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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형의 100년의 기록 100년의 교훈
2021년 02월 09일 (화) 20:45:33 김정형 webmaster@newsmaker.or.kr

성인만화의 개척자 고우영의 ‘삼국지’가 올컬러 종이책으로 재출간되었다는데

고우영이 남긴 흑백 만화 ‘고우영 삼국지’가 10권 분량의 올컬러 종이책으로 최근 출간됐다. 고우영의 아들이 옛 원고를 스캔해 컴퓨터로 옮겨 디지털 채색한 것이다. 40년 시공을 뛰어넘는 부자(父子)의 합작이다. 아들은 부친이 남긴 ‘고우영 십팔사략’에도 직접 색을 입혀 2012년 재출간한 적이 있다.

1972년 연재한 ‘임꺽정’은 신문 연재만화의 새로운 지평 열어

고우영(1938~2005)은 한국 만화의 독자층을 어린이에서 어른으로 끌어올린 성인만화의 개척자였다. 무엇보다 만화는 재미있어야 한다는 지론에 따라 근엄한 고전을 번득이는 유머와 해학으로 재해석해냄으로써 독자에게 카타르시스를 선물한 우리 시대의 진정한 이야기꾼이었다.
등장인물마다 부여한 독특한 캐릭터와 감각적이고 튀는 용어는 젊은 층의 입맛을 정확히 충족시키면서 고우영의 만화가 1970~80년대 하나의 문화현상으로까지 자리잡게 하는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그는 만화를 통해 가정과 학교가 알려주지 않은 성을 노골적이지만 추하지 않게, 익살스럽지만 천하지 않게 가르친 강호의 스승이자 인생의 선배였다.
고우영은 중국의 만주 심양 근처에서 태어나 해방 후 부모의 고향인 평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아버지가 일제시대 경찰 간부로 근무한 것이 문제가 되어 더 이상 평양에 살지 못하고 1946년 부모의 손을 잡고 월남했다. 학창시절에 이미 만화를 전문가 수준으로 그린 두 형의 영향을 받아 만화에 심취했던 그가 피란지 부산에서 미키마우스를 본떠 그린 16쪽짜리 단행본 ‘쥐돌이’를 세상에 내놓은 것은 중학생 때인 1953년이었다.
고우영이 만화를 평생의 업으로 삼게 된 것은 갑작스럽게 닥친 가정의 불행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룸펜으로 소일하는 동안 실질적인 가장이었던 어머니가 1958년 위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6개월 뒤 서울대 미대를 졸업한 두 형 모두 심장마비로 거의 동시에 어머니를 따라가는 바람에 사실상 집안 경제를 책임져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서 만화를 호구지책으로 삼은 것이다.
고우영이 ‘추동성’이라는 필명으로 둘째 형이 생전에 만화잡지에 연재하던 명랑만화 ‘짱구박사’를 이어받아 그리기 시작한 것은 1958년이었다. 어머니와 두 형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그는 ‘짱구박사’의 유명 만화가가 되기도 했지만 중학생 동생이 셋이나 되는 상황에서 순전히 가족을 부양해야 했기 때문에 3년 동안 병역 기피자로 세상을 등지기도 했다.

18년 동안 신문만화 연재하며 한국 성인만화 시장 쥐락펴락해

1972년 1월 1일은 한국 만화사에 한 획이 그어진 날이다. 그날부터 1973년 2월 말까지 고우영의 만화 ‘임꺽정’이 ‘일간스포츠’지에 연재되었기 때문이다. 신문만화라고 하면 4컷짜리 시사만화나 만평이 전부였던 시절에 관례를 깨고 신문 지면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파격적인 모습을 선보이며 신문 연재만화의 새로운 지평을 연 ‘임꺽정’에 독자들은 폭발적으로 반응했다. 초등학교 졸업 후 만화책을 보면 어른이 아니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성인들을 떳떳하게 만화의 세계로 끌여들였다는 것은 의도하지 않은 수확이었다.
이후 고우영은 중국 고전들을 한편씩 해부하는 또 다른 도전에 돌입했다. 자신만의 유머와 해학으로 재해석한 ‘수호지’를 필두로 ‘삼국지’, ‘초한지’, ‘서유기’, ‘열국지’ 등의 고전을 18년 동안 신문에 연재하며 한국 성인만화 시장을 쥐락펴락했다. 1973년 3월부터 일간스포츠에 연재된 ‘수호지’의 등장인물 ‘무대’는 한국 만화에서 가장 빼어난 캐릭터로 꼽힌다. 당시 대학가에는 리본으로 묶은 머리, 삐져나온 앞니에 단춧구멍만 한 눈을 하고서 요부 반금련과 어울리지 않는 커플을 이룬 주인공 무대를 사랑하는 ‘무대 클럽’이 생길 정도였다.
그러나 당국이 ‘수호지’가 체제를 전복하려는 불온한 내용이라고 시비를 걸어오는 바람에 고우영은 한동안 원고 수정을 거듭하다 1974년 271회를 끝으로 붓을 꺾었다. ‘임꺽정’과 ‘수호지’의 인기는 1971년 2만부에 불과했던 일간스포츠의 신문부수를 4년 후 30만 부로 늘어나게 하는 데 절대적으로 기여했다는 평을 듣고 있다.
1975년 12월부터 1년 동안 연재된 ‘일지매’는 100% 고우영의 창작이다. 그가 아는 거라곤 시대 배경이 병자호란 직전이라는 사실 하나뿐이었다. 그런데도 살을 붙여 ‘일지매’를 완성하는 놀라운 상상력을 과시했다. 1978년부터 1980년까지 일간스포츠에 연재된 흑백만화 ‘삼국지’에서는 원본 삼국지의 근엄한 영웅 유비 대신 촐싹거리는 유비를 등장시켜 영웅의 권위를 부수고 우리의 사고를 개방시켰다. ‘고우영 삼국지’는 기발한 패러디, 서민적이고 현실적인 인물 묘사로 사랑받았다. 완결 이듬해 단행본으로 출간되었고, 검열·삭제 없는 복간본이 2002년 출간되어 지금껏 90만부가 발행됐다.

자신의 만화 중 가장 애착이 가는 것은 ‘일지매’와 ‘십팔사략’

▲ 고우영

고우영의 만화는 익살맞은 비틀기, 걸쭉한 입담, 능청스러운 외설 등을 통해 고전 속 인간 군상을 독특하게 각색해내는 인물 해석에서 특히 빛났다. 고우영 자신은 ‘일지매’와 ‘십팔사략’을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으로 꼽는다. ‘일지매’는 100% 창작이라는 이유로, 1998년 11월 전 10권이 완간된 '십팔사략'은 시간에 쫓겨 아무렇게나 그릴 수밖에 없는 신문 연재를 하지 않고 처음부터 단행본으로 기획을 했다는 이유에서다.
고우영은 성인 연재만화를 대표 장르로 하면서도 청소년 만화 작업 역시 게을리하지 않았다. 1975년 ‘소년’지에 연재한 무술가 최배달의 일대기인 ‘대야망’도 그중 하나다. 고우영은 글솜씨가 탁월했다. 만화 속 촌철살인의 대사들은 그의 문학적 재주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의 발자취는 창작만화 작업 외에도 평소 그가 여행한 명소들을 중심으로 엮은 기행문 서적, 도서 삽화 작업 등 다방면에 남아 있다.
고우영은 만능 스포츠맨이었고 취미가 다양했다. 한국여행인클럽 회장을 지낼 정도로 여행에도 일가견이 있었으며 암벽 등반, 스킨스쿠버, 권투, 낚시, 골프 등에도 능했다. 자신의 만화 ‘가루지기전’을 1988년 영화로 만들 때는 직접 메가폰을 잡기도 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고우영이 남긴 최대의 업적을 꼽으라면 단연 독자에게 제공한 만화의 즐거움이다.


美 뉴욕타임스의 ‘펜타곤 페이퍼’ 보도는 베트남전쟁의 진실 밝혀낸 특종

‘펜타곤 페이퍼’로 불리는 미 국방부 기밀문서를 입수해 통킹만 사건 조작 등 베트남 전쟁의 진실을 밝혀낸 닐 시핸 기자가 지난 1월 7일 별세했다. 그의 죽음을 계기로 ‘펜타곤 페이퍼’가 무엇이고 어떤 과정을 거쳐 세상에 알려졌는지 전후 사정을 알아본다.

뉴욕타임스, 23년간 역대 미국 대통령들의 기만과 속임수 실상 그대로 까발려

“1964년 8월 북베트남의 어뢰정이 미국 구축함을 먼저 공격해 베트남전쟁이 촉발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사실이 아니라니….” “미국이 이에 대한 보복으로 북베트남에 대량의 폭탄을 떨어뜨린 것으로 알고 있는데 사실은 오래 전부터 계획된 것이었다니….”
1971년 6월 13일자 뉴욕타임스를 펼쳐 든 미국인들은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1945년부터 1968년까지 23년간 역대 미국 대통령들의 기만과 속임수의 실상을 그대로 까발린 이날 기사의 1면 제목은 ‘펜타곤 페이퍼로 본 미국의 군사 개입 확대과정 30년’이었다.
기사는 오랫동안 비밀의 장막에 갇혀 있던 새로운 사실을 미국인에게 알려주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베트남 내전의 개입에 반대하는 군 상층부의 경고를 무시했고, 케네디 대통령은 1963년 11월 남베트남 고 딘 디엠 정권의 전복을 승인했으며, 존슨 대통령은 1964년 8월 통킹만 폭격을 결정하기 전 예상되는 대량의 민간인 사상자에 관한 보고를 무시했다는 것이다.
모두 6면에 걸쳐 보도된 이 엄청난 고발은 대니얼 엘스버그라는 군사전문가의 고뇌와 용기의 산물이었다. 하버드대를 졸업한 해병대 장교 출신의 엘스버그는 ‘위험, 불분명 그리고 결정’이라는 박사학위 논문을 계기로 1959년 국방부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랜드연구소의 전쟁분석가를 거쳐 백악관의 자문역할을 했다. 1964년에는 1961년부터 7년 동안 베트남전쟁을 지휘한 로버트 맥나마라 국방장관을 보좌하고 1965년부터 2년간은 베트남 현지에서 전쟁 전문가의 안목을 쌓았다. 1967년에는 맥나마라 국방장관의 요청으로 1945년부터 1968년까지 베트남에서 행해진 미국의 의사결정에 관한 1급 비밀을 한데모아 맥나마라 보고서 이른바 ‘펜타곤 보고서’를 만드는 작업에 관여했다.

군사전문가 대니얼 엘스버그라의 고뇌와 용기의 산물

프로젝트에 투입된 수십 명의 군인과 역사학자들이 산더미같은 정부 문서와 2년여를 씨름한 끝에 ‘펜타곤 보고서’를 완성했으나 완전하지는 않았다. 백악관과 CIA 서류가 거의 포함되어 있지 않아 미국이 왜 진흙탕에 빠졌는지에 대한 결정적인 이유가 해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고서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매파에서 비둘기파로 변신한 엘스버그는 보고서를 세상에 공표해 이미 늪이 되어버린 전쟁을 끝내는 데 기여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보고서가 완성된 1969년 가을, 엘스버그는 47권 7100쪽에 달하는 방대한 보고서를 밖으로 빼내 친구가 경영하는 광고대행사에서 밤새도록 복사했다. 복사본을 풀브라이트 상원의원과 조지 맥거번 상원의원에게 각각 전달했으나 두 의원이 미적미적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던 중 1970년 4월 말 미국이 캄보디아까지 침공했다. 엘스버그는 더 이상 미국의 젊은이들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가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평생을 감옥에서 보낼 각오로 1971년 3월 뉴욕타임스의 닐 시핸 기자에게 ‘펜타곤 보고서’의 존재를 알렸다.
뉴욕타임스 사주인 아서 슐츠버거는 몇 주간이나 게재 여부를 놓고 고민을 계속했다. 법률고문을 비롯 편집간부들과 가진 회의에서는 창업 이래 가장 격렬한 논쟁이 연이어 벌어졌다. 편집국장 등 고위 간부들은 발행인에게 기밀문서를 기사화하도록 강력히 요청하고 기자들은 모두 감옥에 가더라도 기사를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기사화를 결정한 뉴욕타임스는 이 건을 ‘프로젝트 X’로 명명하고 보도 준비에 착수했다. 닐 시핸 등 취재팀 4명은 힐튼호텔에 경비까지 세운 비밀취재본부를 차려 3개월간 보고서를 검토하고 분석했다.
폭로 기사는 1971년 6월 13일의 첫날 보도에 이어 10회에 걸쳐 연재될 예정이었다. 그러자 닉슨 행정부가 “미국 국방상의 이익에 심각한 손해를 끼쳤다”며 보도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 법원이 3회분 기사가 실린 후 신청을 받아들여 연재는 중단되었다.
시리즈가 중단되자 이번에는 엘스버그로부터 4000쪽 분량의 보고서를 입수한 워싱턴포스트가 6월 18일 기사화했다. 보도에 앞서 워싱턴포스트도 고민이 많았다. 법률고문들은 대법원 판결이 날 때까지 보도를 유보하자고 했으나 편집국장 브래들리와 베테랑 기자였던 프리츠 비비 등은 보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사안은 워싱턴포스트의 존폐가 걸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민감한 문제였다.
만약 대법원이 이 보도행위를 간첩법 위반으로 판결할 경우 각종 악영향과 더불어 수억 달러의 손해를 보게 될 TV 방송국 허가 갱신 취소, 주가 폭락 등의 문제가 간단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사주인 캐서린은 용기를 내 “go ahead!(발행하라)” 지시를 내렸다. 보도를 통해 베트남전 확전 명분으로 삼은 ‘통킹만 사건’이 조작됐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미국 사회는 충격에 빠졌고, 반전 운동이 더욱 확산하는 계기가 됐다.

美 연방대법원, 언론자유 손 들어줘

전국적으로 많은 신문이 진실보도 억압에 항의하면서 국가안보에 무해하다는 정당성과 논리를 앞세워 닉슨에 도전하는 가운데 재판은 속전속결로 진행되었다. 재판 결과에 따라 엘스버그는 문서오용 및 절도죄 등 12가지 중죄를 저지른 혐의로 115년형을 선고받을 수도 있었다.
닉슨과 측근은 ‘배관과’라는 별칭이 붙은 특별 부서를 설치해 엘스버그의 집을 도청하고 병원치료 기록을 빼내는 등 그를 인격적으로 파멸시키기 위한 공작을 폈다. ‘배관공’들은 엘스버그를 곤란하게 할 어떤 의료기록도 찾아내지 못했지만 문제는 의료기록을 찾고 못 찾고가 아니었다.
이러한 범법행위로 무감각해진 닉슨 정부의 도덕성이 1년 뒤 정적의 선거자료를 찾아 워터게이트 빌딩의 민주당 전국위원회 사무실에 침입하는 이른바 ‘워터게이트 사건’을 일으키는 데 아무런 고민 없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이런 보이지 않는 움직임 속에 1971년 6월 30일 미 연방대법원의 역사적인 판결이 있었다. 대법원이 6대 3으로 “수정헌법 1조의 ‘표현의 자유’를 보장해야 하며, 국가는 이를 억압할 수 없다”고 판결함으로써 언론자유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이는 국가 기밀이란 이유로 수정헌법 1조에 보장된 '언론의 자유'를 억압할 수 없다는 판례를 남긴 역사적 판결이 되었다. ‘펜타곤 페이퍼’는 내부 폭로자의 시대를 연 기념비적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펜타곤 페이퍼 보도 뒤 연락이 끊겼던 시핸과 엘스버그는 NYT 보도 후인 1971년 겨울 뉴욕 맨해튼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뒤통수를 맞았던 엘스버그는 시핸에게 “나처럼 당신도 문서를 훔쳤네”라고 말했다. 그러자 시핸은 “ 미국인이 낸 세금과 미국의 아들들이 흘린 피로 만들어진 서류이기 때문에 미국인들이 읽을 권리가 있다. 나도, 당신도 서류를 훔치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엘스버그는 1973년 절도와 간첩 등의 혐의로 기소됐지만 무혐의로 풀려났다. NM

▲ ‘펜타곤 페이퍼’를 처음 보도한 1971년 6월 13일자 뉴욕타임스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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