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20.8.7 금 12:04 전체기사 l 기사쓰기 l 자유게시판 l 기사제보 l 구독신청 l 광고안내 l 회사소개
> 뉴스 > 피플·칼럼
     
[박성서 칼럼]‘한국의 슈베르트’라 불린 작곡가 이재호의 삶과 노래
2020년 05월 06일 (수) 23:49:23 박성서 webmaster@newsmaker.or.kr

‘나그네 설움’에서 ‘산장의 여인’까지

‘나그네 설움’, ‘불효자는 웁니다’, ‘번지 없는 주막’, ‘막간아가씨’, ‘대지의 항구’, ‘꽃마차’, ‘귀국선’, ‘물방아 도는 내력’, ‘경상도아가씨’, ‘산유화’, ‘홍콩아가씨’,  ‘단장의 미아리고개’, ‘산장의 여인’, ‘고향에 찾아와도’ 등... 대한민국 대중음악사에 주옥같은 명곡을 남긴 작곡가 이재호 선생(1919.10.14.-1960.7.3)은 작곡은 물론 편곡, 연주 실력까지 고루 갖춘 당시 몇 안 되는 실력파였다.
대한민국 가요계의 중심축을 이루던 활동 기간 내내 지병인 폐결핵을 앓았으나 작품만큼은 생동감이 넘쳤다. ‘향년 42세’라는 짧은 생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명곡들을 국민들 가슴에 영원히 남긴 그의 삶과 노래를 지금, 만나본다.

글 l 박성서(음악평론가, 저널리스트)

▲ 이재호 추모음반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 1960년.

‘가요계의 슈베르트’라 불리던 진주가 낳은 귀재

1939년, 조선의 음반업계에 일대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당시 굴지의 음반사로 콜롬비아, 오케, 포리돌, 빅타, 태평... 가운데 가장 규모가 작았던 태평레코드가 도약을 시작, 오케레코드사를 위협하며 라이벌로 성장, 양대 산맥을 구축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지점에 바로 작곡가 이재호가 있었다.

당시 오케레코드에는 ‘박시춘-남인수’ ‘손목인-고복수, 이난영’ 콤비가 최정상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다면 이에 반해 태평레코드에서는 ‘이재호-백년설, 진방남, 박향림, 백난아’ 콤비가 새롭게 탄생했다. 1940년을 전후로  잇달아 스타로 성장하는 백년설, 진방남, 백난아 등이 모두 태평에서 이재호의 곡을 받아 데뷔했다.

이 무렵 발표되는 ‘나그네 설움(고려성 작사, 백년설 노래)’, ‘불효자는 웁니다(김영일 작사, 진방남 노래)’, ‘번지 없는 주막(박영호 작사, 백년설 노래)’, ‘막간아가씨(박영호 작사, 박향림 노래)’, ‘대지의 항구(김영수 작사, 백년설 노래)’, ‘망향초 사랑(박영호 작사, 백난아 노래)’, ‘꽃마차(반야월 작사, 진방남 노래)’, ‘마도로스 수기(불로초 작사, 백년설 노래)’, ‘황하다방(김영일 작사, 백난아 노래)’ 등은 이제금 이재호의 초기작을 넘어 우리나라 가요사의 대표작으로 기록되고 있다.

▲ (왼쪽 사진) 부산 KBS 경음악단장 시절 이재호와 백난아. (오른쪽 사진) 하나가극단(花歌劇團) 공연길에, 뒷줄 우측에서 두 번째가 이재호 선생.

추모 음반 타이틀,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

‘가요계의 슈베르트’라 일컬어지던 작곡가 이재호(李在鎬, 919.10.14-1960.7.3)의 본명은 이삼동(李三童).

1919년 경남 진주시 평안동에서 부친 이선직과 모친 함안 조씨 사이의 3남2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나 어려서 부모와 형들을 잃고 고모와 누이의 보살핌 속에서 자랐다. 진주보통학교, 진주고보를 나온 그는 어려서부터 바이얼린 주자였던 형의 영향을 받아 1937년, 동경의 우에노음악학교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하며 음악학도로서 꿈을 키웠으나 폐결핵으로 인해 중도에 귀국한다.

귀국 당시 20세였던 그는 1938년, 고향 선배인 오케레코드 문예부장 방예정(方藝汀)을 통해 ‘무적인(霧笛人)’이라는 필명을 스스로 짓고 작곡을 시작한다. 38년 후반 콜롬비아레코드사를 통해 첫 히트 곡 ‘항구에서 항구로(박영호 작사, 박향림 노래)’를 비롯해 ‘애수의 강변(김다인 작사, 박향림 노래)’ 등을 발표한 이듬해인 1939년,  태평레코드에 소속되면서 필명을 ‘이재호’로 바꾼 뒤 본격적인 작곡활동을 통해 발표하는 곡마다 히트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한국 최초의 직업가수 채규엽이 부른 '북국 5천K', 진방남의 '불효자는 웁니다'  '세세년년'  '노래하자 하얼빈(꽃마차)',  백년설의 '나그네 설움'  '번지 없는 주막'  '대지의 항구', 박향림의 ‘막간아가씨’, 백난아의 '갈매기 쌍쌍', '황하다방' 등이 그 것. 특히 40년 1월에 발표된 ‘나그네 설움(고려성 작사, 백년설 노래)’은 광복 이전 대중가요 중 가장 많은 판매량을 기록한 노래로 전해져 온다. 이 노래는 1930년대 후반에 새로운 유행 사조로 등장한 이른바 ‘장조 트로트’의 대표작으로 꼽히며, 식민 지배를 받고 있는 민족의 상황을 나그네에 비유, 피압박민족의 설움을 표현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40년대 초 작곡가 전기현과 함께 태평연주단을 이끌고 조선 일대와 만주 일대를 순회하며 연주단 지휘를 맡기도 했던 그는 1944년 12월, 무용수로 태평연주단에서 함께 공연을 다니던 진주 출신, 김정선(金貞瑄)과 결혼했다.

해방 직후 ‘귀국선’을 작곡, 건재함을 과시하던 이재호는 얼마 후 결핵치료를 겸해 고향 진주로 내려간다. 그리고 그 곳에서 1947년부터 모교 진주중(현 진주고)에서 교편을 잡는데 그 자신이 대중가요 작곡가면서도 학생들에게는 결코 대중가요를 부르지 못하게 하고 대신 명랑하고 씩씩한 노래, 희망을 주는 노래만을 가르쳤다고 전해진다. 후에 작곡가 겸 연주가로 활동한 이봉조는 당시 진주고 재학시절, 스승 이재호의 영향을 받아 음악생활을 결심한 계기가 되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 하나가극단(花歌劇團) 공연 전단지와 공연 팀, 1943년

‘한국의 타이론 파워’로 불리던 멋쟁이, 주머니 속엔 늘 전당표가 가득...

당시 진주시내 중심가에 자리한 ‘덕수이발관’에는 이재호의 사진을 확대해 걸어놓고 손님들의 헤어스타일을 견본으로 하고 있을 정도로 그는 멋쟁이였다. 심지어 학생들에 의해 붙여진 별명이 ‘한국의 타이론 파워’. 타이론 파워(Tyrone Power, 1914~1958)는 미국의 유명 미남배우다.

그 무렵 그는 한 쪽 폐를 제거해야 했을 정도로 병세가 악화되어 교단을 떠난다. 이후 6.25 한국전쟁 당시에는 부산방송국인 HLKB(현 부산 KBS)의 전속 경음악단장을 맡기도 했다. 또한 태평레코드사 시절 명콤비였던, 이른바 ‘태평3총사’라 일컫던 작사가 반야월(가수 명 진방남), 백년설과 함께 서라벌 레코드사를 창설하기도 했다.

휴전 후 서울로 올라온 이재호는 금사향의 ‘홍콩아가씨’, 박재홍의 ‘물방아 도는 내력’, 이해연의 ‘단장의 미아리고개’, 송민도의 ‘아네모네 탄식’, 손인호의 ‘울어라 기타줄’ 등을 잇달아 발표했다. 또한 이 때까지만 해도 유행가를 저급문화로 보는 일부 지식층을 겨냥해 ‘산유화(남인수 노래)’를 작곡, 발표한 뒤 ‘이래도 대중가요를 천시하겠는가?’라며 대중가요에 대한 일부 시각에 대해 강한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고 이 노래의 작사가 반야월 선생은 회고했다.

계속해서 남인수의 ‘무정열차’ 그리고 최갑석의 ‘고향에 찾아와도’ 등, 식을 줄 모르는 창작열을 불태우면서도 술을 멀리 못하는 낭만적 기질, 그리고 결핵으로 인한 약값 등으로 주머니에는 전당표가 가득했다. 지병은 계속 악화되어 격리, 요양생활을 반복해야 했으나 그의 창작열은 멈추지 않았다. 그 무렵인 57년, 반야월 작사, 권혜경의 노래로 발표된 ‘산장의 여인’은 아름다운 멜로디로 인해 더욱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다.

60년대에 들어서면서 반야월 작사로 발표된 노래들, ‘한 많은 낙동강(손인호)’, ‘인천블루스(백일희)’, ‘봄 없는 청춘(금호동)’을 마지막으로 필을 접고 60년 7월, 42세의 일기로 운명을 달리했다. 이웃에서는 집안을 소독한다고 법석이었을 만큼 그가 남긴 마지막 모습은 쓸쓸했다. 이를 뒤늦게 안 한국레코드작가협회에서는 대각사에서 사십구제를 지내며 그를 애도했다.

▲ 이재호 친필 악보.(소장 박성서)

42세에 타계, 36년 후 문화훈장 보관장 서훈 받아

향년 42세. 타계 직후 추모앨범이 나왔다. 음반 타이틀은 그의 삶 그대로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였다.
그가 남긴 노래들은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로부터 애창되고 있다. 일제하 망국의 설움을 노래한 ‘오늘도 걷는다마는...’의 ‘나그네 설움’에서 부터 결핵을 앓던 그의 염원을 담은 ‘산장의 여인’까지... 실로 이재호 선생이 한국가요사에 남긴 족적은 선명하다.

이재호 선생은 타계한지 36년이 지난 1996년 10월 20일, 문화의 날에 그의 음악적 업적을 기리는 문화훈장 보관장을 서훈 받았다.

함께 콤비를 이뤄 ‘단장의 미아리고개’,  ‘산유화’, ‘산장의 여인’ 등 많은 노래를 탄생시킨 작사가 반야월 선생은 생전에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이재호 선생을 이렇게 회고했다.

“일찍이 부모님을 여의고 두 누님과 고모의 보살핌 속에 외롭게 자라서인지 평소에는 말이 없고 우수에 차 있는 듯했으며 감성적이고 눈물이 많아 술잔이 몇 순배 돌아야 그제서 말문을 열었던 분”이라며 “술을 너무 좋아해 건강을 되찾지 못했지만 늘 낭만이 넘쳤고 항구를 사랑하고 또 번뜩이는 천재성을 가진 예술가”로 “선생이 조금 더 오래 살아주었더라면 가요계 판도는 크게 바뀌었을 것”이라며 그의 짧은 생을  애석해 했다.

▲ 이재호 선생이 남긴 음반들.

성주 성밖 숲에 세워진 ‘나그네 설움’ 노래비

이재호 선생이 남긴 노래의 노래비가 전국 곳곳에 세워져 있다. 가장 먼저 세워진 노래비는 가수 백년설의 고향인 경북 성주에 세워진 ‘나그네 설움’ 노래비로 1992년에 제막되었다.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
지나온 자국마다 눈물 고였다
선창가 고동소리 옛님이 그리워도
나그네 흐를 길은 한이 없어라.

타관 땅 밟아서 돈 지 십 년 넘어 반평생
사나이 가슴속엔 한이 서린다
황혼이 찾아들면 고향도 그리워져
눈물로 꿈을 불러 찾아도 보네.

낯익은 거리다마는 이국보다 차워라
가야 할 지평선엔 태양도 없어
새벽별 찬 서리가 뼛골에 스미는데
어데로 흘러가랴 흘러갈 소냐.
-나그네 설움(고려성 작사, 이재호 작곡, 백년설 노래, 1940년 발표)

일제 강점기에 나온 이 노래는 당시 ‘번지 없는 주막’과 더불어 나라를 잃은 국민들의 울분을 대신해주었다. 특히 작사가 고려성(본명 조경환)이 독서사건에 연루되어 경기도경 고등계에서 조사받고 나오다가 광화문 뒷골목 선술집에서 그 울분을 담뱃갑에 적어둔 것이 바로 ‘낯익은 거리다마는 이국보다 차워라”라는 3절 가사다. 나라 잃은 국민의 참담한 심경 그대로가 묘사되어 있다.

부산 40계단에 세워진 ‘경상도아가씨’ 노래비

또한  부산 중앙동에 있는 40계단에는 6.25 피난시절, 두고 온 이북 고향을 그리는 피난민의 심정을 절절하게 그린 노래, ‘경상도아가씨’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사십 계단 층층대에 앉아 우는 나그네
울지 말고 속 시원히 말 좀 하세요
피난살이 처량스러 동정하는 판잣집에
경상도 아가씨가 애처로워 묻는구나
그래도 대답 없이 슬피 우는 이북 고향 언제 가려나.

고향길이 틀 때까지 국제시장 거리에
담배 장사 하드래도 살아 보세요
정이 들면 부산항도 내가 살던 정든 산천
경상도 아가씨가 두 손목을 잡는구나
그래도 뼈에 맺힌 내 고장인 이북 고향 언제 가려나.

영도다리 난간 위에 조각달이 뜨거든
안타까운 고향 얘기 들려주세요
복사꽃이 피던 날 밤 옷소매를 부여잡든
경상도 아가씨가 서러워서 우는구나
그래도 잊지 못할 가고 싶은 이북 고향 언제 가려나.
-경상도아가씨(손로원 작사, 이재호 작곡, 박재홍 노래, 1954년 발표)

이 노래비가 세워진 부산 중앙동 ‘40계단 문화테마거리’에서는 해마다 ‘40계단 문화축제’가 열리고 있다. 매년 6월 25일을 전후해 피난민의 애환을 그린 이 노래 ‘경상도아가씨 노래 부르기 경연대회’와 함께 ‘꿀꿀이죽’과 ‘주먹밥’을 무료 시식하는 행사도 개최되고 있다.
 

서울 ‘미아리고개 가로공원’에 세워진 ‘단장의 미아리고개’ 노래비

서울 돈암동 미아리 고개 정상에 위치한 ‘미아리고개 가로공원’에는 ‘단장의 미아리고개’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작사가 반야월은 전쟁 때 잃은 어린 딸을 생각하며 미아리에서의 생이별을 그렸다. 단장(斷腸)은 창자를 끊어내는 고통을 말한다.

미아리 눈물고개 님이 넘든 이별 고개
화약 연기 앞을 가려 눈 못 뜨고 헤매일 때
당신은 철사줄로 두 손 꽁꽁 묶인 채로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맨발로 절며 절며
끌려가신 이 고개 한 많은 미아리 고개.

(대사) 여보, 당신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계세요, 어린 용구는 오늘밤도 아빠를 그리다가 이제 막 잠이 들었어요. 동지섣달 기나긴 밤 북풍한설 몰아칠 때 당신은 감옥살이 얼마나 고생을 하세요. 십 년이 가도 백 년이 가도 부디 살아만 돌아오세요. 네? 여보, 여보...

아빠를 그리다가 어린 것은 잠이 들고
동지섣달 기나긴 밤 북풍한설 몰아칠 때
당신은 감옥살이 그 얼마나 고생하오
십 년이 가도 백 년이 가도 살아만 돌아오소
울고 넘던 이 고개여 한 많은 미아리 고개.
-단장의 미아리고개(반야월 작사, 이재호 작곡, 이해연 노래, 1956년 발표)

한편 행정구역에 ‘미아리’가 포함된 서울 성북구청에서는 한때 ‘미아리’ 동명을 바꾸자는 움직임도 있었다. ‘한 많은 미아리, 그리고 눈물고개’라는 이미지가 너무 강해 시민들에게 부정적 이미지가 박혀있다, 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2019년, 청주에 세워진 ‘산장의 여인’ 노래비

그런가 하면 지난해인 2019년 11월에는 충북 청주 문의관광단지에 ‘산장의 여인’ 노래비가 세워졌다. 청주는 이 노래를 부른 가수 권혜경이 만년에 보낸 곳이다.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
단풍잎만 차곡차곡 떨어져 쌓여있네
세상에 버림받고 사랑마저 물리친 몸
병들어 쓰라린 가슴을 부여안고
나 홀로 재생의 길 찾으며/외로이 살아가네.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
풀벌레만 애처로이 밤새워 울고 있네
행운의 별을 보고 속삭이던 지난날의
추억을 더듬어 적막한 이 한밤에
임 뵈올 그날을 생각하며 쓸쓸히 살아가네.
-산장의 여인(반야월 작사, 이재호 작곡, 권혜경 노래. 1957년 발표)

이 노래비 뒷면에 새겨진 노래비 해설은 필자가 맡았다. 그 내용을 옮겨본다.

‘마산결핵병원을 찾은 작사가 반야월(본명 박창오, 1917.8.1.~2012.3.26)이 결핵으로 세상과 단절하고 투병 중인 한 여인을 모티브로 만들어 1957년 작곡가 이재호(본명 이삼동, 1919.10.14.~1960.7.3.)가 곡을 붙였다. 1956년 중앙방송국(현 KBS) 전속가수 권혜경이 발표한 데뷔곡, 작곡가 역시 한쪽 폐를 잘라내야 했을 정도로 건강이 악화된 상태로 이들은 ‘당시 불치병이라 여기던 결핵을 노래로 치료하고 싶었다’고 회고했다.

권혜경은 ‘이렇게 슬픈 노래를 주어 산장의 여인의 운명으로 살아가게 했느냐’는 항변을 하기도 했다지만 그 스스로 남은 인생을 어려운 이웃을 위해 봉사활동을 펼치다가 이곳 청주에 기거, 자신의 노랫말을 따라간 영원한 ‘산장의 여인’이었다.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 나 홀로 재생의 길 찾으며 외로이 살아가네', 한 여인의 삶과 운명을 함께 한 이 노랫말처럼 만년에 삶의 의지를 불태웠던 이곳에 각 계의 뜻을 모아 여기 노래비를 세운다. -글/음악평론가 박성서‘

지금까지도 국민들 가슴에 깊게 자리하고 있는 그가 남긴 노래들, 천재적인 음악성의 소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난 이재호의 작품세계, 반드시 새롭게 조명되어야 할 소중한 유산이라는 생각이다.

[참고 자료] 작가 탐구-이재호 편 (박성서, 한국가요작가협회보 ‘가요마을’ 2005년 여름호).

박성서의 다른기사 보기  
ⓒ 뉴스메이커(http://www.newsmaker.or.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전체기사의견(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전체기사의견(0)
뉴스메이커About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우)110-999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문로1가 163 광화문오피시아빌딩 14층 뉴스메이커 | 전화 : 02-733-0006 | 팩스 : 02-733-0009
청소년보호책임자 : 안상호
뉴스메이커는 (주)뉴스메이커에서 발행하는 시사종합월간지로서 특정언론과는 전혀 무관한 완전한 자유 독립 언론입니다.
뉴스메이커를 통해 제공되는 모든 콘텐츠(기사 ·사진)는 무단 사용, 복사, 배포시 저작권법에 저해되며,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Copyright 뉴스메이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newsmaker.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