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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서 칼럼] 대구의 가요, 가요 속에 나타난 대구[5]
‘전선야곡’의 가수 신세영과의 인터뷰, 그리고 마지막으로 함께 한 경주 여행의 기억
2021년 07월 12일 (월) 17:49:56 박성서 webmaster@newsmaker.or.kr
▲ 필자와 인터뷰 중인 ‘전선야곡’의 신세영 선생, 2007년

‘불멸의 보초가’로 병영 막사에서 군가보다도 많이 불리는 ‘전선야곡’의 가수, 그리고 ‘청춘을 돌려다오’의 작곡가이기도 한 신세영(申世影, 1925년~2010년).

'전선에서 그리는 고향과 어머니'에 대한 심경을 고스란히 담은 대표적인 전쟁가요로 그 무렵 많은 국민들의 심금을 울렸다. 득히 길가다가도 느닷없이 징집되어 전쟁터에 나간 바람에 정작 어머니에게 인사조차 하지 못 하고 고향을 떠난 이들도 적지 않았던 탓이다.

때문에 노랫말 중 ‘어머님의 흰 머리가 눈부시어 울었소’ 하는 부분에서는 가슴이 북받쳐 부르는 이도, 듣는 이도 다 함께 소리 내어 울었다는 일화로도 유명한 노래다.

선생과의 인터뷰는 지난 2007년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함께 한 경주 여행에 대한 기억까지. 당시 (사)대한가수협회 원로가수회 명예회장을 맡고 있던 선생으로부터 6.25 전쟁 당시 이야기와 대구가요 이야기를 함께 들을 수 있었다.

‘대구의 가요, 가요 속에 나타난 대구’ 다섯 번 째, ‘전선야곡’의 가수 신세영 선생과의 인터뷰, 그리고 마지막으로 함께 한 경주 여행에서의 기억, 그 기록을 펼쳐본다.

글 I 박성서(음악평론가, 저널리스트), 사진 I 최광호(사진작가), 박성서

 

6.25 한국전쟁 중 나온 불멸의 보초가, ‘전선야곡’

▲ 전성기 시절의 신세영 선생(우측에서 두 번 째)와 대표곡 ‘전선야곡’ 악보

1. 가랑잎이 휘날리는 전선의 달밤/소리 없이 내리는 이슬도 차가운데/단잠을 못 이루고 돌아눕는 귓가에/장부의 길 일러주신 어머님의 목소리/아~ 그 목소리 그리워.

2. 들려오는 총소리를 자장가 삼아/꿈길 속에 달려간 내 고향 내 집에는/정안수 떠놓고서 이아들의 공 비는/어머님의 흰 머리가 눈부시어 울었소/아~ 쓸어안고 싶었소.

3. 방아쇠를 잡은 손에 쌓이는 눈물/손등으로 씻으며 적진을 노려보니/총소리 멎어버린 고지 위에 꽂히며/마음대로 나부끼는 태극기는 찬란해/아~ 다시 한 번 보았소. -‘전선야곡(유호 작사, 박시춘 작곡, 신세영 노래)’.

현재까지도 병영 막사에서 군가보다도 많이 불린다는 노래로 일명 ‘불멸의 보초가’로 불리는 ‘전선야곡’은 대표적인 전쟁가요다.

전 국토의 4분의 3이 전쟁터로 변하고 온 국민을 전쟁터로, 그리고 피란민으로 내몰았던 6.25전쟁 당시 나온 이 노래는, 특히 '전선에서 그리는 고향 어머니'에 대한 심경을 고스란히 담아 당시 국민들의 소매 깃을 적셨다. 노래의 주인공인 가수 신세영은 2007년 인터뷰 당시 82세로 사단법인 대한가수협회 원로가수회 명예회장을 맡고 있었다.

‘신세영’이라는 예명은 당시 유명가수였던 신카나리아의 ‘신(申)’, 장세정의 ‘세(世)’, 이난영의 ‘영(影)’자를 한 글자 씩 조합해 만든 이름이다.

대구 오리엔트레코드사를 통해 처음 이름을 알린 노래 ‘로맨스 항로(손영감 작사, 이병주 작곡 -이하 작사, 작곡 순)’에 이어 ‘꽃수레(손로원, 이병주)’, ‘무영탑 사랑(손로원, 이재호)’, ‘고향편지(유호, 이병주)’, ‘푸른 달밤(김종현, 이병주)’, ‘십자성(남북평, 이재호)’, ‘백제의 밤(손로원, 박시춘)’ 등을 잇달아 발표했다.

본명 정정수. 1925년 광산업을 하는 부친 정자경과 포목점을 운영했던 모친 김옥경 사이 3남매 중 외아들로 부산 동래에서 태어나 어릴 때 대구로 이사했다.

“호적에는 1929년 생으로 되어있지만 실제로는 1925년에 동래에서 태어났지요. 당시 군대 문제로 인해 호적을 바꿨어요. 대구에서 사업하시던 아버지는 제가 13살 때 일찍 돌아가셨고 대신 어머니가 대구 종로에서 포목상을 크게 하셨죠. ‘옥경포목점’이라고 대구에서는 알아주는 곳이었어요.”

한때 그는 대구에서 이름난 플라이급 복싱선수였다. 이름은 본명인 정정수로 활동했다.

“17살, 왜정시대 때부터 3년 정도 복싱선수로 뛰었어요, 대구에서는 적수가 없을 정도였죠. 그러다가 서울로 원정경기를 갔는데 그때 ‘마포 곰보’라 불리던 선수에게 엄청 맞았어요. 그 뒤로 권투를 포기했죠.”

적수가 없었던 복싱선수에서 가수로 전향하다

복싱선수 생활을 접은 후 그는 노래에 전념한다. 가까운 곳에 콩쿠르가 열리면 무조건 나갔다. 점차 두각을 나타내면서 본격적으로 가수의 꿈을 키운 것도 이때부터다.

“처음 콩쿠르에 나간 게 19살인가 20살 때부터였는데 어떤 대회인지는 정확히 기억이 안 나요. 어쨌든 나갔다 하면 상을 받았으니까. 그러나 집에서는 절대 반대였지요. 결국 돈이 필요하니까 집에서 훔쳐내곤 했죠. 그 당시엔 비로도(비단)가 매우 비쌌는데, 창고에 있는 비로도 두필을 훔쳐 담을 넘다가 마침 순찰 중인 경찰관에게 걸려 잡혀가기도 했지요.”

결국 어머니가 데리러 와서 사정사정해 겨우 풀려날 수 있었고 경찰은 ‘자기 집 물건을 도둑질하는 도둑놈이 어디 있냐’며 혀를 찼다고 웃는다.

“콩쿠르가 거듭되면서 가요계 거성들을 만날 수 있었어요. 오리엔트 이병주 사장님을 비롯해 작곡가 이재호, 작사가 손로원, 유명가수인 백년설, 이인권 선생님...”

대가들을 만나게 되면서 한껏 가수에의 꿈을 키우던 1945년 초, 그러나 해방을 불과 얼마 앞둔 시점에 그는 강제 징집된다.

“평소 저를 아껴주시던 백년설 선생님이 역까지 마중 나와 어깨를 두드려주며 ‘외동아들인 만큼 반드시 살아 돌아오라’고 당부하던 말이 지금도 귀에 쟁쟁합니다.” 그 때가 21살.

징용된 후 그는 만주 봉천(奉天, 지금의 심양(沈陽))을 거쳐 항구 전선에 투입되는데 이때 ‘B 29’의 폭격을 받아 대부분의 전우들을 잃고 그 역시도 피투성이가 된 채 병원으로 이송된다.

입원한 후 한 달 반 쯤 지났을 때 그는 감격적인 일본 패망 소식을 듣는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귀국하지 못하고 중국 수용소에서 수감생활을 거쳐야했다. 일본군 신분이었기 때문이다.

“징용에 끌려온 조선출신 군인 10여명이 함께 수용되었어요. 한 달 반 동안이나... 결국 신분조사가 끝난 후에야 귀국할 수 있었죠. 하루 꼬박 걸려 항구에서 남경까지 간 후 다시 상해에서 일주일 있다가 배 타고 부산으로 왔는데 마침 배의 반장이 가수 이인권 선생이었어요. 중국에 위문공연 갔다가 해방이 되어서 나오는 길이었지요. 부산에서 밤기차를 타고 새벽 무렵 대구 집에 도착했는데 식구들이 귀신이라고 문을 열어주지 않았어요. ‘전쟁터에 끌려간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더라.’ 라는 소문에 어머니는 홧김에 술을 마셨다가 화로에 넘어져 화상을 입고 몸을 일으키지 못하는 상황이었고 계속 시끄러우니까 결국 누나가 나와 문을 열어주는데 그때서야 내가 살아 돌아온 걸 알고 펄쩍 펄쩍 뛰면서 좋아했죠. 동네 사람들도 우르르 몰려와 새벽부터 동네잔치가 벌어지고... 이인권 선생도 한동안 대구 우리 집에 머물렀어요.”

예명 ‘신세영’으로 오리엔트 전속가수가 되다

▲ 신세영이란 이름을 세상에 알린 실질적인 데뷔곡 ‘로맨스 항로’를 비롯한 당시 발표한 SP음반 라벨

“예명을 짓는데 심사위원 한 분이 제게 ‘신고산’이란 이름이 어떻겠냐고 물어요. 그러니까 또 다른 분이 ‘신고산이 우르르르 함흥 차 떠나는 소리에...의 신고산타령이냐?’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그중 손로원 선생이 성씨만은 살려 ‘신세영’이 어떻겠냐고 제의했지요. 즉 신카나리아의 ‘신’, 장세정의 ‘세’, 이난영의 ‘영’자를 합친 이름이라며 이 이름을 쓰면 우리나라 최고가수가 될 거라고 치켜세웠어요. 해서 당시 이병주 선생을 비롯한 일곱 분이 투표를 해 5:2로 ‘신세영’이 된 거죠.”

신생 레코드사였던 오리엔트는 초기에 어려움이 많았다. 오리엔트의 대표작이 된 ‘귀국선(손로원 작사, 이재호 작곡)’ 또한 그러한 음반 중 하나다.

“제 기억에 이 노래는 이인권 선생이 먼저 취입했다고 들었어요. 그러나 원판에 문제가 생겨 다시 취입해야 하는데 어디로 공연을 갔는지 연락이 안 된다는 거야. 어느 날 이병주 선생님이 마냥 기다릴 수 없으니 저에게 한 번 불러보라고 해요. 그래서 가수 이름도 없이 음반이 나갔는데, 제 이름을 알린 실질적 데뷔곡은 ‘로맨스 항로’입니다.”

녹음 장소는 오리엔트레코드사 2층. 보통 자정을 전후해 녹음을 시작했는데 그나마도 중간에 잡음이 들어가는 바람에 다시 녹음하느라 꼬박 밤을 새우기 일쑤였다.

“그 당시는 떡판, 그러니까 엔지(NG)가 나면 다시 깎아요. 노래 잘 부른다고 무조건 취입할 수 있는 때가 아니었지요.”

이 무렵 작곡가 박시춘 선생이 오리엔트에 가세하면서 그의 전성기가 시작된다. “박시춘 선생이 오리엔트에서 활동을 시작하면서 노래 부를 가수를 찾는다고 해요. 이병주 사장의 소개로 만났죠. 만나자마자 악보를 주시더니 몇 차례 테스트 해보신 후 흡족한 얼굴로 당장 내일 모레 취입하자고 하시더군요. 그동안이라도 열심히 연습해두라는 말도 함께... 그 노래가 ‘전선야곡’이었어요. 녹음할 때 가사가 바뀔 수도 있으니 이해해 달라고 하시던 말씀도 기억이 납니다.”

이 ‘전선야곡’은 그에게 대표곡 이상의 일화가 많은 노래다. 취입했던 바로 그날 어머니가 운명하셨기 때문이다.

“취입을 마치고 새벽에 해장국을 먹으러 갔는데 ‘어머니가 곧 운명하실 것 같다’는 연락이 왔어요. 해서 부랴부랴 자전거를 타고 집에 도착하니 어머니가 좀 안아달라고 하세요. 어머니를 안자마자 운명하셨어요. 입관하고 나서 이 노래를 묘 앞에서 부르는데 어찌나 목이 메든지...”

암 투병 중이던 모친은 의사로부터 3년을 넘기기 힘들 거라는 통보를 받았는데, 그 3년의 단 하루를 남겨놓고 그해 가을, 47세 일기로 타계했다.

▲ 부산 40계단문화관에서 열린 ‘한국전쟁과 대중가요, 기록과 증언전(展)’ 전시장에서의 신세영 선생, 2007년

전쟁 당시 그는 전선야곡 이외에도 여러 곡을 취입했다. 부산바다에 떠있던 병원선의 부상병을 보고 만든 노래 ‘병원선(손로원, 박시춘)’을 비롯해 입영전야를 그린 ‘바로 그날 밤(유호, 박시춘)’, ‘부산야곡(손석우 박시춘)’, ‘영 너머 고갯길(유호, 박시춘)’, 엄토미 작곡의 ‘추억의 40계단’, 손석우 작곡의 ‘타향일기(손석우, 손석우)’ 그리고 ‘청춘 랩소디(손로현, 박시춘)’ 등등...

“‘추억의 40계단’은 당시 엄토미 선생과 함께 부산에 있는 40계단을 오르다가 이 계단을 소재로 노래를 만들어보자, 고 해서 당시 손석우 선생께 가사를 부탁해 만들어진 노래죠. 그 무렵 ‘타향일기’라는 노래도 취입했고 또한 이후에 나온 ‘추억의 다방’이라는 노래도 손석우 작사, 작곡의 노래인데 참 멋진 노래입니다. 또한 ‘바로 그날 밤’은 입영전야(入營前夜)의 심정을 그린 노래인데 당시 이 노래 때문에 참 많이들 울었지요.”

전쟁 당시 그 역시 군예대에 소속되어 군번 없는 용사로 직접 전쟁터를 누볐다.

“전쟁이 났을 무렵엔 대구와 부산에서 공연 위주로 활동하다가 1.4후퇴 이후 정훈국 공작대원으로 들어가 7사단에 배치되었죠. 이때 가수 손인호씨도 같은 소대에 있었어요. 작전하는 군인들을 따라 최전방인 덕천까지 올라갔다가 중공군에게 포위되어 이틀 만에 탈출하는 등 죽을 고비도 참으로 많이 넘겼죠. 문경새재를 넘다가 트럭이 전복되는 사고도 있었고,.. 당시 위문공연 때에는 군인들이 다른 노래는 안 된다며 가는 곳마다 ‘전선야곡’을 요청받았어요. 심지어 어느 부대에서는 이 노래를 모르면 부대장이 밥도 안줬을 정도였습니다.”

▲ 신세영 작곡 1집 ‘정처 없는 방랑자’와 작곡 2집 ‘고향 길 타향 길’ 음반, 그리고 장남 태일의 ‘저 달이 엿볼까봐’ 음반 재킷

 

휴전 후 서울로 올라온 그는 오아시스레코드사를 통해 ‘추억의 다방(손석우, 손석우)’, ‘집시의 탄식(손석우, 외국 곡)’ 등을 발표하는 동시에 작곡가로도 활동을 시작했다.

그가 작곡한 대표적인 노래가 ‘청춘을 돌려다오(월견초 최치수 공동 작사, 신행일, 현철, 나훈아 등 취입-이하 작사, 노래 순)’다. 그 외에도 ‘정처 없는 방랑자(월견초, 최무룡)’, ‘화전민(최치수, 배호)’, ‘비에 젖은 로맨스(월견초, 안다성)’, ‘애수의 밤 열차(허민, 남일해)’, ‘나는 갑니다(반야월, 최정자)’, ‘여인의 밤길(월견초, 문정숙)’ 등이 있다.

“배호에게 ‘화전민’을 취입시킬 당시가 특히 기억이 납니다. 그 당시 배호는 몸 상태가 아주 안 좋았어요. 그럼에도 성의껏 불러보겠다고 하던 말이 생각나고, 또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늘 마음이 아프죠. 최무룡씨 또한 내 곡을 많이 불렀고...”

대표작인 ‘청춘을 돌려다오’는 처음에 가수 신행일이 취입했는데 이후 현철, 나훈아가 불러 크게 히트했다. 처음 만들어질 당시 제목은 ‘청춘을 빌려다오’였다.

“본래 월견초의 가사였어요. 당시 동아방송 강수향 음악부장이 듣더니 아주 좋다며 밀어주겠다고 했던 노래였죠. 그런데 모 제약회사에서 방송사 측에 항의했다고 해요. ‘노랫말 가사가 제약회사를 망하게 하는 것’이라고. 지금도 나는 그게 무슨 주장인지 모르겠고... 어쨌든 계속 시끄러우니까 방송국 측에서 아예 이 노래를 틀지 않게 되었지요. 그때 아세아레코드사 최치수 사장이 곡이 아까우니 가사를 고쳐 다시 취입하자고 해 일부 가사와 제목을 ‘청춘을 돌려다오’로 바꿨어요. (그 때문에 이 노래는 월견초, 최치수 공동 작사로 되어 있다.) 그 후 이 노래가 바로 떴고, 지금도 저작권료가 많이 나오고 있죠,”

그러나 그는 얼마 뒤 작곡 활동을 접고 가수생활에만 전념한다. “작곡에 손을 놓게 된 것은 박시춘 선생님 때문이었어요. 어느 날 선생이 부르시더니 ‘너 가수냐, 작곡가냐? 작곡을 하려면 나와 관계 끊자.’고 하시더군요. 당시 저는 박시춘 선생 앞에서 만큼은 항상 ‘고양이 앞의 쥐’였죠.”

▲ 대한가수협회 원로가수회 명예회장 재임 당시 신세영 선생의 마지막 외출, 2010년 4월 5일 경주. 이로부터 4개월 뒤 선생은 눈을 감았다

장남 ‘태일’, 신세영 곡으로 가수 데뷔

그는 군에 갔다 오자마자 서둘러 결혼했다. “외아들이었기 때문에 어머니가 눈만 마주치면 졸랐어요. ‘빨리 며느리에게 밥을 얻어먹고 싶다’며...”

현재 유가족은 네 살 터울의 부인 박목련(朴木蓮) 여사와의 슬하에 2남 2녀가 있다. 특히 장남 정태진씨는 한때 ‘태일’이라는 예명으로 가수로 활동했다. 신세영 작곡의 ‘추억의 동백섬(한무정, 신세영)’과 ‘남포동 소야곡(강사랑, 신세영)’이 데뷔곡이다.

나머지 가족들은 지난 1974년 미국으로 이민한 데 이어 신세영씨 또한 81년 미국으로 건너가 가족들과 합류한 이후 틈틈이 한국을 오가다가 2000년대 초에 아예 비자를 반납했다. ‘묻혀도 한국 땅에 묻혀야겠다.’는 생각, 그리고 여전히 해야 할 일이 많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우리 민족이 가장 힘들었던 한국전쟁 시기에 많은 노래를 취입했던 선생은 2010년 8월 22일, 노환으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계속)

[참고자료]
단행본 ‘한국전쟁과 대중가요, 기록과 증언(박성서, 책이 있는 풍경, 2010년), ‘大邱 가요, 가요 속에 나타난 大邱’(한국가요작가협회보 가요마을, 2005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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