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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형의 100년의 기록 100년의 교훈
2022년 12월 15일 (목) 12:03:29 뉴스메이커 webmaster@newsmaker.or.kr

‘아르테미스 1호’ 발사를 계기로 살펴본 미국의 우주 개발 여정

2022년 11월 16일 마네킹 3개와 동물 인형을 실은 미국의 달탐사선 ‘아르테미스 1호’가 발사에 성공했다. 이로써 1972년 아폴로 17호 이후 50여년 만에 인류가 다시 달에 발을 내딛기 위한 대장정이 시작됐다. 아르테미스 프로젝트의 목표는 지금껏 인간이 한 번도 밟아본 적이 없는 달의 남극에 유인(有人)기지를 건설하는 것이다. 프로젝트는 1단계 달 궤도 무인(無人) 탐사, 2단계 유인(有人) 궤도 탐사, 3단계 달 남극 기지 건설, 마지막으로 달 궤도에서 화성 등으로 갈 우주 관문 설치 등 장기 플랜으로 이어진다. 1950년대 후반부터 아폴로 17호가 마지막으로 달에 착륙하고 지구로 귀환한 1972년까지 있었던 미국의 우주 개발 여정을 알아본다.

케네디 대통령 “인간을 달에 착륙시키겠다” 특별교서 발표(1961년 5월)

냉전이 최고조에 달하던 1957년 10월 4일, 구 소련이 인류최초로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하는데 성공하자 미 전역이 발칵 뒤집혔다. 교육제도를 자성하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군사기술까지 소련에 추월당할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팽배했다. 다행히 미국도 3개월 뒤인 1958년 1월 31일 미 최초 인공위성 ‘익스플로러 1호’를 발사함으로써 고조되었던 불안감을 떨쳐내고 새로운 우주비행 계획을 수립하는 작업에 착수할 수 있었다. 미국은 1958년 7월 29일 미 항공우주국(NASA)을 설립하고 곧이어 인간을 우주로 보낼 1인승 유인(有人) 우주비행 프로그램의 첫 단계로 ‘머큐리 프로젝트’(1958~1963)를 발표했다. 1959년 4월에는 존 글렌과 앨런 셰퍼드 등 유인 우주선에 탑승할 7명의 우주비행사도 선발했다.
그러던 중 1961년 4월 12일 소련의 유리 가가린(1934~1968)이 ‘보스토크 1호’를 타고 108분 동안 인류 최초로 유인 우주비행에 성공함으로써 또 다시 미국을 경악케 했다. 미국은 한 발 늦긴 했으나 20여일 뒤인 1961년 5월 5일 ‘머큐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앨런 셰퍼드(1923~1998)가 ‘프리덤 7호’를 타고 미국인 최초로 14분 47초 동안 우주비행을 하는데 성공했다. 셰퍼드는 탄도비행의 정점인 지상 185㎞의 고공을 향해 날았다가 발사 8분 후 다시 대기권으로 진입해 귀환했다. 다만 셰퍼드의 비행이 유리 가가린의 궤도비행보다 한 단계 아래인 탄도비행이었기 때문에 구겨진 자존심이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았다. 탄도는 발사물이 공중을 날아가 포물선 궤도를 그리며 목적물에 이르기까지의 길이나 곡선을 뜻하기 때문에 셰퍼드는 지구를 돌지 못했다. 조바심이 난 케네디 대통령은 1961년 5월 25일 “1960년대가 끝나기 전 인간을 달에 착륙시키고 무사히 귀환시키겠다"는 특별교서를 발표하는 것으로 우주계획 의지를 천명했다.
미국은 두 차례의 유인 우주계획(머큐리, 제미니)에 더해 세 차례의 무인 달 탐사 계획(레인저, 서베이어, 루나 오비터)을 수립, 인간의 달 착륙 계획을 구체화했다. 더불어 우주비행사를 달에 착륙시켰다가 지구로 안전하게 귀환시키는 ‘아폴로 프로젝트’도 수립했다. 그러나 해결해야 할 문제가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무게 45t의 아폴로 우주선을 지구 중력에서 벗어나게 하는 강력한 로켓 개발이었다. 적당한 착륙 지점을 선정하기 위해 달 자체에 관한 충분한 사전지식을 모으고 달 환경에 적합한 장비 개발도 못지 않게 중요했다.

존 글렌, 미국인 최초로 궤도 비행에 성공(1962년 2월)

▲ 아폴로 17호 임무로 달에 착륙한 우주비행사 유진 서넌의 모습.

미국은 1962년 2월 20일 존 글렌(1921~2016)이 무게 1660㎏의 우주캡슐 ‘프렌드십 7호’를 타고 미국인 최초로 궤도비행에 성공함으로써 달 탐사에 한 걸음 더 다가갔다. 프렌드십 7호는 지구를 3바퀴 돌고 4시간 56분 만에 대서양 바하마 군도 부근에 무사히 착수했다. 글렌은 셰퍼드 보다 9개월 뒤 우주를 날았으나 가가린과 같은 궤도비행에 성공한 것이어서 영웅 대접을 받았다. 글렌은 계속 우주를 탐사하고 싶어했으나 당시 소련과의 냉전기에 미국의 최고 영웅을 사고로 잃을 것을 우려한 케네디 대통령이 재탑승을 허락하지 않아 우주비행사 경력은 중단되었다. 대신 1974년 오하이오주 상원의원에 당선되어 정치인으로 화려하게 재기하고 1998년 10월 29일 최고령(77세)으로 우주왕복선 디스커버리호를 타고 우주를 비행하는 노익장을 과시했다.
‘머큐리 프로젝트’는 1963년 5월 15일 고든 쿠퍼가 하룻동안 지구궤도를 22회 선회하면서 우주인들이 가속도의 압력을 견뎌내고 무중력 상태에서 기동하는 능력을 시험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때까지 우주를 비행한 우주비행사는 6명이었다. ‘제미니 프로젝트’(1964~1966)는 ‘머큐리 프로젝트’가 끝나고 아폴로호의 첫 비행이 시작되기까지의 공백 기간인 2년 동안 달 착륙에 필요한 각종 난제 해결을 임무로 부여받았다. 제미니 우주선은 모두 12차례의 실험을 통해 궤도를 마음대로 수정하고 다른 캡슐과의 랑데부나 도킹을 위해 궤도상 적당한 위치로 우주선을 조종하는 기술을 터득했다.
도킹은 우주에서 두 우주선을 결합하는 기술이고 랑데부는 도킹을 위해 두 우주선의 상대속도를 0으로 일치시켜 두 우주선이 도킹할 수 있도록 위치와 방향을 맞추는 기술이다. 따라서 랑데부와 도킹이 이루어진다면 궤도상에서 두 우주선끼리 연료를 공급하고 왕래가 가능해지기 때문에 반드시 확보해야 할 필수기술이다. ‘제미니 프로젝트’의 일환인 첫 랑데부 실험은 아틀라스 로켓 상단에 아제나 로켓을 붙여 발사한 후 분리된 아제나를 제미니 6호의 랑데부 대상으로 삼는 것이었다. 그러나 1965년 10월 25일 아틀라스 로켓에 실려 날아올라간 아제나가 로켓과 분리되자마자 폭발해버려 결국 우주에서 아제나와 결합하려던 제미니 6호 발사는 취소되었다. 그러다가 해결책으로 나온 것이 유인 우주선인 제미니 7호와 6A호를 연속으로 발사해 처음 발사된 것을 랑데부 대상으로 삼는 안이었다.

세계최초 랑데부(1965년 12월)와 도킹(1966년 3월) 성공

랑데부는 1965년 12월 15일 발사된 제미니 6A호가, 11일 전인 12월 4일 먼저 발사되어 지구 위를 돌고 있는 제미니 7호를 쫓으면서 시작되었다. 6A호가 발사되었을 때 7호는 지구로부터 근거리 160㎞, 원거리 328㎞의 타원궤도를 돌며 320㎞ 떨어진 지점을 지나고 있었다. 랑데부는 두 우주선이 시속 2만 8136㎞ 속도로 궤도를 선회하다가 태평양 마리아나 군도 위 약 297㎞ 상공에서 이뤄졌다. 12월 15일 오후 8시 34분, 마침내 두 우주선이 상대 우주선을 옆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되었고 이후 6시간 동안 0.3~90m의 간격을 유지한 채 지구를 2바퀴 돌았다. 제미니 6A호는 랑데부에 성공한 뒤 지구로 개선하고, 7호는 3일 동안 더 우주에 머물러 330시간의 우주 체재 기록을 세웠다. 이로써 인간의 우주 탐험은 또 하나의 벽을 넘게 되었고 미국은 소련의 스푸트니크(최초 인공위성)와 유리 가가린(최초 우주비행사)에 밀려 한껏 구겨진 자존심을 회복했다.
세계 최초 도킹은 역시 ‘제미니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1966년 3월 16일 이뤄졌다. 닐 암스트롱과 데이비드 스콧을 태운 2인승 우주선 제미니 8호가, 41분 전에 발사되어 지구궤도를 돌던 무인위성 아제나 로켓에 5시간 43분의 시도 끝에 세계 최초로 도킹에 성공함으로써 미국의 달착륙 프로젝트는 속도를 더했다. 당초 제미니 8호에 부여된 임무는 도킹 말고 스콧의 우주유영도 있었으나 도킹 후 우주선의 흔들림이 점점 심해져 취소되었다. 제미니 6A호·7호의 랑데부 성공에 이은 제미니 8호·아제나 로켓의 도킹 성공은 미국이 소련의 우주 기술을 앞지르는 분수령이 되었고 우주 개발에도 새로운 전기가 되었다. 1964년부터 1966년까지 총 12회 발사된 ‘제미니 프로젝트’에는 모두 16명의 비행사가 동원되었다.
‘제미니 프로젝트’가 1966년 11월 완료됨으로써 제미니 우주선이 소련 우주선 보스호트보다 우수하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하지만 그 기간은 잠시뿐, 1965년 3월 18일 소련의 알렉세이 레오노프가 세계 최초로 24분 동안 우주유영을 하고, 1966년 2월 3일 소련의 ‘루나 9호’가 달 표면에 연착륙하고 1966년 3월 ‘루나 10호’가 최초로 달의 이면 사진을 촬영해 지구로 전송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우주 개발에 관한 한 소련은 여전히 미국보다 우위에 있음이 확인되었다. 미국의 우주 유영은 1965년 6월 3일 제미니 4호를 타고 우주로 날아간 에드워드 화이트에 의해 36분 동안 이뤄졌다. 미국의 서베이어 우주선은 1966년부터 7회에 걸쳐 달 표면에 연착, 토양의 성분을 검사하고 달 표면에서 본 달의 풍경을 찍어 지구로 전송했다.

닐 암스트롱, 인류 최초로 달 표면에 발 내디뎌(1969년 7월 20일)

아폴로 1호의 첫 유인 궤도비행은 1967년 2월로 예정되었다. 그런데 1월 27일 비행을 앞둔 모의훈련 중 캡슐에서 불이 나 미국인 최초로 우주 유영을 한 에드워드 화이트 소령, 머큐리 계획 창단 멤버인 버질 그리섬 중령, 1800시간 제트기 조종 경력의 로저 채피 소령 등 3명의 우주비행사가 불에 타 죽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후 1968년 10월 아폴로 7호가 3인의 우주인을 싣고 지구궤도를 11일 동안 돌고, 1968년 12월 역시 3인의 우주인을 태운 아폴로 8호가 인류 역사상 최초로 지구 궤도를 벗어나 달 궤도에 다녀옴으로써 소련과의 우주경쟁에서 마침내 미국이 앞서나갔다.
1969년 3월 3일 발사된 아폴로 9호 우주인들은 10일 동안 우주에서 달 착륙선과의 랑데부와 도킹 훈련을 하고, 1969년 5월 18일 발사된 아폴로 10호의 착륙선 ‘스누피호’는 ‘고요의 바다’ 상공 14.5㎞까지 내려가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1969년 7월 20일 오후 10시 56분, 마침내 아폴로 11호 우주비행사 닐 암스트롱이 바위로 뒤덮인 달 표면의 ‘고요의 바다’에 인류 최초로 발을 내디딤으로써 미국은 1957년 소련의 스푸트니크 1호 발사와 함께 시작된 미·소간의 우주개발 경쟁에서 마침내 확실히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었다. 이날이 있기까지 미국은 첫 유인우주선 발사, 첫 지구궤도 선회, 첫 우주 유영 등에서 소련에 뒤져 패배감과 열등감에 시달렸다. 아폴로 11호는 미국에서 쏘아올린 21번째 유인우주선이자 아폴로 프로젝트에 의해 발사된 11번째 유인우주선이었다. 무엇보다 인간의 달 착륙 탐사선으로는 세계 최초였다.
아폴로 11호가 불꽃을 뿜으며 우주를 향해 힘차게 날아오른 시간은 미국 케이프 케네디 기지(발사지) 시간으로 7월 16일 오전 9시 32분이었다. 역사적인 순간의 세 주인공은 닐 암스트롱(1930~2012)과 에드윈 올드린(1930~ ), 마이클 콜린스(1930~2021)였다. 암스트롱과 올드린은 한국전에도 참전하고 각각 제미니 8호와 제미니 12호를 타고 우주를 비행한 베테랑 우주비행사였다. 콜린스 역시 1966년 7월 제미니 10호로 우주 도킹에 성공하고 우주유영까지 한 자타공인의 뛰어난 우주비행사였다.
아폴로 11호는 4일 동안 38만㎞를 날아 달 표면에 접근한 뒤, 모선(컬럼비아호)과 달착륙선(이글호)으로 분리되었다. 지구를 떠난 지 100시간 12분이 지난 뒤였다. 암스트롱과 올드린은 착륙선인 이글호로 달로 내려가고, 모선의 콜린스는 달 주위를 110㎞ 상공에서 계속 돌았다. 콜린스는 암스트롱과 올드린이 달에서 임무를 끝내고 오기까지 28시간 내내 달 궤도를 돌았다. 이글호는 20일 오후 4시 17분 40초에 달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달에서 모두 21시간 38분을 보낸 뒤 21일 오후 1시 55분, 역(逆) 분사 로켓을 작동시켜 수직으로 날아올랐다.
26회나 달 주위를 회전하며 기다리던 모선 컬럼비아호와 도킹한 후 세 우주인이 지구로 향한 시간은 22일 오후 1시 39분이었다. 그들이 달에서 이륙하기 2시간 전, 소련의 루나 15호는 아폴로 착륙지점으로부터 500마일 떨어진 ‘위기의 바다’에 추락했다. 아폴로 11호는 24일 오후 12시 50분, 하와이 남서쪽 1500㎞에 위치한 태평양에 무사히 착륙했다. 발사 이래 119시간 18분이 소요된 120만㎞의 우주여행이었다.

암스트롱 이후에도 총 6차례에 걸쳐 12명이 달에 발 디뎌

‘최초’라는 점 때문에 아폴로 11호가 모든 각광을 독차지하고 있지만 이후에도 계속 인간이 달에 내려 총 6차례에 걸쳐 12명이 달에 발을 디뎠다. 아폴로 13호는 달궤도에서 고장을 일으켜 자칫 달에 추락할 뻔했으나 극적으로 생환했고 1961년 미국인 최초로 우주비행을 했던 앨런 셰퍼드는 1971년 2월 아폴로 14호의 우주인으로 달에서 골프를 치기도 했다. 1972년 12월 7일 발사된 아폴로 프로젝트의 마지막호(17호)에는 선장인 유진 서넌, 사령선 조종사인 로널드 애번스, 달 착륙선 조종사인 해리슨 슈미트 3명의 승무원이 탑승했다. 이중 슈미트는 우주비행만을 목적으로 훈련받은 사람이 아닌 첫 지질학자 출신의 우주비행사였다. 12월 11일 달에 발을 디딘 그가 달 표면을 걷어차고 어린아이처럼 흥분해서 껑충껑충 뛰어다니는 모습이 지구에 생중계되었다. 슈미트는 20세기 달을 탐험한 마지막 지구인이자 유일한 민간인으로 기록되었다.
아폴로는 원래 20호까지 발사하기로 계획되어 있었으나, 소련과의 달 착륙 경쟁에서 승리해 점차 관심에서 멀어지고, 베트남전으로 인해 재정 압박이 심해져 NASA의 예산이 삭감되면서 17호까지만 진행되고 이후 계획은 모두 취소되었다.
아폴로 프로젝트 성공의 또 다른 주역은 2차대전 때 독일의 ‘V’ 로켓을 개발해 영국을 공포에 떨게 한 베르너 폰 브라운(1912~1977)이었다. 2차대전 후 미국으로 망명한 그는 자신의 주도로 개발한 로켓으로 1958년 미 최초의 인공위성 익스플로러 1호를 성공적으로 발사했다. 1960년 NASA 내 마셜우주센터 소장으로 활동할 때는 아폴로 프로젝트에 쓰일 새턴 로켓 개발을 주도했다. 시험용 첫 새턴 I(1961년 10월)과, 성능을 개량한 새턴 IB(1966년 2월) 발사를 거쳐 마침내 완성한 새턴 V(5호) 로켓으로 아폴로 4호·6호(무인)와 아폴로 8호~17호를 우주로 날려보냈다. 새턴 V(5호) 로켓은 높이가 100m가 넘고 무게도 3000t이나 되는 3단계 로켓으로 그때까지 인류가 개발한 로켓 중 가장 무겁고 복잡하고 돈이 많이 든 발사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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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년 동안 거꾸로 걸려있던 ‘추상화 대가’ 피에트 몬드리안의 그림

독일의 한 큐레이터가 추상미술의 거장 피에트 몬드리안(1872~1944)의 그림이 77년 동안이나 거꾸로 걸려 있었다는 주장을 최근 제기했다. 문제의 그림은 1941년작 ‘뉴욕 시티1’으로 빨강·파랑·노랑·검정색의 접착테이프가 불규칙한 격자무늬를 이룬 모양이다. 큐레이터의 주장이 옳다면, 1945년 뉴욕현대미술관(MoMA) 첫 전시 당시부터 누구도 ‘오류’를 눈치채지 못한 셈이다. 몬드리안 개인사와 화풍을 알아본다.

사물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 화가 임무라고 생각

20세기 추상화의 두 축은 피에트 몬드리안의 ‘차가운 추상’과 바실리 칸딘스키의 ‘뜨거운 추상’이다. 몬드리안이 엄격하고 질서 정연한 구도 위에 절제된 색의 사용으로 이지적인 추상을 추구했다면 칸딘스키는 특별한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화면을 구성했다. 이들 말고 1명의 추상화가를 더 꼽으라면 ‘절대주의 추상’으로 유명한 카지미르 말레비치가 있다.
몬드리안(1872~1944)은 네덜란드에서 태어났다. 칼뱅파 초등학교 교장인 아버지가 종교적 환상에 매달려 가족을 돌보지 않은 탓에 집안은 가난을 면치 못했다. 경제적 어려움과 교육 부족, 그리고 절제된 금욕주의적 성장 배경은 어린 몬드리안을 자기만의 세계로 이끌었다. 몬드리안의 그림은 30대 중반이던 1907년 큰 변화를 겪었다. 형태보다 원색을 대담하게 사용하는 후기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접한 것이 계기였다.
1909년 가입한 ‘신지학 협회’도 화풍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신지학은 신의 심오한 본질이나 행위에 관한 지식을 신비적 체험이나 특별한 계시에 의해 알아가고자 하는 종교철학이다. 몬드리안은 신지학의 영향을 받아 모든 사물 속에는 그것을 관통하는 보편적인 본질이 내재해 있으며, 그 본질은 궁극적으로 조화로운 상태를 이루고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그는 사람들이 쉽게 알아볼 수 없는 사물의 본질을 작품을 통해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 화가의 임무라고 생각했다.
몬드리안은 1911년 프랑스 파리로 활동지를 옮겨 그곳에서 새로운 조형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비구상적 경향의 ‘나무’ 연작은 그 첫 시도였다. 몬드리안의 화폭에 등장하는 나무들은 서서히 형체가 사라지고 미로와 같은 선들로 구성되었다. ‘꽃피는 사과나무’(1912)는 몬드리안의 그림이 조용하면서도 단순한 추상적 표현으로 들어선 출발점이었다. 몬드리안에게 자연은 불쾌하고 무질서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준 것은 1차대전이었다. 몬드리안은 전쟁의 혼란기에 절실히 요구되는 조화와 질서를 예술 속에서 구현하고자 했다.

부단히 변화하는 형태들 속에 감춰진 불변의 실재를 포착

▲ 몬드리안 그림 ‘검정 빨강 회색 노랑 파랑 구성’(1920년 작)

몬드리안이 ‘신조형주의’를 추구하기 시작한 것도 1차대전 말기인 1917년이었다. 몬드리안은 같은 생각을 가진 네덜란드 동료들과 ‘데 스틸’(스타일이라는 뜻) 그룹을 결성했다. ‘신조형’은 실제의 자연에는 없는 정확하고 기계적인 질서 창조를 지향점으로 삼았다. 몬드리안이 1920년 발간한 저서 ‘신조형주의’는 그 이론적 해명이다. 신조형주의에 따라 몬드리안이 눈에 보이는 대상의 재현을 사실상 거부하기 시작한 것은 1920년이었다. 화면의 기본적 구조는 수직과 수평의 선으로 구획하고 분할된 면은 3원색(빨강, 노랑, 파랑)과 3비색(흰색, 검은색, 회색)으로 채웠다.
몬드리안은 남성적이고 역동적인 의지를 나타내는 수직선과 여성적이고 평온함을 나타내는 수평선이 적절한 위치에서 서로 교차할 때 ‘역동적인 평온함’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수직과 수평은 ‘구성 요소 상호 간의 순수한 관계만이 순수한 미를 낳는다’는 자신의 이념을 표현한 것이다. 몬드리안은 특수한 대상이 아니라 보편적인 조형 원리를 추출하는 데도 관심이 많았다. 부단히 변화하는 형태들 속에 감춰진 불변의 실재를 포착하는 게 목적이었다.
몬드리안의 그림에서 또 하나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비대칭성의 균형과 조화다. 중심축을 기준으로 서로 대칭으로 배치할 때 균형이 이뤄진다고 생각한 다른 화가들과 달리 몬드리안은 비대칭 속에서 조화와 균형을 찾았다. 이 비대칭의 균형은 수백 년 동안 군림해온 대칭 개념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했다. 이는 회화뿐 아니라 1920년대 건축, 인쇄, 응용미술 전반에 새로운 이정표가 되었다.
오늘날 몬드리안을 대표하고 상징하는 격자형 그림은 1920년에 처음 발표된 ‘검정, 빨강, 회색, 노랑, 파랑의 구성’을 필두로 해서 ‘빨강, 파랑, 노랑의 구성’(1930)까지 다양하다. ‘구성’ 연작은 물체가 지닌 일체의 대상성과 구상성을 철저히 배제하고, 수평선과 수직선만으로 화면을 분할해 크고 작은 정사각형과 직사각형을 공간에 배치하는 그림이다.

기하학적 질서로 가득 찬 뉴욕은 신조형주의의 이상향

몬드리안의 예술 세계가 또다시 변화를 맞은 것은 2차대전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간 1940년이었다. 뉴욕은 몬드리안을 경악케 했다. 자신의 그림처럼 수평(가로)과 수직(세로)의 선으로 반듯하게 구획 정리된 맨해튼 시가지, 꺼지지 않는 네온 불빛이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건물들, ‘옐로 캡’으로 불리는 노란 택시들이 지나다니는 거리는 밝고 활기에 넘쳤다.
전통에 지배당하고 있는 유럽의 곡선 건축과 녹색의 공원에서 염증을 느꼈던 몬드리안에게 기하학적 질서로 가득 찬 뉴욕은 신조형주의의 이상향이자 마음의 안식처였다. 하지만 몬드리안은 자신의 그림과 맨해튼이 다르다는 것을 곧 깨달았다. 즉 소리가 없는 그의 그림과 달리 자동차 소리 등 온갖 소음이 뉴욕의 바둑판 같은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던 것이다. 소음으로 가득 찬 뉴욕의 거리는 나치를 피해 온 그에게 소음이 아니라 삶의 활기로 느껴졌다. 그때 그의 눈과 귀에 들어온 것이 재즈 음악 ‘부기우기’였다.
몬드리안은 1930년대 후반부터 1940년대 초반에 걸쳐 미국에서 대중화된 부기 음악의 경쾌함과 즉흥성에 감흥을 받았다. 부기우기 음악을 접한 후 극도로 색채에 예민하고 수직과 수평에 대해서 엄격했던 몬드리안의 작품에 새로운 변화가 생겨났다. 빠르고 짧은 리듬이 자유롭게 변주되는 재즈처럼 그의 그림에도 예전에 없던 길게 이어지는 색띠 속에 작고 빠르게 반복되는 색점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몬드리안은 그동안 추구해온 검정색의 수직선과 수평선을 과감히 지워버리고 무수한 노란색 직사각형과 정사각형, 그리고 소수의 회색 정사각형과 직사각형으로 정사각형의 화면을 분할해 그림을 그렸다. 그 대표작이 ‘브로드웨이의 부기우기’(1942~1943)다. 그림을 흰색과 교차하도록 함으로써 마치 명멸하는 거리의 불빛 같은 느낌을 준 부기우기 그림은 뉴욕에 대한 몬드리안의 찬가였다. 몬드리안은 이 작품을 완성한 후 급하게 다시 한 점을 더 그리다가 1944년 2월 1일 숨을 거뒀다. 이 미완성작이 마름모의 캔버스 위에 검정색의 수직선과 수평선 대신 정사각형과 직사각형의 조각들을 사용해 승리의 기쁨과 축제의 분위기를 나타낸 ‘빅토리 부기우기’다.
몬드리안 사후에도 그의 작품은 미학적 공간 연출을 위한 가구 디자인에서부터 건축, 그래픽디자인, 전자 제품, 의류, 영화, 음악 등 대중문화까지 파고들었다. 이브 생로랑은 1965년 ‘몬드리안 룩’을 발표해 화제를 불러일으켰고 2011년 프라다, 2012년 셀린까지 현대 패션의 흐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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