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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형의 100년의 기록 100년의 교훈
2021년 08월 09일 (월) 15:08:39 뉴스메이커 webmaster@newsmaker.or.kr

2021년 만해평화대상 수상자 다니엘 바렌보임에 대하여

만해 한용운의 삶과 정신을 기리는 만해평화대상의 2021년 수상자로 음악을 통해 중동 평화를 기원해온 지휘자 겸 피아니스트 다니엘 바렌보임(79)이 선정됐다. 시상식은 8월 11~14일 강원도 인제군 백담사 인근에서 펼쳐지는 만해축전 기간 중인 8월 12일 인제읍 하늘내린센터에서 열린다
    
어려서부터 ‘음악의 신동’으로 불리고 두각 나타내

다니엘 바렌보임(1942~ )은 러시아에서 일어난 유대인 핍박(포그롬)을 피해 아르헨티나로 이주한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따라서 출생지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다. 어려서부터 ‘음악의 신동’으로 불리고 두각을 나타냈다. 8살 때인 1950년 첫 피아노 독주회를 열고 이스라엘로 이주한 10살(1952) 때는 오스트리아 빈과 이탈리아 로마에서 공식 연주회를 멋지게 치러냈다. 12살 때인 1954년 당시 베를린필 지휘자 푸르트벵글러의 눈에 띄어 피아노와 지휘 공부를 병행했다.
지휘자 이력은 19살이던 1961년 이스라엘에서 시작했으나 공식적으로는 1966년 잉글리시 체임버 오케스트라와 녹음하며 지휘자로 데뷔했다. 30대부터는 파리 오케스트라 상임 지휘자(1975~1989), 시카고심포니 수석 지휘자(1991~2006)로 활동했다. 2000년부터는 베를린 슈타츠카펠레의 음악감독 겸 종신 지휘자로 활동하고 있다. 베를린 국립오페라극장의 음악감독 겸 종신지휘자도 맡고 있다.
1967년 빼어난 연주력에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영국의 유망 첼리스트 자클린 뒤 프레와 결혼한 것이 화제가 되었다. 뒤 프레는 사랑을 위해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종교까지 유대교로 바꿔가며 ‘키 작은 유대인’ 바렌보임과 결혼한 순정한 여인으로 세상에 알려졌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다발성 근육경화증’이라는 희귀병에 걸려 1973년 무대에서 내려오고 1987년 42세로 눈을 감았다. 그러자 바렌보임에게 “아내를 돌보지 않는 못된 남자”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게다가 바렌보임이 “나는 하루 2시간 이상 피아노 연습을 하지 않는다”고 공공연히 발언하면서 “잘난 척하는 인간”이라는 낙인까지 찍혔다. 이런 부정적인 이미지는 1990년대 들어 바렌보임이 보인 일련의 활동이 있은 후 사라졌다. 일련의 활동이란 인종과 국가를 뛰어넘으려는 음악가로서의 결연한 자세를 말한다.

이스라엘인과 아랍인의 화해 목적으로 ‘동서시집’ 오케스트라 결성

▲ 다니엘 바렌보임 (출처_바렌보임 홈페이지)

그에게 힘을 실어준 것은 팔레스타인 출신의 사상가 에드워드 사이드(1935~2003)였다. 두 사람은 1999년 독일 바이마르 주정부의 제안을 받아들여 이스라엘인과 아랍인의 화해를 목적으로 한 ‘웨스트-이스턴 디반 오케스트라(West-Eastern Divan Orchestra)’를 독일 바이마르에서 결성했다. 오케스트라 이름은 독일의 대문호 괴테가 사랑을 읊은 ‘웨스트-이스턴 디반’ 즉 ‘서동시집(西東詩集)’에서 땄다.
중세 페르시아 시인 하피즈의 문학에 매료된 괴테는 칠순인 1819년 ‘서동시집’을 펴냈다. 괴테는 이 시집을 펴내면서 “자신을 알고 다른 사람을 아는 이라면 알게 되리라. 동방과 서방이 더 이상 나누어지지 않음을”이라고 노래했다. 바렌보임과 사이드는 괴테가 당대 문인들 중 드물게 동양 문학에 관심을 보였고 심지어 아랍어를 배우는 등 실질적인 노력을 했다는 점에서 착안했다.
바렌보임은 엄정한 오디션을 통해 청소년 단원을 뽑으면서 아랍인과 유대인의 비율을 가능한 한 똑같이 맞춰서 선발했다. 단원들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물론 요르단, 레바논, 시리아, 이집트 출신 100여 명의 젊은 연주자들로 구성했다. 2021년 현재 단원도 40%는 이스라엘, 40%는 아랍, 20%는 유럽인이다.
두 사람은 2002년 오케스트라 본부를 스페인 세비야에 마련하고 2004년 세비야를 거점으로 ‘바렌보임-사이드 재단’을 설립했다. 세비야는 이슬람이 지배하던 7세기 동안 유대인과 무슬림이 공존했던 곳이다. 바렌보임이 주장하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공존은 팔레스타인이 국가로서 모든 권력을 가지면서 이스라엘·요르단과 연방 정부를 이루는 것이다.
사실 바렌보임은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후 고국을 위해 행동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친 이스라엘 음악가였다. 1967년과 1973년 중동전쟁 당시에는 이스라엘로 달려가서 연주회를 열었던 ‘애국 청년’이었다. 그가 팔레스타인 편에 서게 된 것은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이스라엘이 ‘박해받는 소수’에서 ‘핍박하는 다수’로 변했다고 판단하면서였다.
2001년 7월 7일, 베를린 슈타츠카펠레 오케스트라가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공연할 때 바렌보임은 예정에 없던 리하르트 바그너 작곡 ‘트리스탄과 이졸데’ 서곡을 기습적으로 지휘하는 방식을 통해 건국 후 이스라엘에서 이어져온 ‘바그너 금지’ 전통에 도전했다. 사실 바그너 음악 자체에 정치색은 없으나 생전 바그너가 반유대주의자이고 히틀러가 바그너를 열렬히 추종한 탓에 이스라엘인들에게 바그너는 연주도 감상도 ‘금기(禁忌)’였다. 그럼에도 바렌보임이 바그너의 곡을 과감히 연주하자 방청석에서는 박수갈채와 욕설이 동시에 쏟아져 나왔다.

고국 아르헨티나와 핏줄인 이스라엘 그리고 팔레스타인 시민권까지 가진 유일한 인물

바렌보임은 2004년 이스라엘의 울프재단이 주관하는 울프상의 예술 부문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시상식에는 이스라엘 대통령과 울프재단 이사장인 교육문화체육부 장관이 참석했다. 시상이 끝나고 수상 소감을 말하는 자리에서 바렌보임은 과거 이스라엘의 독립선언문이 적혀있는 쪽지를 꺼내들었다. 선언문에는 “모든 접경국 그리고 그 국민들과 평화와 우호를 유지할 것을 약속한다”고 적혀 있었다.
바렌보임은 선언문을 읽고 나서 도발적인 질문을 던졌다. “현재, 남의 땅을 점령하고 그 국민을 지배하는 것이 독립선언문의 정신에 부합하는 것인가. 독립이라는 미명 하에 다른 나라의 기본권을 희생시키는 것이 합당한 일인가. 우리 유대 민족이 고난과 박해의 역사를 보냈다고 이웃 국가의 기본권을 침해하고 그들의 고통을 모르는 척하는 것에 면죄부가 주어지나.”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장내가 술렁였다. 화가 난 교육문화부 장관이 바렌보임을 비난했으나 바렌보임은 한 술 더 떠 “상금을 팔레스타인 젊은이들을 위한 음악교육을 위해 기부하겠다”고 말했다.
2005년 8월에는 서동시집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팔레스타인 분쟁의 한복판이자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임시 행정수도인 라말라에서 감동적인 콘서트를 개최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간의 화합을 위한 음악적 노력을 계속 이어갔다. 혹시 있을지 모르는 사고에 대비해 무장군인들이 공연장을 에워싼 가운데 진행된 콘서트에서는 모차르트의 ‘오보에, 클라리넷, 바순, 호른을 위한 협주교향곡’과 베토벤의 교향곡 5번 ‘운명’이 연주되었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2007년 팔례스타인 정부로부터 명예시민권을 받았다. 따라서 그는 고국 아르헨티나와 핏줄인 이스라엘뿐 아니라 팔레스타인 시민권까지 가진 지구상 유일한 사람이 되었다. 2011년 5월에는 유럽 음악가 20여명과 함께 이스라엘이 공습을 퍼부은 가자지구에 들어가 모차르트 작품 두 곡을 연주했다.
바렌보임은 두 번 내한했다. 1984년 5월에는 파리 오케스트라를, 2011년 8월에는 서동시집 오케스트라를 인솔했다. 2011년 8월에는 10일부터 4일 동안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단기간에 베토벤 교향곡 전곡(全曲)을 연속 공연함으로써 화제를 일으켰다. 무엇보다 국내 음악팬을 놀라게 한 것은 8월 15일 경기 파주 임진각 평화누리 야외공연장에서 베토벤 교향곡 9번을 연주하고 조수미 등 국내 성악가와 120여명의 연합합창단이 서동시집 오케스트라 연주에 맞춰 4악장 ‘환희의 송가’를 노래한 것이다.
다만 음악적인 평가는 별로 좋지 않아 “지휘자가 심술을 부리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현악과 관악이 맞지 않는 등 거친 면이 있다” “전반적으로 기량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8월 14일 공연 때는 ‘교향곡 2번’ 1악장을 지휘한 뒤 공연장 온도가 23도인데도 ‘덥다’며 무대에서 퇴장, 15분간 돌아오지 않아 빈축을 샀다.


50년 전, 광주대단지(성남시) 조성과 주민 난동 

서울에 난립한 무허가 판자촌을 철거하고 철거민들은 300만 평이나 되는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일대로 이주시켜 10만 가구 55만 명을 수용하는 인공도시를 만든다는 계획이 발표된 것은 1968년 5월 7일자 건설부 고시를 통해서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도시 ‘성남시’를 탄생시킨 광주대단지 조성사업의 시작이었다.
택지는 1가구(세대)당 20~40평씩 분양하고, 분양 택지는 정착 후 적당한 시기에 입주자에게 매도하며, 주택건축은 입주자 자비로 건립하되 서울시에서 주택건립비의 일부를 보조한다는 고시에 따라 서울시가 토지를 매입하고 택지를 조성했다. 이렇게해서 1971년 8월까지 192만 평이 매입되고 160만 평의 택지가 조성되었다.

선거 공약 남발로 헛바람 잔뜩 불어넣은 것도 주요 원인

1969년 9월 서울시내 철도연변 무허가건물 철거민 3301 가구가 광주대단지에 처음 입주한 것을 시작으로 1971년 8월까지 2만2000가구 16만여 명의 철거민이 광주대단지로 이주했다. 그러나 서울시의 성급한 ‘선입주 후건설’ 정책으로 사람이 살 만한 여건이 제대로 구비되지 않아 주거환경은 극도로 열악했다.
철거민들은 당장 주택을 지을 돈이 없어 황무지나 다름없는 땅에 천막이나 움막을 치고 살아야 했고 아침 저녁으로 그들의 주요 생활공간인 서울을 다녀오려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다. 시내요금의 2배나 되는 버스요금도 큰 부담이었다. 당시 서울~광주대단지 간에는 천호동까지 연결된 폭 6~7m의 국도 하나뿐이었다.
그래도 철거입주민들로부터 입주증을 사 내 집을 마련하려는 영세민이 늘어나면서 입주증 전매가 극성을 부렸다. 많은 복덕방이 현지에 천막을 쳐놓고 입주증 매매행위를 부추기는 바람에 입주증 값은 하루가 다르게 치솟았다. 입주증을 수십 장이나 매점하는 자도 있었다.
게다가 입주증을 판 철거입주민이 다시 서울로 돌아가 무허가건물을 짓는 경우가 늘어나면서 자칫 광주대단지 조성사업이 허사로 끝날 수도 있었다. 이를 우려한 서울시가 1970년 7월 13일자 서울시 공고로 입주증 전매 금지조치를 내리고서야 입주증 값은 제자리를 찾았다.
더 큰 문제는 1971년 전반기에 치러진 두 번의 선거였다. 4월 27일의 대통령 선거와 5월 25일의 국회의원 선거 기간 입후보자들이 광주대단지를 마치 지상의 낙원으로 만들 것처럼 공약을 남발하며 현지 주민에게 헛바람을 잔뜩 불어넣었던 것이다. 선거 후 언제 그랬냐는 듯 갑자기 활기가 식고 찬바람이 부는 가운데 서울시가 입주자들과 분양지 매매계약을 강행했다.
철거민 입주분양자에게는 평당 2000원을 2년 거치 3년간 상환하도록 하고, 전매 입주자에게는 평당 8000~1만6000원을 일시불로 완불하도록 했다. 이게 화근이었다. 이미 70% 가량이 철거입주민으로부터 전매 입주자에게 팔려나갔으니 주민의 동요와 반발은 불을 보듯 뻔했다. 높은 불하가격과 일시불 상환에 전매 입주자들이 술렁거리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경기도까지 나서 가옥취득세를 부과해 주민의 부아를 돋우었다.

개발독재 시절의 어두운 단면

주민들은 1971년 7월 19일 ‘분양지 불하가격 시정위원회’를 구성해 ‘불하가격을 평당 1500원 이하로 인하하고 10년간 연부상환토록 할 것’, ‘향후 5년간 각종 세금을 면제해줄 것’ 등을 요구했다. 서울시가 냉담한 반응을 보이는 가운데 경기도가 기어코 가옥취득세 납부고지서를 배부하자 주민들의 분노가 극에 달했다. 시정위원회는 투쟁위원회로 명칭을 바꾸고 ‘100원에 매수한 땅 1만 원에 팔지 말라’, ‘살인적인 불하가격 결사 반대한다’는 등의 전단지를 단지 내에 살포하며 투쟁의지를 불태웠다.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양택식 서울시장이 1971년 8월 10일에 단지를 방문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주민들은 시장이 방문한 자리에서 궐기대회를 열기로 하고 새벽부터 대회 참가를 독려했다. 그러나 약속 시간인 11시를 넘겨도 서울시장이 오지 않자 비까지 맞아가며 기다리던 5만여 주민은 “속았다”, “우리를 사람 취급 않는다”며 분노를 토해냈다.
서울시장이 현지에 도착한 것은 흥분한 군중이 난동을 시작한 뒤였다. 11시30분 인근에 도착한 서울시장이 투쟁위 대표들에게 “가능한 한 요구조건을 들어주겠으니 난동을 중지시켜줄 것”을 당부하고 대표자들도 이에 합의함으로써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대표자들이 합의내용을 가지고 주민들에게 달려갔을 때는 이미 난동이 저지할 수 없는 단계로까지 달아올라 있었다.
난동자들은 광주대단지 사업소로 몰려가 닥치는 대로 파괴하고 문서를 불태웠다. 성남파출소 유리창도 모조리 부숴지고 파출소 앞의 백차도 불에 탔다. 버스와 트럭을 탈취한 주민들로 단지는 무법천지를 이뤘고, 소방차와 경찰도 감히 접근하지 못할 정도로 폭동이 극심했다.
그러기를 6시간. 오후 5시쯤 서울시가 주민들의 요구조건을 수락할 것이라는 소문이 알려지면서 난동자들이 뿔뿔히 흩어지고 공포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이튿날 내무부가 광주대단지를 '성남시'로 승격시키겠다는 발표와 함께 사태는 일단락되었으나 자칫하면 대규모 폭동으로 비화할 뻔했던 개발독재 시절의 어두운 단면이었다. NM

▲ ‘광주대단지 사건’ 당시 현장 모습 (출처_성남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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