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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서 컬럼] 가요계 떠난 뒤 45년만의 단독 인터뷰, ‘사나이 부르스’, ‘망향’의 가수 배성[1]
다시는 무대에 서지 않겠다, 생방송 중 노래 한 곡 끝날 때마다 악보 찢어...
2021년 05월 07일 (금) 23:24:56 박성서 webmaster@newsmaker.or.kr

가수 배성(71)과의 인터뷰는 그가 가요계 활동을 접은 지 45년만인 지난 2019년, 두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데뷔한 지 50주년이 되는 해였다.

1969년 ‘사나이 부르스’로 데뷔해 ‘망향’, ‘향수’, ‘기적소리만’ ‘거리’ 등 히트곡을 남긴 가수 배성은 유독 ‘사나이’를 주제로 한 노래와 ‘고향’을 주제로 한 노래들을 많이 발표했던 가수. 그런 이미지 탓인지 마치 오랜만에 만나는 고향친구처럼 정겹게 느껴졌다.

다소 투박한 듯하지만 정감 있고 힘 있는 목소리의 주인공, 소탈하면서도 인간적인 외모로 인해 오랜 지인처럼 느껴지는 그는, 고등학교 2학년 때 가요계에 첫 발을 들여 놓은 지 불과 6년 간, 그러니까 군 복무기간을 빼면 불과 4년 동안만 활동했던 가수다.

이후 모든 활동을 접고 미국으로 이민, 현재 사업가로 변신했다. 산호세에서 자신의 본명 이니셜을 따서 지은 ‘TK 콘스트럭션’을 운영하고 있다.

그동안 근황이 거의 알려지지 않아서 올드팬들을 더욱 궁금하게 만들었던 가수. 특히 배성은 70년대 중반 우리나라 가요계를 발칵 뒤집어놓은, 이른바 ‘연예계 비리 폭로사건’의 주인공이다. 그동안 두 차례에 걸친 인터뷰를 통해 그는 당시 언론에 보도되지 않았던 뒷얘기를 포함해 그 무렵의 상황을 비교적 상세히 털어놓았다.

가요계에서 ‘사나이 중의 사나이’로 통했던 가수 배성의 노래들, 그리고 그가 뒤늦게 밝힌 당시 이야기, 그 첫 번 째.

글 I 박성서(음악평론가, 저널리스트), 사진 I 강민숙(사진작가)

▲ 배성 데뷔곡 ‘사나이 부르스’를 비롯해 초기에 발표한 ‘사나이’ 주제 음반들

1969년, 고등학생 때 ‘사나이 부르스’로 데뷔

1. 사랑을 할려거든 불같이 뜨겁게 하고/이별을 할려거든 미련도 후회도 버려라/서로가 좋아서 사랑했다가/서로가 싫어서 헤어졌다면/아- 미움도 원망도 가슴의 상처도/사나이답게 사나이답게 잊어버려라.
2. 사랑을 할려거든 불같이 뜨겁게 하고/헤어져 돌아설 땐 눈물도 한숨도 버려라/서로가 좋아서 사랑했다가/서로가 싫어서 헤어졌다면/아- 뜨거운 눈물도 쓰라린 상처도/사나이답게 사나이답게 잊어버려라.  -‘사나이 부르스(고향 작사, 남국인 작곡. 배성 노래)’

가수 배성이 1969년 발표한 데뷔곡 ‘사나이 부르스’다. 원래 제목은 ‘사나이답게’였는데 음반이 나올 때 제목이 ‘사나이 부르스’로 바뀌었다. 작사자 고향은 작곡가 남국인의 또 다른 예명.

69년 6월에 발표되자마자 8월부터 인기가요 톱10 순위에 진입, 그해 말에 정상을 차지한다. 공교롭게도 그해 말에 박노식. 오영일. 홍세미 주연의 ‘사나이의 부르스’라는 제목의 영화도 개봉되면서 ‘사나이 부르스’라는 단어는 대중들에게 더욱 친근하게 각인되었다. 물론 영화는 노래와 관계가 없다.

정작 이 노래의 주인공이 여드름투성이의 까까머리 고등학생이라는 사실을 대중들은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하지만 당시 배성은 서라벌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고2 때였어요. 친구들과 셋이 길을 가다가 우연히 ‘정진성 작곡사무실’ 간판이 눈에 띄었지요. 그때 친구들이 ‘야, 너 노래 잘하니까 한 번 들어가 보자’, 해서 들어갔죠. 이때 정진성 선생이 노래 한 번 불러보라 해서 얼떨결에 부른 노래가 ‘우수’였습니다. 소풍가서 친구들 앞에서 부른 노래였거든요. 마침 이 노래를 옆에서 듣고 있던 작곡가 남국인 선생이 노래 실력이 괜찮다며 취입 한 번 해보지 않겠느냐고 권유했죠.”

이렇게 해서 처음 취입한 노래가 ‘사나이 부르스’와 ‘세월은 흘러도’, 두 곡이었다. 예명은 직접 지었다. 가수로써 대성하겠다는 의지를 담았다.

‘사나이 부르스’, 지방에서부터 인기몰이하며 북상...

▲ (왼쪽) ‘배성쇼’ 공연이 펼쳐지고 있는 극장 앞에서 가수 한명숙과 함께. (오른쪽) ‘젊음은 우리의 것’, 동료가수 정훈희와 함께.(세광출판사, 1973년)

본명 배태규(裵泰圭). 1950년 11월, 대구에서 부친 배일출, 모친 이경희의 4남 1녀 중 차남으로 출생했다.

사업을 하는 부친을 따라 초등학교 2학년 때 서울로 올라온 그는 이태원초등학교와 선린중학교를 거쳐 서라벌고등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가수 활동을 해보겠다고 할 때 부친은 절대 불가 입장이었음에도 어머니가 적극적으로 나서주었다. 다만 조건은 딱 한 번만 음반을 내고 이후에는 학업에만 전념하기로 한 것

“그러나 ‘사나이 부르스’가 부산에서 히트되기 시작하더니 이어 광주MBC인가 KBS에서도 8주 연속 1위를 하면서 북상, 서울서도 크게 히트했죠. 노래가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방송과 지방공연으로 갑자기 바빠지기 시작했어요. 학교에서는 자주 방송에 나오는 가수니까 머리를 기르게 해주었고 두 세 시간 수업을 하다가 스케줄이 있으면 조퇴를 시켜주었죠.”

배성은 친구들로 부터도 인기가 많았다. “당시 선생님 월급이 5만원이 채 안되었는데 나는 한 번 쇼에 나가면 3만원을 받았어요. 그러다보니 돈에 대한 개념도 없어지고, 주머니가 늘 두둑하니까 친구들을 중국집에 데려가 선심을 쓰곤 했죠. 대신 친구들은 방송국에 신청곡 엽서를 보내고... 심지어 졸업 시즌에는 방송국의 각종 시상식이나 행사들이 많아 아예 수업시간에 들어가지 못했어요.”

‘사나이 부르스’에 이어 배성은 고3 겨울방학을 틈 타 DBS(동아방송)의 연속극 ‘망향’의 주제가를 취입한다. 이 노래는 이듬해인 1970년에 음반으로 발매되며 더욱 크게 히트했다. 물론 고등학생 신분이라는 것은 밝히지 않았다.

1. 고향이 그리워서 고향이 그리워서/깊은 밤 별을 보고 갈 길을 물어보네/사무친 부모형제 다정한 내 친구들/내 이름 다 잊겠네 까마득 잊었겠네/아-- 내 고향  내 살던 고향/언제나 가보나.

2. 고향이 어디메뇨 고향이 어디메뇨/밤마다 별을 보고 갈 길을 물어보네/배불리 먹는다고 행복이 아니에요/좋은 옷 입는다고 호사가 아닙니다/아-- 내 고향  내 살던 고향/언제나 가보나. -‘망향(한운사 작사, 남국인 작곡, 배성 노래)’

이 노래 히트와 더불어 부친과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딱 한 번 하기로 했는데 TV나 라디오에 자꾸 노래가 나오니까 아버님은 역정을 내시며 TV를 끄고. 친구들과 어울릴 때마다 흥을 돋우시던 노래도 끊으셨고 심지어 단골집에 가서 ‘배성의 아버지’라는 말을 들으면 다시는 그 집에 안 갔을 정도로 가수 활동을 못 마땅해하셨죠.”

무엇보다 아들에게 사업을 물려주고 싶어 했던 것이 그 이유다. 그럼에도 배성은 여세를 몰아 졸업을 앞둔 시점에 ‘무정한 여인(김학송 작사, 작곡)’을 타이틀로 한 음반을 취입하는데 이 노래 또한 발표되자마자 인기가요 순위에 진입, 데뷔 6개월 만에 인기가수 대열에 합류한다.

1. 이슬비는 내려서 내 마음을 채우고/구름은 흘러서 내 마음을 덮는다/아-- 내 사랑 잊을 길 없네/사나이 가슴에 눈물만 남기고/멀리 떠나간 무정한 여인아.

2. 태양은 뜨겁게 내 마음에 비치고/안개는 흘러서 내 마음에 스민다/아-- 내 사랑 잊을 길 없네/사나이 가슴에 추억만 남기고/홀로 가버린 무정한 여인아. -‘무정한 여인(김학송 작사, 작곡, 배성 노래)’

‘망향’과 함께 1970년 1월에 취입한 노래다. 그가 가요계의 생리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은 이 때다. 어느 순간부터 스승인 남국인 선생이 그를 거들떠보지 않기 시작한 것.

“기본적인 가요계 룰조차 전혀 몰랐던 거죠. 자신이 데뷔 시킨 제자가 스승을 저버리고 한 마디 상의도 없이 다른 작곡가의 곡을 받는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가요계의 불문율’ 같은 거였어요. 그것을 나중에서야 알았죠.”

그러나 아직 가요계 생리를 알 턱없는 풋내기 소년은 마냥 꿈에 부풀어 있었다. 동시에 두 번 째 히트곡 ‘무정한 여인’의 가사처럼 점차 대중들에게 ‘사나이다운 가수’로 각인되어가고 있었다.

대학 입학 기념으로 뉴 코티나 자동차 선물 받자 부친 재력에 이목 쏠려

데뷔하자마자 ‘사나이 부르스’, ‘향수’, ‘무정한 여인’ 등을 잇달아 히트시키며 인기 가수 대열에 합류한 배성이 사실은 고등학생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건 대학에 진학하면서다.

가수활동을 그렇게 반대하던 부친이 대학입학 기념으로 ‘뉴 코티나’ 승용차를 선물한 것, 이런 사실이 기사화되며(매일경제신문 1970년 3월 27일 자) 부친의 재력에도 관심이 쏠리기 시작했다.

“아버님은 그 때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였는데 저에게 차를 사 주셨어요. 결국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하라고 밀어주신 거죠. 저는 고2 때부터 운전을 했지만 가수는 운전하는 것이 아니라고 해서 기사를 따로 두었지요.”

당시 부친은 ‘일진상사’라는 큰 가방제조업체를 운영했다. 원단을 뽑는 공장은 부산에, 제조공장은 대구에 그리고 본사는 서울에 있어 전국적인 판매망을 갖춘 손꼽히는 업체였다.

“어느 날 아버님이 부르시더니 ‘노래는 취미삼아 하고 대학에 들어가 공부를 열심히 한다면 가수생활을 해도 좋다’고 한발 양보하셨죠.” 물론 부친은 경영학과에 진학하기를 원했지만 그런 바람을 저버리고 그는 연극영화과를 택한다.

“특히 중앙대 연극영화과는 음반을 내거나 연예활동을 하면 학과 실기점수에 반영해준다는 것이 매력이었지요. 결과적으로 연영과를 선택했기에 더욱 열심히 가수 활동을 이어 갈 수 있었죠.”

당시 펄시스터즈의 배인순과 ‘잘 있어요’의 가수 이현이 바로 배성의 대학 동기다.

대학 진학과 함께 더욱 본격적으로 가수 활동,‘사나이 중의 사나이’ 로 불려

1970년, 대학에 진학하던 이 해 그는 유독 ‘사나이’라는 제목의 노래를 많이 발표한다. 데뷔곡인 ‘사나이 부르스’로 사나이 이미지가 굳혀진 탓이기도 하다.

당시 발표한 ‘사나이’라는 제목의 노래들을 살펴보면, 데뷔곡 ‘사나이 부르스’에 이은 두 번 째 히트곡 ‘무정한 여인’도 사나이의 순정이 강조된 노래다. 이어 4월에 발표한 박시춘 작곡의 ’사나이가 울 때‘를 시작으로 정진성 작곡의 ‘사나이 마음(70년 12월)’, 그리고 정주희 작곡의 ‘사나이 순정(1970년 12월)‘ 등등.

고향에 관한 노래 또한 많이 불렀다. 그 무렵 우리나라 가요계는 고향노래가 대세였다. 특히 도시 산업화로 이농현상도 두드러지고, 대중가요 또한 이러한 세태가 적극 반영되었다. 어느 때보다도 두고 온 고향, 떠나온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노래가 많았던 시기다. ‘향수’도 그 대표곡 중 하나, 1972년 10월 발표한 김영광 작사, 작곡의 노래로 첫 발표 당시 제목은 ‘가고파 가고파도’였다.

▲ 전성기 시절 발표한 배성 음반들

포크 계열의 통기타 반주 노래, ‘향수(가고파 가고파도)’

지난날 강가에서 꽃잎을 따서/물위에 띄워 보내던/지금도 그 시절이 마음에 남아/손짓해 나를 부르네/가고파 가고파도 못 가는 내 고향아/꿈에 보이네 꿈에 보이네/나를 부르네 나를 부르네/지난 날 즐거웠던 오솔길에서/정답게 이야기하던/달콤한 속삭임은 사랑의 약속/지금도 잊지 못하지/가고파 가고파도 못 가는 내 고향아. -‘향수(김영광 작사, 작곡, 배성 노래)’

시대가 시대인 만큼 유독 고향 소재의 노래를 많이 발표했던 배성은 이외에도 ‘저 하늘 저 편은(박정웅 작사, 작곡)’, ‘어머님 생각(정진성 작사, 작곡)’, ‘타향 길(전우 작사, 나규호 작곡)’, ‘고향친구(정진성 작사, 작곡)’ 그리고 ‘기적소리만’ 등을 발표했다. ‘기적소리만’ 역시 배성이 1971년도에 발표한 노래로 많은 사랑을 받은 그의 대표곡 중 하나다.

1. 가랑잎이 떨어지는 쓸쓸한 정거장/정든 그 사람을 멀리 보내고 나 홀로 섰네/사랑을 하면서도 보내야 하는/사나이 이 가슴을 알겠냐마는/기적소리만 기적소리만은/내 마음 알고 갔겠지.

2. 기적도 잠이 들은 적막한 정거장/비에 젖고 젖은 가로등 밑에 나 홀로 섰네/사나이 두 주먹에 흘러내리는/뜨거운 이 눈물을 알겠냐마는/기적소리만 기적소리만은/내 마음 알고 갔겠지. -‘기적소리만(진남성 작사, 작곡, 배성 노래)’.

고등학생 때 가수 데뷔, 대학 시절에 결혼

▲ 젊은 시절의 배성, 작곡가 정주희(위), 가수 이채연(아래)과 함께

1972년, 배성은 불과 스물둘의 나이에 결혼한다. 가수로써는 전성기였지만 아직 대학생 신분이었다. 결혼상대는 모델 곽성자, 당시 CF에 이따금 출연했다. 결혼 후 명동 챔피온 다방 앞에서 지지 의상실을 차려 운영하기도 했다.

배성 역시 오아시스 전속가수로 승승장구했다. 작곡가 김영광, 김학송, 남국인, 라규호, 박시춘, 박정웅, 정주희, 정진성, 진남성 등 인기 작곡가들과 콤비를 이뤄 여러 음반을 발표, 히트곡 행진을 멈추지 않았다. 72년 결혼과 함께 발표한 노래가 김영광 작곡의 ‘거리’, 이어 박정웅 작곡의 ‘연인’을 발표한다.

여기는 사랑의 거리 여기는 연인의 거리/추억을 담았던 그대와 내 모습/만날 수 없네 만날 수 없네/ 그리운 사람이 마음이 변해서/그때 그 시절 찾아온 이 거리에 비만 내리네. -‘거리(김영광 작사, 작곡, 배성 노래)’

쓸쓸한 싸롱에서 찻잔을 마주 놓고/할 말을 잊었는가 외로운 연인아/이 밤이 지나면 떠나야 할 차거운  이 순간에/이별이 너무나 아쉬워서 떠나지 못하나/쓸쓸한 싸롱에서 찻잔을 마주 놓고/할 말을 잊었는가 외로운 연인아. -‘연인(박정웅 작사, 작곡, 배성 노래)’

승승장구하던 배성의 활동에 제동이 걸린 것은 바로 이 무렵인 1973년도다. 모 지방방송국 개국 축하방송 스케줄 문제로 다투다가 결국 방송국 PD와 폭행사건으로 비화되었다. 방송국 측은 출연정지를 주장했고 배성은 이참에 가수활동을 접겠다고 맞섰다.

‘다시는 무대에 서지 않겠다’, 생방송 무대에서 노래 끝날 때마다 악보 찢어...

▲ 가요계를 떠난 뒤 45년 만에 필자와 인터뷰를 하고 있는 가수 배성, 2019년

배성이 가요계를 떠나기로 마음먹었던 이 무렵, 그는 기독교방송(KY)의 ‘정오의 휴게실’ 생방송 무대에 오른다.

“그날 생방송으로 진행된 ‘정오의 휴게실’의 공개방송 타이틀이 ‘배성 아워(Hour)’였어요. 그러나 저는 이 무대를 끝으로 다시는 무대에 서지 않겠다고 맘먹고 반주를 맡고 있는 밴드마스터, 이길봉 악단장님께 노래 한 곡이 끝날 때마다 악보를 찢어버리자고 제의했지요. 실제로 노래 한곡이 끝날 때마다 악보를 찢는 소리가 그대로 방송에 나갔지요. 방청석에서는 눈물을 보이며 안타까워하는 팬들도 곳곳에 눈에 띄더군요.”

결국 이 무대가 그의 은퇴 공연이 되었다. 그리고 이 무대를 끝으로 그는 가수 활동을 접는다. 이로써 불과 4년간의 짧은 활동은 여기서 막을 내린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얼마 뒤 가요계에 엄청난 회오리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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