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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서 칼럼] ‘야생마’, ‘살짜기 옵서예’의 뮤지컬 배우 겸 가수, 김하정의 삶과 사랑[5]
‘아- 못다한 사랑, 그늘에서 곱게 피다 지리라’
2022년 07월 11일 (월) 12:02:10 박성서 webmaster@newsmaker.or.kr
▲ ‘김하정 50주년 기념 음반’과 ‘53주년 기념/사랑이 남긴 것’ 음반

‘사랑’, ‘야생마’. ‘금산 아가씨’, ‘살짜기 옵서예’, ‘미련’, ‘사랑이 남긴 것’의 가수 김하정씨는 1968년 이광수 원작소설을 영화화한 ‘사랑’의 주제가로 데뷔했다.

1971년,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 뮤지컬 ‘살짜기 옵서예’에서 김하정은 주인공인 ‘애랑’ 역을 맡았다. 춤과 노래 그리고 연기가 바탕이 되어야만 할 수 있는 역할이었다. 이후 뮤지컬 ’바다여 말하라‘, ‘땅콩 껍질 속의 연가’, ’캬바레‘, 그리고 드라마 ‘석양의 나그네(MBC-TV), TV 뮤지컬 ‘황진이’와 ‘대춘향전’ 등의 타이틀롤을 맡아 전성기를 구가하던 김하정.

노래면 노래, 연기면 연기, 그야말로 만능 엔터테이너였지만 이후 누구보다도 드라마틱한 삶을 살아야 했던 가수 김하정. 그의 삶과 사랑 그리고 노래 이야기, 그 다섯 번째. ‘38년 만에 만난 첫사랑’.

글 l 박성서(음악평론가, 저널리스트)


26년 만에 아들과 부친의 만남, 그리고 ‘용서’

밀레니엄 시대를 맞이하던 세기말인 1999년. 그는 자전소설 ‘아 못다한 사랑, 그늘에서 곱게 피다 지리라’를 출간한다. 이 자전소설은 영화로도 기획되었지만 여러 가지 상황으로 결국 중단된다.

대신 이 무렵인 2001년, KBS ‘이것이 인생이다’에서 ‘김하정 편-야생마의 눈물’이 방송되었다. ‘제2의 패티 김’이라고 일컬어지던 김하정의 세 차례 이혼과 네 차례의 교통사고가 다큐멘터리로 조명된 것. 특히 이 방송에는 미국에 있는 아들 정훈(당시 26세)이 귀국, 두 살 때 헤어진 지 26년 만에 부친 쓰리보이와 만나는 장면이 그려졌다.

이 부분은 이후 발간된 자서전 ‘김하정 이야기(2004년)’에 ‘용서’라는 제목으로 상세히 소개되었다. 그 부분을 발췌해본다.

‘정훈이가 스물여섯이 되던 어느 날 미국에서 다급히 전화를 했다. 간밤에 꿈을 꾸었는데 이가 빠지고 진흙탕에 빠져 허둥대는 꿈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꿈을 꾸면 가족 중에 누군가 죽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불안하다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며칠 후 정훈이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핏줄의 힘은 이렇게 무서운 것일까. 이 무렵 정훈이가 서둘러 귀국을 했다. 동시에 나는 그를 급히 수소문했다. 그렇게 해서 26년 만에 두 부자는 얼굴을 마주했다. 그는 처음 정훈이와 몇 마디 얘기를 주고받더니 조용히 나를 불렀다. '정말 아들 잘 키웠네'. 그가 내게 한 마지막 말이었다. 헤어진 이후에도 나에 대한 온갖 모진 말을 하고 다녔던 사람이었는데 마지막 말만큼은 그러했다. 그리고 몇 달 뒤 그는 눈을 감았다. 그날 나는 공연차 미국에 있었지만 정훈이는 다시 귀국해 마지막까지 그가 가는 길을 함께 했다...’ 고. 자서전 177쪽부터 180쪽에 게재된 이 부분에 대한 소제목은 ‘용서’였다.

▲ 김하정 전성기 시절 발표 음반들

‘숨어 우는 바람소리’ 리메이크, 히트

이 자서전은 ‘김하정 이야기/내가 그리는 내 삶의 지도(태창미디어, 2004년)’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그동안 받았던 고통을 인내하고 새롭게 출발하자는 의지와 희망을 담았다.

그는 서문에서 강조한다. ‘산다는 것은 절망과 체념을 극복하고 끝까지 견뎌내는 것이다. 슬프면 울어라, 눈물로 모두 풀어내고 눈물의 강을 건너야 한다. 그 강에 잠겨서는 안 된다. 고난이란 건 극복해야지 피해갈 수는 없다. 마음가짐을 바꿈으로써 삶을 바꿀 수 있다. 그것이 인생이다.’

그는 이 자서전을 통해 ‘파란만장했던 자신의 삶을 글로 풀어내면서, 또 다른 인생의 새로운 것들을 발견, 지금이 또 다른 시작의 때’라고 결론 맺고 있다.

동시에 그는 ‘김하정의 모든 것’이라는 음반을 발표한다. ‘숨어 우는 바람 소리, 그리움’을 타이틀로 한 이 음반에는 그의 대표곡들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갈대밭이 보이는 언덕 통나무집 창가에/길 떠난 소녀같이 하얗게 밤을 새우네/김이 나는 차 한 잔을 마주하고 앉으면/그 사람 목소린가 숨어 우는 바람 소리.
둘이서 걷던 갈대밭 길에 달은 지고 있는데/잊는다 하고 무슨 이유로 눈물이 날까요/아 길잃은 사슴처럼 그리움이 돌아오면/쓸쓸한 갈대숲에 숨어 우는 바람 소리. -‘숨어 우는 바람 소리(김지평 작사, 김욱 작곡)’

‘숨어 우는 바람 소리’는 앞서 발표한 ‘금강산 가자(김지평 작사, 김욱 작곡)’의 콤비가 만든 곡으로 MBC 신인가요제 대상 수상곡이었다. 그러나 이 노래를 부른 신인 이정옥이 당시 활동을 접고 고향 청주로 내려갔기 때문에 그간 묻혀 있던 노래였다. 물론 이정옥은 이후에 다시 활동을 시작했지만 김하정씨는 이 노래를 대중들에게 히트시킨 장본인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이 음반을 기점으로 그는 국내 활동과 더불어 해외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이어간다. 2006년, 미국 뉴저지에 있는 라이브카페의 명소 ‘트리오 몽키스’의 특별무대 등이 그것.

“드라마로, 자서전으로, 노래로 고통을 하나둘 풀어내고 나니 스스로 많은 위로가 됐어요. 팬들도 더 뜨겁게 응원해주더라고요. 그들이 건네는 위로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 어떤 약보다 더 빠르게 날 치유해주었죠.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걸로 모든 게 평온해지더라구요. 마치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처럼 고통의 세월이 계속 이어질 줄 알았는데 하나님을 만나니까 모든 것이 한순간에 사라지더라고요. 그래서 지금은 너무 감사하고...”

개종을 결심한 계기는 아주 단순했다. “그날이 미국의 아들 생일이었어요. 생일 선물로 뭘 해줄까 전화로 물었더니 ‘꼭 들어주신다면 말하겠다’면서 대뜸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라, 그래야 구원받을 수 있다.’는 거예요. 그동안 나를 위해 계속 기도를 해왔다면서... 그 순간...”

아들을 생각하면 늘 미안함이 남아있다. 지금까지 살면서 누군가에게 미안하다고 생각한 적이 별로 없었는데 아들에게만큼은 유독 그러했다. 그런 아들의 말이라서 더 그랬을까. 그는 한순간 개종할 것을 결심한다.

▲ 김하정이 2000년대 들어 발표한 음반들

38년 만에 첫사랑과 재회하다

2006년, 이 무렵 김하정은 운명처럼 첫사랑과 재회한다. 그 상대는 박성수(朴成秀. 75세)씨.
처음 영화 제작자로 활동을 시작한 그가 처음 김하정씨를 만난 것은 1968년, 가수 신카나리아가 운영하던 카나리아 다방에서였다. 을지로의 옛 스카라극장 부근에 있던 이곳은 가수와 영화배우들의 사랑방 같은 곳이었다.

“당시 영화감독 김화랑-가수 신카나리아 부부의 양아들처럼 지냈어요. 때문에 카나리아 다방에 자주 갔었는데 거기서 김하정씨를 처음 만났지요. 피부가 까무잡잡한 게 건강미가 넘치는, 매력적인 가수였지요.”

당시 김하정은 데뷔곡 ‘사랑’과 ‘야생마’를 비롯한 연이은 히트곡으로 전성기를 맞고 있었다. 그 역시 179Cm의 훤칠한 외모로 TBC 8기 탤런트로도 발탁되었다.

“탤런트 연규진, 임동진씨와 동기입니다. 수습 기간인 6개월을 채 넘기지 못하고 접었지만... 그땐 어머니가 종로의 광장시장에서 원산상회라는 큰 포목점을 했어요. 제법 부유한 집 아들로 영화 제작자로 선회, ‘암살자 제로’ 등을 제작했죠. 그러나 그 무렵 김신조 무장공비 침투사건이 터져서 영화 흥행에 실패, 그마저도 쉽지 않았죠.”

그렇게 만난 이들은 스캔들이 날 것을 우려해 조심스럽게 교제를 이어갔고 어느덧 결혼까지 약속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5대 독자인 저의 어머니는 제가 가업을 계속 이어가기를 바랬죠. 그래서 결혼 조건으로 김하정씨에게 가수 생활을 접고 집안일에만 몰두한다면 전 재산을 물려주겠다고 제의했으나 하정씨는 절대 가수를 포기할 수 없다, 고 거절하는 바람에 결국 무산됐지요. 그로부터 몇 년 후 하정씨의 결혼 소식이 알려지고 저도 홧김에 결혼을 했죠.”

김하정씨 또한 그의 어머니가 영화배우처럼 상당한 미인이었다고 기억했다. 그런 첫사랑과 헤어진 지 38년 만에 국일관의 실버타운에서 만난 것.

“사업 차 국일관에 갔는데 그곳에 김하정씨가 출연한다는 포스터가 붙어있는 거예요. 깜짝 놀랐죠. 조금 뒤 실제로 김하정씨가 무대에 올라오는데 얼굴이 전혀 아닌 거예요. 처음엔 그냥 모창 가수인 줄 알았어요. 그래서 지배인을 불렀죠. 여기 영화배우 강일아가 와있으니 아는 사람이면 이 자리로 오라고...”

김하정은 목숨을 잃을 뻔한 네 번의 교통사고로 얼굴을 비롯한 온몸이 만신창이였다. 그 때문에 얼굴 전체를 성형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김하정씨의 입장은 어땠을까. “영화배우 누구... 라고 하는데 처음 듣는 이름인 거예요. 그래도 가서 인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세상에, 이 분인 거예요. 그새 멋진 중년 신사로 변했더라구요.”

헤어진 뒤 영화배우로 데뷔했기 때문에 김하정은 그가 영화배우였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몰랐다. 그야말로 38년 만의 재회였다. 순간, 만감이 교차했다.

▲ 박성수(예명 강일아) 출연 영화 ‘황혼의 만하탄’과 ‘지구여 멈춰라, 내리고 싶다’ 포스터

다시 만난 첫사랑, 그리고 영화배우 강일아

영화배우 강일아는 박성수씨의 예명이다. 1974년에 개봉한 영화 ‘황혼의 만하탄(강범구 감독)’에서 양정화, 윤일봉과 함께 주연을 맡은 신인배우로 데뷔했다.

“강범구 감독이 예명을 지어주었어요, 강일아(康一牙)라고. 그리고 강감독님이 직접 메가폰을 잡은 영화 ‘황혼의 만하탄’에서 주연을 맡으며 데뷔했죠.”

당시로써는 드물게 해외 올로케로 제작돼 화제를 모았던 이 영화는 단성사에서 개봉되었다.
“그러나 영화 개봉 즈음에 양정화가 그 유명한 ‘박동명 사건’에 휘말리면서 영화는 나흘 만에 막을 내려야 했지요.“

박동명 사건은 희대의 카사노바로 불리던, 재벌 2세 박동명이 70년대 대한민국을 뒤흔든 여배우 스캔들 사건으로, 가장 큰 피해자가 여배우 양정화였다. 당시 양정화는 1세대 트로이카를 이을 차세대 유망주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지만 이 여파로 모든 활동을 중단, 결국 은퇴를 했던 비운의 여배우다.

영화배우 강일아는 이 영화에 이어서 박성수라는 본명으로 영화 ‘지구여 멈춰라, 내리고 싶다(1974년, 이재웅 감독)’ 등에 출연하기도 했다.

각설하고, 김하정씨는 첫사랑을 만난 얼마 뒤인 2007년에 뇌경색으로 쓰러져 3개월 간 안암고려병원에 입원한다. 급기야 팔, 다리가 마비되기 시작했다. 이때 박성수씨가 온갖 정성으로 보살폈다. 일본에서 지인들을 통해 몸에 좋다는 특효약을 구해주는 등 극진히 재활을 도왔다.

누군가 꼭 필요했던 순간, 그의 옆에는 38년 만에 만난 첫사랑이 있었다. 당시 둘은 각각 결혼한 후 다시 혼자가 된 입장이었다. 그 때문인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 의지했다.

김하정은 이 사실을 미국에 있는 아들에게 먼저 알렸다. “남자친구가 생겼다고 하니 아들이 너무 좋아하는 거예요. ‘엄마는 반드시 남자친구가 있어야 한다며... 그동안 혼자 지내는 모습이 너무 안쓰러워 못 보겠더라.’면서 새 남자친구를 직접 만나봐야겠다며 며칠 뒤에 귀국했어요.”

아들도 엄마 걱정을 늘 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고마운 것은 둘이 만나자마자 너무 잘 통하는 거예요. 그리고는 아들 눈에 그이가 아주 멋져 보인대요. 무엇보다 엄마를 바라보는 눈빛에서 진실함이 느껴졌다고 하더군요.”

박성수씨는 그동안 미국과 일본을 오가며 사업을 해왔고 이 무렵에도 일본에서 사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만난 지 두 달 만에 일본으로 거처를 옮긴다. 일본에는 다행히도 친한 동료 가수 조미미씨가 살고 있었다.

“집은 도쿄의 코리아타운인 신오쿠보(新大久保)라는 곳에 있었어요. 조미미씨 집이 바로 거기서 한 정거장 거리에 있었고. 그러다 보니 거의 매일 만나게 되었는데 당시 조미미씨의 하루 일과가 종일 파친코 장에서 지내는 것이었어요. 아침 9시 반만 되면 나가서 파친코 장 영업이 끝나는 저녁 10시까지... 그리고 돈을 따면 땄다고 술 한 잔, 잃으면 잃었다고 또 한 잔... 그렇게 함께 지내다 보니 불현듯 겁이 나는 거예요. 마치 나의 미래를 보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난 이렇게는 못 살겠다. 다시 노래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그와 상의를 했지요. 그러자 그는 결국 ‘정 그렇다면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자, 단 조건은 건강이 좋지 않으니 건강 관리를 겸해 매니저를 자신이 직접 보겠다’는 거였어요.”

결국 이들은 한 달 만에 일본 생활을 정리하고 다시 귀국했다. 귀국 후 그는 계속해서 매년 음반을 발표했다. 몸이 불편했기에 더욱 절실한 마음으로. ‘유킹카(2007년, 장대성 작사, 작곡)’, ‘사랑의 조약돌(2008년, 박윤성 작사, 박성훈 작곡)’, ‘웃어봐요(2009년, 박용갑 작사, 이정운 작곡)’, ‘싹뚝이 부부(2010년, 김화경 작사, 곡)’ 등 음반이 그것.

악극 ‘웃어봐요(2010년)’, ‘고향 무정(2011년)’ 무대에도 잇달아 올랐다. 그런 중에 틈틈이 동경, 오사카, 나고야 등에서 교포위문공연도 했다. ‘김하정 사랑의 효 대잔치 한마당(교토, 2019년)’, ‘김하정 쟈니리 콘서트(2019년, 오사카)’ 등 일본 교포공연을 꾸준히 이어간 것.

그런가 하면 2011년에는 대표곡인 ‘금산 아가씨’ 노래비가 금산 세계 인삼엑스포광장(금산읍 신대리 국제인삼유통센터)에 세워지기도 했다. ‘금산 아가씨’는 이보다 먼저인 1981년부터 시작된 금산인삼축제의 ‘인삼 아가씨 선발대회’ 때 주제가처럼 불리기도 했던 노래다.

▲ 2011년에 세워진 ‘금산 아가씨’ 노래비 앞에서 김하정. 그리고 일본 공연 포스터들

백의의 천사, 그늘에서 곱게 피다 지리라

“미국에 있는 아들은 미국방부 공군본부 정보국에서 일하고 있는데 2, 3일에 한 번씩 꼭 전화하고. 비타민 등 영양제를 꾸준히 보내주고 있지요.”

한동안 김하정은 다시 ‘제2의 인생’을 누리듯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그동안 헬스클럽에서 함께 근육운동을 하면서 제2의 부활을 할 수 있게 도와주던 그. 음반 또한 계속해서 ‘김하정 가요 인생 50주년 기념 음반(2018년)’과 ‘김하정 53주년 기념 음반/사랑이 남긴 것(2021년)’ 까지 잇달아 발표한다.

그런데 2년 전인 2020년,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졌다. 박성수 매니저가 암 선고를 받은 것.

“그동안 같은 부위의 수술을 세 차례 받았어요. 수술은 잘 되었는데 그사이에 또 네 군데로 전이가 되었지요. 재수술에 들어갔는데 이번 수술은 잘 되었는지 이제 곧 검사를 앞두고 있습니다.”

갑자기 벌어진 이 현실 앞에 김하정은 새삼 길게 호흡을 가다듬는다. 그리고 다짐한다.
‘슬럼프에 빠져 가장 어려웠을 때 나타나 제2의 인생을 살게끔 도와준 만큼, 이제는 내가 그를 위해 남은 인생을 살겠노라.’고.

“이미 잡혀 있는 스케줄만 소화할 예정이에요. 그리고 이후로는 그냥 평범한 여자로, 그리고 한 남자의 아내로 조용히 살겠다.”는 게 최근 그의 각오다.

먼 길을 돌아 38년 만에 다시 만난 첫사랑, 데뷔곡 ‘사랑’의 노랫말처럼 ‘그늘에서 곱게 피다 지겠다’는 게 이제금 그의 소박한 꿈이자 바람이다.

가수는 노래 따라간다고 했던가. 그의 데뷔곡 ‘사랑’의 노랫말이 새삼 가슴에 와 닿는다.
‘사랑이란 슬픈 길을 알고 왔어도/젊음의 꽃밭에는 찬비만 내려/운명이라 달래보는 백의의 천사/행여나 오실까 아~ 못다한 사랑/그늘에서 곱게 피다 지리라.’

그렇다. 그는 이 노래의 주인공처럼 실제로 ‘백의의 천사’가 되려 하고 있었다.

▲ 38년 만에 다시 만난 첫사랑, 김하정 박성수 부부의 최근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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