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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형의 100년의 기록 100년의 교훈
2021년 05월 07일 (금) 23:37:36 김정형 webmaster@newsmaker.or.kr

서울역사박물관이 자료 공모하는 화신백화점과 박흥식

서울역사박물관이 화신백화점에 대한 기억을 되살릴 수 있는 자료를 5월 16일까지 공모한다. 이번 공모전은 7월 2일 개최되는 ‘공평도시유적전시관 기획전 화신백화점’을 위해 마련된 것이다. 화신백화점은 1932년 설립되어 1987년까지 현재의 종로타워 자리에 위치했다. 화신은 한국인이 세운 최초의 백화점이자 종로 상권의 중심이었다. 서울시민뿐 아니라 서울에 올라온 사람들이라면 반드시 방문했던 서울의 랜드마크이기도 했다. 화신백화점의 부침과 한국의 근대백화점 역사를 살펴본다.

‘백화점 왕’으로 불리며 한국 최고 부자 소리 들어

▲ 일제 강점기 화신백화점 모습

박흥식(1903~1994)은 일제강점기를 거쳐 1950년대 말까지 ‘백화점의 왕’으로 불리며 한국 최고의 부자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부터 급격히 몰락해 오늘날에는 과거의 흔적이 모두 사라져버린 파란만장한 기업가로 기억되고 있다.
박흥식은 평남 용강의 2,000석꾼 부농 집안에서 태어나 15세 때이던 1918년 용강읍내에서 미곡상으로 첫 사업을 시작했다. 운이 좋게도 그해 쌀값 폭등으로 큰돈을 벌게 되자 그 돈으로 1920년 대규모로 땅을 매입해 대지주가 되었다. 1920년 고향에 차린 인쇄소까지 큰 성공을 거둬 1926년 6월 서울로 진출했다. 종이도매업체 ‘선일지물’로 역시 큰돈을 벌어들인 박흥식이 다음 사업 목표로 잡은 것은 대형 상점이었다.
당시 청계천을 경계로 서울 ‘남촌’에는 일본인이 설립한 히라타, 조지야, 미나카이, 미쓰코시 등의 대형 상점이 각축을 벌이며 상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북촌’에는 조선인의 대형 상점 ‘동아부인상회’와 ‘화신상회’가 일본 상점과 경쟁하고 있었다.
1920년 설립된 동아부인상회는 1925년 최남의 손으로 넘어가 3층으로 증축된 뒤 성황을 이뤘고, 1918년 신태화가 종로 네거리에 설립한 화신상회는 양복부, 포목부, 신구잡화부까지 갖춘 서울에서 제일 큰 금은상회로 유명했다. 그러나 화신상회가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경영난에 빠지자 박흥식이 이를 인수해 1931년 9월 15일 주식회사 화신상회로 재탄생시켰다.
박흥식은 화신상회의 목조 2층 건물을 헐고 조선인 건축가 박길룡이 설계한 콘크리트 3층 건물을 지어 1932년 5월 10일 ‘화신백화점’이라는 새 이름으로 문을 열었다. 바로 옆에는 4개월 전인 1932년 1월 영업을 시작한 최남의 4층짜리 동아백화점이 자리잡고 있어 박흥식과 최남의 경쟁은 치열했다.
두 청년 실업가는 사운과 재력을 걸고 혈전을 벌였으나 1932년 7월 16일 박흥식이 동아백화점을 인수하는 것으로 승패가 갈렸다. 이로써 박흥식은 서울의 최대 상권을 거머쥔 유통업계의 큰 손으로 우뚝 섰다. 당시 박흥식이 보여준 경영 수완은 신기에 가까웠다. 경품부 바겐세일, 체인점 설치, 상품권 발행, 주택의 경품 제공 등 당시로서는 혁신적이고 대담한 마케팅 기법을 과감히 도입하는 탁월한 사업 수완을 펼쳐보였다.

화신백화점 서울의 대표적 명물로 각광받아

박흥식은 백화점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 화신백화점 건물은 서관, 동아백화점 건물은 동관으로 구분해 두 건물을 육교로 이었으나 1935년 1월 27일 저녁 7시 30분쯤 일어난 큰불로 서관 1~3층이 전소되고 동관 3층, 4층이 불에 타는 바람에 4년에 걸친 공든 탑이 무너지는 아픔을 겪었다. 인명 피해는 없었으나 재산 피해가 컸다. 그렇다고 풀이 죽을 박흥식이 아니었다. 그는 “불난 집이 더 비싸게 팔린다”, “불같이 활활 다시 일어날 것”이라고 큰소리치고는 총독과 담판 끝에 종로경찰서 구관을 빌려 같은 해 8월 15일 임시로 백화점 영업을 재개했다.
대형 건물 두 동을 통째로 태워버린 초유의 화재가 안긴 충격은 컸다. 엉성한 소방 시스템이 도마에 올랐고 이후 소방 행정이 달라졌다. 대화재 뒤 첫 연말이 다가오자 경성소방서는 시내의 모든 극장과 백화점마다 소방관 1명씩을 상주시키며 화재 경계를 하는 특단의 대책까지 실행했다. 화재 신고 전화 ‘119’도 그해에 탄생했다. 경성중앙전화국은 1935년 10월 1일 전화번호 안내번호 ‘114’ 등 10개의 서비스 번호를 제정하면서 119 번호를 도입했다. 119는 1927년 일본의 도쿄와 교토 전화국에서 처음 도입한 번호였다.
박흥식은 1935년 9월 15일 동관을 5층으로 증개축하고, 1937년 11월 11일 서관 자리에 르네상스식 초일류 대형 건물을 지어 재개관함으로써 새로운 부흥기를 열었다. 지하 1층, 지상 6층으로 지어진 서관 건물은 일본인의 어느 백화점보다 규모가 크고 15인승 엘리베이터와 2대의 에스컬레이터까지 갖춰 당시 서울의 대표적인 명물로 각광받았다. 옥상 위 불꽃 모양의 첨탑과 2층, 3층에 걸쳐 있던 빨간색 네온의 꽃 모양 마크는 화신의 상징이 되었다.
박흥식은 교육에도 관심이 많았다. 1925년 고향에 중등교육 과정인 용강농업학교를 설립하고 이갑, 유동렬 등이 1908년 설립한 서북협성학교(협성실업학교)를 1939년 4월 인수해 1940년 7월 광신상업학교로 명칭을 바꿨다. 이 학교가 서울 회기동에 있다가 신림동으로 장소를 옮긴 광신정보산업고등학교다. 광신상고는 1998년 광신정보산업고등학교로 개칭했다가 2020년 광신방송예술고등학교로 다시 학교 명칭을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박흥식은 독립운동가 안창호도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안창호가 구속되었을 때는 보석금을 대주었고 안창호가 1938년 사망했을 때는 조선일보 사주 방응모와 함께 기업인으로는 가장 많은 100원을 조위금으로 냈다.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임전보국단 상무, 총동원연맹 이사, 기계화국방협회 조선본부 이사, 동양척식회사 감사 등 총독부 산하 각종 단체의 직책을 8개나 가진 친일 인사로도 활동했다. 1949년 1월 8일 반민특위 제1호로 검거된 것도 이런 친일 행적 때문이었다. 그러나 1949년 4월 21일 병보석으로 풀려나고 9월 26일 무죄판결을 받아 반민특위 검찰관과 사회?정당 단체들로부터 거센 반발을 샀다.
6·25 전쟁으로 화신백화점은 잿더미가 되었다. 그러나 휴전 후인 1955년 11월 화신백화점 건너편 지금의 한국스탠다드차타드은행 본점 자리에 신신백화점을 개장하고 1년 뒤 화신백화점도 복구해 ‘백화점 왕’으로서의 건재를 과시했다. 그때까지도 박흥식은 우리나라 최고 거부였다.

숱한 좌절과 시련에도 굽힐 줄 모르는 타고난 장사꾼

박흥식은 1961년 5·16 쿠데타로 또다시 시련을 겪었다. 부정축재자로 몰려 43일간 옥고를 치르고 5억 9,000만 환의 벌금을 물었다. 그러나 박흥식은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 국가재건최고회의와 손잡고 거창한 사업을 추진했다. 그것이 영과 욕이 교차하는 순간이라는 것을 당시의 박흥식은 알지 못했다.
박정희 의장의 권유에 따라 흥한화섬(원진레이온 전신)을 설립하고 1966년 당시로선 동양 최대 규모인 비스코스(인견사) 공장을 착공한 것이 몰락의 전주곡이었다. 결국 외자 조달 부진과 예상보다 엄청나게 늘어난 공사비로 준공이 예정보다 늦어지고 때마침 불경기가 불어닥친 데다가 은행 대출마저 끊겨 공장은 가동도 못하고 1969년 산업은행으로 넘어갔다.
1970년대 들어서도 박흥식은 화신전자(1972), 화신소니(1973)를 설립하며 재기를 꿈꿨으나 이번에는 오일쇼크가 앞을 가로막았다. 결국 화신그룹은 1980년 10월 도산했다. 1987년 3월에 헐린 화신백화점 자리에는 1999년 33층짜리 초현대식 종로타워가 세워졌다. 이로써 화신의 50년 영욕의 역사도 흔적 없이 사라졌다. 박흥식도 1994년 5월 10일 이미 눈을 감아 세상에 없었다.
박흥식과 화신의 신화는 이렇게 끝이 났지만 오늘날 박흥식은 숱한 좌절과 시련에도 굽힐 줄 모르는 타고난 장사꾼으로 기억되고 있다. 친일 행적과 더불어 반민특위 1호 검거자라는 결코 지워질 수 없는 오명에도 불구하고 그는 국내 자본에 의한 우리나라 최초의 백화점 설립자로 근대적 의미의 서비스 산업에 경영학 개념을 도입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라이트 형제 인류 최초 동력비행 성공

미국항공우주국(NASA)의 초소형 무인 헬리콥터인 ‘인저뉴어티(Ingenuity)’가 4월 19일(한국 시각, 화성 시간 오후 12시 30분) 화성에서 첫 시험 비행에 성공했다. 인저뉴어티는 3m 높이까지 상승했다가 다시 내려앉았다. 인저뉴어티의 비행 시간은 30초에 지나지 않았지만 인류사에서 중요한 순간으로 기록됐다. 이로써 118년 전 라이트 형제가 단 12초의 첫 동력 비행으로 인류 역사를 바꾼 것처럼 이번에 지구가 아닌 곳에서 처음으로 인류가 만든 동력 비행체가 하늘을 나는 기록을 세웠다.

역사적인 비행 성공은 1903년 12월 17일 이뤄져

윌버 라이트(1867~1912), 오빌 라이트(1871~1948) 형제는 어릴 때부터 기계에 관심이 많고 손재주도 좋았다. 그러나 고등학교를 중퇴해 체계적인 과학 교육이나 기술 훈련을 받지는 못했다. 그래서 1892년 12월 개업한 것이 자전거 제작·판매점이었다. 다행히 당시 미국을 휩쓴 자전거 열풍 덕분에 큰돈을 벌었다.
1896년 8월 어느 날 독일의 항공 개척자 오토 릴리엔탈이 글라이더로 비행을 하다가 추락사했다는 기사를 읽고 비행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릴리엔탈은 사람이 날개를 달고 조종을 하면서 공중을 날 수 있다는 사실을 1891년 처음 세상에 알려준 인물로, 죽는 날까지 총 2,000여 회 비행 실험을 했던 ‘행글라이더의 창시자’였다.
형제는 ‘나는 기계’와 관련된 자료를 찾아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중에는 릴리엔탈이 쓴 ‘항공 기초로서의 새의 비행’(1889)도 있었다. 형제는 곧 연처럼 날릴 수 있는 글라이더를 설계했고 사람이 탈 수 있는 글라이더도 만들었다. 그리고 오하이오주 데이턴에 있는 집에서 1,100㎞나 멀리 떨어져 있고 미국에서 가장 바람이 센 곳으로 알려진 노스캐롤라이나주 키티호크 마을을 비행 실험 장소로 정했다. 형제는 1900년 10월 키티호크에서 7㎞ 떨어진 킬데블 모래 언덕에서 비행 실험을 했으나 실패했다. 1901년에도 그곳에서 수백 차례의 글라이더 비행을 실험했으나 결과는 실망의 연속이었다.
형제는 글라이더를 개량해 1902년 9~10월 키티호크 허허벌판에서 1,000차례 이상 연을 날리고 글라이더 비행 실험을 하면서 동력 비행에 필요한 데이터를 축적하고 분석했다. 그리고 1903년 여름부터 동력을 갖춘 비행기 ‘플라이어호’를 제작했다. 나무를 뼈대로 하고 광목천으로 뒤집어씌운 후 위와 아래 날개를 버팀줄로 이었다. 12마력짜리 4기통 수랭식 엔진은 조종사의 오른쪽에 설치하고 프로펠러는 주날개 뒤쪽에 붙여놓았다. 조종석은 따로 없이 조종사가 주날개 위에 납작 엎드려 조종하도록 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기체의 총무게는 274kg이었고 총길이는 6.4m, 주날개는 가로 세로 각각 12.3m, 2.8m였다.
형제는 1903년 9월 플라이어호를 키티호크로 가져가 비행을 준비했다. 비행기를 띄울 킬데블 언덕은 강한 바람이 쉬지 않고 불어 비행기가 날아오르기 쉽고 주변이 모래 해변이라 착륙할 때 덜 위험했다. 1903년 12월 14일 형 윌버가 ‘플라이어호’의 주날개 위에 엎드린 채 첫 비행을 시도했으나 공중으로 날아오르자마자 땅으로 곤두박질쳐 첫 비행은 실패했다. 사실은 30m 정도 날았지만 비행시간이 3초에 불과해 형제 스스로 진정한 비행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중력의 사슬을 끊고 하늘로 나는 인류의 오랜 꿈 실현

역사적인 비행은 그로부터 3일 뒤인 1903년 12월 17일 시도되었다. 5명의 주민이 역사적인 현장을 지켜보는 가운데 이번에는 동생 오빌이 실험 비행에 나섰다. 하늘은 맑았으나 대서양에서 불어오는 시속 43㎞의 강풍이 언덕에 몰아쳤다. 오전 10시 35분 플라이어호를 실은 활차가 18m 길이의 레일 위를 달렸고 곧이어 플라이어호가 활차에서 공중으로 떠올랐다.
플라이어호는 잠시 앞으로 날아간 뒤 미끄러지듯이 모래밭에 착륙했다. 비행시간은 12초였고, 비행거리는 36.5m였다. 기체와 탑승자 모두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내세울 만한 기록은 아니었지만 이 비행은 인류사에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동력 비행기가 중력의 사슬을 끊고 하늘로 나는 인류의 오랜 꿈을 마침내 실현한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첫 비행에 성공한 12월 17일 형제는 4번의 비행을 더 시도했다. 첫 비행 보다는 거리도 멀어지고 비행시간도 늘어났다. 형제가 잠시 쉬고 있을 때 플라이어호가 강한 돌풍으로 뒤집히고 망가져 더 이상 비행은 하지 못했다.
사실 최초로 하늘을 난 사람은 라이트 형제가 아니었다. 1783년 프랑스의 몽골피에 형제가 사람을 태운 열기구로 25분간 8㎞ 비행에 성공하고 1804년 영국의 조지 케일리가 처음으로 글라이더 비행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라이트 형제가 동력비행을 준비하고 있을 때 미국에는 새뮤얼 랭글리라는 또 다른 경쟁자가 있었다. 그는 1896년 증기동력 모형항공기의 비행에 성공한 뒤 사람이 타는 비행기를 제작했다. 그리고 1903년 10월 7일과 12월 8일, 공개 시험을 했으나 두 번 다 실패했다. 라이트 형제의 최초 비행 성공은 랭글리가 두 번째 공개 시험에 실패한 날로부터 9일 후 이뤄졌다.
형제는 역사적인 비행 성공 후 더 개량된 ‘플라이어 2호’를 만들었다. 그리고 1904년 봄 자신들이 비행에 성공했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인근 허프먼 목장으로 신문기자들을 초청했다. 그러나 플라이어 2호는 활주 레일을 벗어나자마자 땅에 처박혀 기자들의 비웃음을 샀다. 기자들은 첫 비행도 조작된 얘기라며 자리를 떴다. 형제는 2호가 실패한 원인을 바람이 갑자기 멈췄기 때문이라고 분석한 뒤 뒷바람 없이도 이륙할 수 있는 새로운 비행기를 구상했다. 형제는 1904년에만 100여 번 비행을 시도했다. 그중 11월 9일과 12월 1일에는 5분 4초, 5분 8초 비행하는 데 성공했다.
‘플라이어 3호’는 1905년 5월 50여 차례의 비행 실험 중 어떤 때는 38분 동안 45㎞를 비행할 정도로 수준이 높아졌다. 형제의 조종술도 비약적으로 좋아졌다. 형제는 1906년 5월 ‘나는 기계’로 미국 특허를 획득하고 1908년 2월 미 국방부와 비행기 납품 계약을 체결했다. 미 정부는 2명이 탑승하고 시속 64㎞의 속도로 200㎞를 비행할 수 있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형제는 조건을 충족한 비행기를 만들어 1908년 9월 17일 오빌과 한 육군 대위가 동승한 비행 실험을 했다. 하지만 비행기가 추락, 오빌은 중상을 당하고 대위는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결국 납품은 1909년 8월로 미뤄졌다.
형제는 1909년 11월 비행기 제조회사를 설립하고 비행학교를 세웠다. 그러나 1912년 5월 형 윌버가 장티푸스에 걸려 죽는 바람에 동생은 비행기 사업에 흥미를 잃고 말았다. 결국 3년 뒤 거액을 받고 회사를 매각했다. 플라이어 1호는 현재 스미스소니언 국립항공우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NM

▲ 라이트 형제가 1903년 12월 17일 인류 최초의 동력 비행에 성공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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