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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서 칼럼] ‘미련’, ‘석양’의 가수, 장현의 삶과 노래
‘신중현 식 Rock’ 을 ‘장현 스타일’과 접목하다
2021년 08월 09일 (월) 14:54:38 박성서 webmaster@newsmaker.or.kr
▲ 장현 데뷔음반 ‘기다려주오’, 1970년

1970년 ‘기다려주오’를 시작으로 ‘미련’, ‘마른 잎’, ‘나는 너를’, ‘석양’ 등을 발표했던 가수, 장현(1945~2008).

속칭 ‘신중현 사단’의 대표적인 남성보컬 중 한 명이었지만 신중현 음악의 트레이드마크라 할 수 있는 현란한 록과는 사뭇 다른, 중저음 보컬의 매력이 돋보이는 느린 박자 위주의 곡들을 비교적 스탠더드하게 불렀다. ‘신중현 식 록’을 ‘장현 스타일’로 소화해낸 가수였다. 특히 감정이 격하지 않게, 적당히 생략해 부르는 담백함은 듣는 이들을 노래에 몰입하게 만드는 또 다른 매력이었다.

1994년 위암 4기 판정을 받고 수술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기적처럼 병세가 호전돼 만년에 다시 국내로 돌아와 무대에 섰던 장현.

장현과의 인터뷰는 이 무렵인 2007년 6월에 이루어졌다. 인터뷰 당시 그는 의사들이 놀랄 정도로 건강이 호전되었다며 암을 극복했다는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심지어 ‘암은 불치병이 아니라 난치병’이라고 주장하며 ‘다시 무대에 설 수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행복하다’는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거의 나았다는 암은 폐로 전이돼 결국 폐암 합병증인 폐렴을 극복하지 못하고 이듬해인 2008년 11월30일, 63세의 일기로 눈을 감는다.
투병 중에도 무대로 돌아온 것이 무엇보다 행복하다고 말하던 가수 장현. 그의 삶과 노래 이야기.

글 I 박성서(음악평론가, 저널리스트)

 

미국에서 위암 4기 극복, 10여년 만에 다시 무대로 돌아왔던 가수 장현

▲ 전성기 시절의 장현

‘기다려주오’, ‘미련’, ‘마른 잎’, ‘나는 너를’, ‘석양’... 중저음의 매력이 한껏 돋보였던 가수 장현. 마치 동네 형님 같이 친근하면서도 호탕한 그의 매력은 오히려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들어 제 빛을 발하는 중후함에 있었다.

‘내 마음이 가는 그 곳에 너무나도 그리운 사람/갈 수 없는 먼 곳이기에 그리움만 더하는 사람.코스모스 길을 따라서 끝이 없이 생각할 때에/보고 싶어 가고 싶어서 슬퍼지는 내 마음이여.미련 없이 잊으려 해도 너무나도 그리운 사람/가을 하늘 드높은 곳에 내 사연을 전해 볼까나.기약한 날 우리 없는데 지나 간 날 그리워하네/먼 훗날에 돌아온다면 변함없이 다정하리라.’ -미련(신중현 작사, 작곡, 장현 노래)

대표곡 ‘미련’이다. 특히 저음의 보이스 컬러와 신중현의 슬프고도 느릿느릿한 화성이 잘 어울리며 지금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노래.

속칭 ‘신중현 사단’의 핵심멤버였지만 독특하게도 당시 신중현 음악의 주류를 이루던 변화무쌍한 록과는 사뭇 다른, ‘느린 박자’ 위주의 곡들을 비교적 스탠더드하게 불렀다.

작곡가 신중현은 지난 2003년, 한국일보에 연재하던 ‘나의이력서/록의 대부 신중현 편’에서 가수 장현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내가 생각한 대로 (가수를) 끌고 가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곡을 쓴 사람이므로 나 자신이 주체가 됐을 때 가장 훌륭한 작품이 나왔다. 대표적인 예가 펄시스터즈, 김정미, 초기의 김추자라고 믿는다. 그들은 곡으로 출세하겠다는 마음보다, 꼭두각시가 될지언정 나를 따르고 배우겠다는 의지로 충만해 있었다. 정반대의 예가 있다면 장현처럼 곡만 받겠다는 경우다...” 라고.

반면 가수 장현의 입장은 어떠했을까.
“가수는 목소리가 노래의 주가 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신중현 선생의 곡조는 너무 슬프지요. 그래서 지나치게 격정적으로 감정을 드러내면 오히려 역효과가 나기도 합니다. 듣는 사람 각자가 느낄 수 있게, 그러니까 사람이 울고 있을 때의 감정보다는 한참 울고 난후 허탈할 때의 감정, 그런 것들을 내 나름대로 표현하고 싶었어요.”
인터뷰 당시 그가 한 말이다. 장현과의 인터뷰는 지난 2007년 6월에 이루어졌다. 그가 미국에서 위암 을 극복하고 귀국해 다시 무대에 서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그래서인지 대부분 사람들이 그래요. 내 노래는 듣기에는 편한데 막상 불러보면 힘들다고...”

▲ 장현 발표 음반들

 

신중현과의 첫 만남, 일하는 호텔에 일주일간 머물며 데뷔곡 ‘기다려주오’작곡

본명 장준기(張俊起). 1945년 4월 27일, 경북 울진에서 2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울진 매화중학교 2학년 때 서울 청운중학교로 전학해 서울에서 청소년시절을 보냈다. 어린 시절부터 음악광이었던 그는 고3 때 부친이 타계하자 진로를 바꿔 일찌감치 무대로 진출한다.

“어릴 때부터 유독 음악을 좋아했어요. 아마추어 당시에도 노래 부를 기회가 생기면 적극적으로 무대에 섰지요. 그 시절 음악친구들도 많이 사귀었습니다.”
젊은 시절부터 명동 다운타운가에 자주 모습을 드러내던 장현은 유독 음악친구들과의 우애가 돈독했다. 무명이었던 그가 직업가수로 처음 섰던 무대는 대전에 있는 유성관광호텔 나이트클럽. 이 역시 명동시절 음악친구였던 홍성일(대전주정의 아들)의 소개로 서게 됐다. 주정은 소주의 원료, 대전주정은 대전 지역 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소문난 재력가 집안이었다.

이어 섰던 무대가 대구수성나이트클럽이다. 이 또한 음악친구이자 호텔 사장이었던 김정만의 소개로 이루어졌다.

당시 그의 주 레퍼토리는 빙 크로스비, 프랭크 시나트라 같은 스탠다드 팝. ‘워커 웨이’, ‘샌프란시스코’가 그의 주요 레퍼토리였다. 점차 노래 잘한다는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당시 함께 어울렸던 멤버 중 한 명이 김진성 PD(현 KBS '가요무대' 자문위원)다. 김진성 PD는 그 무렵 기독교 방송국에서 음악프로그램을 맡고 있었다. 그의 회고담을 들어보자.

“장현을 비롯해 다들 명동에서 어울리던 음악친구들이었어요. 어느 날 대구의 정만이(대구수성나이트클럽 사장)가 부탁을 해요. 준기(장현의 본명)를 정식 음반 내고 활동하는 가수로 키워달라고... 정작 장현 본인이 아니라 친구들이 대신 부탁할 정도로 노래 실력이 뛰어났죠. 그래서 평소 가깝게 지내던 신중현씨를 만나 부탁을 하게 된 거죠.”

며칠 뒤 신중현은 노래를 직접 들어보겠다며 대구로 내려간다. 그곳 나이트클럽에서 노래하는 장현을 지켜본 뒤 그로부터 일주일 간 호텔에 머물며 그를 위한 노래를 만든다. 이때 만든 곡이 ‘기다려주오’를 비롯해 ‘안개 속의 여인’ 등 무려 다섯 곡이다. 이 노래들은 1970년 11월, 장현의 데뷔독집에 수록, 발표된다.

‘기다려주오 기다려주오 기다려주오 내 사랑아/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만나리라/그대 손에 손에 안으며 하고픈 그 말을 다 하리/그대 검은 눈 바라보며 행복하게 살아야지/기다려주오 기다려주오 기다려주오 내 사랑아 내 사랑아.’ -기다려주오(신중현 작사, 작곡, 장현 노래)

 

스스로 지은 예명, ‘가수면 장현, 정치인이면 장민...’

▲ 운동을 좋아했던 장현. 특히 골프실력은 주위에 정평이 나있을 정도였다

‘장현’, 스스로 지은 예명이다. “평소에 늘 생각하고 있었어요. 연예인이면 ‘장현’, 정치로 나간다면 ‘장민’으로 하겠다고... 한문으로는 ‘검을 현(玄)’자를 썼는데 특별한 의미는 없고 그냥 외우기 쉽고, 부르기 쉽고 또 연예인 색깔도 있고...”

데뷔곡 ‘기다려주오’는 작곡가 신중현의 색채가 강하게 배어있는 노래다. 신인가수 장현의 담백한 보이스 컬러는 신중현씨의 악상과 결합해 한결 새롭게 표출된다. 이어 발표하는 노래 ‘미련’, ‘마른 잎’, ‘석양’ 등과 함께 장현은 ‘신중현 사단’의 중심에 합류한다.

‘가야할 사람이기에 안녕, 안녕이라고 말해야지/돌아설 사람이기에 안녕, 안녕이라고 말해야지/울먹이는 마음일랑 나 혼자 삭히면서/웃으며 말해야지 안녕, 안녕...’ -석양(신중현 작사, 작곡. 장현 노래)

장현의 대표곡 중 하나인 ‘석양’이다. 보사노바 리듬의 ‘나는 너를’ 또한 두 콤비가 만들어낸 역작이다. 이 노래에서 들을 수 있는 전율의 백 코러스는 작곡가 신중현이 직접 맡았다.

‘시냇물 흘러서 가면/넓은 바닷물이 되듯이/세월이 흘러 익어간 사랑/가슴속에 메워있었네/그토록 믿어온 사랑/내 마음에 믿어온 사랑/지금은 모두 어리석음에/이제 너를 떠나간다네.저녁노을 나를 두고 가려나 어서 가려나/내 모습 감추게/밤하늘에 찾아오는 별들의 사랑이야기 들려줄 거야/세월이 흘러서 가면 내 사랑 찾아오겠지/모두 다 잊고 떠나가야지/보금자리 찾아가야지.’ -나는 너를(신중현 작사, 작곡. 장현 노래)

신중현 사단의 핵심멤버로 히트곡 행진을 이어가던 그는 1975년, 이른바 ‘대마초 파동’으로 인해 가수 활동을 접고 사업가로 변신한다. 결혼을 한 것도 이 무렵이다. 상대는 7살 연하의 김영주씨.

“집사람은 경기여고를 졸업하고 불란서 유학을 다녀온 후 1년 정도 있다가 만났어요. 제가 노래하는 장소에 불란서 룸메이트인 홍콩 친구와 함께 와서 처음 만나게 되었는데 결국 제 노래를 좋아하는 팬과 결혼할 수 있어 더욱 행복했죠.”

그가 위암 4기 판정을 받은 것은 1994년, 그의 나이 39세 때였다. 유년시절부터 유독 운동을 좋아했던 만큼 건강 체질이었던 그가 아파서 병원을 가본 것이 이때가 처음이라고 했다. 처음 찾은 병원에서 덜컥 암 진단을 받은 것.

당시 수술을 집도한 의사는 부인에게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라고 일렀다. 하지만 정작 장현 자신은 이상하리만치 이대로 삶이 끝나지 않을 거란 확신이 강하게 들었다. 워낙 낙천적인 성격 탓이기도 했다.

특히 운동이라면 가리지 않고 좋아해 위암 판정을 받기 전까지는 연예인 축구단에서 10여 년간 활동하기도 했다. 골프실력 또한 주위에 정평이 나있을 정도.

“사업하면서 골프를 즐겨 쳤어요. 특히 1987년에는 광주 곤지암에 있는 중부컨트리가 오픈했는데 그때 초대 챔피언을 차지했죠. 홀인원도 했었고... 하하”

 

암 치료 차 도미, LA 코리아타운에서 라이브카페 ‘미련’ 운영하며 ‘제2의 삶’ 누려

▲ ‘다시 무대에 설 수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행복하다’던 가수 장현

위암수술을 받은 얼마 뒤 그는 치료차 미국으로 건너간다.
“미국 가기 전 마지막으로 섰던 무대가 퇴원한 지 2개월 만에 섰던 KBS ‘빅쇼’였어요. 올림픽공원 잔디에서 펼쳐진 이 공연무대에 패티김, 이선희 등과 함께 올랐는데 막상 내가 노래하려는 순간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해요,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죠. 하필 부르는 노래가 슬로우 템포인 ‘미련’이었거든요. 그러나 막상 노래가 시작되니 관중들이 조용해져요. 비를 맞은 채 들었음에도 엄청난 박수가 쏟아졌어요. 노래가 끝난 뒤 제가 사과를 했지요. 병원에서 나온 지 한 달이 채 안 되다보니 숨이 차서 노래가 잘 안된 듯하다고. 그랬더니 또다시 박수와 함께 앙코르 요청이 쇄도해요. 할 수 없이 ‘나는 너를’을 추가로 불렀죠. 노래 중간 중간에 박수도 여러 차례 나오고... 투병생활을 하는 동안 제게 엄청나게 힘을 준, 잊지 못할 무대였지요.”

사실상 가수 활동을 접은 76년부터 18년 동안 펼쳤던 사업도 이때 함께 접어야 했다. 그가 설립, 운영했던 삼성봉제공업회사는 삼성물산 계열의 섬유 수출업체. 제조직원만도 3백여 명을 거느린 규모로 연간 1,500만 불 매출을 기록, 대통령 표창까지 받았던 사업장이었다. 당시 KBS 보도본부 24시에 나와 인터뷰를 할 정도였다고 했다.

“사업으로 인한 과로와 스트레스가 결국 위암을 불러 왔던 셈이죠. 미국으로 건너가 투병생활을 하면서 지나간 시절의 자신을 되돌아보며 많은 생각을 했어요. 특히 다시 건강해질 수 있다면 철저히 인생을 즐기며, 즐겁게만 살겠다... 이런 각오가 무엇보다 간절했죠.”

이러한 긍정적인 생각 때문이었을까. 수술 직후엔 불과 50m만 걸어도 숨이 차올랐지만 점차 기적처럼 빠르게 회복되어 갔다.

건강 때문에 택한 미국행이었지만 회복기간 동안 자녀들이 공부를 마쳤고 새로운 콘도사업에 성공하면서 한때 라이브카페 ‘미련’을 경영하기도 했다. 당시 미국 이름 트레버 존스(Trevor Jones)로 ‘제2의 삶’이 시작된 것이었다.

 

‘다시 무대에 설 수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행복했다’

▲ 필자와의 인터뷰 당시 장현, 2007년 6월

미국에서의 투병생활 12년 만에 다시 고국으로 돌아와 이따금씩 무대에 섰던 가수 장현. 당시 그는 한국과 미국에서 동시에 진행하고 있는 사업 관계로 5~6개월 간 스무 차례나 미국을 다녀오는 등 여전히 분주했다.

앞서 잠시 거론했듯 필자와의 인터뷰는 이 무렵에 이루어졌다. 당시 인터뷰 기사는 필자가 서울신문에 연재하고 있던 칼럼 ‘박성서의 7080 가요X파일’에 두 차례에 걸쳐 소개되었다. 인터뷰 당시 장현은 의사들이 놀랄 정도로 건강이 호전되어 암을 거의 극복했다는 자신감에 차있었다. 심지어 ‘암은 불치병이 아니라 난치병’이라고 자신 있게 강조하던 그에게서 긍정적인 생각은 암도 극복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엿보기도 했다.

그러나 이듬해인 2008년 11월30일, 그는 63세의 일기로 눈을 감는다.
‘다시 무대에 설 수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행복하다’던 그, 곧 음반도 발표할 예정이라며 기대해달라고 말하던 의욕에 찬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참고 자료] ‘박성서의 7080 가요X파일-장현[1][2]’(서울신문 2007년7월24일~8월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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