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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형의 100년의 기록 100년의 교훈
2021년 03월 08일 (월) 20:34:09 김정형 webmaster@newsmaker.or.kr

‘할리우드 최초 아이콘’ 루돌프 발렌티노 첫 주연 영화 '묵시록의 네 기사' 개봉 100주년

이탈리아의 카스텔라네타에서 태어난 로돌프 구글리엘미(1895~1926)가 미국의 뉴욕으로 건너간 것은 18세 때인 1913년이었다. 미국에 처음 발을 내디뎠을 때 그가 가진 것이라곤 방랑의 10대를 보내며 파리에서 배운 난폭한 스타일의 아파치 댄스와 4,000달러가 전부였다. 돈이 떨어져 노숙자, 정원사, 접시닦이 등을 전전했으나 춤에는 자신이 있어 카페에서 ‘택시 댄서’ 생활을 했다. ‘택시 댄서’는 돈을 받고 유한마담들과 춤을 추는 직업으로 우리 식으로 말하면 제비족 같은 것이다.

‘묵시록의 네 기사’, 최고 흥행 수익 올린 무성영화

▲ 루돌프 발렌티노

그의 무기는 잘생긴 외모와 뛰어난 탱고춤 솜씨였다. 어떻게 해야 여성들이 즐거워하는지를 터득하게 되자 이름을 루돌프 발렌티노로 바꾸고 외모 관리에 더욱 치중했다. 몸매가 날렵해 보이도록 셔츠 속에 코르셋을 입고 여성들만 차는 것으로 여겨온 손목시계도 착용했다. 고급 레스토랑에서 탱고춤으로 여성들의 혼을 빼놓던 그가 스타를 꿈꾸며 할리우드로 떠난 것은 20대 초반인 1917년이었다. 초기 몇 년간은 첫 출연 영화 ‘이혼수당’(1917)을 비롯해 20여 편의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했다. 그러다가 제작자이자 극작가인 준 마티스의 눈에 들어 1921년 영화 ‘묵시록의 네 기사’에 주연으로 캐스팅되었다. 마티스는 발렌티노의 극 중 인물 비중을 높이기 위해 원작에도 없는 술집 탱고 신을 넣어 발렌티노를 돋보이게 했다.
1921년 3월 6일 개봉된 ‘묵시록의 네 기사’에서 발렌티노는 탱고를 선보이며 자신의 매력을 한껏 발휘했다. 발동작은 경쾌하고 가벼웠으며 행동에는 절제가 배어 있었다. 여성 관객들은 극 중에서 젊은 여성을 춤으로 유혹하는 그의 춤동작에 숨을 죽이고 극 중 한 여성의 손을 자신의 입술로 가져가는 장면에서는 눈을 감았다. 지금까지도 최고의 흥행 수익을 올린 무성영화로 평가받고 있는 ‘묵시록의 네 기사’가 개봉된 후 미국 사회에는 탱고 열풍이 불었다.
발렌티노가 등장하기 전까지 할리우드에서는 건장한 몸을 가진 거친 태도의 백인 남성이 ‘스크린의 영웅’으로 대접받았다. 하지만 발렌티노는 강렬한 눈동자와 넘쳐나는 관능으로 여성들을 열광시켰다. 또한 남성성과 여성성이 결합된 ‘양면적 섹슈얼리티’가 대중을 사로잡는다는 것을 알려준 최초의 스타가 되었다.
발렌티노는 1921년 ‘족장(Sheik)’에서 새로운 타입의 정열적인 영웅을 탄생시켰다. 이 영화를 계기로 그는 ‘최초의 섹스 심벌’, ‘문화적 신드롬의 주인공’으로 영화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아랍계 족장으로 분한 영화에서 그가 백인 여성을 치명적 매력으로 유혹하자 이후 영화 제목 ‘셰이크’는 미남자, 호색한이라는 의미로 불리며 발렌티노의 별칭이 되었다.

할리우드 역사에서 가장 강한 신드롬 일으킨 스타

발렌티노는 수많은 여성 관객의 마음을 뜨겁게 달구었으면서도 정작 자신의 결혼 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1919년 여배우 진 애커와 결혼했으나 그가 레즈비언인 것을 알고 6시간 만에 헤어졌고 1921년 의상감독이자 미술감독인 나타샤 람보바와 연인 관계가 되었으나 법적으로 전처인 진 애커와 이혼하지 않은 것 때문에 간통 혐의로 감옥에 들어갔다가 1만 달러의 벌금을 내고 풀려났다. 진 애커와 법적으로 이혼한 후 람보바와 정식으로 결혼했지만 람보바도 레즈비언인 데다 아이 낳는 것을 거부해 3년 만에 또다시 이혼했다. 이로 인해 발렌티노는 한동안 실의에 빠져 자살을 기도하고 여배우들과 스캔들을 일으켰다. 발렌티노는 ‘혈과 사’(1922) 이후 한동안 영화에 출연하지 않고 시집 ‘백일몽’(1923)을 내거나 잡지에 개인사를 연재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다.
잠시 영화계를 떠나 있었지만 인기는 여전해 ‘더 이글’(1925)과 ‘족장’의 속편인 ‘족장의 아들’(1926)에 출연했다. 그러나 ‘족장의 아들’을 모두 촬영하고 개봉을 기다리고 있던 1926년 8월 15일 궤양 악화로 쓰러져 수술을 받았다가 2차 감염에 의한 패혈증으로 8월 23일 눈을 감았다. 결국 9월 3일 개봉된 영화는 유작이 되었다.
발렌티노가 죽자 여성 팬들 사이에 집단 히스테리 현상이 벌어졌다. 그의 죽음에 상심한 여성 팬들의 자살 보도가 잇따르고 수십 명의 여성이 그의 아이를 가졌다는 등 대소동이 벌어졌다. 여름비가 내리는 가운데 치러진 장례식에는 3만여 명이 참석했고 뉴욕 시내의 연도에는 10만 명이 운집해 그와의 작별을 슬퍼했다. 이후 수십 년 동안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상복 차림으로 그의 묘지를 찾는 여성도 있었다.
발렌티노는 배우로서는 크게 인정을 받지 못했다. 비평가들로부터도 “소질 없는 배우”, “화장한 호모”라는 혹평이 쏟아졌다. 하지만 100년이 넘는 할리우드 역사에서 발렌티노처럼 강한 신드롬을 일으켰던 스타는 일찍이 없었다. 그는 여성 관객들의 영혼을 훔친 최초의 아이돌이었으며 댄디(여성적 남성)의 표상이었다. 죽음으로 대중의 광란을 몰고 온 할리우드 최초의 아이콘이었다.


6·25 종전 후 남북한 거부하고 중립국 선택한 현동화의 죽음을 계기로 살펴본 중립국행 전쟁 포로들의 실태

최인훈의 소설 ‘광장’ 속 주인공의 실제 모델로 알려진 현동화씨가 향년 89세로 지난 2월 12일 별세했다. 현동화씨는 6·25 종전 후 남북한을 모두 거부하고 중립국 인도를 선택한 88명의 포로 중 한 명이었다. 당시 인도로 간 포로 대부분은 브라질·아르헨티나 등지로 이주하고 인도에는 3명만 남았는데 현동화씨는 마지막 생존자였다. 그의 죽음을 계기로 종전 후 중립국(인도)을 선택한 625 전쟁 포로들의 실태를 알아본다.

송환 원치 않은 포로들은 중립국 송환위원회로 넘겨져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상 조인 후 송환을 희망하는 포로들은 8월 5일부터 한 달간 판문점에서 교환되었다.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군사편찬연구소의 전신) 통계에 따르면 휴전 후 남한으로 돌아온 포로는 1만 2,783명(국군 7,870명, 유엔군 4,913명)이었고, 북한으로 송환된 포로는 7만 6,451명(북한군 7만 371명, 중공군 6,080명)이었다. 남북한 모두를 거부한 포로들도 있었는데 남한 송환을 거부한 포로는 349명(국군 327명, 유엔군 22명), 북한 송환을 거부한 포로는 2만 1,976명(북한군 7,712명, 중공군 1만 4,264명)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남북의 포로 숫자에서 큰 차이가 나는 것일까. 전쟁 중 북한 언론에 보도된 전쟁 발발 후 첫 9개월간 6만 5,000여 명, 1951년 6월 25일 북한군 총사령부가 전쟁 발발 1주년을 맞아 한국군 등 유엔군 포로가 10만 8,257명이라고 노동신문을 통해 구체적으로 밝힌 것과 비교하면 남한으로 돌아온 포로 1만 2,783명은 터무니없이 적은 숫자였다. 더구나 전쟁 개시 후 1년간의 통계였기 때문에 휴전까지는 포로가 더 늘어났을 가능성이 높다.
유엔군 측은 포로 협상 초기부터 6만 5,000명을 근거로 ‘사라진 5만 명’에 대한 해명을 요구했다. 반대로 공산군 측은 “5만여 명을 이미 석방했다”면서 오히려 유엔군의 포로 명단에서 남한 출신 의용군 등 민간인 억류자 4만여 명이 제외된 것을 항의했다. 또한 공산 포로 중 다수의 송환 거부자가 발생한 것을 두고 유엔군 측에서 이들 포로를 강제로 억류하려 한다고 반발했다. 이 때문에 유엔군 측은 어쩔 수 없이 북한이 제시한 포로 명단을 받아들여야 했다.
송환을 원치 않았던 포로들은 포로교환협정에 따라 인도, 스위스, 스웨덴,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5개국으로 구성된 중립국 송환위원회에 넘겨져 인도군이 관리하는 판문점 근처 비무장지대에 수용되었다. 남·북한과 중국 대표들은 송환을 원치 않는 포로들의 자국 송환을 위해 3개월 동안 설득작업을 벌였다. 그 후 포로수용소에 삼거리가 만들어졌는데 어느 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남한, 북한, 중립국(인도행)이 결정되었다. 포로들은 1954년 1월 20일, 3일간 자신의 행로를 선택했다. 1954년 1월 22일자 동아일보·경향신문에 따르면 최종적으로 본국 송환을 거부한 공산권 포로는 중공군 1만 4,155명, 북한군 7,550명 등이었다.
송환을 거부한 북한군은 그대로 한국에 남았지만 중공군 1만 4,000여 명은 자유중국(현 대만)을 선택했다. 자유중국 정부는 이들을 맞기 위해 연예인을 포함한 환영팀을 한국에 급파했고 이들은 1월 21일 인천항에서 미 LST 수송선을 타고 자유중국으로 떠났다. 이후 자유중국에서는 이들을 주제로 ‘1만 4000명의 증인’이란 반공영화를 만들고 이들이 자유중국에 도착한 1월 23일을 자유일로 정해 기념했다.

▲ 인도를 선택한 포로들이 ‘아스토리아호’ 선상에서 기념 촬영을 했다

중립국 선택한 포로(88명) 대부분은 남미로 떠나고 일부만 인도에 남아

전체 포로 중 남북한을 선택하지 않고 중립국을 선택한 포로들은 당초에는 200여 명이었으나 최종적으로는 88명만이 제3국행(인도행)을 선택했다. 88명 중 12명은 중국인, 76명은 한국인(북한군 74명, 남한군 2명) 포로였다. 이들은 인도군과 함께 판문점에서 열차를 타고 인천에 도착했다. 인천 부두에서는 반공청년단원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조국의 품으로 돌아오라”고 소리높여 외쳤다.
포로들은 1954년 2월 21일 인천항에서 2만 2,000톤 급 오스트리아 선적 여객선 ‘아스투리아스호’를 타고 16일간의 항해 끝에 인도 남단 마드라스항(현재의 첸나이)에 내렸다. 이들은 인도 정부가 제공한 군 막사에 기거하면서 자신을 받아줄 나라를 기다렸다. 당초 그들이 원했던 목적지는 미국, 캐나다, 스위스, 스웨덴 등이었으나 받아주겠다는 나라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미국은 참전국이라 불가능했고 스위스와 스웨덴은 수용을 거부했다.
다행히 멕시코에서 그들을 받아들이겠다는 소식이 왔으나 6개월이나 시간을 끌다가 난색을 표명, 또다시 무작정 기다려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2년이 다 되도록 받아들이겠다는 나라가 나타나지 않자 기다림에 지친 일부 포로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보내 자신을 남쪽에서 받아주기를 요청했다. 그러나 남한 정부로부터도 반응이 없자 유엔에 청원했다. 그러자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로부터 전갈이 왔다.
포로들은 인도 잔류, 브라질, 아르헨티나로 갈렸다. 55명이 브라질(1956.2 도착), 26명이 아르헨티나(1957.5)로 떠나고 나머지 3명은 인도에 눌러앉았다. 현동화도 인도에 눌러앉은 한국인 중 1명이었다. 그 전에 1명이 마음을 바꿔 북한으로 돌아갔고, 2명은 현지에서 죽었고, 1명은 병에 걸려 한국으로 돌아갔다. 브라질로 간 포로 중 상당수는 기술을 익혀 자동차 정비공, 재봉공, 선반공장 직공 등으로 진출했다. 신학을 공부해 목사가 된 포로, 살인을 저질러 27년간 정신감호소에 갇힌 포로도 있었다. 아르헨티나로 간 포로들이 주로 터전을 잡은 곳도 공장지대였다.

“한국문학 사상 최초로 분단의 문제를 이데올로기적 갈등의 문제로 다룬 기념비적인 작품”

인도행 포로들의 이야기는 ‘새벽’지 1960년 10월호에 실린 최인훈의 중편소설 ‘광장’에 그려졌다. ‘광장’은 6·25 후 북한의 석방포로를 싣고 인도로 향하는 ‘타고르호’에 탄 이명준이라는 한 젊은이의 회상으로부터 시작된다. 해방 후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던 이명준은 해방 직후 월북한 아버지가 대남방송 시간에 나왔다는 이유로 경찰서에 불려가 고문을 당한 뒤 남한에는 개인의 자유와 인간적 존엄성을 짓밟는 어두운 밀실만 있을 뿐 사회적 정의가 구현되는 푸른 광장이 없다고 생각한다. 떠밀리듯 아버지를 찾아 북으로 갔으나 인민의 공화국을 표방하는 그곳 역시 푸른 광장은 없고 잿빛 광장만 있었다.
그러던 중 6·25 전쟁이 터졌고, 이명준은 인민군으로 낙동강 전선에 투입되었다가 포로가 된다. 그는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거쳐 판문점 포로송환위원회에서 남북한 대표들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정착지로 중립국 인도를 선택한다. 그러나 배에서 명준은 자기가 참으로 오랫동안 ‘이데올로기’라는 잣대에 홀려 있었음을 깨닫고 크레파스보다 더 진한 남지나해 바다로 뛰어들어 투신자살한다.
6·25전쟁 후 반공소설류가 이데올로기 문학의 정형처럼 굳어 있던 시절에 발표된 ‘광장’은 문단으로부터 “한국문학 사상 최초로 분단의 문제를 이데올로기적 갈등의 문제로 다룬 기념비적인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평론가 김현은 “정치사적 측면에서 보자면 1960년은 학생들의 해였지만 소설사의 측면에서 보자면 ‘광장’의 해였다”며 ‘광장’의 가치를 높게 평가했다.
현동화는 1932년 함북 청진에서 태어나 평양 사동군관학교에 다니다가 18살 때 6·25가 터져 북한군 중위 계급장을 달고 전쟁에 투입되었다. 강원도 화천전투에서 미군의 폭격으로 부상을 당해 포로가 되자 요양 중 국군에 귀순했다. 그는 포로수용소에 있다가 1953년 7월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을 때 중립국 인도를 선택했다.
소설 ‘광장’에서는 주인공 이명준이 좌우 이데올로기에 대한 환멸로 선상에서 투신하는 걸로 끝나지만 현동화는 생전 인터뷰에서 “당시 나는 사상적 갈등 때문이 아니라 귀순으로 인해 가족들이 있는 북한으로 갈 수도 없고 혈혈단신 남한에 남는 것도 자신이 없어 공부나 더 하자는 생각으로 미국행이 가능한 제3국을 택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당시 현동화의 가족들은 이미 월남 해 한국에 살고 있었다. 그가 이 사실을 인도에서 알게된 것은 1964년이었다. 현동화는 1962년 인도에 한국 총영사관이 설치되자 대한민국 여권을 받고 ‘재외국민’으로 등록했다. 인도에서 황무지를 개간해 양계장 사업을 시작하고 인모(人毛) 수출, 아프가니스탄 섬유공장 건설 등 여러 사업에서 성공을 거뒀다. 중동 붐이 일어났을 때는 한국 기업에 인도 노무자들을 송출했다.
1969년, 15년만에 한국에 돌아와 가족들과 눈물의 재회를 하고 중매결혼 후 아내와 함께 다시 인도로 돌아갔다. 그는 1976년부터 2005년까지 인도 한인회장을 맡았고 88 서울올림픽 유치 과정에서 인도인 IOC 부회장을 우리 편으로 끌어오는 데 숨은 역할을 했다. 2018년 신병 치료를 위해 귀국했다. 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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