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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서 칼럼] ‘야생마’, ‘살짜기 옵서예’의 뮤지컬 배우 겸 가수, 김하정의 삶과 사랑[2]
2022년 04월 15일 (금) 00:17:52 박성서 webmaster@newsmaker.or.kr
▲ 1970년대 김하정씨와 지난해 출반한 ‘53주년 기념 음반/사랑이 남긴 것’ 재킷

가수에서 탤런트로, 뮤지컬 배우에서 성우로,
야생마처럼 거침없이 질주하다

‘사랑’, ‘야생마’. ‘금산 아가씨’, ‘소라의 노래’, ‘기도하는 도미니카’, ‘살짜기 옵서예’의 가수 김하정씨는 1968년 이광수 원작소설을 영화화한 ‘사랑’의 주제가를 부르며 데뷔했다.
MBC 드라마 주제가 ‘야생마’ 그리고 예그린악단의 뮤지컬 ‘살짜기 옵서예’ 등에 출연하며 다재다능한 실력을 발휘했던 실력파 가수.

1971년, 양반의 위선을 풍자한 고전소설 '배비장전'을 현대적으로 각색한 창작 뮤지컬 ‘살짜기 옵서예’에서 김하정은 기생 ‘애랑’ 역을 맡았다. 춤과 노래 그리고 연기가 바탕이 되어야만 할 수 있는 역할이었다. 이후 뮤지컬 ’바다여 말하라‘, ‘땅콩 껍질 속의 연가’, ’캬바레‘, 그리고 드라마 ‘석양의 나그네(MBC-TV), TV 뮤지컬 ‘황진이’와 ‘대춘향전’ 등의 타이틀 롤을 맡아 전성기를 구가하던 김하정.

노래면 노래, 연기면 연기, 그야말로 만능 엔터테이너였지만 이후 누구보다도 드라마틱한 삶을 살아야 했던 가수 김하정. 그의 삶과 사랑 그리고 노래 이야기, 그 두 번째.

글 l 박성서(음악평론가, 저널리스트)


등장하자마자 가요계 판도 바꿀 유망주로 주목받아

1968년, 영화주제가 ‘사랑’으로 데뷔하자마자 정식 음반을 내기도 전에 경향신문은 곧바로 신인 김하정을 주목했다. ‘목소리와 창법은 패티김을 닮았지만 더 달콤하고 참신한 개성을 지녔다.’고.

이어 정식 음반이 발표되자 다시 경향신문은 그해 9월, ‘바뀌는 가요계 판도’라는 기사에서 김하정에 대해 이런 기대 섞인 전망을 내놓는다. ‘능수능란한 감정 표현은 물론 뛰어난 기교를 소유하고 있어 곧 가요계 판도가 달라질 것’이라고.

기대를 한몸에 받던 유망주 김하정은 영화주제가 ‘사랑’을 취입하자마자 곧바로 오아시스레코드사에 전속되며 히트곡을 잇달아 발표한다. ‘사랑’을 비롯해 ‘첫사랑 별이 웁니다’, ‘기도하는 도미니카’ 등.

데뷔 이듬해, 김하정의 위상은 사뭇 달라진다. 당시 연예 오락 부문에서 절대 강자였던 동양 TV(TBC)가 김하정과 전속 계약을 체결했고 당시 음반계에서 양대산맥을 구축하고 있던 경쟁사 지구레코드가 김하정을 스카우트한다. 가요계 다크호스로 등장한 오아시스의 신예, ‘사랑을 계절 따라’의 박건과 함께였다.

이 무렵 메이저 음반사들끼리 스카우트 경쟁이 치열했다. 아세아에서 ‘돌아가는 삼각지’, ‘안개 낀 장충단 공원’ 등으로 최고 인기를 구가하던 배호가 신세기로 전속을 옮기는 시점에 ‘아빠의 청춘’, ‘영등포의 밤’으로 신세기의 주축을 이루던 가수 오기택이 아세아로 자리를 옮긴다. 지구의 문주란(동숙의 노래, 타인들)과 신세기의 정훈희(안개, 강 건너 등불)도 같은 시점에 서로 상대 음반사로 자리바꿈을 했다. 라이벌사 끼리 서로 상대 가수를 눈독 들이고 있었던 것. 초대형 맞트레이드였지만 공교롭게도 이들 모두 새로 적을 옮긴 음반사에서는 이렇다 할 히트곡을 내놓지 못했다. 당시 신인이었던 김하정, 박건도 마찬가지였다.

▲ 지구 전속 시절에 발표한 김하정 음반들

김하정, 라이벌 음반사 지구로 전속을 옮겨

1969년 지구로 전속을 옮기면서 김하정은 작곡가 손석우, 백영호, 김인배, 홍현걸, 김영광, 고봉산 등과 새롭게 손잡고 신곡을 발표하기 시작한다. ‘첫날밤 갑자기(임희재 작사, 손석우 작곡-이하 작사, 작곡 순)’, ‘눈물의 여인(지천, 김인배)’, ‘진도아리랑(김중순, 홍영표)’, ‘임은 어디에(홍현걸, 홍현걸)’, ‘사랑이 남긴 것(김중순, 고봉산)’ 등이다.

아울러 김하정은 동양 TV(TBC)에 전속된다. “방송국 전속 가수에게는 장, 단점이 동시에 존재했지요. 물론 저 같은 신인에게는 엄청난 행운이지만... 방송국 전속 가수는 우선 적으로 자 방송국에서 만드는 프로그램에 대부분 참여해야 했고 그러다 보니 아침방송부터 오후 늦은 토크 방송까지 마치고 나면 늘 파김치가 되곤 했지요. 그 무렵 함께 전속으로 활동하던 가수로는 이석, 조영남, 최영희씨 등이 있었지요.”

데뷔 1년 만에 ‘세금을 가장 많이 낸 가수 8위’에 올라

데뷔 1년만인 1969년, 김하정은 놀랍게도 ‘세금을 가장 많이 낸 가수 8위’에 오른다.
”처음 뉴스를 보면서 깜짝 놀랐어요. 세금이 왜 이렇게 많이 나왔지? 그동안 수입은 소속 음반사 측과 사촌오빠가 관리했기 때문에 저는 실제로 잘 몰라요. 그러나 어쨌든 세금을 많이 냈다는 것은 그만큼 수입이 많았다는 것이겠지요. 그때는 정말 쉴 새 없이 방송과 음반 취입, 공연을 다녔으니까...”

1969년 당시 초임 공무원 월급이 1만2천5백20원이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세금만 15만 원이 나왔다는 것은 그만큼 수입이 많았던 인기가수임을 증명하는 것이리라.

1970년 4월, 김하정은 TBC 전속이 풀리자마자 MBC-TV ‘후라이보이쇼’에 출연한다. 이전의 ‘크라운쇼’가 이름을 바꾸고 새롭게 단장한 첫 회였다. MBC를 시작으로 김하정은 어느 방송국이든 자유롭게 출연할 수 있게 되었다. ‘쇼 일레븐(MBC)’, ‘쇼쇼쇼(TBC)’, ‘스카이쇼(MBC)’, ‘즐거운 주말(KBS). ‘백화스테이지(MBC)’, ‘고요한 밤에(KBS)’ 등등. 특히 ‘쇼 일레븐’에서는 미니 뮤지컬 코너에 단골 출연했다.

TV 드라마 ‘석양의 나그네’에서 ‘달네’역 맡아

그해 8월, MBC-TV의 드라마 ‘석양의 나그네’에서 출연 섭외가 왔다.
“그 무렵 MBC ‘쇼 일레븐’의 미니 뮤지컬 코너에 거의 고정으로 출연했어요. 아마 드라마 제작진이 그걸 본 후 캐스팅한 것 같아요. 처음엔 못한다고 고사를 했는데 할 수 있을 거라며 계속 설득해왔지요.”

‘석양의 나그네(김만부 작, 이대섭 연출)’는 매일 밤 8시 45분에 방영된 일일 드라마였다.
“산속에서 자란 순진한 소녀 ‘달네’ 역을 맡았어요. 때 묻지 않은 산골 소녀였지요. 극 중에서 제가 사랑하는 상대 역은 박근형씨는데 그 외에도 김애경, 백일섭, 정애란씨 등과 호흡을 맞췄고... 처음 하는 연기라 많이 긴장되고 어려웠지만 브라운관을 통해 시청자들을 매일  만날 수 있기에 모든 열정을 쏟아부었죠.”

탤런트로도 연기력을 점차 인정받기 시작한 그는 드디어 대형 뮤지컬 ‘살짜기 옵서예’의 ‘애랑’역에 캐스팅된다.

▲ 창작 뮤지컬 ‘살짜기 옵서예’

뮤지컬 ‘살짜기 옵서예’ 주인공을 맡다

예그린의 ‘살짜기 옵서예’는 ‘뮤지컬의 대중화’에 성공한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 뮤지컬이다. 1971년 1월 1일부터 6일 동안 시민회관에서 펼쳐진 이 공연은 계속해서 부산, 대구, 대전, 광주, 전주, 목포 등 전국 주요 도시를 열흘 동안 순회공연했다. 애랑 역은 김하정씨가, 배비장 역에는 최희준, 목사 역엔 최불암, 정비장 역엔 김상국씨가 맡았다.

회를 거듭할수록 김하정은 점점 뮤지컬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공연을 통해서 춤, 연기, 노래 3박자를 모두 갖춘 가수로 인정받는다.

이 뮤지컬에 대한 애착은 이후 1978년도에 발행된 ‘살짜기 옵서예’ 공연 팜플렛에 직접 기고한 글에서도 잘 나타난다. 그 글을 보자.

“‘살짜기 옵서예’의 기억은 언제나 내가 부른 ‘애랑의 노래’가 팬들의 귓전에 살아 있으리라는 기대와 함께 피어오른다. 달콤한 멜로디 속에 젖어 드는 애절한 사랑의 호소... 뮤지컬이라는 감동의 세계에 들어서고 나서 비로소 눈 뜬 연극에의 열망이 애랑의 기억을 좀처럼 지워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가 쓴 글의 첫 부분이다.
글은 이렇게 이어진다. “확실히 나는 ‘살짜기 옵서예’ 이후 여러모로 대담해졌다. 1971년 그해 가을, 다시 예그린 뮤지컬 ‘바다여 말하라’를 준비하고 있는 동안, 모 주간지 화보페이지를 위해 나 자신의 누드 사진을 제공한 적이 있다. 뮤지컬이 나를 그렇게 대담하게 만든 것이라고 생각한다.”

연예계를 발칵 뒤집어놓은 누드 사진 사건

이 부분에 등장하는 ‘누드 사진’이란 서울신문사가 발행하던 주간지 ‘선데이서울’ 창간 3주년 기념호의 별책부록 ‘선데이 펀치’였다. 1971년 9월 26일 자. ‘톱싱어 김하정, 옷을 벗다’라는 제목과 함께 누드가 게재되며 연예계를 뒤흔들었다, 당시 기사의 일부를 잠시 보자면,
‘톱·싱어 김하정양이 누드가 됐다. 외국에선 흔히 있는 일이지만 우리나라 연예인으로서는 최초의 누드인 만큼 쇼킹하다...(이하 생략)’

이에 ‘선데이서울’은 간행물 윤리위원회로부터 경고 조치를 받았고 한국연예협회에서는 ‘김하정 제명 논란’으로 시끄러웠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 사진이 누드가 아니라 누드처럼 보이게 찍은 것이었다. 어쨌든 이 논란에 대해 김하정은 앞서 말한 ‘살짜기 옵서예’ 팜플렛을 통해 담담히 입장을 이어간다.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무엇인가 호소하는 것인데, 그러다 보면 입으로만이 아니라 온몸으로 표현하고 싶어지는 게 사람들의 본능인가 보다. ‘살짜기 옵서예’는 나를 정말 대담하게 만들었다.”고.

김하정에게 뮤지컬 ‘살짜기 옵서예’는 또 다른 연예생활의 전환점이 되었다. 무엇보다 대부분의 가수들이 목소리만으로 데뷔해서 목소리만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은데 이 뮤지컬의 경험은 또 한 단계 다른 세계로 이끈 것.

논란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이른바 ‘김하정, 국내 연예인 최초로 비키니를 입다’ 사건. 당시 이야기를 들어보자.

김하정, 우리나라 연예인 최초로 비키니 수영복을 입다

▲ 김하정 발표 음반

“뮤지컬 ‘살짜기 옵서예’ 공연이 끝나고 나니까 국방부에서 명령이 내려왔어요. 월남 위문공연을 준비하라고. 당시 위문공연은 국가적 행사였기 때문에 연예인이면 대부분 가야 했죠. ‘살짜기 옵서예’ 팀들과 함께 간 것이 1971년이었어요.”

당시 문화공보부가 주관한 이 주월 국군 연예위문단을 통해 그는 1971년과 72년, 두 차례 파월장병 위문공연을 다녀왔다. 에피소드 또한 많다.

“실제 전투가 벌어지고 있던 낯선 나라 전쟁터에서 우리 장병들을 만나는데 눈물부터 났었어요. 우리가 도착하자마자 환호성이 대단했는데 역시 이들이 가장 기다리던 것이 바로 위문공연이었어요. 그리고 제가 가장 놀란 것은 사병들 관물함 마다 제 사진이 붙어 있는 거예요. 아마도 위문품으로 보내진 잡지에서 오려낸 것이겠지요, 공연 때 모두 함께 합창하며 하나가 되어 눈물 흘리고..., 그때 만난 장병들은 지금도 나를 전우라고 부르지요.”

머나먼 땅에서 펼쳐진 위문과 흥겨운 자리, 그리고 눈물바다. 이곳에서 우리나라 연예인 중 최초로 비키니를 입은 김하정이 탄생한다. 김하정씨가 들려주는 비키니 수영복에 대한 에피소드 한 토막.

“청룡부대에서 위문공연을 하는 도중에 장병들과 바다에서 수영하는 프로그램이 있었어요. 저는 진도 섬에서 태어났지만 수영을 전혀 하지 못했고 또 어릴 때 물에 빠져 겨우 살아났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물에 대한 트라우마가 유독 심했어요. 때문에 그때까지 수영복을 입어본 적이 없었지요.”

그러나 위문공연이었던지라 주최 측에서는 수영놀이 프로그램을 강행했고 할 수 없이 수영복으로 갈아입어야 했는데 하필 여자 연예인에게는 당시 외국 사진에서나 볼 수 있었던 비키니 수영복을 입으라는 거였다.

“위문공연이었기 때문에 거절할 수가 없었어요. 제게 주는 수영복은 예쁜 링이 달린 비키니였는데 아예 장병들이 수영복에 제 이름까지 적어 놓았더라구요. 행사가 끝나니까 기념선물로 주더군요. 공연을 마치고 귀국하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공항에 카메라 기자가 와 있어요. 별수 없이 그를 따라 뚝섬에 가서 요트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어요. 이 사진이 주간지 표지에 실리면서 저는 본의 아니게 비키니를 입은 최초의 연예인이 되었지요.“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언제 포탄이 떨어질지 알 수 없는 전쟁터라 많이 긴장되었지요. 이동 중에 헬기가 갑자기 추락하지 않을까, 공연 도중에 포탄이 날라오지 않을까... 등등. 그 위문공연에서 생각나는 게 김상국 선배님이에요. 다들 무섭다고 하니까 ‘나만 믿으라’고 큰소리치면서 도착하자마자 군화를 갈아신고 무장까지 했는데 하필 우리가 공연하는 도중에 포탄이 근처에 떨어졌어요. 그때 가장 먼저 도망가는 거야. 어디로 갔나 보니까 글쎄, 책상 밑에 얼굴을 파묻고 있더라구. 엉덩이는 그대로 내놓고... 저 역시 무대에서 노래를 끝내려는데 갑자기 엄청나게 큰 소리가 나요. 순간 너무 놀라서 황급히 무대 뒤로 갔는데 포탄 소리가 아니라 병사들의 앙코르를 요청하는 함성이었데요. 그래서 다시 나가 노래 부르고...”

▲ ‘금산 아가씨’. ‘소라의 노래’ 음반, 1971년

지구에서 다시 오아시스 전속으로, ‘금산 아가씨’, ‘소라의 노래’ 히트

1971년 들어 김하정은 일 년여의 지구 전속을 마치고 다시 오아시스레코드사로 돌아온다. 이때 발표하는 노래가 ‘금산 아가씨’다.

1. 별과도 속삭이네 눈웃음 치네/부풀은 열아홉 살 순정 아가씨/향긋한 인삼 내음 바람에 싣고/어느 고을 도령에게 시집가려나/총각들의 애만 태우는 금산 아가씨.

2. 새하얀 꽃잎처럼 마음도 하얀/열아홉 꿈을 꾸는 순정아가씨/산 넘어 구름 아래 누가 산다고/노래마다 그리운 정 가득히 담아/안보면은 보고만 싶은 금산 아가씨. ‘금산 아가씨(김운하 작사, 이철혁 작곡, 1971년)

“인삼의 고장, 금산을 알리기 위해 만들어진 노래입니다. 그 무렵에는 지역마다 자기 고장을 노래로 알리려는 시도가 많았죠. ‘삼천리 한려수도, 낭주골 처녀(이미자)’나 ‘연포 아가씨, 하동포구 아가씨(하춘화)’처럼. 특히 금산은 이전까지 전라북도였다가 60년대에 충청남도로 바뀌었기 때문에 더욱 지역 홍보 노래가 필요했던 것 같아요.”

‘금산 아가씨’는 1981년부터 시작된 금산인삼축제의 ‘인삼 아가씨 선발대회’ 때 주제가처럼 불리기도 했다.

“당시 작곡가 황문평 선생님은 제가 트로트 풍의 노래를 부른다고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셨지만 사실 제 노래 중 가장 대중적으로 사랑받은 노래지요. 금산에 노래비도 세워져 있고, 그러다 보니 제가 금산 출신 가수로 아는 사람도 의외로 많아요. 노래가 있는 한 제겐 제2의 고향과도 같은 곳이지요.”

70년대 여름이면 해마다 들려오던 시즌 송, ‘소라의 노래’

소라의 노래가 들리는 바닷가에서/지나간 당신의 발자욱을 찾아봅니다/젊음을 불태운 그 시절은 싸늘히/차갑게 차갑게 시들어가고/당신의 다정했던 노래 소리는/파도에 실려 속삭이는데/오늘도 당신을 못 잊어 못 잊어서/지나간 당신의 발자욱을 찾아봅니다. -소라의 노래(김양화 작사, 남국인 작곡, 1971년)

뜨거우면서도 시원시원한 김하정의 창법과 음색에 매우 잘 어울리는 노래. ‘소라의 노래‘는 당시 부산MBC에 근무하던 김양화 PD가 쓴 노랫말에 역시 부산 출신의 작곡가 남국인씨가 멜로디를 붙여 해마다 여름이면 어김없이 들려오던 대표적인 여름 시즌송이다.

▲ 영화배우 최무룡씨가 운영하던 뉴욕 맨하탄의 한인클럽에서. 좌측부터 김하정, 최무룡, 최정자씨

예그린 10년 결산, 초대형 뮤지컬 ‘바다여 말하라’에서 가쯔코 역 맡아

1971년 9월, 김하정은 예그린 창단 9주년 기념 뮤지컬 ‘바다여 말하라’ 무대에 오른다. 장보고의 파란 많은 일생을 그린 이 공연에서 김하정은 장보고의 상대역인 일본 여인 가쯔코 역을 맡았다.

작곡, 지휘는 최창권, 45명의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맡고 70여 명의 합창단, 20여 명의 무용단이 함께 무대에 오른 초대형 뮤지컬이었다. 당시 국내 뮤지컬 사상 최대 제작비, 1천 5백만 원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장보고 역을 맡은 김창섭, 그리고 저 김하정, 백인숙, 조정애씨 등 30여 명의 주역에 1백여 명이 넘는 조역, 단역들이 함께 무대에 오르는 그야말로 초대형 뮤지컬이었어요. 저는 가쯔코 역을 맡았는데 일본인 특유의 어투와 발음을 구사하느라 엄청난 연습을 했고 또 기모노를 입고 배꼽춤까지 추던 장면이 기억나네요.”

예그린 측은 함께 무대에 선 김하정씨와 연극인 함현진, 그리고 추송웅씨를 예그린 정식단원으로 입단시키기도 했다.

그의 질주는 거침없었다. 계속해서 매주 금요일 밤 7시 반부터 30분간 방영된 TBC-TV 뮤지컬 ‘대춘향전((박만규 극본, 이영식 연출)’에서 춘향역을 맡아 열연했다. 주제가인 ‘내 마음 나도 몰라(김희조 작곡)’ 역시 김하정씨의 몫이다.
 
누구보다도 바쁘게 보낸 1971년, 김하정은 이 해에 서울신문 문화대상에서 여자가수상과 MBC 10대가수상 특별상을 수상한다. 그의 활동은 이듬해인 1972년에 결성하는 ‘김하정 패키지쇼’와 함께 거침없이 질주하고 있었다. 마치 야생마처럼. (계속) 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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