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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한국전쟁 70주년 특집/ 전시 수도 ‘부산의 가요, 가요 속에 나타난 부산’[2]
‘굳세어라 금순아’에서 ‘이별의 부산정거장’까지
2020년 10월 08일 (목) 18:27:57 박성서 webmaster@newsmaker.or.kr

부산은 도시 천체가 노래 소재로 더없이 좋은 조건을 지니고 있는 낭만적인 도시다. 산, 바다, 도시가 어우러져 1년 내내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부산 곳곳이 멋과 낭만으로 가득하다. 때문에 시대를 떠나 부산은 노래의 소재로 각광받았다.
특히 6.25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임시수도 역할까지 담당했던 이곳은 피난민들의 ‘제2의 고향’이자 동시에 우리 대중가요 속에 ‘또 하나의 고향’으로 자리했다.
전시 수도이자 당시 우리나라의 음악의 산실이었던 부산의 대중가요 활동은 우리나라 대중음악, 그 자체였다.
이후 부산은 우리나라 제2도시로 면모를 갖춘다. 부산을 소재로 하여 전 국민에게 애창됐던 노래들을 살펴보며 부산의 가요, 가요 속에 나타난 부산, 부산사람의 모습을 살펴본다. 그 두 번 째.

글 박성서(음악평론가, 저널리스트)

▲ ‘이별의 부산정거장’ LP와 유호 친필가사

전쟁가요의 메카, 전시수도 부산

전 국토의 4분의 3이 전쟁터로 변하고 국민들은 전쟁을 피해 피란생활을 하던 때. 온 국민을 전쟁터로, 그리고 피란길로 내몰았던 이 비극의 한국전쟁. 특히 임시수도의 역할까지 맡아야 했던 부산은 피란민들의 애환이 고스란히 담긴 곳이다.
전쟁을 피해 밀려드는 피란민들로 인해 산비탈은 물론 길섶에 이르기까지 판자촌이 숲을 이뤘다. 이 기간 중에 부산으로 몰려든 피란민이 약 5백80여만 명에 이르렀다고 하니 당시 참혹상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치솟는 물가는 피란민들을 괴롭히는 또 하나의 전쟁이었고 공동수도 앞에는 물이 나오기 몇 시간 전부터 수백 개의 물동이가 늘어서고 그나마 한 가구당 세 동이를 넘지 못하도록 제한했다. 때문에 ‘밥 한 그릇 동냥 줄 수는 있어도 물 한 그릇은 줄 수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물 전쟁 또한 가혹했다.
호구지책이 최대 과제이던 시절, 부산의 국제시장과 영도다리 그리고 판자촌 언덕길로 이어지던 길목인 40계단 등이 바로 피란시절의 상징물들이다. 특히 40계단은 수많은 피란민들이 판잣집을 짓고 밀집해서 살았던 곳으로 바로 앞 부두에서 들어오는 구호물자를 내다 파는 장터로, 그리고 피란 도중 헤어진 가족들의 상봉 장소로 유명했던 곳이다. 이 사십계단을 주제로 실향민의 아픔을 그린 노래가 ‘경상도아가씨(손로원 작사, 이재호 작곡. 박재홍 노래)’다. 현재 중앙동 40계단에는 ‘경상도아가씨’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 부산 40계단에 세워져 있는 ‘경상도아가씨’ 노래비와 40계단 테마거리

‘경상도아가씨’와 박재홍, 그리고 40계단 테마거리

1. 사십 계단 층층대에 앉아 우는 나그네/울지 말고 속 시원히 말 좀 하세요/피난살이 처량스러 동정하는 판잣집에/경상도 아가씨가 애처로워 묻는구나/그래도 대답 없이 슬피 우는 이북 고향 언제 가려나.
2. 고향길이 틀 때까지 국제시장 거리에/담배 장사 하드래도 살아 보세요/정이 들면 부산항도 내가 살던 정든 산천/경상도 아가씨가 두 손목을 잡는구나/그래도 뼈에 맺힌 내 고장인 이북 고향 언제 가려나.
3. 영도다리 난간 위에 조각달이 뜨거든/안타까운 고향 얘기 들려주세요/복사꽃이 피던 날 밤 옷소매를 부여잡든/경상도 아가씨가 서러워서 우는구나/그래도 잊지 못할 가고 싶은 이북 고향/언제 가려나. -‘경상도아가씨(손로원 작사, 이재호 작곡. 박재홍 노래)’

피란지 부산을 무대로 활동했던 가수들 역시 고생이 심했다. 공연이 끝나도 잠잘 곳이 없어 무대에서 그냥 새우잠을 자야했다.
이 노래의 주인공이자 ‘울고 넘는 박달재’의 가수 박재홍은 전쟁이 터지자 다섯 식구를 데리고 부산으로 내려가 피란생활을 시작한다. 국제시장에서 ‘유신전기’라는 간판을 내걸고 전기에 관련된 온갖 잡다한 물건들을 취급하는 장사를 했다. 또한 이 시기에도 꾸준히 음반을 취입했다. ‘경상도아가씨(미도파레코드)’를 비롯해 ‘물방아 도는 내력(손로원 작사, 이재호 작곡, 도미도레코드)’, ‘세기의 항구(고려성 작사, 나화랑 작곡, 태평레코드)’, ‘순정 애인(손로원 작사, 이재호 작곡, 태평레코드)’, ‘야영의 밤(손석우 작사, 전오승 작곡, 도미도레코드)’ 등.
현재 이 노래의 배경이 되는 중앙동 40계단 주변에는 ‘40계단문화관’이 세워져 있고 이 일대에 ‘40계단 테마거리’가 조성되어 있다. 해마다 6.25를 전후해 전쟁 당시 생활을 체험할 수 있는 ‘꿀꿀이죽 먹기 대회’와 ‘경상도아가씨 노래 부르기 대회’도 펼쳐진다. 또한 6.25 당시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아버지의 휴식’, ‘물동이 진 아이’, ‘어머니의 마음’, ‘뻥튀기아저씨’ 등 조형물도 세워져 있다.

▲ 송도 현인광장에 세워진 현인 동상과 ‘굳세어라 금순아’ 노래비. 영도다리 앞에도 노래비와 동상이 세워져 있다

‘굳세어라 금순아’노래비와 현인가요제

이 시기에 나온 대표적인 전쟁가요가 ‘굳세어라 금순아’다. 1.4후퇴 때 피란길에 잃어버린 동생 금순이를 찾는 심정을 절실하게 그렸다. 이 노래에는 피란시절을 상징하는 ‘흥남부두’, ‘국제시장’, ‘영도다리’ 같은 지명이 리얼하게 등장한다.

1.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목을 놓아 불러 봤다 찾아를 보았다/금순아 어데로 가고 길을 잃고 헤매였더냐/피눈물을 흘리면서 1.4 이후 나 홀로 왔다.
2. 일가친척 없는 몸이 지금은 무엇을 하나/이 내 몸은 국제시장 장사치이다/금순아 보고 싶구나 고향 꿈도 그리워진데/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떴다.
3. 철의 장막 모진 설움 받고서 살아를 간들/천지간에 너와 난데 변함 있으랴/금순아 굳세어다오 남북통일 그날이 되면/손을 잡고 울어보자 얼싸안고 춤도 추어보자. -‘굳세어라 금순아(강해인 작사, 박시춘 작곡, 현인 노래)’

잿더미 속에서도 희망의 불씨를 심어 삶에 대한 의지를 갖게 했던 노래 ‘굳세어라 금순아’. 가수 현인의 독특한 바이브레이션과 스타카토 창법, 이른바 탁탁 끊기는 절제된 창법이 오히려 슬픔을 더해준다. 어디에 있건, 어떠한 역경이 있더라도 반드시 굳세게 견디며 살아만 있어달라는 절박한 외침이 생생하게 담겼다. 실제로 당시 온 국민들이 ‘금순이’였고 ‘금순이 오빠’였다. 같은 처지의 피란민들은 이 노래를 부르며 자신의 심정을 달래기도 했고 또 노래가사처럼 나 자신도 언젠가 헤어진 가족과 다시 만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살아남겠다.’는 각오와 의지를 다졌다. 바로 이러한 노래들과 함께 국민들은 그 힘든 시기를 견뎌낼 수 있었다.
현재 부산에는 이 노래 ‘굳세어라 금순아’의 노래비가 두 개 세워져 있다. 영도다리 입구, 그리고 송도해수욕장 ‘현인광장’에 각각 현인 동상과 함께 세워져 있다. 영도다리 입구에 세워진 노래비에는 노랫말이 2절까지만 새겨져 있다. 또한 송도 현인광장에 세워진 노래비에는 3절까지 새겨져 있지만 이 두 노래비의 가사는 서로 다르다. 한 예로 ‘고향 꿈도 그리워진데’가 한쪽엔 ‘그리워진다’로 다른 한 쪽엔 ‘그리워질 때’로 적고 있다. 심지어 송도에 새겨진 노래비의 경우는 무려 다섯 군데나 잘못 표기한 부분이 발견된다. ‘어데로 가고’가 ‘어디를 가고’로, ‘살아를 간들’이 ‘살아를 본들’로, ‘그날이 되면’이 ‘그날이 오면’으로, ‘손을 잡고 울어보자’가 ‘손을 잡고 웃어보자’로. 노래비 건립 단체의 보다 정확한 고증이 아쉽다.
아울러 ‘제2의 현인’을  발굴하고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현인가요제’가 매년 부산 송도에서 개최되고 있다. 지난 2005년부터 시작, 올해로 16년째다.

▲ 매년 부산 송도해수욕장에서 펼쳐지고 있는 ‘현인가요제’ 현장

전쟁가요 ‘병원선’과 ‘유틀란디아호’

피란시절 부산에서 탄생한 또 하나의 전쟁가요가 ‘병원선’이다. 부상병이 병석에서 전우들과 함께 전선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심정을 그린 노래로 1953년에 발표되었다.
원곡은 1942년에 만들어진 남인수의 ‘병원선(조명암 작사, 박시춘 작곡)’. 그러나 6.25전쟁 당시 작곡가 박시춘, 작사가 손로원이 부산에 떠있는 병원선 배 위에서 요양하고 있는 환자들의 모습을 보고 가사를 바꿔 다시 발표했다.

1. 저 멀리 저 강을 한없이 볼 적에/분한 마음 참지 못해 혼자 울었소/병석에 누워서 창문 밖으로/마음은 전선에 달려 가건만/어이해서 다친 님의 몸은 한달음 못 걸어가나.
2. 장부의 갈 길을 일러주는 어머님/뵈올 낯이 부끄러워 다시 울었소/명예의 창찬도 고마웁 건만/저 멀리 전선에 전우와 함께/담배 한개 서로 나눠 피운 그 밤이 다시 그리워. -‘병원선(손로원 작사, 박시춘 작곡, 신세영 노래)’.

이때 부산 앞바다에 떠있던 병원선은 덴마크가 의료진 100여 명과 함께 파견했던 ‘유틀란디아호’. 병상 456개를 갖춘 당시로서는 최첨단 의료시설을 갖춘 떠다니는 종합병원이었다. 이 ‘유틀란디아호’라는 이름은 정작 우리나라에선 생소한데, 이 배를 파견한 덴마크의 국민들은 이 배 이름을 잘 알고 있다. 지난 1986년에 덴마크의 유명 가수, 킴 라르센이 ‘유틀란디아(Jutlandia)’라는 제목의 노래를 발표해 크게 히트시켰기 때문이다. 현재는 덴마크 국민애창곡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이후 4년 뒤인 1990년에 덴마크 코펜하겐 항구에 ‘유틀란디아호 한국전쟁 참전 기념비’가 세워졌다. 한국산 화강암으로 제작되었는데 직접 부산에서 만들어 코펜하겐까지 운반했다.
병원선 ‘유틀란디아호’는 전쟁 기간 동안 약 5,000명의 부상병과 6,000명 이상의 전쟁고아를 비롯한 민간인들을 치료했다. 휴전 이후에는 전쟁 때 야전병원을 운영했던 노르웨이, 스웨덴 의료진과 함께 국립의료원을 세웠다. 이것이 지금의 국립중앙의료원이다.
이처럼 한국전쟁을 전후해 많은 전쟁가요들이 부산에서 탄생했다. ‘꿈에 본 내 고향(한정무)’, ‘바로 그날 밤(신세영)’, ‘부산야곡(신세영)’, ‘삼다도 소식(황금심)’, ‘상이군인가(정문숙)’. ‘슈샤인 보이(박단마)’, ‘승리부기(신카나리아)’, ‘에레나가 된 순이(한정무)’. ‘이별의 부산항(손인호)’, ‘저무는 국제시장(황정자)’, ‘전선소야곡(이예성)’, ‘추억의 사십계단(신세영)’, ‘함경도사나이(손인호)’ 등등.


구두닦이소년을 소재로 한 익살스런 노래‘슈샤인 보이’

▲ 가수 신세영 선생과 인터뷰하고 있는 필자. 2007년. 우측은 ‘병원선’, ‘슈샤인보이’ 음반

이 시기에 나온 노래 중 한 곡이 힘겨운 현실을 익살스런 해학으로 그려낸 ‘슈샤인 보이’다. 이서구 작사, 손목인 작곡의 경쾌한 재즈풍의 노래로 박단마가 불렀다. ‘아무리 피란통에 허둥거려도 구두만큼은 깨끗이 닦아 신어야 멋쟁이아가씨들이 좋아한다.’는 구구닦이 소년의 익살이 재미있다.

1. 슈샤인 슈샤인 보이 슈샤인 슈샤인 보이/슈슈슈슈 슈샤인 보이 슈슈슈슈 슈샤인 보이/헬로 슈사인 헬로 슈사인/구두를 닦으세요 구두를 닦으세요 구두를 닦으세요/아무리 피난통에 허둥거려도/구두 하나 깨끗하게 못 닦으시는/주변 없고 배짱 없는 고린보 샌님은/멋쟁이 아가씨는 노노노노 노굿이래요.
2. 슈샤인 슈샤인 보이 슈샤인 슈샤인 보이/슈슈슈슈 슈샤인 보이 슈슈슈슈 슈샤인 보이/헬로 슈사인 헬로 슈사인/구두를 닦으세요 구두를 닦으세요 구두를 닦으세요/아무리 피난통에 허둥거려도/구두 하나 깨끗하게 못 닦으시는/주정뱅이 안달뱅이 고린보 샌님은/멋쟁이 아가씨는 노노노노 노굿이래요. -‘슈샤인보이(이서구 작사, 손목인 작곡, 박단마 노래)’

미군, 즉 유엔군이 들어오면서 영어 단어들이 국민들 입에 오르내렸다. ‘헬로, 오케이’, ‘기브 미 초콜레트’같은 말부터 ‘양공주’, ‘유엔 사모님’이란 신조어도 생겨나고, 또 미군 피엑스에서 빼낸 물건으로 장사하는, 일명 ‘양키장사’들이 돈줄을 쥐기도 했다. 당시 구두닦이들이 구두통을 메고 거리에 나서며 외국인만 보면 ‘슈샤인, 슈샤인!’하고 외쳤던 웃지 못 할 풍경도 볼 수 있었다. ‘슈샤인 보이’라는 단어는 정작 외국인들은 못 알아듣는 일종의 콩글리시다.
당시 국민들은 피란지에서 가족 모두가 생활전선에 나서야했던 힘겨웠던 시절이었다. 어린아이들도 신문팔이나 구두닦이, 또는 구걸을 해가며 생활해야 했다. ‘슈샤인 보이’, 이 노래에는 당시 생활전선에 나서야만 했던 소년들의 애환이 밑바닥에 깔려있다.

피란지 부산을 떠나 고향으로, ‘이별의 부산정거장’

▲ 625전쟁 당시 피란시절에 발표된 전쟁가요 음반들

1953년 7월, 드디어 휴전이 되었다. 동시에 포성도 멈췄다. 휴전과 함께 등장한 노래가 바로 ‘이별의 부산정거장’이다. 50년대 대중가요 중에서 가장 크게 히트한 노래이기도 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별의 부산정거장’은 경쾌한 멜로디에 비해 노랫말은 슬프다. 전쟁이 끝나고 비로소 고향으로 돌아가는 설레임과, 동시에 비록 고생스러웠지만 그래도 정들었던 피란지 부산을 떠나는 아쉬움이 동시에 들어있는 노래인 것이다.

1. 보슬비가 소리도 없이 이별 슬픈 부산 정거장/잘 가세요 잘 있어요 눈물의 기적이 운다/한 많은 피난살이 설움도 많아/그래도 잊지 못한 판잣집이여/경상도 사투리에 아가씨가 슬피 우네/이별의 부산 정거장.
2. 서울 가는 십이 열차에 기대앉은 젊은 나그네/시름없이 내다보는 창밖의 등불이 존다/쓰라린 피난살이 지나고 보니/그래도 끊지 못할 순정 때문에/기적도 목이 메어 소리 높이 우는 구나/이별의 부산 정거장.
3. 가기 전에 떠나기 전에 하고 싶은 말 한마디를/유리창에 그려보는 그 마음 안타까워라/고향에 가시거든 잊지를 말고/한 두자 봄소식을 전해주소서/몸부림치는 몸을 뿌리치고 떠나가는/이별의 부산 정거장. -‘이별의 부산정거장(유호 작사, 박시춘 작곡, 남인수 노래)’

한편 이 노래가 더욱 서글프게 느껴지는 것은 당시 이 열차를 탈 수 없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전쟁은 끝났지만 정작 돌아갈 고향이 없어진 사람들, 바로 이북에 고향을 두고 온 이들이다. 전쟁을 피해 삼팔선을 넘은 사람들, 그러나 어느덧 분단이 토착화되며 당시 많은 ‘피란민’들은 이제 ‘실향민’으로 그 이름이 바뀐 채 살아가고 있다.
삼팔선의 분단은 6.25전쟁으로 더욱 골이 깊어져 ‘영토의 분단’, ‘민족의 분단’에 이어 ‘마음의 분단’으로까지 이어졌다. 한국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인 것이다. (계속) NM

[참고 자료] ‘한국전쟁과 대중가요, 기록과 증언전(展)’ 도록(부산 40계단문화관, 2007년), 단행본 ‘한국전쟁과 대중가요, 기록과 증언(책이 있는 풍경, 박성서,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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