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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형의 100년의 기록 100년의 교훈
2022년 11월 15일 (화) 14:17:35 김정형 webmaster@newsmaker.or.kr

<초대 주미공사 박정양展>으로 살펴본 구한말 한미 관계사와 박정양의 삶

미국 워싱턴DC 시내에 있는 주미대한제국공사관이 2022년 10월 11일 ‘초대 주미공사 박정양, 자주외교의 기틀을 닦고 한미 우호의 길을 열다’란 제목으로 한·미 수교 140주년 기념전을 시작했다. 1887~1888년 조선의 첫 전권공사로 미국에 파견되어 조선을 계속 속국으로 두려는 청의 강한 압박 속에서도 자주 외교의 길을 걸으려 했던 박정양(1841∼1905)과 후임 공사들의 행적을 재조명하는 전시는 2023년 4월까지 계속된다.?박정양의 초대 주미공사 부임(1888년) 전후로 이뤄진 한미 관계사를 알아본다.

조선과 미국의 역사상 첫 접촉은 1853년

조선과 미국의 첫 접촉은 1853년 1월 29일 미국 포경선 ‘사우스 아메리카호’가 부산 용당포 앞바다로 표류하면서 이뤄졌다. 부산의 관리들이 배에 올라 심문했으나 “며리계” “며리계”만 반복적으로 들릴 뿐 무슨 얘기를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오늘날 전문가들은 조선 관리들이 “아메리카”에서 ‘아’자를 듣지 못하고 ‘며리계’로 들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선원들은 배에서만 머물다 1853년 2월 8일 조선을 떠났다.
조선 땅을 처음 밟은 미국인은 미국 포경선 ‘투 브러더스호’에 타고 있던 4명의 선원이었다. 그들은 선장의 횡포에 시달리다가 작은 배를 타고 탈출해 표류하던 중 1855년 7월 2일 강원도 통천 해안가에 상륙했다. 조선 관리들이 의사소통을 시도했으나 말이 통하지 않았다. 그들은 결국 서울을 거쳐 북경으로 보내졌다가 상해 주재 미국영사를 통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1866년 6월 24일에는 당시 문헌에 ‘사불(士佛)호’로 기록된 미국 상선 ‘스쿠너 서프라이즈호’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선원 8명이 평안도 철산부 선천포 해안에서 구조되어 청국을 거쳐 미국으로 돌아간 일도 있었다.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다가 대동강에서 불에 탄 이른바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일어난 것은 그로부터 2개월이 지난 1866년 8월 16일(음력 7월 7일)이었다.
이후 10년 동안 잠잠하던 미국이 다시 조선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1876년 조선·일본의 ‘조일수호조규’ 체결 후였다. 미국의 로버트 슈펠트 제독이 부산에 도착, 그곳 일본영사를 통해 교섭을 원한다는 국서를 조선 조정에 전달한 것은 1880년 5월이었다. 그러나 조선 조정은 미국을 포함해 서양과 조약을 체결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1880년 김홍집이 일본에서 가지고 온, 일본 주재 청국공사관의 외교관 황준헌이 쓴 ‘조선책략’을 고종이 읽은 후, 미국을 ‘영토 욕심이 없는 양대인(洋大人)’으로 인식하면서 상황에 변화가 생겼다. 고종은 청국의 비호 하에 미국 등 우호적 국가들과 수교하면 조선에서 세력균형을 유지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 결과물이 1882년 5월 22일 미국의 슈펠트와 조선의 전권대신 신헌이 제물포에서 체결한 ‘조미수호통상조약’이다. 서양 국가와 처음 체결한 통상조약은 긍정·부정의 양면성을 띠고 있었다. 체결 과정에서 중국의 입김이 크게 작용하고 조약 체결 후 미 정부의 조선 정책이 불개입·친일 정책으로 일관해도 손을 쓸 수 없었다는 점에서는 부정적이었다. 반면 당시 청국이나 일본이 서구 제국과 맺은 조약에 비해 불평등이 약화된 주권국 간의 쌍무적 협약이고 조선·청국 간의 전통적인 조공 관계를 청산하고 주권독립국가로 새롭게 출발했다는 점에선 역사적 의의가 적지 않다는 견해도 있다.

보빙사는 역사상 최초로 서양 문물을 체험한 사절단

▲ 박정양

1883년 1월 미 상원이 조약을 비준함에 따라 그해 5월 루시어스 푸트가 초대 주한 미국특명전권공사로 부임했다. 조선도 상호주의 원칙에 따라 미국에 공사를 파견해야 했으나 재정 부담이 커 1883년 7월 공사 대신 보빙사를 미국에 파견했다. 보빙은 ‘답례로 외국을 방문하는 것’을 뜻한다. 우리 역사상 최초로 서양 문물을 체험하게 된 사절단은 민영익(정사), 홍영식(부사), 서광범(종사관) 등 모두 11명이었다. 유길준, 고영철, 변수, 현흥택, 최경석 등 조선인 외에도 통역을 담당할 중국인 오례당, 미국인 퍼시벌 로웰, 일본인 미야오카 쓰네지로 등이 수행했다. 이 가운데 미국 현지를 안내할 로웰은 우리말은 모르지만 일본어를 어느 정도 구사했다. 로웰은 훗날 명왕성 발견의 길을 연 천문학계의 거물로 성장한다.
보빙사 일행은 1883년 7월 16일 미 군함을 타고 제물포항을 떠나 일본 요코하마에서 태평양 횡단 여객선으로 갈아타고 9월 2일 미국 샌프란시스코항에 입항했다. 그리고 9월 18일 뉴욕 23번가 피브스 에버뉴 호텔 1층 대연회장에서 당시 체스터 아서 미국 대통령에게 국서를 전달했다. 이때 역사에 남을 해프닝이 벌어졌다. 아서 대통령을 보자 마룻바닥에 엎드려 이마가 닿을 정도로 큰절을 한 것이다. 보빙사는 양국 간 문화 차이로 화제를 뿌렸지만 그런 와중에도 자주국의 자존심은 지켰다는 평을 듣는다. 아서 대통령에게 전달한 친서에 청나라 연호 대신 조선의 개국연호를 사용하고, 태극기를 게양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복잡한 통역이었다. 조선어-영어 통역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 ‘중국어-영어’, ‘일본어-영어’, ‘조선어-중국어’, ‘조선어-일본어’ 통역 절차를 밟아야 했다. 예를 들어 아서 대통령이 영어로 말하면, ‘중국어-영어 통역’이 중국어로 옮기고, 이어 ‘조선어-중국어 통역’이 조선어로 옮기는 식이었다. 이걸로는 불안했는지 똑같은 방식으로 ‘일본어-영어 통역’과 ‘조선어-일본어 통역’을 활용해 의사소통에 만전을 기했다.
보빙사는 미국의 공공 기관, 산업박람회, 시범 농장, 병원, 전신 회사, 소방서, 우체국, 상점, 제당 공장, 해군기지 등을 시찰했다. 특히 신식 농업기술과 농기구 등에 관심이 많아 751달러를 들여 타작기, 벼 심는 기계, 쇠스랑, 서양 저울 등 농기구들을 사서 조선으로 탁송했다. 시찰단은 두 팀으로 나눠 귀국했다. 홍영식, 고영철, 로웰, 일본인 통역은 10월 중순 먼저 귀국길에 오르고 민영익, 서광범, 변수는 11월 10일 뉴욕항을 떠나 6개월 동안 파리, 런던, 로마, 카이로 등 유럽 각국을 비롯해 인도, 스리랑카, 싱가포르, 홍콩을 경유하는 조선인 최초의 세계일주 여행을 한 뒤 1884년 5월 31일 귀국했다. 민영익은 이때의 경험을 두고 “암흑세계에서 태어나 광명세계에 갔다가 다시 암흑세계로 돌아왔다”고 표현했다. 유길준은 국비 유학생 자격으로 미국에 남아 한국 최초의 미국 유학생으로 기록되었다.

청나라, ‘영약삼단(?約三端)’을 조건으로 달아 공사 파견 허락

고종은 이후에도 미국에 공사를 파견하지 못하다가 1887년 8월에야 내무협판 박정양(1841~1905)을 주미 특명전권공사로 임명했다. 주유럽 5개국(영국·독일·러시아·이탈리아·프랑스) 전권공사로는 심상학을 임명했다. 그러자 청나라 외교와 통상업무를 관장하는 북양대신 이홍장이 당시 조선에서 상전 노릇을 하던 원세개(위안스카이)를 통해 “청국과 사전에 협의하지 않았으니 사절 파송은 허가하되 전권(全權)은 불허한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하지만 미국의 항의가 있자 ‘영약삼단(?約三端)’을 조건으로 달아 ‘전권 공사’ 파견을 허락했다.
영약삼단은 ▲조선공사가 주차국에 가면 먼저 청국 공사에게 보고하는 것은 물론 그를 경유해 외무부에 가야 하고 ▲공식 행사나 연회석상에서 조선 공사는 청국 공사 다음에 앉아야 하며 ▲중대 사건이 있을 경우 반드시 청국 공사와 미리 협의해야 한다는 것으로, 조선이 청국의 속국임을 대내외에 알리려는 계산이었다. 청국의 압력이 얼마나 드셌던지 심상학은 병을 이유로 유럽 전권공사직을 사임할 정도였다. 심상학의 후임자인 조신희 역시 원세개를 의식해 유럽 현지에 부임하지 않고 홍콩에서 1년 이상 머물다 병을 핑계로 1890년 1월 임의로 귀국해 서울로 들어오지도 못하고 인천에서 곧바로 전라도로 유배되었다.
최초의 주미 공사단은 주미전권공사 박정양(1841~1905)을 비롯 참찬관 이완용, 번역관 이채연, 서기관 이하영과 이상재, 수행원 2명, 무관 1명, 하인 2명 등 모두 10명으로?구성되었다. 이상재는 1881년 조사시찰단 멤버로 일본을 다녀온 개화파였다. 이완용은 왕립 관료 교육기관인 육영학교 출신 엘리트였다. 박정양은 조사시찰단을 이끌었던 온건 개화파였다. 이하영은 일본에서 사업에 실패한 뒤 선교사 알렌을 만나 신문물에 발을 디딘 사람이었고, 이채연 또한 신문물을 접한 젊은 관료였다.
그들은 1887년 11월 12일 미국 군함 오마하호를 타고 조선을 떠났다. 일본 나가사키에서 미국인 의사 호러스 알렌과 합류한 뒤 12월 10일 일본을 출발했다. 공사단은 18일 간의 항해 끝에 12월 28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선객 중에 두창(천연두) 환자가 있어 바로 상륙하지 못하고 1주일 동안 배에 갇혀 있다가 1888년 1월 1일 미국 땅을 밟았다. 공사단은 1월 4일 대륙횡단열차를 타고 1월 10일 워싱턴에 도착했다. 박정양은 1888년 1월 17일 그로버 클리블랜드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정했다.?과거 보빙사 일행이 아서 대통령에게 큰절을 한 것과 달리 목례와 악수로 인사를 나눴다. 하지만 이때도 해프닝이 있었다. 대통령이 접견실에 들어왔는데도 평범한 복장의 대통령을 알아보지 못하고 화려한 복장의 대통령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리며 멀뚱멀뚱 서 있었던 것이다.
박정양 공사 일행은 워싱턴 주재 28개국 공사와 미국의 15개 부처를 순방한 뒤 워싱턴의 ‘O 스트리트의 1513번지’에 있던 피셔옥을 임대해 임시공사관을 열었다. 앨런의 지인인 ‘피셔’의 이름을 딴 집이다. 공관은 자색 벽돌로 새로 건축한 남향 3층집이었다. 임대료는 매년 은화 780원(매월 65원)이었다. 주미공사 일행이 미국으로 출발할 때 영어 실력은 형편없었다. 조금이라도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은 이하영과 이완용 뿐이었다. 박정양은 공사인데도 영어를 전혀 몰랐다. 3등 서기관이었던 이상재는 훗날 “미국의 반벙어리와 조선의 반벙어리가 적당히 절충해 의사를 소통했다”고 회고했다.
박정양이 공사로 부임할 당시, 이미 미국에는 조선인 엘리트가 여럿 머물고 있었다. 갑신정변의 주역이었던 서재필, 서광범, 정난교를 비롯해 민영익의 돈을 훔쳐 미국에 온 민상호와 윤정식, 그리고 갑신정변 후 본국의 소환령에 불응하고 일본에 있다가 미국으로 건너간 이계필 등이 그들이다. 박정양은 이계필 말고는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박정양 초대주미공사는 전형적인 관료형 정치가

박정양은 영약삼단을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외교활동을 펼쳤다. 신임장 제정도 청나라 공사관에 알리지 않고 독자적으로 진행했다. 알렌이 뒤늦게 워싱턴에서 영약삼단의 존재를 알고 박정양이 영약삼단에 따라 청국 공사관을 먼저 방문하면 공사단에서 발을 빼겠다며 반발한 것이 작용했다. 그러자 청국의 시비가 끊이지 않았다. 주미 청국 공사가 박정양의 독단 행동을 일일이 본국으로 보고하면 본국의 이홍장은 이를 한양의 원세개에게 훈령으로 보내고, 원세개가 이를 근거로 다시 조선 정부에 따지면 조선 정부가 박정양을 힐책하는 식으로 괴롭혔다. 결국 박정양은 부임 1년도 안돼 본국으로 송환되는 신세가 되어 1888년 11월 공사관 업무를 후임 공사인 이하영에게 맡기고 이상재 등과 귀국길에 올랐다. 이후 미국 상주 공사관원은 이하영, 강진희, 알렌 등 3명으로 축소되었다.
박정양이 일본에 도착했을 때 분이 덜 풀린 원세개가 그에게 사약을 내리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통에 박정양은 귀국도 못 하고 4개월 동안 일본 땅에 머물렀다. 귀국 후에도 남대문 밖에서 70여 일 동안이나 기다리다 1889년 8월 20일 어렵게 고종을 만나 결과를 보고했다. 고종은 한때 원세개의 압력에 굴복하긴 했지만 박정양을 도승지·호조판서 등 요직에 잇따라 기용해 여전히 깊은 신뢰를 보였다. 박정양의 공사 후임은 이하영(1888.11~1889.6), 이완용(1889.6~1890.9), 이채연(1890.9~1893.5) 등으로 이어졌다.
박정양은 귀국 후인 1888년 11월 순한문체로 쓴 ‘미속습유(美俗拾遺)’를 탈고했다. ‘미속습유’는 박정양이 1888년 11월 귀국길에 오를 때까지 약 11개월간 미국을 관찰하고 쓴 보고서 형식의 견문기다. 박정양은 총 90쪽 분량에 달하는 ‘미속습유’에서 미국의 역사와 제도, 통치구조, 사회­교육시설 등 근대문물을 구체적으로 소개했다. 다만 별도 책으로는 출간되지 않고 박정양의 시문집 ‘죽천고’에 실었다.
박정양은 1895년 김홍집의 2차 내각에 학부대신으로 임명되어 갑오개혁을 추진했다. 1895년 삼국간섭으로 김홍집 내각이 붕괴했을 때는 내각 총리대신 서리에 임명되어 과도 내각을 이끌었다. 1896년 아관파천으로 김홍집이 군중에 살해된 후에는 총리대신 서리와 궁내부대신 서리를 겸임하다가 내각이 의정부로 개혁되면서 의정부 참정대신이 되었다. 이처럼 박정양은 고종의 신임 아래 줄곧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점진적인 개혁을 펼쳤다. 특히 각국 외교관들이 인정할 정도로 청렴결백하고 자신의 직무를 충실히 수행함으로써 전형적인 관료형 정치가라는 평가를 받았다.
초대 주미공사관 일행의 끝은 각기 달랐다. 그중 막내였던 이채연의 죽음은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열흘 뒤 박정양은 “역적들을 공개리에 처단하지 않으면 국가의 정사가 사라진다”고 이완용 등을 처벌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그리고 18일 뒤 죽었다. 이완용과 이하영은 나라를 팔아먹었다. 망국을 목격한 이상재는 계몽운동으로 식민의 시대를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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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전쟁 거론하며 소환한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022년 10월 6일 뉴욕에서 열린 민주당 선거자금 모금 행사에서 “(우크라이나) 상황이 계속 이대로 가면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이래 처음으로 우리에게 핵무기 사용의 직접적 위협이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쿠바 미사일 위기’에 대해 알아본다.

▲ 흐루쇼프(왼쪽)와 케네디

미소 양국의 핵 도박에 전 세계 공포 느껴

1962년 10월 22일 오후 7시, 케네디 미 대통령이 TV와 라디오를 통해 “소련이 쿠바에 장거리 미사일 기지를 건설 중”이라며 “미국과 서방 세계의 안전을 위해 쿠바에 무기를 운반하는 선박에 대해 해상 봉쇄를 단행한다”고 발표했다. 1주일 전부터 미국의 극소수 정책 입안자들끼리만 대책을 논의해오던 ‘쿠바 미사일 위기’의 실체가 마침내 세상에 드러난 것이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미국의 대쿠바 정책이 이렇게 가까스로 가닥을 잡긴 했지만 미국은 “평화냐 전쟁이냐”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여전히 곤혹스러웠고 세계는 인류의 생명을 볼모로 한 미소 양국의 핵 도박에 공포를 느꼈다. 케네디는 사안의 중대성을 의식해 ‘봉쇄(blockade)’ 대신 ‘격리(quarantine)’ 표현을 쓰긴 했지만 그것이 사실상 봉쇄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미국이 쿠바에 건설 중인 소련 미사일 발사 기지를 처음 포착한 것은 케네디의 중대 발표가 있기 8일 전인 10월 14일이었다.?그날 미국의 U2정찰기가 촬영한 항공사진을 분석한 결과, 쿠바 서쪽 4곳의 야자나무 숲속에서 소련의 미사일 기지가 건설 중이고 핵무기를 탑재할 수 있는 일류신28 폭격기가 조립중인 것으로 확인된 것이다.?미국과 145㎞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미국 동부의 주요 도시를 사정권에 넣을 수 있는 미사일 기지가 건설 중이라는 사실에 미 정부는 경악했다. 1961년 4월 17일 쿠바 망명객들을 훈련시켜 쿠바의 피그만 침공을 지원했다가 실패의 쓴잔을 마셨던 미국으로서는 이런 쿠바의 움직임에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련의 니키타 흐루쇼프 서기장이 쿠바에 핵미사일을 배치하기로 결심한 것은 1962년 5월이다. 이유는 세 가지였다. ▲첫째, 피그만 침공을 받았던 쿠바의 카스트로가 흐루쇼프에게 쿠바 방어를 요청한 상황에서 미국의 전복공작으로부터 카스트로 정부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둘째, 미국에 대한 핵전력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소련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은 물론 각종 중거리 미사일과 핵탄두 숫자에서 미국에 한참 모자랐다. 게다가 미국은 1962년 4월 이탈리아와 터키에 소련을 겨냥한 중거리 탄도미사일 주피터를 배치하는 것으로 소련을 위협했다. 이런 이유로 흐루쇼프는 미국에서 멀지 않은 쿠바에 중거리 미사일을 배치함으로써 미국에 대한 핵전력 열세를 만회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셋째, 흐루쇼프는 쿠바 배치 미사일과 서베를린을 맞교환할 수 있다는 계산을 했다. 동독 내에 위치한 서베를린은 소련에게는 큰 골칫거리였으며 미소 냉전의 최전선이었다.
흐루쇼프와 카스트로는 1962년 7월 쿠바 미사일 배치를 위한 비밀협약을 맺었다. 카스트로는 미국이 터키와 이탈리아에 미사일을 배치했으니 양자 외교의 합법적 행위의 일환으로 공개적으로 배치하자고 제안했으나 흐루쇼프는 이를 거부하고 비밀 배치를 단행했다. 곧이어 흐루쇼프는 쿠바에 미사일 발사대를 설치하고 핵탄두와 미사일 부품들을 위장 반입해 현지에서 조립했다.

미 정부, 한동안 강경파와 온건파로 갈려

미 정부는 소련 미사일이 쿠바에 배치된 것을 알게 되자 10월 16일 아침 국가안전보장회의를?긴급 소집했다. 그 자리에서 국가안전보장회의 비상실행위원회(EXCOMM·엑스콤)가 설치되었고 엑스콤은 연일 비밀 대응책을 논의했다. CIA 분석에 따르면, 미사일 발사대는 앞으로 10일 후면 거의 완성될 예정이었다. 그렇게 되면 미국은 쿠바의 핵 공격 위험에 빠지게 된다. 엑스콤은 미사일 기지를 즉각 공격하자는 강경파와 외교적으로 철거시키자는 온건파로 갈렸다. 케네디는 결정은 못했지만 “미국이 애매한 태도를 보이면 소련은 베를린을 비롯한 그밖의 지역에서 또 다른 모험을 시도할 것”이라는 견해에는 동의했다. 그것은 전쟁을 할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공중 폭격과 해상 봉쇄를 두고 엑스콤은 여전히 둘로 갈렸고 케네디는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 미국의 B-47, B-52, B-58 등의 폭격기가 세계 곳곳에 분산된 기지에서 폭탄을 장전한 채 대기하고, 100여기의 B-52는 수백만t의 폭발력을 지닌 폭탄을 탑재한 채 대서양 상공을 비행했다.?케네디가 마침내 ‘해상 봉쇄’로 결정을 내린 것은 10월 20일이었다. 그리고 10월 22일 대국민 발표를 했다.
10월 24일부터 함정 180여 척, 군용기 1100여 기가 동원될 해상 봉쇄는 미 해군이 소련 선박을 정지시켜 무기 탑재 여부를 검색하는 방법으로 진행될 예정이었다. 상황에 따라서는 미소 간에 심각한 무력충돌이 일어날 가능성도 있었다. 10월 23일 흐루쇼프가 쿠바에 대한 미국의 해상 봉쇄를 해적행위로 비난하며 소련 선박에 미국의 봉쇄를 무시하라고 지시하면서 긴장이 더욱 고조되었다. 소련 선박은 서서히 쿠바로 다가가고 있었고 소련 잠수함도 카리브해로 모여들었다. 중재에 나선 우 탄트 유엔 사무총장이 미국에는 ‘해상 봉쇄 해제’, 소련에는 ‘미사일 반입 중지’를 호소했으나 “미사일 철거가 우선”이라는 케네디의 거부로 합의를 끌어내지 못했다.
긴장이 더욱 고조되고 있던 10월 26일 쿠바의 카스트로가 쿠바 주재 소련 대사관을 찾아가 미군의 침공이 현실화될 경우 핵 선제 공격을 하자고 요청했다. 하지만 그 무렵 흐루쇼프는 이미 미국과의 타협을 결심하고 있었다. 그날 흐루쇼프는 텔렉스 용지로 약 2m에 달하는 장문의 편지로 “미국이 쿠바를 침공하지 않겠다고 보장하면 미사일을 철거하겠다”는 뜻을 케네디에게 전했다. 27일에는 “터키의 미국 핵미사일 기지와 쿠바의 미사일을 서로 맞바꾸자”는 두 번째 편지를 케네디에게 보냈다.

쿠바행 소련 선박의 귀환으로 ‘위기의 13일’ 막 내려

이처럼 화해가 모색되던 10월 27일 쿠바 상공을 정찰비행 중이던 미국의 U2기가 쿠바에 설치된 소련의 지대공 미사일에 격추되면서 사태는 다시 긴박하게 돌아갔다. 공군이 보복공격을 주장했으나 케네디가 응하지 않아 파국까지는 가지 않았다. 훗날 알려진 일이지만 10월 27일 핵전쟁이 일어날 뻔한 위기의 순간도 있었다. 미 구축함이 소련 잠수함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소련 잠수함이 핵무기를 탑재한 사실도 모르고 폭뢰를 투하하자 전쟁이 일어난 것으로 착각한 소련 잠수함이 핵어뢰를 장착하고 대응태세에 돌입했던 것이다. 이 같은 위기상황에서 케네디는 흐루쇼프의 두 가지 제안 중 두 번째 편지는 거부하고 첫 번째 편지를 받아들인다는 답장을 보냈다. 흐루쇼프가 받아들일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케네디로서는 실패로 끝나면 공중 폭격을 주장하는 군부의 목소리를 제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위기는 절정으로 치달았다.
그러던 중 10월 28일 흐루쇼프가 모스크바 방송을 통해 미사일 철거와 쿠바로 향하던 소련 선박 16척의 귀환을 명령했다. 이로써 세계를 불안에 떨게 했던 ‘위기의 13일’이 가까스로 막을 내렸다. 미국은 다시는 쿠바 침공을 하지 않겠다고 공개 선언했다. 사태는, 쿠바에 남아 있던 소련 폭격기들이 떠나고 미국이 ‘격리’를 완전히 해제한 11월에 가서야 종결되었다. 미 여론은 케네디 대통령의 지도력에 박수를 보냈고 민주당은 11월의 중간선거에서 승리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1963년 워싱턴과 모스크바 사이에 핫라인이 개설되고 핵전쟁을 피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1963년 8월 ‘제한적 핵실험 금지조약’(모스크바 조약)이 체결되었다. 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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