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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형의 100년의 기록 100년의 교훈
2022년 09월 16일 (금) 21:45:09 김정형 webmaster@newsmaker.or.kr

김정형 <20세기 이야기>(전10권) 저자

20세기 100년, 국내·외에서 일어난 각종 사건·사실들과 분야별 주요 인물들의 기록이다. 의미와 교훈은 있는지, 후세에 미친 영향은 무엇인지, 선구적 업적인지 등을 살핀다. 빛과 그림자가 늘 함께 하듯 양면성과 명암도 가급적 사실대로 소개한다.(편집자 주)

대만의 금문도… 중국의 70년 포위·포격에도 버텼으나 다시 위기로 내몰려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 의장의 2022년 8월 대만 방북에 따른 후폭퐁이 거세다. 펠로시 의장이 대만을 떠난 후 중국은 총 12차례에 걸쳐 무인기 19대로 금문도(金門島.진먼다오)를 위협하기도 했다. 대만의 영토이지만 대만 본섬과는 거리가 멀고 중국 본토와는 지척이라는 점에서 우리의 서해5도와 자주 비교되는 금문도에서 지난 70여 년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아본다.

1949년 장개석의 대만 천도(遷都)와 금문도를 둘러싼 구닝터우(古寧頭) 전투
1945년 8월 일본의 패전 후 본격적으로 전개된 국공내전(國共內戰)의 최후 승자는 모택동이었다. 사실상 승세가 중국공산당으로 기울고 국공내전도 막바지에 이르렀음을 전 세계에 알려준 신호탄은 1949년 3월 23일 수도인 북경을 인민해방군이 무혈 입성한 것이다. 인민해방군은 여세를 몰아 장개석 총통의 중화민국 수도 남경(4월)에 진입하고 항주.상해.서안(5월) 등을 점령했다. 8월에는 호남.호북.복건성을, 10월에는 광동성 등 화남 지역 등을 장악했다. 모택동은 대륙의 대부분이 손아귀에 들어오자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국내외에 선포했다.
장개석은 대만(타이완)으로 후퇴할 준비를 하면서도 대만과 마주보고 있는 복건성의 하문도(廈門島.샤먼다오)와 금문도(金門島.진먼다오), 그리고 금문도 북쪽의 마조도(馬祖島.마쭈다오) 등 몇몇 섬들에 중화민국군을 주둔시켰다. 언제든 대륙 반격의 교두보로 쓸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문도가 1949년 10월 17일 인민해방군 수중으로 넘어가 핵심 교두보는 금문도와 마조도 뿐이었다.
금문도는 대만 본토에서는 190㎞나 떨어져 있지만 하문(샤먼)에서는 수㎞에 불과했다. 면적은 울릉도 2배 정도이고 길이는 동서 20㎞, 남북 길이 5~10㎞였다. 마조도는 복건성 연강현에 속한 36개 섬으로 구성된 열도로 남북 54㎞로 길게 뻗어있다. 한편 장개석은 사천성 성도(成都.청두)에서 1949년 12월 7일 대만의 대북(台北.타이베이)으로 천도를 발표하고 12월 10일 성도에서 비행기를 타고 타이베이로 철수했다.
금문도와 마조도 두 섬은, 장개석에게는 본토 수복을 위한 최전방 군사기지였으나 모택동에게는 중국의 턱밑에 위치한 송곳 같은 존재였다. 결국 두 섬을 둘러싸고 점령하려는 인민해방군과 반격의 교두보로 삼으려는 중화민군국 간에 혈전이 불가피했다. 인민해방군은 파죽지세로 대륙을 석권한 바 있어 자신감이 넘쳐났다. 금문도 주둔 중화민국군 병력이 얼마나 되는지 제대로 파악하지 않았고 금문도 상륙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인민해방군이 여기저기서 끌어 모은 300척 목선에 9000여 명의 병력을 태워 금문도 북쪽의 고령두(古寧頭.구닝터우)로 향한 것은 1949년 10월 25일 새벽 2시경이었다. 하지만 섬에 상륙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곳곳에 깔려 있는 지뢰와 빗발치는 총탄, 전차.화염방사기.기관포 등의 포탄이었다. 인민해방군은 상륙 중 병력 3분의 1을 잃었으나 간난신고 끝에 고령두 상륙에 성공, 교두보를 구축했다. 그런데 2진 병력 1만명을 태워오기 위해 섬을 떠나야 할 선박이 갯벌에 설치한 장애물에 걸리고 썰물에 갇혀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구닝터우에 구축한 지휘소도 56시간만에 빼앗겼다. 결국 10월 27일까지 사흘간의 치열한 접전 끝에 인민해방군은 3873명이 전사하고 5175명이 포로로 잡혔다. 중화민국군도 1267명이 전사하고 1982명이 부상했다.

▲ 금문도와 마조도 위치

1950년 6·25전쟁. 1954년 9·3포격전, 1958년 중동 사태
1949년 10월의 구닝터우 전투 후에도 인민해방군이 남부 해안에 병력을 집결시키고 중화민국군이 항전을 준비하면서 금문도의 긴장은 여전했다. 인민해방군은 해군을 확충하고 국공내전 당시 대륙에서 활약했던 정예병들을 동원해 금문도 점령 계획을 짰다. 그러던 중 1950년 6월 25일 갑자기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했다. 미국이 참전을 결정하자 중국은 남부 해안에 집결했던 부대를 만주로 이동시켰다. 금문도를 침공하려던 중국의 정예 병력이 한반도로 빠진 덕에 금문도에는 ‘불안한 평화’가 찾아왔다. 이런 점에서 한국전쟁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몰린 대만에 구사일생의 전환점이었다. 인민해방군이 한국전쟁에 참전한 동안 대만은 금문도 진지를 요새화하고 병력을 증강했다. 해안에는 수천 개 지뢰를 깔았다.  중국은 1953년 한국전쟁이 끝난 후 부대를 다시 남부 해안에 집결시켰다. 그리고 1954년 9월 3일 금문도와 마조도에 대대적으로 포격을 시작했다. 1955년 5월까지 계속된 포격전은 ‘9·3포격전’ 혹은 ‘제1차 해협 전투’로 불린다. 미국으로서는 자칫 전쟁으로 확대될 수 있는 ‘9·3포격전’을 끝내야 했다. 중국에는 핵 공격을 불사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대만에는 상호방위조약으로 보호해 주겠다는 당근으로 응전을 자제시켰다. 미국-대만 간 상호방위조약은 1954년 12월 2일 체결되어 1955년 3월 3일 발효되었다. 1955년 5월 1일 중단된 포격전으로 대만군은 519명, 중국군은 393명이 전사했다.
‘9.3포격전’ 후 대만은 미국과의 상호방위조약에 따라 F-86 세이버 전투기 등을 도입하고 핵탄두를 탑재할 수 있는 순항미사일을 배치함으로써 전력 증강에 박차를 가했다. 중국 역시 소련의 지원을 받아 전투기 시험 비행에 성공하고 동남 해안 여러 성(省)에 철도와 비행장을 건설했다.
포격전이 소강상태로 접어든 1958년 7월 14일 이라크 왕국에서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 파이살 2세를 비롯한 왕족들이 살해되고 왕정이 무너졌다. 중동으로 진출을 모색하던 소련의 움직임이 활발해지는 등 중동의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자 중동 지역에 이권을 가졌던 미국과 영국이 즉각 파병해 중동 지역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중국은 미국의 관심이 중동으로 집중되는 틈을 타 또 다시 침공을 구체화했다.

1958년 8·23포격전
그리고 마침내 1958년 8월 23일 오후 6시, 하문도(샤먼섬)의 해안 포대에서 459문의 대포가 불을 뿜으면서 ‘8.23포격전’이 시작되었다. 수십 척의 인민해방군 함정에서도 금문도를 향해 포탄이 날아들었다. 인민해방군이 이날 하룻동안 금문도에 퍼부은 포탄은 5만 7000발이나 되었다. 대만군도 포탄을 응사하며 격렬히 반격했지만 금문도는 순식간에 불바다로 변하고 부사령관을 포함해 많은 병력을 잃었다. 포격은 이튿날에도 그 이튿날에도 계속되었다.
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미국은 항공모함, 순양함, 구축함 등으로 구성된 제7함대를 대만해협에 급파하고 최신예 전투기인 F-104A 등을 대만에 배치했다. 3800명의 미 해병대도 대만에 상륙했다. 미국은 직접 참전하지는 않았으나 물자보급 지원과 공동훈련에 집중했다. 결국 미국의 지원과 대만군의 끈질긴 저항에 가로막혀 인민해방군은 바다를 건너지 못했다. 그렇다고 명분도 없이 공격을 멈출 수 없어 지루한 포격전만 계속되었다.
중국은 이런 고착된 상황을 타개하려고 9월 24일부터 100여 기의 전투기를 출격시켰다. 이에 맞선 대만의 전투기는 미국의 AIM-9 공대공 미사일로 무장이 가능한 미국의 F-86이었다. 결국 세계 전투사상 처음 실전 배치된 공대공 미사일(AIM-9)에 의해 중국 전투기 10여기가 격추되었다. 공대공 미사일이 뭔지도 모르던 상태에서 당한 일방적인 패배에, 중국은 더 이상의 출격을 포기했다.
게다가 한 달 동안 47만 4000발의 포탄을 날렸는데도 더 이상의 전과가 없자 10월 5일 팽덕회 국방장관이 “금문 포격을 1주일간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1주일이 지난 10월 13일, 또다시 2주간 공격을 중지한다고 발표함으로써 포격전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10월 28일에는 이틀 간격의 공격 방침을 발표했으나 폭탄 없이 선전비라를 잔뜩 채운 포탄이어서 사실상 본격적인 포격전은 중단되었다.
목숨을 건 대만군의 처절하고 끈질긴 저항과 반격에 중국은 결국 금문도 점령을 포기했다. 40여 일간의 포격전으로 대만군은 440명, 중국군은 460명이 전사했다. 인구와 물자.전투력에서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거대한 대륙 중국이 코앞의 왜소한 작은 섬, 금문도를 집어삼키지 못한 건 죽음을 불사한 대만군의 끈질긴 저항과 국민의 의연함 때문이다. 화력에선 중국군이 앞설지 모르나 심리전에선 단연 대만군이 우세했던 것이다.

‘8·23포격전’ 후 금문도 상황
대만은 ‘8·23포격전’ 후 금문도를 군사요새로 변모시켰다. 화강암 지반에 콘크리트로 보강한 지하벙커를 건설하고 이곳에 4만 명 이상의 군대를 주둔시켰다. LST 42척을 정박시킬 수 있는 수로를 파고, 군용트럭과 탱크가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지하갱도도 팠는데 총 길이가 십 수㎞나 되었다. 2017년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상영된 대만 영화 ‘군중낙원(軍中樂園)’은 죽음의 섬으로 변한 금문도에 1969년 주둔한 대만군 병사들과 공창(公娼) 여성들 사이의 사랑을 다룬 작품이다. ‘8.23포격전’ 이후에도 간헐적으로 계속되던 중국의 금문도 포격은 미국과 중국이 핑퐁외교 끝에 서로 수교하게 되는 1979년 1월 1일을 기해 중단되었다. 이후 금문도는 외부와 교류가 활발해졌다. 1982년 여행금지 조치가 해제되고 1990년 출입허가제가 폐지되어 금문도 주민들의 대만 출입이 자유로워졌다. 1992년 11월에는 금문도와 마조도의 계엄령까지 해제되면서 금문도에 주둔하던 10만명 규모의 군대도 서서히 줄어들었다.
금문도가 긴장과 갈등의 장소에서 평화와 교류의 공간으로 탈바꿈한 것은 2001년 양국 정부가 합의한 금문도와 하문도 사이에 무역, 우편, 화물의 직접 교류를 허용하는 ‘소삼통(小三通)’ 정책에 힘입은 바가 크다. 소삼통의 시행으로 금문과 하문은 교류가 빈번해지면서 과거처럼 공동생활권이 복원되었다. 금문도 전역에서는 중국의 위안화가 통용되었고 지하갱도는 중국 관광객을 위한 관광지로 탈바꿈했으며 폭탄 잔해는 관광 상품으로 팔려나갔다. 이랬던 금문도에 최근 다시 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배우 송혜교가 기증한 부조(浮彫)의 주인공 김규식의 파란만장한 삶

배우 송혜교와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가 77주년 광복절을 맞아 중국 중경임시정부청사에 독립운동가 김규식의 부조(浮彫)를 기증했다. ‘대한민국 독립운동가 부조작품 기증 캠페인’의 일환으로 기획된 이번 부조는 가로 80㎝, 세로 90㎝ 크기의 청동으로 제작됐다. 두 사람의 부조 기증은 네덜란드 헤이그 이준 열사 기념관, 중국 상해 윤봉길 기념관, 중국 가흥 김구 피난처 등에 이어 여섯 번째다.

16살 나이에 미국 유학 떠나
김규식(1881-1950)은 해방 전에는 임시정부 각료로 활동하며 중국, 미국, 프랑스 등 해외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했던 독립운동가였다. 해방공간(1945~1948년)에서는 극단적인 좌우의 이념대립 속에서도 여운형과 함께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하며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진력했다. 미군정이 한때 김규식을 이승만 대신 과도정부의 대통령에 앉힐 계획을 세울 정도로 미군정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나 미군정의 단독정부 수립 방침에는 호응하지 않았다. 이런 김규식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권모술수를 쓰지 않는 몇 안되는 정치인” “정치적 카리스마가 부족하고 성격이 우유부단” “명분론에 치우친 이상주의자” 등이 그것이다.
김규식은 부산 동래에서 태어났으나 굳이 고향을 따지자면 강원도 홍천이다. 홍천이 고향인 부친이 대외관계 일을 맡아 동래에 부임했을 때 어머니가 동래에서 김규식을 낳았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김규식이 5살이던 1886년 세상을 떠났다. 그 무렵 부친도 조선과 일본 간의 부정한 물품거래를 고발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유배되자 김규식은 서울 숙부집으로 보내졌다. 그러나 숙부는 경제적으로 어려워 미국인 선교사 호러스 언더우드가 1886년 5월 서울 정동에 설립한 고아원에 김규식을 맡겼다. 1891년 부친이 유배에서 풀려나 부친을 따라 강원도 홍천으로 돌아갔으나 1892년 부친마저 세상을 떠나 다시 서울의 언더우드 고아원으로 돌아왔다.
김규식은 언더우드 고아원이 학교로 발전한 언더우드 학당(1894년, 경신고 전신)과 한성관립영어학교(1896년)를 졸업하고 독립신문에 입사했다. 그러던 중 독립신문 사장 서재필과 언더우드의 도움으로 1897년 가을 16살 나이로 미국 유학길에 올라 1903년 6월 버지니아주 로어노크대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1904년 봄 프린스턴대 대학원에서 영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로어노크 대학 시절 김규식은 1900년 6월경 열린 강연대회에서 1등을 수상하고 1902년 1월 전교 회장으로 피선되었다. ‘The Daun in East(동방의 서광)’ 제목의 연설문은 그 지역 잡지 2월호에 실렸다.
1904년 귀국 후에는 경신학교, YMCA, 배재학당, 숭실학교 등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언더우드의 비서로 활동했다. 당시 언더우드가 김규식을 얼마나 신뢰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 있다. 1906년 언더우드가 유언장을 작성할 때 자신의 아내와 아들보다 김규식을 먼저 언급한 뒤 김규식에게 당시로서는 거금인 500달러와 선교사들이 설립한 회사의 주식 5주를 남긴 것이다.
 

▲ 김규식

일제강점기, 해외를 떠돌며 조국 독립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
김규식은 1910년 일제의 강제 합병으로 조국이 패망하고 일제가 조작한 ‘105인 사건’으로 일제의 압박이 가해오자 1913년 중국 상해로 망명, 신규식이 상해 프랑스 조계 내에 설립한 박달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1918년 8월 상해에서 여운형, 김철, 정인보, 신규식, 신채호 등과 함께 신한청년단을 조직했다. 신한청년단은 1차대전 종전 처리를 위해 전쟁 관련 당사국이 1919년 1월 18일 파리에서 열릴 예정인 평화회의에 김규식을 조선인 대표로 파견했다.
김규식은 2월 1일 상해를 출발해 3월 13일 파리에 도착했다. 그 사이 조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난 것을 알고 파리의 한 건물에 한국대표관을 개설한 뒤 3.1운동 사실을 각국 대표단에게 소상히 알렸다. 1919년 4월 11일 발족한 상해 임시정부는 김규식의 대외 활동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4월 13일 김규식을 임시정부 외무총장 겸 파리평화회의 대표위원으로 임명한다는 신임장을 전보로 타전했다. 김규식은 한국대표관을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위원부로 개칭했으나 독립국 대표가 아니라는 이유로 파리평화회의 회의장에 발을 들여놓진 못했다. 프랑스 정부는 일본 요청을 받아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그래도 김규식은 임시정부 외무총장 겸 파리강화회의 대표 자격으로 열강들을 향해 일본 지배의 부당함을 호소했다. 미국에서 7년간 유학하며 프린스턴대에서 영문학 석사를 받은 김규식은 프랑스어도 능숙했다. 소식지 ‘자유 대한(La Coree libre)’을 내면서 독립 국가의 대표라는 점을 알리려 애썼다. 파리위원부는 3.1 운동 등 한국 독립운동에 관한 소식을 참가국에 알리고 조르주 클레망소 파리평화회의 의장에게는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의 서한을 전달했다.
그러자 유럽 신문들이 파리위원부 활동에 관한 기사를 싣기 시작했다. 파리위원부가 발행한 ‘구주의 우리 사업’에 따르면 1919년 3월부터 1920년 10월까지 프랑스 신문에 한국 관련 기사 게재 건수가 133종 423건이나 되었다. 유럽 전체로는 181개 신문에 517건이나 됐다.?교황 베네딕토 15세도 “한국 교회의 총애하는 자녀들이 받는 핍박에 대해 우려하며 속히 자유와 행복의 생애를 하기를 천주께 기구한다”는 내용의 서한을 파리위원부에 보냈다.
김규식의 이런 노력에도 평화회의의 목적 자체가 서구 제국주의 국가 간 영토 재분할이다 보니 한국 문제는 회의에 상정되지 못했다. 결국 피식민지 국가들의 기대와 희망은 착각이었음이 드러났다. 1919년 6월 28일 파리평화회의를 종결짓는 베르사유조약이 체결되었을 때 김규식은 크게 실망했다. 조약 내용이 입으로만 약소민족과 식민지를 위한 것이지 실제로는 제1차 세계대전 승전국가를 위한 잔치였기 때문이다.

독립운동가로 활동하면서도 교육자 역할에 충실
김규식은 1919년 8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이 있는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에서는 임시정부 구미위원부 위원장으로 발령받아 구미 국가들을 대상으로 조선의 독립을 역설했다. 1919년 9월 상해에서 발족한 통합 임시정부의 학무국장으로 선임되어 귀국을 준비하던 중 격심한 통증이 생겨 1919년 말 뇌종양 제거 수술을 받았다. 부작용으로 간질 증세가 일어나고 신경통과 소화불량에 시달렸으나 건강이 호전되어 상해를 떠난지 3년만인 1921년 1월 상해로 돌아가 임시정부 학무총장으로 활동했다.
김규식은 1922년 1월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피압박인민대회에 여운형, 나용균, 이동휘, 박헌영, 김단야 등과 함께 참석하고 레닌 등을 만나 조선 독립의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그곳에서 공산주의 소련의 실체를 보고 좌절했다. 1922년 5월 러시아에서 상해로 복귀했을 때 상해에서는 임시정부를 창조하자는 ‘창조파’와 기존의 임시정부를 개조하자는 ‘개조파’가 대립했다. 김규식은 창조파 입장에 섰으나 그의 뜻과 달리 임시정부는 개조파가 장악했다.
김규식은 독립운동가로 활동하면서도 교육자 역할에 충실했다. 1923년 상해에 위치한 복단대학과 동방대학에서 영문학을 강의하고, 조선인 학생들의 민족교육을 위해 고등보습학원을 설립.운영했다. 1927년부터는 천진의 북양대학, 1935년부터는 성도의 사천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쳤다. 학생을 가르치면서도 조선인, 중국인, 인도인 등이 1927년 2월 중국 남경에서 결성한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에 참가,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는 한편 중국에서 활동하는 조선의 독립운동 정당들이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상해), 조선민족혁명당(남경), 민족혁명당 등을 결성할 때 적극 참가하고 1944년 4월 임시정부가 주석과 부주석제를 채택했을 때는 민족혁명당을 대표해 부주석으로 취임, 한국독립당을 대표하는 김구 주석과 보조를 맞췄다.

해방 공간에서는 김구·이승만과 함께 우익 3영수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하자 11월 23일 김구 주석과 함께 환국했다. 해방 공간에서는 김구, 이승만과 함께 우익 3영수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혔으나 김규식은 두 사람에 비해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그는 우리 민족의 힘만으로는 민족해방이나 통일민족국가의 수립이 어렵다는 현실을 받아들여 국제정세의 변화를 민족운동의 계기로 활용하고자 했다. 그 결과 1946년 3월 시작한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해 수립되는 정부만이 진정으로 민족의 이익을 대변하는 통일정부가 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미소공위는 2개월만에 휴회되었고 정국은 좌우 양 진영으로 나뉘어 첨예한 갈등과 대립을 반복했다.
이런 상황에서 김규식은 여운형과 함께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미군정을 현실로 받아들여 미군정의 정책에 적극 동참했다. 그 결과 1946년 12월 미군정이 입법기관인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을 설립했을 때 의장에 선임되었다. 그는 궁극적으로는 반소·반미를 뛰어넘어 좌.우익이 힘을 합친 자주적인 임시정부를 수립하고자 했다. 그러나 1947년 7월 19일 좌익 측 파트너였던 여운형이 피살당해 합작운동은 시련에 봉착하고 미소공동위는 완전 결렬되었다. 그래도 김규식은 자신의 구상을 포기하지 않고 1947년 12월 중도파 15개 정당과 사회단체 25개를 통합해 민족자주연맹을 창당하고 위원장에 선임되었다. 민족자주연맹은 남북정치단체대표회의 개최를 주장했다. 이 구상에 김구가 적극 동조함으로써 역사적인 남북협상이 태동했다.
두 사람은 북한의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남북요인회담 개최를 요망하는 편지를 1948년 2월 16일 발송했다. 북한은 3월 25일 평양방송을 통해 “4월 14일부터 평양에서 연석회의를 개최하자”고 제의했다. 1948년 제헌 의원을 선출하는 5.10선거가 임박한 시점에서 북한의 제의는 남한의 정치인들을 들러리로 세우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으나 김규식과 김구는 참여를 굳혔다. 두 사람은 북한으로 올라가 4월 30일 평양에서 김일성.김두봉과 함께 4김 회담에 참가했다. 그러나 이승만과 김구는 물론 김일성과 박헌영이 모두 참가하지 않는 한, 특히 미국의 지원 없이는 합작이고 뭐고 절대로 성공할 수 없다는 점에서 남북연석회의의는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좌우합작운동은 무위로 끝났다. 김규식은 1948년 5.10 총선에 대해 불참가 성명을 발표하면서도 5.10 총선에 따라 구성된 대한민국 정부는 합법적인 정부로 인정했다. 대신 그의 지난했던 역할도 끝나 정치활동은 종지부를 찍었다.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9월 26일 서울에서 납북되어 12월 10일 평북 만포에서 지병인 천식 악화로 숨졌다. 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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