠나게 되자 야신은 24살의 늦은 나이에 디나모팀의 골문을 책임지는 주전 수문장으로 데뷔했다.
그는 탁월한 점프력과 순발력, 동물적인 반사신경의 소유자였다. 차분하면서도 너그럽기까지 해 동료들로부터 신망이 두터웠다. 디나모 모스크바의 골문은 점차 철옹성으로 변해갔다. 야신은 1954년 국가대표로 발탁되어 1956년 멜버른 올림픽, 1960년 유럽챔피언컵 우승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1963년에는 골키퍼로는 사상 처음으로 유럽 최우수선수(발롱도르)에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이 기록은 지금도 깨지지 않고 있다. 그해 야신은 소련 리그에서 27경기 동안 불과 6실점 밖에 하지 않는 우주방어를 펼쳤다.
1958년 스웨덴 월드컵부터 1970년 멕시코 월드컵까지 4회 연속 월드컵 본선에 출전해 스웨덴 월드컵(1958년)과 칠레 월드컵(1962년)에서는 팀을 8강에, 영국 월드컵(1966년)에서는 팀을 4강에 올려놓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 월드컵 본선에는 총 13게임에 출전, 4게임 무실점의 기록을 세웠다. 북한이 돌풍을 일으킨 1966년의 영국 월드컵에서 북한을 3-0으로 물리칠 때도 수문장은 야신이었다.
그러나 야신에게도 씻을 수 없는 흑역사가 있다. 1962년 칠레 월드컵에서 소련은 콜롬비아전에서 후반 23분까지 4-1로 크게 리드했다. 그러나 야신은 8분 만에 3골을 허용했다. 콜롬비아 선수의 코너킥이 그대로 골문으로 빨려 들어가도 막지 못했다. 소련은 개최국 칠레와의 8강전에서 1-2로 패했다. 야신은 패배의 책임을 홀로 뒤집어썼다. 소련 팬들은 야신이 월드컵 경기 중 뇌진탕에 걸린 몸으로 버텼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 채 야유를 쏟아냈다.
은퇴 경기는 동서 냉전이 한창이던 1971년 5월 27일 모스크바에서 펼쳐졌다. 레닌스타디움에서 유럽올스타 팀을 상대로 벌어진 은퇴 경기에는 세계 축구계를 호령해온 펠레, 에우제비오, 베켄바워 등이 참석해 경기장을 꽉 메운 10만 명의 관중과 함께 마지막 경기를 축하해주었다.
그때까지 야신의 기록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국가대표로 뛴 17년 동안 A매치(국가대표 간 경기) 78경기에서 70골(평균 실점률 0.89)을 허용하고 270회의 페널티킥 상황에서 무려 150개의 슈팅을 막아냈다. 디나모 모스크바 주전 선수로는 326경기에 출장, 160번의 클린시트와 254골 허용함으로써 5번의 리그 우승과 3번의 FA컵을 팀에 안겨주었다. FIFA는 이런 야신의 공적을 인정해 월드컵 최고의 골키퍼를 가리는 ‘야신상’을 제정, 1994년 미국 월드컵부터 2006년 독일 월드컵까지 주인을 가렸다. 2020년 매년 유럽 최고 축구선수에게 ‘발롱도르’를 수여하는 프랑스풋볼이 ‘역대 베스트11’을 선정했을 때 야신에게 골키퍼 장갑을 선물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미 팬암기 폭발’(1988년)의 전말과 카다피(리비아)·미국 간의 20년 전쟁

미 법무부가 1988년 270명의 사망자를 낸 ‘팬암 103편 항공기 폭발 사건’ 용의자의 신병을 확보했다고 2022년 12월 11일 미 언론이 일제히 보도했다. 34년간 끈질기게 수사를 계속한 끝에 폭탄을 운반한 리비아 정보요원을 찾아내 구금했다는 것이다. 이른바 ‘로커비 사건’으로도 불리는 ‘팬암 103편 항공기 폭파 사건’에 대해 알아본다.

리비아 카다피와 미국의 20년 전쟁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1942~2011) 대위가 군사쿠데타에 성공해 전권을 장악한 것은 1969년 9월이었다. 카다피는 ‘아랍민족주의 기수’ 역할을 자임하면서 외교적으로는 반제국주의와 반식민주의를 표방했다. 공개 석상에서도 거리낌없이 미국과 서방의 대아랍 정책을 비난하고 서방국가들을 경원시했다. 이 때문에 아랍권에서는 인기가 높았으나 서방국가들은 ‘국제사회의 이단아’ ‘중동의 미친개’ 등으로 낙인찍었다.
카다피가 미국 등 서방세계와 본격적으로 틀어진 시기는 1980년대 중반이었다. 1985년 12월 17일 이탈리아 로마와 오스트리아 빈공항에서 무차별 총격과 수류탄 투척으로 16명(미국인 5명 포함)이 사망한 것이 시작이었다. 미국은 카다피를 배후로 지목, 1986년 1월 리비아와의 경제관계를 모두 끊었다. 카다피는 1986년 3월 리비아 북쪽 지중해의 시드라만에 외국 함정이나 항공기의 출입을 봉쇄하는 것으로 맞불을 놓았다. 미국이 아랑곳하지 않고 시드라만의 국제 해역에서 해군 작전을 펼치자 카다피는 자국 해역을 침범하는 모든 미국 항공기와 함정을 궤멸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래도 미군기가 해역을 침범하면서 군사충돌이 일어나 미 항모에 접근하는 리비아 전투기가 격추되고 함정이 침몰했다.
이런 와중에 1986년 4월 5일 주로 미군이 출입하는 독일 서베를린의 디스코텍에서 폭탄테러가 발생했다. 미군 2명과 터키인 1명이 죽고 미군 50명을 포함해 230명이 다쳤다. 미국은 리비아를 배후로 지목하면서 폭탄 테러 3일 전에 일어난 미국의 TWA 여객기 공중폭파 사건도 리비아의 소행이라고 주장했다. 미국이 보복에 나선 것은 1986년 4월 15일 새벽 2시였다. 야음을 틈타 영국에서 이륙한 미 F-111 전폭기와 지중해 제6함대 항모에서 발진한 미 해군 전폭기가 리비아 수도 트리폴리와 제2도시 벵가지 주변의 군사시설을 초토화했다. 폭격으로 카다피의 양녀를 포함해 37명이 죽고 카다피의 두 아들을 포함해 100여 명이 다쳤다. 하지만 카다피는 건재했다. 리비아도 보복에 나섰지만 미국의 F-111 전폭기 1기를 격추하고 이탈리아 내 미군 레이더 기지를 공격하는데 그쳤다.

'미 팬암기 폭발 사건'의 전말

이런 가운데 리비아 폭격 후 2년 반이 지난 1988년 12월 21일 오후 7시 19분, 런던 히스로 공항을 출발해 뉴욕 존 F. 케네디 공항으로 가던 미 팬암기(보잉 747)가 스코틀랜드 로커비 상공에서 공중폭발했다. 이 사고로 259명의 탑승자(미국인 189명) 전원과 기체 잔해에 맞은 지역주민 11명 등 모두 270명이 사망했다. 사고기는 독일의 프랑크푸르트를 출발해 영국의 런던을 경유한 뒤 미국의 뉴욕으로 가는 중이었다. 사고가 일어나기 보름 전, 핀란드 주재 미 대사관에 프랑크푸르트발 뉴욕행 팬암기를 폭파하겠다는 익명의 전화가 걸려왔으나 핀란드 정부와 팬암사는 늘상 있어온 협박 전화로 여기고 운행을 강행한 것으로 뒤늦게 알려졌다. 사건은 ‘팬암기 폭발 사건’ ‘로커비 사건’으로 불리며 전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당초 수사팀은 이란의 사주를 받은 팔레스타인 테러 단체를 가장 유력한 용의자 단체로 추정하고 수사를 벌였다. 그해 여름 걸프만에서 미 해군이 이란 여객기를 전투기로 오인해 격추한 것에 분노한 이란이 보복했을 가능성이 높아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증거가 발견되지 않아 수사팀은 다시 50개국의 관련 여부를 조사하고 1만 4000여명을 신문하는 등 수사를 대대적으로 확대했다. 그 결과 사고 발생 3년 만인 1991년 11월 리비아 소행이라는 단서를 찾아냈다.
미국이 지목한 용의자는 리비아 정보요원과 몰타 주재 리비아 항공사 직원이었다. 미국은 시한폭탄을 두 용의자에게 전달한 또 다른 인물의 연루 가능성도 확인했지만 정확한 신원은 파악하지 못했다. 미 정보기관이 찾아낸 증거물은 폭발사고 6개월 뒤 추락현장에서 발견한 손톱만 한 시한폭탄장치 파편과 셔츠 조각이었다. 감정 결과 파편은 폭탄을 터뜨릴 때 사용하는 스위스제 시한장치로 밝혀졌다. 미 정보기관은 이와 동일한 장치가 1980년대 리비아 정부에 의해 대량 구매된 사실과 몰타의 패션 상점에서 셔츠 조각을 판매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수사팀은 용의자들이 라디오 겸용 카세트 녹음기로 위장한 플라스틱 폭탄을 셔츠와 함께 가방에 넣은 뒤 가방을 몰타 공항에서 탁송 화물로 보내 프랑크푸르트에서 팬암기에 실려 런던을 거쳐 뉴욕으로 가도록 했는데 가방이 로커비 상공 3만1000피트 고도에서 폭발한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문제는 추락 현장에서 발견한 셔츠를 리비아 정보요원에게 팔았다는 몰타 상인의 증언이 물증과 연결짓는 유일한 고리였다는 점이었다. 그러다보니 폭탄이 내장된 가방이 공항 검색대를 어떻게 통과했는지도 밝히지 못한 채 미국이 일부러 리비아를 지목한 거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카다피와 미국의 화해… 최근 새 용의자 신병 확보

진실이 무엇이든 미국은 용의자들을 기소하기 위해 카다피에게 신병을 요청했다. 카다피는 거부했다. 그러자 유엔 안보리가 1992년 3월 결의안을 채택했다. ▲항공기의 리비아 운항 금지 ▲리비아에 무기 판매 또는 이전 금지 ▲북미 국가들의 대 리비아 외교관계 격하 등을 담은 결의안이었다. 그래도 카다피가 범인 인도를 거부하자 유엔은 ▲리비아의 일부 해외자산 동결 ▲석유수송 터미널 및 정유소용 일부 장비의 수입 금지 등 더욱 강력한 제재조치로 리비아를 압박했다. 카다피는 계속 용의자를 인도하지 않고 미국과 지루한 줄다리기를 벌였다. 그럴수록 리비아 경제는 피폐해지고 카다피는 궁지로 내몰렸다.

▲ 공중 폭발 후 떨어진 팬암기 잔해

결국 견디지 못한 카다피는 “미·영 법정에서는 공정한 재판을 받을 수 없다”며 중립적인 제3국의 법정을 제시하는 타협안으로 화해 제스처를 취했다. 미국과 리비아는 넬슨 만델라 당시 남아공 대통령 등의 중재로 1998년 8월 용의자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재판을 받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용의자들은 1999년 4월 네덜란드로 인도되었다. 재판은 2000년 5월부터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부근 미 공군기지 캠프에서 스코틀랜드 재판부의 주도로 진행되었다. 재판과정에서 용의자들은 혐의를 부인했으나 판사는 2001년 1월의 1심 판결에서 1명(압델 바세트 알리 메그라히)에게는 종신형, 다른 1명(라민 칼리파 피마흐)에게는 무죄를 선고했다. 종신형은 2002년 3월의 2심에서 20년형으로 감형되었다.
재판이 마무리되자 카다피가 서방국가와의 관계 개선을 노렸다. 구체적으로는 2003년 8월 희생자 270명의 가족에게 1000만 달러씩 모두 27억 달러(약 3조 2000억 원)의 배상금을 지불하는 보상안에 합의했다. 유엔은 카다피의 이런 노력을 인정해 제재 11년 만인 2003년 9월 제재 결의안을 해제했다. 카다피는 2003년 12월 19일 ‘대량살상무기(WMD) 포기 및 국제사찰 수용’ 선언으로 화답했다. 미국 역시 2004년 2월 리비아 여행 금지를 해제함으로써 오랫동안 불편했던 관계를 정상화했다. 2004년 9월 20일에는 부시 대통령이 리비아 경제제재를 해제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함으로써 통상 금지, 항공운항 금지, 미국 내 리비아 정부 자산 동결, 석유 수입 금지 등의 모든 제재조치가 풀렸다. 2006년 5월에는 미국이 테러 지원국 명단에서 리비아를 빼고 국교를 정상화했다.
그러나 카다피는 서방국가와의 관계 개선을 제대로 활용해보지도 못하고 2011년 10월 20일 리비아 민주화 세력의 시민군에게 피살되었다. 수감된 메그라히는 암에 걸려 2009년 풀려난 뒤 호화빌라에서 살다가 2012년 5월 고향인 리비아의 트리폴리에서 숨졌다. 그는 죽을 때까지 무죄를 호소하면서 자신을 기소한 조치가 국제적 음모라고 주장했다.
이런 가운데 미국이 정확한 신원을 파악하지 못해 기소하지 못한 또 한 명의 용의자(아부 아겔라 마수드)가 카다피가 죽고 없는 2012년 다른 혐의로 리비아 사법 당국에 체포되면서 수사에 새로운 물꼬가 터졌다. 용의자 마수드는 1988년 정보기관의 지시로 시한폭탄이 설치된 가방을 몰타 공항까지 운반하고, 11시간 후 폭발하도록 타이머를 맞춘 뒤 사건 초기 체포된 메그라히와 피마흐에게 건네줬다고 리비아 당국에 진술했다. 미 FBI는 2017년 이 진술서를 입수한 뒤 보강 수사를 거쳐 사건 발생 32주년이 되는 2020년 12월 마수드를 기소했다. 그리고 리비아와의 협상 끝에 2022년 12월 11일 마침내 그의 신병을 확보함으로써 마지막 수순을 밟을 수 있게 되었다. 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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