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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형의 100년의 기록 100년의 교훈
2022년 08월 08일 (월) 17:27:43 김정형 webmaster@newsmaker.or.kr

저작권 만료되는 ‘미키마우스’의 탄생 과정과 산파였던 월트 디즈니의 삶

미국 디즈니가 벌어들이는 수익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캐릭터는 ‘미키마우스’다. 문제는 미국 저작권법이 인정한 미키마우스 저작권이 2024년 만료된다는 것이다. 미키마우스가 1928년 첫 유성 애니메이션 단편 ‘증기선 윌리’로 세상에 탄생했을 때 미국 저작권법이 인정하는 출판 저작물의 저작권은 56년이었다. 그런데 1976년 미 의회가 법을 개정해 미키마우스의 저작권을 75년으로 연장했다. 여기에 한 술 더 떠 1998년에는 미키마우스의 저작권 보호 기간을 최대 95년으로 늘린 이른바 ‘미키마우스법’(정식 명칭은 ‘소니 보노 저작권 기간 연장법’)을 통과시켜 저작권을 2023년으로 연장했다. 미 의회가 또 다시 법을 개정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미키마우스의 탄생과정과 산파인 월트 디즈니의 일생을 살펴본다.

캐릭터 산업이라는 새로운 사업 영역의 개척자

월트 디즈니(1901~1966)는 애니메이션에서 가장 혁신적인 변화를 주도하고 이를 문화 상품과 작품으로 승화시킨 ‘애니메이션의 대명사’다. 연출자, 제작자, 사업가였으며 캐릭터 산업이라는 새로운 사업 영역의 개척자였다.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백설공주), 최초의 유성 애니메이션(증기선 윌리), 최고의 인기 캐릭터(미키마우스, 도널드 덕, 구피, 플루토 등)로 시대를 풍미했다.
디즈니는 미국 시카고에서 태어났다. 고교 시절에는 학원에서 펜화와 풍자화를 배우고 학교 신문의 미술기자로 활동했다. 1920년 입사한 광고회사의 도안사로 활동하면서 애니메이션의 세계에 눈을 뜨고 평생의 친구이자 동지가 될 어브 아이웍스를 만났다. 1922년 5월 아이웍스와 함께 ‘래프 오 그램’이라는 스튜디오를 설립하고 지역 극장에서 상영할 1~2분짜리 만화 상업광고를 제작했으나 파산하는 바람에 1923년 8월 할리우드로 활동지를 옮겼다. 그곳에는 형 로이 디즈니가 있고 메이저 영화사가 즐비했다.
디즈니 형제는 1923년 10월 할리우드 최초의 여성 배급자인 마거릿 윈클러를 만나 ‘앨리스와 만화왕국’ 시리즈를 제작하기로 계약을 체결하고 그해 12월 ‘디즈니 브러더스 스튜디오’를 설립한 뒤 아이웍스를 끌어들였다. 형제가 제작한 실사와 애니메이션이 혼합된 7분짜리 ‘앨리스와 만화왕국’은 1924년 3월 워너브러더스 배급망을 통해 미국의 몇몇 극장에서 개봉했다. 하지만 제작비를 건지지 못해 재정적으로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월트 디즈니는 파산 신고를 할 정도로 궁지에 몰렸다.
그러자 윈클러의 남편인 찰스 민츠가 새로운 주인공을 개발하도록 권유하고 디즈니에게 유니버설 영화사를 소개해주었다. 당시 유니버설은 경쟁사인 패러마운트가 최고의 인기 캐릭터인 ‘고양이 펠릭스’로 흥행에 성공하자 이에 필적할 캐릭터와 애니메이션을 찾고 있었다. 디즈니는 실사영화와 애니메이션을 섞어놓은 당시의 만화영화 패턴과 달리 ‘토끼 오즈월드’를 100% 순수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했다. 오즈월드 캐릭터는 1927년 ‘토끼 오즈월드’의 첫 시리즈인 ‘전차 사건’이 공개된 후 서서히 인기를 끌어모았다. 성공이 눈앞에 보였으나 1928년 2월 찰스 민츠에게 ‘토끼 오즈월드’의 소유권을 빼앗기는 쓰라린 경험을 맛보았다.
디즈니는 심기일전해 한 편의 짧은 시나리오를 썼다. 제목은 당시 미국의 영웅이던 찰스 린드버그의 대서양 횡단 비행 성공에서 모티브를 얻어 ‘미친 비행기’로 정했다. 주인공은 쥐였다. 디즈니는 시나리오를 아이웍스에게 보여주었고 아이웍스는 둥근 눈에 길게 늘어진 귀를 가진 귀여운 모습의 생쥐로 이미지화했다. 처음 정한 쥐의 캐릭터 이름은 모티머였으나 몇 차례의 회의를 거쳐 ‘미키마우스’로 바꿨다. 진정한 의미의 세계 최초 애니메이션 ‘미키마우스’가 탄생한 것이다.

▲ ‘증기선 윌리’ 개봉(1928년) 당시 포스터와 월트 디즈니

미키마우스가 등장한 최초의 유성 애니메이션 영화는 1928년 ‘증기선 윌리’

미키마우스의 데뷔작은 당초 구상 대로 ‘미친 비행기’였다. 두 번째 작품 ‘갤러핀 가우초’도 만들었지만 두 애니메이션 모두 시사용으로만 공개했을 뿐 제작자의 배급 거부로 개봉되지 못했다. 두 번의 실패를 경험한 디즈니는 당시 최고의 코미디언인 버스터 키턴의 인기 영화 ‘증기선 빌’의 인기에 편승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1년 전 최초의 유성(토키) 영화 ‘재즈 싱어’가 엄청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던 사실을 떠올리며 미키마우스에 소리를 입혔다. 그림에 단순히 소리를 입히는 수준이 아니라 그림과 소리가 동시에 움직이도록 정교하게 제작했다.
미키마우스가 등장하는 최초의 유성 애니메이션 영화 ‘증기선 윌리’는 1928년 11월 18일 뉴욕 콜로니 극장에서 개봉했다. 디즈니가 제작과 각본을 맡고 아이웍스가 감독한 7분짜리 ‘증기선 윌리’에서 귀여운 생쥐 한 마리가 휘파람을 불고 염소를 손풍금처럼 연주하고 빨래판, 냄비, 프라이팬, 고양이, 오리, 하마의 이빨 등을 이용한 배경음악이 연주되자 관객도 덩달아 휘파람을 불며 환호했다. ‘증기선 윌리’는 영화 ‘갱들의 전쟁’의 상영에 앞서 오프닝 프로그램으로 선보였으나 본 영화보다 더 큰 인기를 끌었다. 미키마우스는 하루아침에 스타가 되었다. 이후 100편도 넘는 만화영화에 등장하며 ‘만화의 찰리 채플린’으로 불렸다.
디즈니도 무명에서 할리우드의 새로운 기대주이자 스타로 부상했다. 언론들은 ‘유성 애니메이션’을 제작한 디즈니를 만화영화의 개척자이자 선각자로 치켜세웠다. 문제는 단편 애니메이션이 장편 극영화에 비해 수익이 많지 않다는 점이었다. 극장 개봉 수익만으로는 유성영화를 제작하는 데 들어간 제작 비용을 감당하지 못했다. 디즈니는 새로운 비즈니스 계획을 세웠다. 그래서 만들어진 ‘어리석은 교향악단’(1929~1939) 시리즈는 가능한 한 대사를 줄여 배경음악이 줄거리를 이끌도록 했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월트 디즈니 단편 애니메이션 형식은 여기서 출발한다.
6~7분짜리 단편 만화영화 ‘어리석은 교향악단’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은 프랑스 작곡가 카미유 생상스의 음악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한밤중에 흥겹게 춤추고 뛰어노는 해골의 이야기를 다룬 ‘해골의 춤’이었다. 1929년 12월 31일 열린 비공개 시사회는 대성공을 거뒀다. 이후 극장에서 개봉되어 많은 관객을 동원했다. 그러나 배급사의 농간으로 수입은 여전히 신통치 않았다.
디즈니는 또다시 새로운 혁신을 고민했다. 결론은 천연색의 도입이었다. 디즈니는 1932년 ‘어리석은 교향악단’의 새로운 시리즈 ‘꽃과 나무’에 새롭게 컬러를 입혀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새로운 기술에 대한 계속적인 투자는 밑 빠진 독에 물을 붓기였다. 안정적인 수익 분배가 이뤄지지 않아 늘 자금난으로 허덕였다. 이런 디즈니를 구해준 인물이 뉴욕의 거상 조지 보그펠트였다. 그는 1931년 디즈니에게서 장난감, 책, 옷가지에 미키마우스를 사용하는 허가를 받아 짭짤한 수익을 창출했다. 이를 본 디즈니는 미키마우스가 보유한 상업적 잠재력을 알아채고 사업 다각화를 시작했다. 부가 사업이 시작된 1932년 한 해 동안 80여 개 회사가 디즈니와 캐릭터 사용 계약을 맺고 인형에서 칫솔에 이르는 수백 가지 미키마우스 상품을 시장에 쏟아냈다. 곧 미국은 어딜 가나 미키마우스 천지가 되었고 디즈니는 캐릭터가 돈이 된다는 사실을 세계 처음 확인시켜 주었다.

디즈니 캐릭터는 ‘원 소스 멀티 유스’의 전범

디즈니 캐릭터는 ‘원 소스 멀티 유스’의 전범이었다. 1933년 4월 개봉한 ‘아기 돼지 삼형제’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정점이었다. 영화는 이야기 속에서 각 캐릭터의 성격을 드러내는 퍼스낼리티 애니메이션의 전범으로 평가받고 있다. 아기 돼지 캐릭터의 각기 다른 성격을 드러내기 위해 내러티브를 활용했다는 점에서도 디자인으로 캐릭터의 성격을 드러낸 이전의 애니메이션과는 달랐다. ‘아기 돼지 삼형제’는 단지 움직이는 그림에 불과한 애니메이션을 ‘살아 있는 그림’으로 바꿔놓았다는 점에서도 역사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아기 돼지 삼형제’의 인기는 마침내 디즈니를 지긋지긋한 재정적 궁핍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다. 그렇다고 해도 당시 애니메이션은 으레 실사영화를 시작하기 전에 시간 채우기로 상영하는 7~8분짜리 보조 장르에 불과했다.
이런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디즈니의 꿈은 사운드와 컬러, 퍼스낼리티를 아우르는 장편 애니메이션의 제작이었다. 디즈니는 그때까지의 모든 성공적 시도를 총망라하는 장편 애니메이션을 기획했다. 첫 대상은 어린 시절 보았던 ‘백설공주’였다. 백설공주의 동작은 젊은 무희의 춤과 걸음걸이 등을 카메라에 담아 이를 한 프레임씩 분석·제작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기존 애니메이션이 찰리 채플린이나 버스터 키턴의 무성영화처럼 과장된 동작을 활용한 것과 달리 백설공주는 사람이 춤을 추듯 정교하게 움직이고 우아한 연기를 펼쳐 보였다. 디즈니는 역사상 최초의 장편(80분) 애니메이션 영화 ‘백설공주와 일곱 난장이’를 완성함으로써 마침내 꿈을 이뤘다. 1937년 12월 21일 개봉한 ‘백설공주’는 미 영화사상 최다 관객인 2,000만 명을 극장으로 끌어들였다.
디즈니는 ‘백설공주’의 성공에 고무되어 장편 애니메이션 ‘피노키오’(1940.2), ‘판타지아’(1940.11), ‘덤보’(1941.10), ‘밤비’(1942.8) 등 애니메이션사에 획을 그을 만한 작품을 연이어 제작·발표했다. 이 가운데 77분짜리 ‘피노키오’는 입체감과 사운드트랙을 효과적으로 살려 같은 해 개봉한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이어 두 번째 많은 수입을 거둬들였다. 3년의 제작 기간이 투입된 ‘판타지아’는 스트라빈스키, 차이콥스키 등이 남긴 대표적인 고전음악을 배경곡으로 활용해 애니메이션이 아동들만의 것이라는 편견을 깨뜨렸다. 다만 예술적으로 뛰어나다는 평판에도 불구하고 가장 비참한 상업적 실패를 디즈니에게 안겨주었다.
그 무렵 디즈니에게 새로운 시련을 안겨준 것은 노조와의 갈등이었다. 당시 할리우드에 유행처럼 번지고 있던 노동운동이 디즈니 스튜디오에까지 불어닥친 것이다. 디즈니의 독선과 전횡을 끝장내겠다며 시작한 디즈니 애니메이터들의 파업은 1941년 5월 시작되어 4개월 후 종료되었다. 파업이 끝나자 디즈니는 피의 숙청을 단행했고 해고를 면한 애니메이터들은 다른 회사로 자리를 옮겼다.

▲ ‘백설공주’(왼쪽)와 ‘아기돼지 삼형제’의 개봉 당시 포스터

‘디즈니랜드’로 또 한 번 세상 놀라게 해
그 와중에도 디즈니는 ‘덤보’를 1941년 10월 개봉했다. 덤보는 상업적으로 성공할 기미를 보였으나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공습과 이에 따른 태평양전쟁 발발이 디즈니에게 새로운 시련을 안겨주었다. 디즈니는 상업용 애니메이션으로는 전쟁 중 승산이 없다고 판단해 주로 정부쪽 일을 맡았다. 1943년 이후 디즈니 스튜디오에서 제작한 작품의 대부분은 정부 발주의 선전영화거나 교육영화였다. 종전 후에는 실사영화에도 매달렸다. 1946년 11월 애니메이션과 실사를 섞어 만든 ‘남부의 노래’를 내놓았고 1950년 6월 100% 실사영화 ‘보물섬’을 개봉해 호평을 받았다. 1950년 2월 선보인 장편 애니메이션 ‘신데렐라’는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 1953년 작 ‘피터팬’도 흥행과 작품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면서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명불허전임을 입증해 보였다.
애니메이션으로 성공 가도를 달리던 디즈니가 또 한 번 세상을 놀라게 한 것은 캘리포니아 남서부 애너하임에 세워질 디즈니랜드의 건설이었다. 디즈니랜드는 1954년 7월 18일 공사를 시작해 정확히 1년 후 완성했다. 그동안 엄청난 자금이 투입되었고 교통 체증에 대비해 2개의 고속도로가 건설되었다. 디즈니랜드는 1955년 7월 17일 개장했다. 이미 ABC 방송 프로그램 ‘디즈니랜드’를 통해 9개월간 지속적으로 홍보한 덕분에 개장식은 국민적 축제처럼 치러졌다. ABC 방송을 통해 90분간 전국에 생중계된 개장식은 당시 미국 인구의 절반인 7,000만 명이 시청했다. 디즈니랜드 개장은 디즈니가 평생을 바쳐 이룩하고자 했던 가치들이 애니메이션이라는 제한된 매체를 벗어나 거대한 실제 공간 속에서 살아났다는 데 큰 의미가 있었다. 일반인이 입장하기 시작한 7월 18일 상상을 초월하는 입장객이 몰려들었다. 첫 주에만 16만 명이 방문하고 1년 만에 360만 명을 돌파했다.
디즈니랜드는 각각의 스토리를 가진 환상·모험·개척·미래의 나라로 구획되었다. 애너하임의 ‘디즈니랜드’를 필두로 1971년 플로리다주 올랜도의 ‘월트 디즈니 월드’, 1983년 일본의 ‘도쿄 디즈니랜드’, 1992년 프랑스의 ‘유로 디즈니랜드’(현재 디즈니랜드 파리), 2005년 ‘홍콩 디즈니랜드’ 등 전 세계에 디즈니랜드 형제들이 속속 세워지면서 디즈니랜드는 세계인의 놀이공원이 되었다.
디즈니가 디즈니랜드 건설과 함께 관심을 쏟은 것은 TV였다. 1954년 4월, 3년 동안 1시간짜리 프로그램 26편을 매년 제공하기로 ABC 방송과 체결한 계약은 그 신호탄이었다. 디즈니는 ABC TV를 이용해 디즈니 스튜디오가 제작하는 영화와, 이미 공사가 시작된 디즈니랜드를 홍보할 생각이었다. 1954년 10월 27일부터 방송된 TV 프로그램의 제목도 곧 개장할 놀이공원과 같은 이름의 ‘디즈니랜드 스토리’였다. 디즈니 프로그램은 놀라운 시청률을 기록하며 승승장구했다. 시청률이 치솟자 매주 해설자로 등장하는 월트 디즈니 역시 전 국민의 스타가 되었다. 1954년 12월부터 방송된 ‘데이비 크로켓’ 시리즈는 TV 프로그램 ‘디즈니랜드’의 절정이었다. ‘디즈니랜드’는 이후 제목을 바꿔가며 미국 TV 시리즈 사상 최장 기간인 29년 동안 방송되었다.
디즈니의 영향력은 더욱 막강해지고 미국을 대표하는 살아 있는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했다. 1958년 디즈니의 수익이 영화 38%, TV 28%, 놀이공원 21%, 캐릭터 13%일 정도로 수익 구조도 다변화되고 안정화되었다.

디즈니의 성장 동력은 변화와 혁신의 DNA

1960년대 들어 디즈니는 애니메이션에서 실사영화와 드라마 등으로 콘텐츠의 폭을 넓혀나갔다. 1960년대의 가장 성공적인 작품인 ‘메리 포핀스’는 1964년 8월 개봉 후 흥행은 물론 비평적 성공도 거둬 13개의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라 여우주연상(줄리 앤드루스) 등 5개 부문 트로피를 차지했다. 월트 디즈니는 1966년 12월 15일 세상을 떠났다. “손 닿는 것이면 모두 상업화하려는 속류 상업주의자, 미 문화제국주의의 첨병”이라는 비판이 없진 않았으나 미국인의 꿈을 바꿔놓았다는 점에 대해서는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디즈니가 떠난 후 디즈니사는 오랜 침체기를 겪었다. 하지만 디즈니사에는 시대적 트렌드를 놓치지 않고 계속 새로운 걸 시도하는 변화와 혁신의 DNA가 면면히 이어오고 있었다. 물론 그 DNA를 착상시킨 첫 주역은 당연히 월트 디즈니였다. 그는 발명가였고 혁신가였으며 창조자였다. 1984년 최고경영자 자리에 오른 마이클 아이스너는 혁신의 경영자로 평가받는다. 그는 영화 사업에 진출했다가 위기를 맞은 디즈니를 다시 애니메이션 왕국으로 돌려놓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단순한 과거로의 복귀가 아니라 혁신이 가미된 변신이었다. 그는 단순한 아이들 취향의 만화영화 스튜디오였던 디즈니를 종합엔터테인먼트 미디어 그룹으로 탈바꿈시켰다. ‘인어공주’, ‘미녀와 야수’, ‘라이온 킹’ 등의 히트작을 쏟아낸 것은 이러한 청사진이 뒷받침된 결과였다. 아이스너의 뒤를 이어 2005년 최고경영자 자리에 오른 로버트 아이거 역시 디즈니의 혁신 DNA를 물려받은 경영자로 평가받고 있다.
디즈니는 1990년대 들어 미국 3대 지상파 방송사 중 하나인 ABC 등을 잇따라 인수하면서 방송 제국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ABC를 비롯해 어린이 전문 방송 ‘디즈니 채널’, ‘ABC 패밀리’, ‘SOAPnet’ 등의 채널과 ‘스테이지9디지널 미디어’ 등의 제작사, 그리고 ‘라디오 디즈니 네트워크’ 등을 갖고 있다. ABC가 최대주주인 스포츠 전문방송 ESPN도 디즈니 소유다. 디즈니의 과감한 도전은 1995년 픽사 스튜디오와 손잡고 최초의 컴퓨터 애니매이션 ‘토이 스토리’를 제작한 데서 잘 드러난다. 창립 이래 줄곧 사람이 그리는 애니메이션만 만들어온 디즈니 스튜디오로서는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중일전쟁의 전초전 된 ‘노구교 사건’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가 지난 7월 8일 선거 유세 연설 도중 총격을 받아 사망했다. 그런데 이 사건 이후 일부 중국인이 아베의 죽음을 조롱하며 기념 행사를 열어 논란이 됐다. 반일 감정이 고조된 이유는 아베 전 총리의 사망일인 7월 8일이 ‘7·7 사변’과 일자상으로 하루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7·7 사변은 1937년 7월 7일 중국과 일본 군대가 베이징의 노구교(蘆溝橋·루거우차오) 다리에서 충돌한 사건이다. ‘노구교 사건’에 대해 알아본다.

노구교는 1930년대 중국·일본 간 군사적 거점

노구교는 중국 북경의 남서쪽을 흐르는 영정강 위에 놓여 있는 아치형 석조 다리로 중국 금나라 시절인 1192년 완공되었다. 길이는 266m이고 너비는 9m다. 일찍이 마르코 폴로가 다리 난간에 새겨진 수백 개의 아름다운 돌사자상과 주변 경치에 매료되어 ‘동방견문록’에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라고 예찬할 만큼 멋진 곳이다. 그런데 이 다리가 1930년대 들어 중국·일본 간에 일촉즉발의 전운이 감돌면서 새로운 군사적 거점으로 급부상했다.
중국으로서는 노구교 위를 지나는 도로가 북경과 화북 지역을 잇는 유일한 교통로이고 북경의 3면이 사실상 일본에 포위된 상태라는 점에서 반드시 지켜야 할 곳이었다. 일본 역시 이 도로를 확보하면 화북 지역으로 군대를 이동할 수 있어 중국 북서부로의 진출이 용이해지고 장차 있을 중일전쟁을 유리하게 끌고 갈 수 있다는 점에서 반드시 확보해야 할 곳이었다. 화북은 북경을 포함해 하북성·산서성·산동성·하남성 4개 성을 포괄하는 곳으로 예로부터 농산물과 각종 자원이 풍부한 전략적 요충지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군 1개 중대가 노구교 부근에서 훈련을 하고 있던 1937년 7월 7일 밤 10시쯤, 갑자기 10여 발의 총성이 울려퍼졌다. 일본군 부대가 즉각 훈련을 중단하고 점호를 실시해보니 신병 1명의 행방이 묘연했다. 일본군 중대장은 이를 중국 측의 소행으로 단정하고 상부에 보고했다. 상부에서는 “단호히 대처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그런데 보이지 않던 신병이 20분 후 돌아와 용변을 보다가 늦었다고 사정을 설명했다. 그런데도 신병의 귀대 사실은 상부에 보고되지 않았다. 그날의 총격이 일본군의 자작극인지 중국의 항일 세력에 의한 것인지는 지금까지도 확실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 노구교(루거우차오)를 건너 행진하는 일본군

일본의 정전협정은 중국과 전면전을 벌이기 위한 시간 벌기용 계략

일본군은 이튿날 새벽 중국군과 첫 교전을 벌였다. 하지만 현지 군사력이 충분치 않다고 판단한 중국군 지도부가 “양보를 통해 국부적으로 해결하라”고 지시해 전면전으로는 발전하지 않았다.
양군은 사태가 확산하는 것을 피해 7월 11일 정전협정을 체결했다. 노구교 인도, 대표자 사과, 책임자 처벌, 항일단체 단속 등 일본 측의 무리한 요구를 중국 측이 수용한 결과였다. 하지만 정전협정이 체결된 그날 일본 정부는 사건을 ‘중국 측의 계획적 무력 항일’로 단정하고 일본 본토 3개 사단, 조선 주둔 1개 사단, 만주 2개 여단 파견을 결정했다. 며칠 후에는 수십만 명에 달하는 증원군의 파병도 승인했다. 결국 일본의 정전협정은 중국과 전면전을 벌이기 위한 시간 벌기용 계략이었다.
당시 일본의 정계, 군부, 언론은 만주를 쉽게 점령했던 수년 전 경험에 마취되어 중국과 전면전을 벌이면 어렵지 않게 중국 전역을 점령할 수 있다는 환상에 빠져 있었다. 군사력도 상당해 30만 명 이상의 일본군, 15만 명 이상의 만주·몽골군, 200만 명에 가까운 예비군에 세계 3위를 자랑하는 강력한 해군력과 항공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중국 국민당군은 400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되는 병력이 있었으나 현대식 무장을 갖춘 부대는 장개석의 직속부대 10만 명에 불과했다. 항공력도 사실상 전무했다. 일본군은 ‘속전속결로 전쟁을 끝낸다’는 전략 하에 본토와 만주에서 온 증원군과 함께 총공세에 나서 7월 30일 북경과 천진을 점령하고 8월 13일 상해를 기습함으로써 향후 7년간 중국 전역을 쑥대밭으로 만든 중일전쟁을 시작했다. 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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