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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서 칼럼] ‘나대로 선생’의 시사만화가, 이홍우 화백의 삶과 노래
2023년 01월 13일 (금) 12:25:08 박성서 webmaster@newsmaker.or.kr

노랫말 한마디, 한 소절로 엮는
‘기-승-전-결, 그리고 반전’

▲ 이홍우 화백

‘나의 대표작은 다음 작품’...이라고 늘 강조할 만큼, 항상 더 나은 작품을 위해 최선을 다하던 시사만화가 이홍우 화백(1949~2022)이 지난 12월 23일 별세했다.

화백께서는 손꼽히는 대중가요 애호가이기도 했다. 실제로 음반까지 발표, 가수로도 잠시 활동했다. 노래 제목은 ‘사나이 눈물은 황금이다’. 1970년 4월, 오아시스레코드를 통해 발표되었다.

동아일보에 연재되던 시사만화 ‘나대로 선생’에도 유독 대중가요 노랫말을 소재로 한 촌철살인의 작품들이 많았다. 때로 무릎을 치게끔 만들고 때로는 혀를 내두르게 하던 이홍우 화백의 번뜩이는 재치와 풍자...

이홍우 화백에 대한 추모와 함께 그의 네 컷 만화 ‘나대로 선생’ 중에서 대중가요를 소재로 한 몇몇 작품들을 들춰본다. 그 삶과 노래.
 
글 l 박성서(음악평론가, 저널리스트) 사진 l 최광호(사진작가)


‘신문이 열 냥이면 신문만화는 아홉 냥’

시사만화는 ‘신문의 꽃’인 동시에 특성상 만화이기보다는 언론으로 인정받는다. 때문에 신문만화는 ‘제2의 사설’로도 불린다. 혹자는 되레 사설보다 월등히 낫다고 추켜세우기도 한다. 진실을 알려야 할 기사들조차 채 꺼내지 못하는 ‘말’을, 때로 ‘능청스레’ 꼬집기 때문이리라.
1980년 11월 12일자로 처음 동아일보에 등장한 이래 27년 간 하루도 거르지 않고 국민의 심사를 대신해온 네 컷 만화 ‘나대로 선생’은 우리 시대의 대변자인 동시에 사회의 반사경이었다.

‘나대로 선생’ 또한 대부분 신문만화 주인공이 그러하듯 지나칠 정도로 정치에 민감하다. ‘대통령이 취임도 하기 전에 다음 대통령을 궁금해 할 정도로 정치에 민감한’ 국민들을 대신하기 때문이다. 그렇듯 오랫동안 정계를 조감하고 비판해 온 나대로 선생이야말로 대중들로부터 ‘또 한 명의 정치인’ 취급을 받았다.

대한민국 보통시민의 ‘쓴소리’를 후련하게 대신하는 주인공 ‘나대로’를 유심히 지켜본 독자라면 네 컷 만화 속에 유독 대중가요가 소재로 자주 등장함을 눈치챘으리라. 바로 이 대중가요의 노랫말 한마디, 한 소절을 끌어들여 슬그머니 의중을 빗대거나 세태를 통렬히 풍자하며 기막힌 반전을 끌어내는 묘미, 이 또한 나대로만의 백미였다.

때로는 무릎을 치게 만들고 때로는 혀를 내두르게 할 정도로 기지를 발휘하는 이홍우 화백, 그는 실제로 음반까지 취입하며 한때 가수로도 활동했던 인물이다. 그가 발표했던 음반은 ‘사나이 눈물은 황금이다’. 70년 4월, 오아시스레코드를 통해 발표했던 옴니버스 음반이다.

▲ 1969년에 취입한 '사나이 눈물은 황금이다(1970년 발매)' 음반 재킷. 이로부터 35년 뒤인 2005년 인터뷰 당시 음반에 실렸던 사진 원본을 가지고 와 깜짝 놀라게 하기도

‘사나이 눈물은 황금이다’로 한때 가수로도 활동

이화백이 가수로 데뷔했던 것은 1969년 스무 살 때. 당시 중도일보에 시사만화를 연재하며 동시에 문화부 기자로 활동할 당시 가요 관계자들과 자주 어울리면서부터. 취재 도중 만난 부산의 고향 선배, 작곡가 남국인 씨로부터 음반 취입을 제의받는다. ‘목소리 저음에서의 울림이 매력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고 했다.

처음엔 시사만화가가 무슨 노래냐, 싶었지만 ‘기회는 아무에게나 오는 것이 아니다.’라는 끈질긴 설득에 취입을 감행하기에 이른다. 어쩌면 ‘뉴스만 찾아다닐 게 아니라 그 스스로 뉴스 중심에 서고 싶다.’는 의중도 한몫했다.

‘1. 눈물이 흐르면 하늘을 보며/한없이 걸어가자/그까짓 미련 땜에 흐느끼면서/사나이는 울지 않는다/차라리 웃으면서 보내버리자/사나이 눈물이란 황금이란다/입술을 깨물면서 눈물을 삼키자/아무리 가슴 아파도.

2. 눈물이 흐르면 하늘을 보며/한없이 걸어가자/서러운 추억들을 되새기면서/사나이는 울지 않는다/미련을 두지 말고 보내버리자/사나이 눈물이란 황금이란다/밤하늘 별을 보며 한숨을 삼키자/아무리 가슴 아파도. -사나이 눈물은 황금이란다(고향 작사, 남국인 작곡, 이홍우 노래)’

음반이 발표되자마자 화제가 되면서 연예면을 장식하기도 했고 또 전국 방송국을 돌며 PR을 다니기도 했는데 부친의 완고한 반대에 부딪혀 불과 한 달 만에 접고, 부친의 명으로 곧바로 군에 입대하게 된다.

“당시엔 배호, 남진, 나훈아 등 쟁쟁한 가수들 인기가 하늘을 찌르던 시절이었어요. 남국인 선배는 내 노래도 훌륭하다고 칭찬했지만 까놓고 말하자면 이들과 비교할 때 족탈불급(足脫不及)이지요. 워낙 부친의 반대가 심했던 탓도 있었지만 이건 도무지 내 길이 아니다, 싶었죠.”

결국 방송이 되기 시작하는 노래를 뒤로 한 채 그해 5월 군에 입대, 가수 활동의 꿈을 접는다.

‘소금은 짜야 맛이고 만화는 재미있어야 맛이다’라고 입버릇처럼 늘 강조하는 그로써 어차피 최고가수가 되기는 어렵다는 판단에 따라 제대 후 본격적으로 신문만화에만 전념했다.

7할의 실패에서 깨닫는 3할의 지혜, ‘촌철살인 만화 인생’

▲ 이홍우 화백의 고등학교, 군 복무, 권투선수 시절

비록 가수에의 꿈은 그쯤에서 접어야 했지만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가요애호가이자 실력자다. 전문가 뺨치는 노래 실력 또한 여전했다. 1980년대, 이홍우 화백과 광화문 뒷골목 선술집에서 어울리다 우연히 듣게 된 노래로 필자 또한 가수 활동을 겸하는 게 어떻겠냐고 적극적으로 권유했던 기억이 생생할 정도로. (그 당시 필자는 그가 실제 음반을 발표했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동아일보 시사만화 ‘나대로 선생’에도 대중가요 노랫말을 소재로 한 촌철살인의 작품들이 유독 많았다. 때로 무릎을 치게끔 만들고 때로는 혀를 내두르게 하던 이홍우 화백의 번뜩이는 재치와 풍자... 네 컷 만화 ‘나대로 선생’ 중에서 대중가요를 소재로 한 몇몇 작품들을 들춰본다.

직접 만든 유행어도 많다. 1986년 지침상 보도가 금지됐던 국회 국방위원회 회식 폭력 사건을 “맞고 나니 눈앞에 별이 번쩍하더군”이라고 묘사했다가 보안사에 끌려가기도 했고 1991년 6공 정부를 6신(외교 굽신·경제 망신·치안 불신·정책 등신·날치기 귀신·국민 배신)이라고 불렀다. 경포대(경제를 포기한 대통령), 삼팔선(38세도 선선히 사표를 받아준다) 등이 그가 남긴 유행어.

2001년 제1회 고바우만화상 수상, 2007년 동아일보대상을 수상했던 이홍우 화백은 그동안 몸담았던 동아일보사 국장급 편집위원을 사임한 이후 한국시사만화가협회장과 상명대학교 예술대학 만화애니메이션학과 석좌교수로 재직하며 후학에 힘썼다.

항상 ‘2사 만루의 찬스에서 타석에 들어서는 심정으로 작품에 임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이홍우 화백. ‘피 말리는 마감과의 전쟁’에서 팽팽한 긴장을 풀어주는 것은 늘 그렇듯 평소 즐겨 부르는 노래 한 소절, 한 가락이었다. ‘촌철살인 만화 인생’을 살던 그에게 역전홈런을 날릴 호재였던 동시에 한 자락 여유를 주던 유일한 낙이기도 했다.

▲ 이홍우 화백의 번뜩이는 재치와 풍자, 대중가요를 소재로 한 작품들. (동아일보 시사만화 ‘나대로 선생’ 중에서)

 

 이홍우 화백과의 인터뷰/
‘뒷모습 괜찮은 만화쟁이로 남고 싶다’

●인터뷰 날짜 : 2007년 4월 17일
●장소 : 동아일보 이홍우 화백실
●인터뷰어 : 박성서

 

▲ 이홍우 화백, 2007년

1980년 11월 12일부터 27년 동안 서민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사회적 갈등 해소에 큰 몫을 했던 동아일보 시사만화 ‘나대로 선생’. 시대적 갈증을 풀어주는 반사경 역할을 해왔던 ‘나대로 선생’ 이홍우 화백과의 인터뷰는 지금으로부터 16년 전인 2007년에 이루어졌다.

Q : ‘나대로 선생’이라는 이름을 짓게 된 배경은?
A : ‘나대로’라는 이름에는 불가 언어인 대경대로(大徑大路)의 ‘정도를 걷는다’는 뜻과 함께 ‘나, 갈대로 간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어요. 남들이 뭐라 해도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가는 인물입니다.
(‘나대로 선생’은 1980년 11월 12일 자 동아일보에 첫 연재가 시작된 뒤 2007년 12월 26일 자를 끝으로 27년간 8568호가 연재되었다.)

Q : 만평에서 특히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은?
A : 만화에는 웃음이 있어야 합니다. 최소한의 웃음이 없으면 만평은 외마디 비명이 될 수도 있죠. 우습지 않은 만화는 만화가 아니죠, 소금은 짜야 소금인 것처럼 만화는 재밌어야 만화라고 생각합니다.

Q : 아이디어는 주로 어디서 얻는지요?
A :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을 때는 환장하죠. (웃음) 소재를 찾기 위해서 신문이나 잡지는 물론 개그 프로나 새로 나온 영화까지 모조리 봅니다. 항상 젊은 기자들과 대화하려고 노력하고 우리 애들도 대학생이니까 얘기하면서 새로운 시각을 받아들입니다.

Q : 캐리커처가 많이 들어가는데 특별히 어떠한 데 중점을 두시는지?
A : 사람들은 모두 자기를 이쁘게 잘 그려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죠. 이회창 씨 같은 경우는 날카로운 이미지가 있으니까 안경을 세모꼴로 그렸더니 뭐라 그러고 정주영 씨는 얼굴에 검버섯을 빼달라는 얘기도 하더군요. 그 사람의 특징을 제대로 찾기 위해서는 한 인물에 대해 오랜 시간 주시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Q : 화백께서 갖고 있는 풍자에 대한 정의는?
A : 독자들이 처음에는 폭소하고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난 뒤 나중에 생각하게 되는 페이소스가 있는 것이 진정한 풍자라고 생각합니다.

Q : 우리나라 독자들은 정치에 특히 민감하지 않나요?
A : 대통령이 취임도 하기 전에 다음 대통령을 궁금해할 정도로 정치에 너무 민감하죠. 그런데 앞으로 우리도 경제나 정치가 안정되면 시사만화도 정치 지향적인 만화가 많이 줄어들 것으로 보입니다. 생활이라든지 여가, 취미 이런 쪽으로 바뀔 거라고 봅니다.

Q : 화제를 바꿔서, 최근 가요계를 보고 느끼는 점이나 1970년도에 음반을 발표하신 배경에 대해...
A : 요즈음 가요계는 젊은 가수 위주라 빅 히트되는 인기곡이 없는 것 같아요. 젊은 층만을 겨냥하다 보니 40-50대들에는 어필하는 부분이 없죠. 그나마 90년도 서태지는 우리들에게도 와 닿았는데, 요즈음은 그런 걸 모르겠어요. ‘비’도 그렇고, 중간세대인 장윤정의 ‘어머나’ 그런 정도로... 저는 흘러간 옛노래가 좋습니다.

Q : 화백님의 애창곡은?
A : 배호 노래를 특히 좋아합니다. ‘누가 울어’, ‘돌아가는 삼각지’, ‘안개 낀 장충단 공원’ 등을 비롯해 ‘울고 넘는 박달재’, ‘잘 있거라 공항이여’ 등 옛노래를 좋아합니다.

Q : 특히 배호를 좋아하는 이유를 꼽는다면?
A : 노래를 정말 잘하죠. 돌아가시기 전까지 신장이 안 좋았다가 부어서 돌아갔고, 아리랑 편집장이었던 작사가 전우도 돌아가셨는데,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분들입니다.

Q : 음반까지 취입하시게 된 배경은?
A : 1967년 대학교 2학년 때 중도일보에서 ‘두루미’를 연재하면서 문화부 기자로도 활동하게 되었어요. 이때 지구레코드, 오아시스레코드 등을 자주 방문하게 되면서 오아시스레코드 전속인 작곡가 남국인 씨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마침 부산 선배이기도 하고 그래서 친하게 지내며 술 마시다가 노래를 부르게 되었는데 목소리 좋다고 해서 기타로 취입했죠. 나훈아와 방송을 같이 타기도 했는데, 인기 끌 능력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처음에는 만화가가 노래한다고 다들 특이하게 생각했죠. 저음이 좋다고들 했는데 두서너 번 방송해 보니 이건 아니다, 싶더라구요. 그렇게 음반 한 장 내고 부친의 강요로 70년 5월, 입대했죠.

Q : 당시 취입했던 노래 가사를 기억하시는지요?
A : ‘눈물이 흐르면 하늘을 보며 한없이 걸어 가자...’, 이 노래가 부산에서는 기독교 방송과 KBS에서 1등은 못했어도 2~3등은 했었죠.

Q : 대중가요 애호가로서 좋은 점이 있다면?
A : 만화를 그리면서 적재적소에 노래를 많이 인용하게 되는 점...

Q : 만화 그린다고 집에서 야단맞고 무단가출할 당시를 얘기해주신다면?
A : 중학교 2학년 부산 계성중학교에 들어갈 당시 우수한 성적이었는데, 만화를 그리다 보니 성적도 떨어지고 만화 그려서 각 신문사에 보내 당선 원고료가 집으로 오자 집에서 알고 반대가 심했어요. 61년 10월 9일에는 공납금 두 번 낼 것 가지고 무단가출해서 서울에 올라왔습니다. 두 달간 친척 집에 있다가 다시 부산으로 끌려가서 아버지에게 죽도록 맞았습니다.

Q : 등단 배경은?
A : 고등학교 입시 준비 못 하고 만화에 대한 고집을 부리자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63년에 서라벌고등학교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만화를 그리면서 부산 국제신문 어린이판 연재, 대중잡지 아리랑, 명랑, 소설계, 로맨스 등 연재를 했고 서라벌예대에 들어갔어요. 고등학교 2학년 때 ‘학원 잡지’에 ‘10대의 프론티어’라고 해서 10대 학생이면서 두각을 내는 인물을 뽑았는데, 영화는 중동중학교 2학년 안성기, 바둑은 고등학교 1학년인 조훈현, 만화는 고등학교 2학년인 저 이홍우 등등이 뽑혔는데 지금까지 그 분야에 뚜렷하게 하는 사람은 세 사람 안성기, 조훈현, 이홍우이고 각자 우연히 만난 적 있지요.

Q : 부친께서 매우 엄하셨다고 알려졌는데?
부산시의회 의장을 역임하고 부산시 의원, 96-98년 까지 부산시 재무분과위원장을 지내셨죠. 가족은 5남매, 3남 2녀 중 큰아들입니다.

▲ 이홍우 화백(오른쪽)과 필자 박성서, 1989년

Q : 집안에서 음악계통이나 문화계통에 계신 분이 계시는지?
A : 그 분야에 있는 사람은 없고, 아버지 목소리가 괜찮고, 밑의 동생이 대회 나가서 1등도 하고 노래를 곧잘 합니다.

Q : 그밖에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A : 저는 많은 분들이 생각하시는 것처럼 잡놈 기질이 많습니다. 중학교 때 가출도 해봤고 권투도 배웠고 음반을 내며 딴따라도 해봤지만 한번 시작한 만화만큼은 때려치우지 못했어요. 네 컷 만화의 기본은 기승전결인데 결(結)을 향해 가는 내 만화 인생이 보입니다. 물러날 때를 아는, 뒷모습이 그나마 괜찮은 ‘만화쟁이’로 남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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