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24.2.21 수 08:58 전체기사 l 기사쓰기 l 자유게시판 l 기사제보 l 구독신청 l 광고안내 l 회사소개
> 뉴스 > 피플·칼럼
     
김정형의 100년의 기록 100년의 교훈
2022년 10월 11일 (화) 13:14:40 김정형 webmaster@newsmaker.or.kr

김정형 <20세기 이야기>(전10권) 저자


20세기 100년, 국내·외에서 일어난 각종 사건·사실들과 분야별 주요 인물들의 기록이다. 의미와 교훈은 있는지, 후세에 미친 영향은 무엇인지, 선구적 업적인지 등을 살핀다. 빛과 그림자가 늘 함께 하듯 양면성과 명암도 가급적 사실대로 소개한다.(편집자 주)


영화감독 장뤼크 고다르 별세… 그의 영화인생과 ‘누벨바그’ 영화의 전성기

프랑스 영화감독 장뤼크 고다르는 1960년대 ‘누벨바그(새로운 물결)’라는 영화계의 새로운 사조를 이끌었던 중심인물 중 한 명이다. 2022년 9월 13일 92세로 합법적인 안락사를 통해 세상과 작별한 그의 죽음과 함께 누벨바그도 종언을 고하고 영화계에 작가주의라는 말이 풍미했던 시대도 막을 내렸다.

‘누벨바그’는 기존 영화와 차별화된 새로운 영화 흐름
‘누벨바그(Nouvelle Vague)’는 ‘새로운 물결’이라는 뜻의 프랑스어다. 1958년 프랑스의 한 영화 기자가 이 용어를 처음 사용하면서 새로운 영화문법과 영화적 테크닉을 통해 기존 영화와 차별화된 새로운 영화 흐름을 지칭하게 되었다. 누벨바그가 등장하기 전, 기성 영화는 주로 스튜디오에서 촬영하고 판지로 장식한 소품을 이용하거나 얼굴이 잘 알려진 배우들을 기용했다. 그러나 누벨바그 감독들은 신속한 촬영, 새로운 젊은 배우를 통한 동시대의 이야기, 스튜디오가 아니라 자연광을 이용한 야외촬영, 적은 예산과 소규모 인원의 제작방식 등을 고수하며 기성 영화와 선을 그었다. 그들의 촬영현장은 스튜디오가 아니라 거리와 카페 그리고 값싼 방이었다.
프랑스 태생의 프랑수아 트뤼포(1932~1984)와 장뤼크 고다르(1930~2022)는 누벨바그를 태동시키고 흐름을 주도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1940년대 말, 10대였던 두 사람의 영화 갈증을 풀어준 곳은 파리의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였다. 시네마테크는 주로 클래식 영화를 상영하고 영화의 보존·복원과 전시를 하는 공간으로 1936년 설립되었다. 두 사람은 1951년 창간한 전설적 영화 비평지 ‘카이에 뒤 시네마’에도 평론을 쓰며 필명을 날렸다.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는 누벨바그 영화의 신호탄
트뤼포가 발군이었다. 그는 소년기에는 소년원을 들락거린 결손가정의 불량소년으로 지내고, 청소년기에는 학교를 그만둔 뒤 거리와 극장을 배회했다. 하루에 한 편의 영화를 보고 이틀에 한 편의 평론을 쓰던    ‘카이에 뒤 시네마’ 시절(1952~1958)에는 프랑스 영화계의 각종 도발적인 논쟁을 앞서 지휘하며 자신의 존재를 부각했다. 그의 글 중 당시 영화계를 발칵 뒤집어놓고 누벨바그의 출현을 알린 대표적인 글은 1954년 ‘카이에 뒤 시네마’ 1월호에 쓴 ‘프랑스 영화의 어떤 경향’이라는 작가주의 글이다. 이 무명 평론가가 쓴 글의 파괴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기성 영화인들로부터 “아버지의 무덤을 파는 묘굴꾼”, “저널리즘의 불한당” 등 각종 악평이 쏟아졌다.
트뤼포는 폭포수 같은 문체, 영화사와 예술사를 아우르는 방대한 지식, 거침없는 태도로 기성 영화계에 맞섰다. 1957년 4월 ‘아르’지에는 칸 영화제를 공격하는 기사를 써 기성 영화에 선전포고를 하고 5월 칸 영화제 폐막 무렵에는 ‘독자들 모두가 재판의 증인, 잘못된 전통 아래 괴멸하는 프랑스 영화’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어 영화제 관계자들을 분노하게 했다. 기성 영화계가 “그럼 네가 한번 영화를 만들어보라”고 항변하자 트뤼포는 자신의 데뷔작이자 반자전적 영화 ‘400번의 구타’를 연출해 1959년 5월 칸 영화제에 출품했다.
영화는 무관심한 부모와 억압적인 학교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영화와 문학에서 탈출구를 찾았던 트뤼포의 유년시절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트뤼포는 냉담한 부모 밑에서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불행한 소년기를 보냈고 거기서 탈출하기 위해 영화에 모든 것을 걸었다. 영화의 주인공 소년 앙트완이 바로 트뤼포였다. ‘400번의 구타’는 트뤼포의 첫 연출작이었으나 놀랍게도 그해 칸 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하고 6월 파리에서 상영될 때는 45만 명의 관객을 끌어들여 상업적으로도 대성공을 거뒀다. 1960년에는 제25회 뉴욕영화비평가협회 최우수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하며 전 세계에 이름을 알렸다. 이 영화가 갖는 더 큰 의미는 누벨바그 영화의 신호탄으로 평가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트뤼포는 영화감독이라기보다 영화작가로 불린다. 작가가 소설에 개성을 부여하듯 영화에 자신만의 개성을 부여하는 작가주의를 몸소 실천한 영화감독이기 때문이다. 트뤼포를 영화작가로 자리매김한 대표적인 영화가 ‘쥘과 짐’(1962년)이다. 트뤼포와 함께 누벨바그의 기치를 든 장뤼크 고다르는 ‘400번의 구타’가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을 듣고 ‘아르’지에 “우리는 이겼다.…전투에서 이긴 거다.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의미심장한 글을 남겼다.

▲ 장뤼크 고다르

“고다르 이전에 고다르 없고, 고다르 이후에 고다르 없다”
고다르는 스위스 의사인 아버지와 프랑스 은행 설립자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스위스에서 유년기를 보낸 후 파리로 돌아왔다. 소르본대에서 인류학을 공부하다 중퇴한 뒤에는 시네마테크에서 영화를 배우고 ‘카이에 뒤 시네마’에 쓴 영화평으로 이름을 알렸다.
그의 영화감독 데뷔작은 트뤼포의 시나리오를 토대로 만든 ‘네 멋대로 해라’(1960)다. 영화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데뷔작으로 불리는 영화의 스토리는 단순하다. 경관을 죽인 뒤 도망자 신세로 전락한 좀도둑 청년과 파리에 유학 중인 철부지 미국 여성의 비극적 탈주기가 줄거리의 전부다. 이처럼 영화는 관습적인 스토리텔링 방식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진행되는 줄거리에다 등장인물의 행위를 논리적으로 설명해주지 않았다. 그런데도 고전적 영화 스타일과 현대적 스타일을 가르는 경계이자 누벨바그 영화의 정점으로 영화사에 기록되었다.
비약과 생략이 돌출하는 편집 등을 통해 고다르가 추구한 것은 기존 영화에 대한 관념을 깨는 작업이었다. 장면의 급격한 전환을 일컫는 대담한 ‘점프 컷(jump cut)’, 카메라를 들고서 화면이 흔들리게 찍는 ‘핸드헬드 카메라(handheld camera)’ 등 이전 영화에서 금기시하던 기법을 총동원해 기존 영화 문법을 뒤흔들었다. 카메라는 스스로의 자의식을 갖고 주인공과 이야기와 작가 사이에서 영화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주인공이 갑자기 카메라를 향해 말을 걸고 화면은 점프컷으로 영화의 불문율을 무시하며 “이것은 지금 영화다”라는 것을 의도적으로 강조했다. 고다르에게 중요한 것은 영화가 사실적으로 보이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아니라 감독이 영화로 무슨 말을 하는지를 관객이 자각하느냐 아니냐는 것이었다. 결국 고다르는 영화로 영화를 말했던 영화평론가였던 셈이다.
단 20여 일 만에 촬영한 이 영화로 고다르는 1960년 베를린 영화제 감독상(은곰상)을 받았다. 프랑스 국민 배우로 불렸던 장 폴 벨몽도는 반항아적 이미지의 이 영화를 통해서 세계적 스타로 부상했다. 재미있는 것은 이처럼 영화사에 한 획을 그은 작품으로 평가받았지만 끝까지 본 사람은 거의 없다는 우스개소리가 돌았다는 것이다. 덴마크 출신의 프랑스 배우로 그의 뮤즈로 불리며 누벨바그를 상징하는 인물이 된 안나 카리나(1940~2019)와 1961~65년, 프랑스 배우 안 비아젬스키(1947~2017)와는 1967~79년 각각 결혼 생활을 유지했다.

▲ 프랑수아 트뤼포

1968년 5월 학생운동, 트뤼포와 고다르 갈라놓아
고다르는 여러 면에서 트뤼포와 대조적이었다. 서정적이고 낭만적인 정서를 담고 있는 트뤼포의 영화와 달리 고다르의 영화는 과격했다. 둘의 영화사적 행로는 1960년대 중반부터 더욱 벌어졌다. 트뤼포가 예술과 인생, 영화와 허구 사이의 경계를 성찰하면서도 영화의 전통적 미덕을 고수한 반면 고다르는 영화 개념 자체를 끊임없이 파괴하면서 급진적 좌파 입장을 취한 미학적 혁명가의 길을 걸었다. 고다르는 ‘작은 병정’과 ‘기관총 부대’(1963년), ‘머나먼 베트남’과 ‘중국 여인’(1967년) 같은 영화를 통해서 알제리 독립 전쟁과 베트남 전쟁 등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드러냈다.
1968년 5월의 학생운동은 두 사람을 완전히 갈라놓은 분기점이었다. 누벨바그 그룹 내에서 우파 쪽 입장을 취한 트뤼포와 달리 고다르는 당시 서구 좌파 지식인들을 사로잡았던 모택동주의에 경도되어 형식과 내용은 물론이고 제작과 배급방식에서마저 혁명성을 부르짖었다. 1968년 칸 영화제가 수상작을 내지 못한 것도 고다르의 비난과 영화제 중단 시위 때문이었다. 고다르가 이처럼 대중과 점점 멀어지며 제도권과 싸움을 벌이고 있는 동안 트뤼포는 상대적으로 안정된 조건 속에서 ‘아메리카의 밤’(1973), ‘아델 H의 이야기’(1975) 같은 교양미 넘치는 영화들을 만들었다. 고다르는 ‘아메리카의 밤’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것으로 둘은 친구로도 이념적으로도 결별했다.
그러나 고다르의 신념 역시 좌절의 순간을 맞았다. 영화가 너무 어려워 그가 시도한 다양한 실험적 양식이 주관객층인 노동자와 학생들로부터 외면을 당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셸 푸코는 고다르를 이렇게 평했다. “고다르 이전에 고다르 없고, 고다르 이후에 고다르 없다”.

 


민영환 동상 충정로 이전… 구한말 민영환의 자결, 연쇄적 순국 투쟁 불러


1905년 11월 18일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 분노한 민영환은 단도로 자신의 목을 찔러 자결했다. 고종은 민영환에게 ‘충정(忠正)’ 시호를 내렸다. 해방 직후 서울시는 1946년 10월, 민영환의 별장이 있던 지역의 도로에 민영환의 시호를 따서 충정로 1,2,3가로 개명했다. 그곳의 일제 지명은 죽첨정(竹添町) 1,2,3 정목    (丁目)이었다. 현재 충정로는 충정로 사거리부터 서대문역 교차로까지, 약 800m 길이의 왕복 8차선 도로다. 충정공 민영환 동상은 1957년 서울 종로구 안국동 사거리에 처음 세워졌다가 1970년 종로구 돈화문 옆으로, 2003년 다시 종로구 조계사 인근 구 우정총국 터 근처로 옮겨졌다. 그러다가 최근 충정로의 일부인 서대문구 종근당 건물 앞으로 옮겨져 비로소 이름의 주인을 찾았다.

국권 침탈의 울분을 참을 수 없어 비장한 결심
1905년 11월 18일 새벽 2시에 체결된 을사조약은 연쇄적인 순국 투쟁을 불러왔다. 첫 순국자는 돈의문 밖 배씨 성을 가진 평민이었다. 그는 며칠을 통곡하다가 자살했다. 상류계층인 사대부의 순국 중 국내외에 큰 파문을 불러일으키고 순국과 항거의 도화선이 된 죽음은 민영환(1861~1905)의 자결이었다.
민영환은 경기도 용인에서 을사조약 체결 소식을 듣고 바로 상경해 전 좌의정 조병세와 대책을 논의했다. 조병세는 고령으로 낙향했다가 소식을 듣고 79세 노구를 이끌고 상경한 터였다. 두 사람은 11월 27일 조병세를 소두(疏頭.상소문에서 맨 먼저 이름을 올린 사람)로 하고 관료들이 연명한 상소문을 가지고 궁궐로 들어가 을사5적의 처형과 조약의 파기를 호소했다. 일제가 고종을 협박해 두 사람을 궁궐에서 쫓아냈으나 조병세는 대한문 밖에서 석고대죄하며 상소 항쟁을 계속했다.
민영환은 계속된 상소 활동으로 몸이 쇠약해져 몸을 추스르기 위해 서울 공평동에 사는 의관 이완식의 집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안정을 취해야 했으나 국권 침탈의 울분을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비장한 결심을 했다. 그리고 11월 30일 아침 6시쯤 단도로 자신의 배를 찔렀다. 칼이 작아 깊이 들어가지 않자 다시 목을 찔러 자결했다. 그의 나이 44세였다.
다음날 유족이 시신에 수의를 갈아입히려고 할 때 옷소매에서 서구식 명함 앞뒷면에 한자로 깨알같이 적어놓은 유서 몇 장이 발견되었다. 한 장은 “영환은 죽어도 아니 죽는다(死而不死)”면서 백성들에게 자유와 독립을 회복할 것을 촉구하는 유서였고 다른 한 장은 청국.영국.미국.프랑스.독일 공관 앞으로 보낸 유서 겸 편지였다. 민영환의 자결 후 을사조약에 서명한 하야시 곤스케 일본공사를 비롯해 각국 공사들이 조문했다. 백성들도 남녀노소와 신분의 구분 없이 영전에서 곡을 했으며 기생도 수십 명이 몰려와 땅을 치며 통곡했다. 고종도 한참 동안 목 놓아 울었다.
민영환의 순국은 백성들의 추모 열기를 뜨겁게 하고 반일 의식을 부추겼다. 5번이나 상소를 올린 의정부 참찬 이상설은 맨상투에 흰 명주 저고리만을 걸친 채 서울 종로 네거리에서 “국가와 백성을 이 지경에 빠뜨렸으니 만 번 죽어도 마땅하다”며 땅에 머리를 내리찧었다. 유혈이 낭자한 그 현장을 지켜본 사람 중에는 민영환의 집에 조문을 갔던 김구도 있었다. 고종은 민영환에게 ‘충정(忠正)’ 시호를 내리고 최고 훈장을 추서했다.
민영환의 피묻은 옷과 칼은 민영환 집 뒷방에 봉안되었다. 방문을 잠가둔 지 7개월이 지난 1906년 7월 어느 날 가족이 문을 열어보니 4줄기, 9가지, 48잎사귀가 돋은 푸른 대나무가 마룻바닥 틈으로 솟아올라 있었다. 이 사실이 대한매일신보 7월 17일자에 보도되면서 경향 각지에서 인파가 밀려들었다. 이후 대나무는 민영환의 피에서 자라났다고 해서 ‘혈죽(血竹)’으로 불렸다. 민영환의 집은 혈죽을 구경하고 그의 넋을 기리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문인들은 시를 짓고 노래를 지어 민영환의 충절을 되새겼다. 박은식도 ‘혈죽기편’을 지어 당시 상황을 기록했다. 민영환의 가족은 혈죽을 광목천에 싸서 다락방에 몰래 보관하다가 1962년 고려대 박물관에 기증했다.

▲ 조선말, 궁중화원이나 유명화가에 의해 제작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민영환의 초상화

민영환의 자결, 순국 투쟁 연쇄적으로 불러일으켜
민영환이 목숨을 끊자 민영환과 함께 상소운동을 펼친 조병세와 전 이조참판 홍만식도 민영환이 자결한 다음날(12월 1일) 순국에 동참했다. 뒤를 이어 전 대사헌 송병선이 순국하고 학부주사 이상철과 시위대 군인 김봉학 등 각계각층에서도 순국이 이어졌다. 민영환의 집 행랑에 거처하던 인력거꾼은 뒷산에서 소나무에 목을 매 자결했다. 이렇게 자결한 사람이 1905년 11~12월에만 10명이 넘었다.
조병세는 거듭된 상소에도 일본 헌병에 의해 강제로 가마에 태워지자 국난을 바로잡을 수 없음을 통분하고 가마에서 극약을 마셔 자결했다. 당시 종로 네거리에서 거행된 장례식에는 수천 명의 군중이 우국충정의 정신을 기렸다. 홍만식은 을사조약 전에도 두 차례 자살을 기도했었다. 1884년 동생 홍영식이 갑신정변의 주모자로 사형을 당하고 이에 충격을 받은 아버지까지 자살하자 그 역시 자살을 기도한 바 있고 1895년 민비가 시해당한 을미사변 때도 분을 참지 못하고 음독자살을 시도했다. 이후 그는 나라에 큰 죄를 지었는데도 살아 있다며 ‘미사신(未死臣)’을 자처하다가 12월 1일 끝내 자결하는 것으로 생을 마감했다.
송병선 역시 통분을 참지 못하고 세 차례에 걸쳐 독약을 마시고 자결했다. 그는 대사헌까지 지낸 후 1877년부터 1903년까지 총 23차례에 걸쳐 관직에 천거되었지만 모두 거부하고 후학을 양성하는 데 진력했다. 을사조약 후에는 제자들과 함께 상경해 고종을 직접 대면한 자리에서 국망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대책으로 을사5적 처단, 인재등용, 나라의 기강 확립 등을 내용으로 하는 ‘십조봉사’를 올렸다. 고종에게서 아무런 언질이 없어 며칠 동안 서울에 머무르며 재차 고종을 독대하고자 했으나 좀처럼 기회가 오지 않았다. 일제는 이런 송병선의 행동을 눈엣가시로 여겨 대전으로 압송했다.
송병선은 12월 29일 유서 성격의 상소를 쓴 뒤 후손과 제자를 모아 “도(道)의 수호를 위해 죽음을 선택한다”는 마지막 유지를 남기고 1905년 12월 30일 음독 후 숨을 거두었다. 동생 송병순도 한일합방과 일제의 회유에 항거하며 1912년 자결함으로써 형제 모두 순국열사가 되었다. 김봉학은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군인으로서 이를 막지 못한 것을 개탄하며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할 계책을 짜고 있다가 일이 누설되어 실패하자 독약을 마시고 자결했고 학부주사 이상철은 12월 3일 원통함을 참지 못하고 자결했다.

순국에도 불구하고 당대 평가 마냥 우호적이지 않아
민영환은 민비 집안인 여흥 민씨 가문에서 태어나 어려서 큰아버지 민태호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대원군의 부인 민씨가 민영환의 고모이므로 민영환과 고종은 내외종 간이었고, 민영환의 둘째아버지 민승호가 민비의 부친 민치록의 양자(따라서 민승호는 민비의 양오라비)여서 민영환은 비록 민비와 피를 잇지는 않았지만 민비의 조카였다. 민영환은 20대에 선혜청 당상인 생부 민겸호가 임오군란(1882년) 와중에 척살되고 양부인 민태호는 갑신정변(1884년) 때 개화당 청년들에게 살해되는 개인적인 비극을 겪었다. 둘째아버지 민승호는 이미 1874년 뇌물로 위장된 폭약 상자를 열다가 일가족과 함께 폭사한 상태였다. 이처럼 민씨 일족의 잇따른 죽음은 그들의 가렴주구에 대한 백성들의 원성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짐작케 해주는 대목이다.
민영환도 민씨 가문의 후광에 힘입어 출세 가도를 달렸다. 생부와 양부의 죽음 후에도 이조참판, 예조판서, 병조판서 등 주요 관직을 두루 거쳤으며 동학농민운동 때는 내무부 독판으로 진압에 나섰다. 1895년 을미사변 직전에는 주미 전권공사에 임명되었으나 민비의 시해로 부임하지는 못하고 낙향했다. 민비의 죽음으로 고종의 친정(親政) 이후 22년간 유지되어온 민씨 일족 세력의 세도정치는 사실상 종언을 고했다.
민영환은 낙향한 뒤에도 고종의 신임이 두터워 두 차례나 세계를 순방했다. 첫 번째는 1896년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 축하 특명전권대사로 파견된 해외 순방이었다. 특사단은 1896년 4월 1일 인천 제물포를 출발해 군함.상선.열차 등을 갈아타며 상해~요코하마∼밴쿠버∼뉴욕∼런던∼베를린∼바르샤바 등지를 거쳐 5월 20일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10월 21일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 장장 6개월 20일 동안 민영환이 거쳐간 나라만 11개국에 달했다. 그때의 견문을 기록으로 남긴 ‘해천추범’은 유길준의 ‘서유견문록’과 더불어 당대 제일의 세계일주 기록으로 평가되고 있다.
민영환은 귀국 후 곧바로 군부대신에 임명되어 조선군의 신식 훈련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던 중 1897년 1월 영국.독일.러시아.프랑스.이탈리아.오스트리아 등 유럽 6개국의 특명전권공사로 임명되었고 1897년 3월 영국 빅토리아 여왕 즉위 60주년 기념 축하식에 참석하라는 특명을 받았다. 일행은 3월 24일 인천을 떠나 상해∼나가사키∼홍콩∼인도~수에즈운하~오데사항(흑해)∼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거쳐 6월 5일 영국 런던에 도착, 빅토리아 여왕을 알현한 뒤 미국을 거쳐 7월 17일 귀국했다.
민영환은 두 차례 해외 순방을 하며 각국의 정치.경제.문화.사회.교육.군사상의 발전 등을 눈여겨보았다. 이를 통해 정치제도를 개혁하고 민권을 신장시켜 국가의 근본을 공고히 할 것을 수차례 고종에게 건의했다. 민영환은 1902년 11월 해외 이민사업을 관장하는 ‘수민원’을 설립하고 총재를 맡아 2년간 6,700여 명의 이민자를 하와이로 보내는 데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904년 2월 러일전쟁 발발 후에는 내부대신과 학부대신으로 활동하면서 친일 각료들과 대립하다가 한직인 시종무관장(경호실장)으로 밀려났지만 반일운동은 멈추지 않았다. 5년 7개월간 투옥되었다가 풀려난 이승만에게 고종의 밀지를 주어 1904년 11월 미국으로 떠나게 한 것도 민영환이었다.
이상의 내용으로만 보면 민영환은 애국·순국 열사로 추앙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당대 평가는 마냥 우호적이지 않았다. 전봉준이 중앙 탐관오리의 대표적 인물로 민영준.고영근과 함께 지목한 인물이 민영환이기 때문이다. 민씨 일가를 부패 지도층으로 몰아붙여야 하는 정치적 입장에 섰던 전봉준의 발언만으로 민영환이 부패한 관리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대한제국을 파멸로 이끈 집단 중 한 세력인 민씨 일족의 핵심 인물이라는 점에서 전봉준의 지적이 완전히 틀렸다고만 볼 수 없다는 반론도 있다. NM

김정형의 다른기사 보기  
ⓒ 뉴스메이커(http://www.newsmaker.or.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전체기사의견(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전체기사의견(0)
뉴스메이커About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우)110-999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문로1가 163 광화문오피시아빌딩 14층 뉴스메이커 | 전화 : 02-733-0006 | 팩스 : 02-733-0009
청소년보호책임자 : 안상호
뉴스메이커는 (주)뉴스메이커에서 발행하는 시사종합월간지로서 특정언론과는 전혀 무관한 완전한 자유 독립 언론입니다.
뉴스메이커를 통해 제공되는 모든 콘텐츠(기사 ·사진)는 무단 사용, 복사, 배포시 저작권법에 저해되며,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Copyright 뉴스메이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newsmaker.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