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합방조약 강제 조인               1910년
조선을 병탄하려는 일제의 시나리오는 치밀하고 주도면밀했다. 그들이 먼저 마수를 뻗친 것은 대한제국 주변의 모든 외교적 울타리를 걷어내 마침내 대한제국을 국제 미아로 만드는 일이었다. 조선을 마음껏 유린할 때 혹시라도 있을 열강의 간섭을 차단하기 위한 사전 포석이었다.
1895년 청일전쟁을 일으켜 먼저 청국에게 굴욕적인 패배를 안겨준 일제가 다음 표적으로 삼은 것은 러시아였다. 일제는 1904년 2월 러일전쟁으로 러시아마저 무릎을 꿇게 한 뒤 다음 단계를 일사천리로 진행시켰다. 미국과는 가쓰라·테프트밀약(1905.7)을, 영국과는 제2차 영일동맹(1905.8)을 체결해 조선에서의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권리를 인정받았다. 한반도를 둘러싼 모든 강대국과의 관계를 이런 식으로 차단한 일제 앞에는 이제 더 이상 거칠 것이 없었다.

▲ 1910 한일합방조약

을사조약(1905.11)과 한일신협약(1907.7)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과 내정권을 차례차례로 빼앗아간 일제가 마침내 야욕을 드러낸 것은 1909년 7월이었다. 일본의 내각이 '대한제국 병합에 관한 건'을 의결한 뒤 천황의 재가를 받아 한일합방안을 확정지은 것이다. 그러자 이 사실을 탐지한 친일매국단체인 일진회의 고문 스기야마는 일진회의 실질적 운영자 송병준 등에게 '합방청원서'를 만들도록 부추겼다. 조선인이 먼저 병합을 원한 것처럼 꾸민다는 계략이었다. 일진회는 1909년 12월4일, 합방성명서를 발표하고, 뒤이어 순종과 이토 히로부미 통감, 이완용 대한제국 총리에게 합방청원서를 전달했다. 수면 아래에서만 논의되던 ‘합방’ 문제가 마침내 수면 위로 부상한 것이다.
그러나 조선 황제의 통치권 전부를 일본 황제에게 양도한다는 내용의 합방청원서는 누구에게도 환영을 받지 못했다. 이완용 내각에 대항하기 위해 일진회와 연합을 모색하고 있던 대한협회와 서북학회는 3파 연합의 결렬을 선언했고, 통감부도 아직은 시기상조라는 이유를 들어 합방청원서를 반려했다. 이완용 내각 역시 일진회 방식의 합방에는 반대했다. 대신 이완용 내각은 합방의 전제 조건으로 메이지유신 이후 화족(華族)의 대우 방안을 마련했 듯, 양반의 지위를 보장하는 방안을 먼저 마련해 줄 것을 일본 정부에 요구했다. 이렇듯 일진회의 합방성명서는 누구에게도 환영받지는 못했지만, 그러한 시도 만으로 합방은 기정사실처럼 굳어지고 합방 이후 조선의 정치 체제에 관한 논쟁을 촉발시켰다.
일제가 야욕을 구체화한 것은 1910년이었다. 5월30일 병약한 소네 아라스케 통감을 물러나게 하고 현역 육군대장이자 육군대신인 데라우치 마사다케를 3대 통감으로 임명했는데 이는 무력과 간계를 동원해서라도 대한제국을 병탄시키겠다는 야욕의 산물이었다.
일제는 6월30일 유명무실한 대한제국의 경찰제를 폐지하고 일본 헌병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일본 현병제를 조선에 도입했다. 7월부터는 모든 옥내외 집회를 금지시켰으며 신문과 잡지의 검열을 강화해 조선을 사실상의 계엄상태로 만들었다. 일진회는 다시 스기야마의 지시를 받아 ‘한일합방에 관한 상주문’과 청원서·성명서 등을 발표해 마치 조선인 스스로가 합병을 원하는 것처럼 분위기를 조성했다.
데라우치가  일본 헌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서울로 부임한 것은 1910년 7월23일이었다. 7월29일에는 이완용을 총리대신으로 하고 을사조약의 주역 박제순을 내부대신으로 하는 새 내각을 조직해 합병의 전위대로 삼았다. 8월18일 합병조약이 내각회의에 상정되었으나 학부대신 이용직을 제외하고는 누구 하나 반대하는 사람이 없어 일사천리로 처리되었다. 조인이 예정된 8월22일, 늘 그러했듯 서울 남산에 설치된 대포가 창덕궁과 덕수궁, 종로거리를 겨냥했다. 오후 2시 순종이 참석한 형식적인 어전회의에서 대신들이 합병조약에 서명하고 몰래 훔쳐두었다가 보관해 둔 행정결제용 어새를 찍는 것으로 나라를 통째로 넘겨주는 매국노들의 서명작업은 일단락되었다. 조약에 서명한 총리 이완용, 내부대신 박제순, 탁지부대신 고영희, 농상공부대신 조중응, 궁내부대신 민병석, 시종원경 윤덕영, 중추원의장 김윤식 등 7명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이름들이다.
오후 4시 이완용이 통감부에서 데라우치와 합병조약안에 조인했으나 조선민의 반발을 의식해 체결사실은 바로 공표하지 않았다. 조선인들의 집회를 사전에 철저히 금하고 원로대신들을 연금한 뒤 발표 시기를 저울질하다가 8월29일에서야 조선총독부 관보에 게재하는 형식으로 발표했다.
8개조로 된 조약 1조 “조선 황제 폐하는 조선 정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 황제폐하에게 양여한다”가 조선을 송두리째 일본에 넘기는 데 적용된 조문이다. 그러나 이 조약안은 어새만 찍혀있고 1907년 11월 이후 각종 조칙문에 날인해 온 순종의 서명 ‘척’자가 빠져있어 엄연히 불법 무효조약이다. 그렇더라도 당시에는 아무런 힘도 없어 조선 왕조는 결국 건국 27대 519년만에 문을 닫았고 조선의 존재도 세계 무대에서 자취를 감췄다.
일제는 조약 공포와 동시에 대한제국의 국호를 폐지하고, 데라우치를 통감부 대신 설립한 조선총독부의 초대 총독에 임명했다. 뒤이어 광무황제(고종)를 이태왕, 융희황제(순종)를 이왕, 고종의 아들 강과 희를 공으로 칭하며 일본 황족으로 편입시켰다. 조선귀족령도 발표, 합방에 공을 세운 친일매국노와 구조선 고관 76명에게 작위와 은사금을 나눠주고 전국의 유생들에게도 회유책으로 거금을 살포했다. 매국노들이 희희낙락하는 동안 전국에서는 국권상실에 분노한 자결이 잇따랐다. 우리 민족이 겪어야 할 오랜 시련의 전주곡이었다.

■찰리 채플린 할리우드 입성        1913년

▲ 1913 채플린

찰리 채플린(1889~1977)의 어린 시절은 지독한 가난으로 점철되었다. 술주정뱅이였던 아버지는 어머니와 이혼 후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3류 배우였던 어머니는 채플린을 데리고 빈민구호소를 전전했다. 다행히 채플린의 피에는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광대 기질이 있었다. 인쇄공, 신문팔이 등으로 끼니를 연명하던 9세 때 처음 무대에 섰고 14세 때인 1903년 연극 '셜록 홈스'에 급사역으로 출연해 주목을 받았다. 19세였던 1908년 카노 극단에 입단하고 1910년 주인공으로 발탁되어 첫 미국 순회공연을 다녀왔다. 
채플린이 미국의 할리우드에 둥지를 튼 것은 1913년이었다. 두 번째 미국 순회공연 중 키스톤영화사의 맥 세네트의 눈에 띠어 12월부터 영화촬영에 들어갔다. 그러나 1914년 1월에 발표된 채플린의 첫 영화 ‘생계'는 별다른 주목을 끌지 못했다. 다행히 1914년 2월에 개봉한 두번째 영화 ‘베니스의 어린이 자동차 경주’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펼친 덕에 자신의 존재를 분명하게 각인시킬수 있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몸에 꽉 끼는 웃옷과 헐렁한 바지, 우스꽝스런 콧수염, 찌그러진 중절모를 쓴 채 지팡이 하나에 의지하는 채플린의 ‘초라한 신사’ 이미지는 이 영화에서부터 등장했다.
이후로도 여러편의 영화에 출연하던 채플린은 1914년 5월 자신의 첫 연출작 ‘비속에 갇혀서’를 발표했다. 이후 채플린은 1주일에 2편꼴로 많은 단편영화를 연출하면서도 대부분 성공을 거뒀다. 채플린 영화의 예술적 자양분은 유년시절의 혹독했던 가난과 불행이었다. 때문에 그의 영화에는 언제나 ‘울리는 희극’ 혹은 ‘웃기는 비극’이라는 평이 쏟아졌다.
채플린의 보수는 영화사를 옮길 때마다 빠르게 치솟았다. 1914년 12월 에사네이영화사, 1916년 2월 뮤추얼영화사, 1917년 6월 퍼스트내셔널영화사 등과 손잡고 다양한 영화를 쏟아내면서 채플린의 명성은 삽시간에 미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1919년 독점양상을 띠고 있는 영화배급체계에 대항하기 위해, 제작자 더글라스 페어뱅크스, 영화감독 데이비드 그리피스 등과 손을 잡고 영화사 '유나이티드 아티스츠’를 설립하는 등 채플린은 적극적으로 영화산업에 뛰어들었다.
채플린이 연출?주연한 첫 장편영화는 1921년 1월 뉴욕에서 개봉된 ‘키드’다. 자신의 신산했던 지난 세월을 응축해놓은 ‘키드’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비평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이미 영화배우이자 영화감독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지긴 했으나 '키드'를 통해 비로소 명장의 반열에 올랐다. 이후에도 ‘황금광 시대’(1925년) ‘시티 라이트’(1931년), ‘모던 타임즈’(1936), '위대한 독재자'(1940), '라임라이트'(1952) 등을 제작하면서 세계 영화사에 굵은 족적을 남겼다.
‘시티 라이트’는 직접 음악을 작곡해 영화계와 관객들을 놀라게 한 영화였고, ‘모던 타임즈'는 기계처럼 되어버린 노동자의 모습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해 희극 영화사상 최고의 블랙코미디이자 채플린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위대한 독재자’는 채플린이 감독한 최초의 발성영화였다.
그러나 채플린은 영화에서의 엄청난 성공에도 불구하고 매카시즘이 기승을 부리던 전후의 미국에서 공산주의자로 몰려 곤욕을 치렀다. 2차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5월 독일과 싸우고 있는 소련을 적극 지원해야 한다는 연설이 전후 냉전기에 문제가 된 것이다. 미국 비자를 신청하지 않은 것도 불신을 산 요인으로 작용했으며 1947년 4월 개봉된 영화 '무슈 베르두'의 일부 대사로도 오해를 사 미국 반공주의자들의 표적이 되었다. 채플린은 당시 저승사자와도 같던 비미행위조사위원회의 출두명령을 받았지만 청문회는 수차례 연기되었다가 무산되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당시의 채플린은 자신의 견해나 원칙을 감추는 법이 없었고 자신을 중상모략하는 언론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엄밀히 말하면 채플린의 정치적 이념은 강력한 반파시즘이었다. 나치같은 파시즘에 대한 저항은 물론이고 파시즘으로 발전할수 있다는 이유로 심지어 애국주의에 대해서조차 비판적이었다.
1952년 9월, 채플린은 영국에서 먼저 개봉할 예정인 ‘라임 라이트’ 상영을 위해 영국행 배에 몸을 실었다. 그런데 이틀 뒤 미 법무장관이 채플린의 미국 입국 비자를 말소시켰다는 소식이 배 안으로 전해졌다. 더 이상 미국에서 살 생각이 없었던 채플린은 1953년 1월 높은 세금부담을 피해 스위스로 영구 이주하고 1953년 4월 "나는 반공주의자들의 선동과 모략의 희생자였다"며 미국 거주를 단념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이후 '뉴욕의 왕'(1957)과 '홍콩에서 온 백작부인'(1967년)을 끝으로 더 이상 영화를 만들지 않았던 채플린이 다시 미국 땅을 밟은 것은 1972년 4월 아카데미 특별공로상을 받을 때였다.
채플린은 자신의 영화에서 주연을 맡았던 배우들과 세 번의 결혼과 이혼을 반복했다. 1943년 6월 4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자신(54세)보다 36살이나 어린, 극작가 유진 오닐의 막내딸 우나 오닐(18세)과 결혼했다. 오닐은 이 일로 딸과 부녀관계를 끊었으나 막내딸은 채플린과 35년을 살며 8남매를 낳았다. 영화감독 펠리니는 “그는 아담이었다. 우리는 모두 그의 후손”이라고 했고, 극작가 버나드 쇼는 “영화계의 유일한 천재”라며 칭송했다.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세상에 영화감독이 단 둘뿐이더라도, 그 중 한명은 찰리 채플린”이라고 찬사했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1914년
1차대전은 19세기 후반 유럽의 국제질서가 불러온 필연적인 충돌이었다. 범슬라브주의와 범게르만주의 간의 갈등, 프랑스와 독일의 전통적인 불화, 군사적으로 강해진 독일의 세계제패 야망, 강대국 사이에 끼어있는 군소국가들의 민족주의 고양 등이 불러온 국제정치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데다 인종 우월주의 등의 사상적 요인과 자본주의 발달, 시장확보를 위한 식민지 쟁탈 등의 경제적 요인들까지 중첩되어 일거에 폭발한 미증유의 대참사였다.

▲ 1914 1차대전

갈등이 팽창할 대로 팽창한 상태에서 일어난 1914년 6월28일의 사라예보 사건은 문명세계 유럽을 죽음과 파멸로 몰아넣은 제1차대전의 도화선이 되었다. 개전에 앞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큰형님 독일을 과신하고 세르비아를 침공했으나 세르비아 뒤에는 동방의 거인 러시아가 버티고 있었다. 독일이 아무리 중부 유럽의 패자를 꿈꿀 정도로 강력한 국가였다지만 오스트리아와 라이벌 관계에 있는 러시아에게 세르비아 사태는 결코 지나칠 수 없는 중대사였다.
개전 초기 참전국들은 참전이 불러올 엄청난 비극을 미처 예측하지 못한 채 줄줄이 전쟁터로 끌려들어갔다. 1914년 8월4일, 독일이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고 영국도 같은 날 독일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연쇄폭발이 일어났다. 이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러시아에 선전포고(6일)를 하고 러시아와 '3국협상'으로 묶여있는 영국과 프랑스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선전포고(12일)로 맞섰다.
독일과 러시아의 지원이 없었다면 충돌은 외교적으로 해결되고 전쟁은 피할수 있었을런지 모른다. 그러나 지난 4반세기동안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로 성장한 독일은 전쟁이 하고 싶어 몸살이 날 지경이었다. 인구는 25%, 자본력은 50%, 국민소득은 100%나 늘어나 있었다. 러시아는 폴란드?우크라이나?발칸반도를 둘러싸고 오스트리아와 오랜 경쟁관계에 있었고, 프랑스는 1870년 보불전쟁에서 빼앗긴 알자스?로렌 지방을 꿈에도 잊지 않고 있었으며 1892년 러시아와 동맹을 맺어 독일이 군대동원령을 내리면 두 나라가 함께 동원령을 내리기로 한 상태였다.
영국은 독일이 해군 군비 경쟁에 뛰어들자 이를 경계하며 프랑스?러시아와 3국협상을 맺어 만일을 대비했다. 독일은 이미 오스트리아?헝가리와의 2국 동맹에 이어 이탈리아를 끌여들여 3국동맹으로 확대시켜 놓고 있었다. 이처럼 동맹, 비밀협정, 군사협약으로 얽히고 설킨 거미줄같은 방위망이 1914년 이전의 국제적 긴장상태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었다.
개전후 오스만 투르크와 불가리아는 독일편에 가담했고, 그리스?루마니아는 3국협상 대열에 합류했다. 이탈리아는 전쟁 초기에는 동맹국과 같은 배를 탔으나 곧 협상국이 승전후 오스트리아 영토의 일부를 주겠다는 미끼에 넘어가 3국협상 편으로 돌아섰다. 이로써 가장 평화스러운 한 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유럽 전체가 전화(戰禍) 속으로 휘말려들었다. 일본도 그 틈을 타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8월23일)해 동아시아와 서태평양에 있는 독일의 권익을 빼앗고 중국에서 발판을 굳히려 들었다.
전쟁이 일어나자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병사들의 장도를 축하했다. 44년동안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데다 19세기의 낭만적인 전쟁 양상이 여전히 그들의 머릿속을 채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군인들은 영웅심에 불타있었고, 영광과 명예를 꿈꾸었으며 신이 자기편에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기동전이 참호전으로 바뀌면서 4개월이면 족할 줄 알았던 전쟁은 4년으로 늘어났고, 신무기와 독가스는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아갔다. 이 때문에 유럽열강은 과다한 전비 사용으로 점차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전쟁결과 예상치 못했던 왕정의 붕괴도 나타나 러시아, 독일, 오스트리아의 왕가가 몰락했고 오스만 투르크 제국과 오스트리아ㆍ헝가리 제국도 멸망했다. 전쟁 중 볼셰비키 혁명에 성공한 러시아와 미국은 새로운 강자로 급부상했다. 약소국에서는 ‘민족자결주의’로 대변되는 민족의 독립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났다. 인류는 국제연맹을 창설, 전쟁을 막으려했지만 한세대가 흐르기도 전에 인류 앞에는 더 큰 전쟁이 기다리고 있었다.

■러시아 혁명 성공           1917년
혁명은 전쟁을 먹고 자란다. 러시아혁명은 그래서 마르크스의 예언대로 됐다기 보다 1차대전의 혼란 속에서 성공한 측면이 크다. 러시아에게, 1200만명이 동원되어 900만명 이상의 러시아 장정이 죽거나 부상하거나 포로로 잡힌 1차대전은 곧 한 시대의 종말을 고하는 조종(弔鐘)이었다.

▲ 1917 러시아혁명

러시아의 1917년은 혁명의 해였다. 전쟁으로 물자가 부족해지자 페트로그라드에서는 먹을 것과 땔감에 대해 배급제를 실시했다. 그런데 어느날 나누어줄 빵이 다 떨어지자 페트로그라드의 여성노동자들이 ‘세계여성의 날’인 1917년 3월8일(러시아 구력 2월23일)에 "빵을 달라!"며 파업을 벌였다. 그해 첫 두달동안 이미 1300건에 70만명이 참가할 정도로 파업은 일상사였으나 이날의 파업은 전 도시를 마비시키는 총파업으로 발전했다. '2월 혁명'의 봉화가 오른 것이다. 게다가 3월11일 황제의 친위부대가 군중을 향해 발포하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이날의 발포로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친 가운데 정부가 시위 주동자들을 검거하고 두마를 해산하면서 도시는 안정을 되찾은 듯했다. 그러나 그날 저녁 친위부대원들이 발포중단을 결정하고 이튿날부터 시위 군중과 합세하면서 2월혁명은 중대 전환점을 맞았다.
장병들은 위에서 발포명령을 내려도 하늘을 향해 총을 쏠 뿐 진압에는 관심조차 없었고 심지어는 장교를 향해 총부리를 겨누기까지 했다. 수천명의 정치범이 풀려나는 등 페트로그라드는 점차 혁명의 도가니로 빠져들었다. 3월13일 갓 출범한 혁명위원회가 차르의 대신들을 체포하기 시작하고 3월14일에는 군 장성들이 전선에 나가있는 차르에게 “제위를 포기해야 독일의 침략으로부터 러시아를 구할수 있을 것”이라고 진언하면서 사태는 긴박하게 돌아갔다. 결국 차르는 황제직을 포기하고 동생에게 양위했으나 동생마저 신변에 위협을 느껴 황제직을 거부함으로써 303년동안 이어온 로마노프 왕조는 역사의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3월15일이었다.
차르 퇴위 후 두마(의회)의 온건파 지도자들이 임시정부를 구성하고, 같은 날 같은 건물에서 노동자병사소비에트도 결성됨에 따라 이른바 ‘이중권력’ 상태가 시작되었다. 임시정부는 국민들이 전쟁 중단을 바라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전쟁이 계속되기만을 바랬다. 때문에 이 전쟁 지속 결정은 러시아 국민들에게 70년동안의 권위주의 체제를 짐지운 비극적 대실책이었다. 온건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노동자병사소비에트는 임시정부를 마르크스주의가 정의한 사회주의로 가기 전 단계인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단계로 보았기 때문에 임시정부가 혁명을 수호하고 민주적으로 행동하는 한 임시정부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4월초까지 임시정부와 소비에트는 불편하면서도 상호 인정하는 협동관계를 이어갔으나 레닌의 귀국과 함께 상황에 큰 변화가 생겼다. 적당한 선에서 멈추려는 세력과 가속페달을 밟으려는 세력이 공존을 시작한 것이다. 정치선전의 명수 트로츠키까지 미국에서 돌아옴으로써 혁명은 급물살을 탔다. 그래도 볼셰비키는 여전히 소비에트 내에서 소수였다. 1917년 6월 페트로그라드에서 제1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가 열렸을 때 볼셰비키는 822석 가운데 겨우 105석만 차지했을 뿐 멘셰비키가 248명, 농민을 대표하는 사회혁명당이 285명으로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임시정부는 온건 사회주의자 알렉산더 케렌스키가 실권을 쥐고 있었다. 7월에 일어난 두가지 사건이 사태를 더욱 약화시켰다.
임시정부가 독일을 향해 총공세를 펼쳤으나 대참패로 끝나자 전쟁에 싫증난 수십만명의 병사들이 탈영하는 바람에 군대는 거의 해체상태였다. 게다가 수만명의 소비에트가 폭동을 일으켜 임시정부의 위신은 떨어졌고 반전을 외치는 볼셰비키의 인기는 높아졌다. 폭동을 구실로 케렌스키 정부는 트로츠키와 볼셰비키 지도자들을 체포하고 핀란드로 탈출한 레닌에 대해서는 '독일의 스파이'라고 몰아세웠다.
볼셰비키의 승리를 가져올 최초의 구체적인 사건이 일어난 것은 9월초였다. 7월의 민중폭동에서 겁을 먹은 보수적 분자들이 질서를 회복하고자 군 최고사령관 코르닐로프를 앞세워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코르닐로프는 소부대라도 페트로그라드로 진격하기만 하면 소비에트를 무력화시킬 것이라고 생각하고 9월9일 수도로 진격해들어갔으나 케렌스키가 그를 해임하고 철도와 전신 노동자들이 쿠데타군의 통신과 이동을 방해함에 따라 쿠데타는 실패로 돌아갔다.
쿠데타를 진압하기 위해 트로츠키를 석방하고 철도 노동자들의 도움을 받았으나 이 과정에서 큰 변화가 생겼다. 군 고위지도자들의 신망이 철저하게 떨어지고 임시정부가 고립되었으며 볼셰비키의 인기가 크게 높아진 것이다. 트로츠키는 영웅이 되어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장으로 뽑혔고 레닌은 10월20일 몰래 페트로그라드로 돌아왔다. 레닌의 봉기 결정은 10월 혁명의 분수령이었다. 시점을 늦게 잡았다면 혁명이 물건너갈 뻔한 인류사에 중대한 결정이었다.
레닌은 11월7일 오후에 있을 제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 이전에 봉기하기를 원했고, 트로츠키는 노동자와 군인에게 전투준비를 호소했다. 11월6일 아침, 케렌스키의 임시정부가 소비에트 간부들의 체포를 명령하고 볼셰비키 기관지 인쇄소를 급습하자 노동자·병사가 반격에 나섰다. 11월7일 새벽까지 노동자와 병사들은 역, 교량, 발전소, 우체국, 전화국, 무기고, 국립은행 등을 무혈점거해 사실상 혁명의 중요한 고비는 넘긴 상태였다. 오전10시 트로츠키는 소비에트 정권이 수립되었음을 선언했고 오후에는 선언문을 시 전역에 배포했다. 이날 혁명군은 임시정부가 들어서 있는 동궁(冬宮)을 빼고 페트로그라드 전 시내를 점령했다. 동궁의 임시정부 각료들이 육사 생도들의 도움을 받으며 전선에서 돌아올 원군을 믿고 항복을 거부하고 있는동안 케렌스키는 페트로그라드를 빠져나갔다.
11월7일 오후에 열린 제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는 볼셰비키가 다수파임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참석자 648명 가운데 338명이 볼셰비키를 지지한 데다 볼셰비키에 동조하는 사회혁명당 좌파까지 포함하면 대의원의 3분의 2나 되었다.
오후 9시35분 동궁 뒤 네바강에 정박해있던 오로라 군함이 동궁을 향해 쏜 2발의 포탄을 신호로 혁명군이 동궁으로 진입했다. 임시정부군은 맥없이 무너졌고 동궁은 함락되었다. 11월8일 새벽2시였다. 오전6시, 소비에트 대의원들에게 레닌이 기초한 대회선언이 낭독되었다. “혁명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승리하는 새 시대의 막을 열었다.”
3일간의 소비에트 대회 끝에 인민위원회 의장 레닌, 외무인민위원 트로츠키, 민족인민위원 스탈린 등으로 이어지는 인민위원회가 설립되고 ‘임시 노동정부’가 발족했다. 볼셰비키가 권력을 쟁취하기까지 사상자는 1000여명 뿐이었다. 인류사에 큰 변화를 몰고 온 것치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작은 희생이었다. 세계최초로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노동자·농민의 정부’가 탄생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