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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형의 100년의 기록 100년의 교훈
2020년 04월 06일 (월) 14:29:37 김정형 webmaster@newsmaker.or.kr

■홍난파가 ‘봉선화’의 원곡인 ‘애수’를 작곡한 지 어느덧 100년          

난파 홍영후(1898~1941)가 ‘봉선화’를 작곡한 지 어느덧 100년이 되었다. 홍난파가 처음 ‘봉선화’의 원곡인 바이올린곡 ‘애수’를 작곡한 건 1920년 4월이다. 다만 그때만 해도 곡만 있고 가사는 없었다. ‘애수’ 선율에 ‘봉선화’라는 시를 붙여 우리 민족의 영원한 애창곡이 되도록 한 이는 1925년 정신학교 음악 교사 김형준이었다.

홍난파는 초기 한국 양악계의 팔방미인

▲ 홍난파

홍난파는 작곡가, 바이올리니스트, 음악평론가, 교육자로 한국 음악사에 굵은 족적을 남긴 초기 한국 양악계의 팔방미인이었다. 소설도 여러 편을 써 문필에도 재능이 있었다. 홍난파는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나 서울 정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를 음악 세계로 이끈 것은 10살 무렵 집 앞의 이화학당에서 울려 나오는 피아노와 노래 소리였다. 13살  때인 1911년 그의 손에 쥐어진 바이올린과 교습서는 음악 인생의 디딤돌이었다. 홍난파는 그해 9월부터 당시 조선정악전습소 교사로 있던 김인식에게 바이올린을 배우고 3개월 만인 12월 23일 세브란스의전 강당에서 열린 성탄 축하 음악회에서 첫 바이올린 독주를 함으로써 음악의 신동으로 유명해졌다.
1912년 YMCA 중학부와 1915년 조선정악전습소 양악부를 졸업하고 전습소 교사로 3년 동안 후진을 양성하다가 1918년 일본 도쿄음악학교(우에노음악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당시 도쿄음악학교에는 한국 최초의 피아니스트 김영환과 최초의 소프라노 윤심덕이 있었다. 홍난파의 음악 공부는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났을 때 도쿄에서 독립선언서를 만들어 뿌리는 등 독립 만세 운동에 참여했다가 일본 경찰의 추적을 피해 국내로 귀국하면서 중단되었다.
국내에서 홍난파는 음악보다 문학에 심취했다. 1919년 9월부터 매일신보에 소설 ‘허영’을 60회 연재하고, 1921년 6편의 단편소설로 구성된 창작소설집 ‘처녀혼’을 출간했다. ‘처녀혼’의 첫 장에는 홍난파가 바이올린곡으로 작곡한 ‘애수’ 악보가 게재되었는데 악보 밑에 ‘1920년 4월 28일 작’이라고 적혀있어 ‘애수’의 작곡 시기를 분명하게 알려주고 있다. ‘애수’ 이전의 우리나라 음악계는 권학가, 운동가, 망국가 등 단순한 창가 시대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 점에서 ‘애수’는 우리나라 음악계에 일대 전환점을 마련해준 최초의 예술가곡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애수’는 가사가 없어 한민족의 한과 설움까지 담아내지는 못했다.

‘애수’ 선율에 ‘봉선화’ 시를 붙인 건 1925년 김형준

‘애수’ 선율에 ‘봉선화’라는 시를 붙여 우리 민족의 영원한 애창곡이 되도록 한 이는 1925년 정신학교 음악 교사 김형준이었다. 노래 제목이 ‘봉선화’가 된 데는 온갖 설이 분분하지만 김형준이 자기 집 뜰에 피어 있는 봉선화를 보고 “우리 신세가 저 봉선화와 같다”며 시를 지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홍난파는 1921년 자신의 소설 ‘최후의 악수’를 각색해 연극 무대에 올렸다.
문학과 음악, 두 분야를 무섭게 질주하던 홍난파에게 제동을 건 이는 소설가 변영로였다. 1925년 구정 때 변영로가 “음악이나 하면 했지 주제넘게 소설은 다 무엇이냐? 개천지 통만고(開天地 通萬古)해서 두 가지 예술에 대성한 천재가 누구란 말이냐?”라고 질책한 것이다. 홍난파는 이후 문학 활동을 중단하고 음악 활동에만 전념했다. 1925년 4월 음악과 문학을 아우른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 전문지 ‘음악계’를 창간, 한동안 음악평론가로 활동하고 같은 해 ‘코리아 재즈 밴드’에 바이올리니스트로 참여했으며 1926년 종로 YMCA 강당에서 한국 최초로 재즈 공연을 열었다. 음악 전문지 ‘음악계’는 유럽과 미국의 음악계 흐름과 음악가를 주로 다루고 틈틈이 서양음악 악보를 제공해 연주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나 1926년 2월 제4호를 끝으로 폐간되었다.
홍난파는 1926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고등음악학원에 다니면서 도쿄관현악단과 도쿄신교향악단(NHK교향악단의 전신)에서 제1바이올린 연주자로 활동했다. 1929년 귀국 후에는 ‘조선 동요 100곡선’ 상권을 내고 1931년 7월 꿈에 그리던 미국 유학의 장도에 올랐다. 시카고의 셔우드 음악학교에서 1년 6개월간의 과정을 마치고 1933년 2월 귀국해서도 놀라운 창작열을 보여주어 3개월 뒤 ‘조선 동요 100곡선’ 하권을 발간했다. 1933년 9월 15일 제1바이올린 홍난파, 제2바이올린 홍성유, 제3바이올린 이영세로 구성된 우리나라 최초의 실내악단 ‘난파트리오’의 첫 공연을 정동 모리스홀에서 펼쳤다. 홍성유는 홍난파의 큰형 석후의 셋째 아들이자 ‘봉선화’의 작사자 김형준의 사위다.

홍난파 이름을 지우고는 20세기 한국 음악사 온전히 기술할 수 없어

홍난파는 작곡가로도 가곡, 동요, 대중가요를 넘나들었다. ‘고향 생각’, ‘옛 동산에 올라’, ‘성불사의 밤’, ‘장안사’ 등 나라 잃은 민족의 설움과 애수가 짙게 배어 있는 가곡 10여 곡을 작곡하고 ‘달 마중’, ‘낮에 나온 반달’, ‘퐁당퐁당’ 같은 동요 117곡을 발표했으며 ‘나소운’이라는 예명으로 ‘백마강의 추억’, ‘순정의 꽃장사’ 같은 대중가요도 10여 편 작곡했다. 1937년 6월에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검거되었다가 늑막염이 재발해 72일 만에 풀려났다.
이 다재다능한 음악가도 일제가 던져놓은 올가미와 깔아놓은 덫을 피하지는 못했다. 1937년 4월 조선총독부 주도로 결성한 ‘조선문예회’에 가입하고 그해 11월 소설가 전영택, 성악가 현제명 등과 함께 사상 전향서를 썼으며 1938년 6월 친일 단체인 ‘대동민우회’에 가입했다. 1937년 12월 경성방송관현악단 지휘자로 취임한 것은 사상 전향을 한 그에 대한 일제의 배려였다. 그 무렵 중일전쟁을 미화한 ‘정의의 개가’와 ‘공군의 노래’, 대동아공영권을 찬양한 ‘희망의 아침’ 등 친일 노래도 다수 작곡했다. 홍난파 같은 전천후 음악가가 지금까지 나오지 않고 홍난파의 이름을 지우고는 20세기 한국 음악사를 온전히 기술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의 친일은 아쉬운 점이 많다.
홍난파는 1939년 6월 한국 최초로 관현악곡 2곡을 발표했다. ‘관현악 조곡’과 ‘나그네의 마음’이다. 1940년 늑막염이 악화해 사실상 음악 활동을 중단한 채 병원을 전전하다가 1941년 8월 30일 “내가 죽거든 연미복을 입혀 화장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봉선화’가 비로소 전 국민의 가요가 된 것은 홍난파 사후 일본 유학생 소프라노 김천애를 통해서였다. 1942년 도쿄 히비야공회당에서 열린 전일본 신인음악회에서 김천애가 흰색 저고리 차림으로 봉선화를 불러 동포 청중을 눈물바다로 만들고 이로 인해 김천애가 일본 경찰에 연행되었다는 사실이 조국에 알려지면서 ‘봉선화’는 암울했던 식민지 시대에 조선인의 애창곡이자 한민족의 대표곡이 되었다.
일제는 김천애가 1942년 가을, 서울과 평양 등지에서 개최한 귀국 공연 때도 ‘봉선화’를 불러 조선인의 심성을 자극하자 ‘봉선화’를 금지곡으로 묶고 김천애의 음반까지 판매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나 ‘봉선화’는 이미 조선 민족의 마음에서 마음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양궁선수 김진호, IOC 선정 ‘2020 여성과 스포츠상’ 수상

김진호 한국체대 교수가 최근 국제올림픽위원회(IOC) ‘2020 여성과 스포츠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이는 IOC가 여성의 스포츠 참여에 공헌한 체육인에게 주는 상이다. IOC는 최근 김진호를 비롯한 수상자 6명을 공개했다. 2018년 대한체육회는 김진호를 ‘대한민국 스포츠 영웅’으로 헌액한 바 있다.

김진호가 걸어간 길은 그대로 한국 양궁의 길

김진호(1961~ )는 ‘한국 양궁의 주춧돌’이다. 그가 걸어가면 그 길은 곧 한국 양궁의 길이 되었다. 그가 처음 길을 낸 것은 예천여고 2학년생이던 1978년이었다. 그해 8월 국가대표선수 기록 평가전에서 60m더블, 70m 더블, 개인종합성적 등 3개 부문에서 비공인 세계신기록을 세워 국내 양궁계를 놀라게 한 것이다. 그해 12월 방콕 아시안게임에서도 개인전 금메달을 따내 우리나라 양궁사상 국제양궁대회 첫 금메달을 조국에 안겨주었다.
그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1979년 7월,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제30회 세계양궁선수권대회에서 총 6개의 금메달 중 5개의 금메달을 따내는 신기(神技)로 세계 양궁계를 깜짝 놀라게 한 것이다. 7월 19일 김진호는 60m 더블에서 세계신기록인 643점을 쏘아 한국 기록경기 사상 첫 세계 제패의 위업을 달성하더니 이튿날에도 30m와 50m까지 석권해 개인종합과 단체전까지 우승으로 이끌어 국내 양궁사상 전인미답의 5관왕 금자탑을 쌓았다.
70m까지 금메달을 땄으면 전무후무한 대기록을 달성할 수 있었으나 신은 훗날의 영웅을 위해 6관왕 자리만은 허용하지 않았다. 비록 당시 세계 최강 소련을 비롯 중국, 폴란드 등 공산권 15개 국가가 불참하고 28개 서방국가만 참가해 5관왕의 의미가 일부 반감되긴 했으나 올림픽과 세계선수권대회를 휩쓸어온 미국세를 누르고, 기록도 세계최고 수준이었다는 점에서 김진호를 명실상부한 세계 1인자로 부르는 데는 이견이 있을 수 없었다.
‘양궁의 여왕’으로 등극한 김진호는 1980년에 열릴 모스크바 올림픽의 꿈을 키웠다. 언론은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올림픽 출전사상 첫 금메달을 따낸 레슬링의 양정모 선수에 이어 2호 금메달을 따낼 주인공으로 김진호를 꼽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1979년 세계양궁선수권대회에서 5개 금메달을 따낸 게 전설의 시작

▲ 김진호

그러나 서방 세계의 모스크바 올림픽 출전 무산으로 김진호의 목표는 좌절되었고 그런 그녀에게 찾아온 것은 슬럼프와 부상이었다. 1981년 이탈리아에서 열린 제31회 세계양궁선수권대회에서는 30위권 밖으로 밀려나고 국가대표에서마저 탈락하는 등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모두들 김진호 시대가 끝났다고 생각했다.
김진호는 그러나 다시 비상을 꿈꿨다. 결과는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 2관왕과 1983년 전미오픈선수권대회 우승에 이어 1983년 10월 LA에서 펼쳐진 제31회 세계양궁선수권대회 5관왕이었다. 바야흐로 1984년의 LA 올림픽이 1년 앞으로 다가왔고 4년 전과 마찬가지로 누구도 김진호의 금메달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올림픽은 여전히 그녀와 인연이 없었다. 올림픽 최초의 양궁 금메달의 주인공은 팀의 막내 서향순에게 돌아갔고 김진호는 동메달에 그쳤다. 이후 김진호에게는 ‘비극의 스타’ ‘무관의 여왕’이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그래도 김진호는 속으로 삭여가며 훈련에 매진한 끝에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에서 3관왕을 차지함으로써 건재를 과시했다.
1987년 은퇴할 때까지 김진호는 통산 39개의 한국신기록을 수립하고, 은퇴 당시에도 3개의 세계신기록과 7개의 한국기록을 보유하고 있었다. 비록 올림픽에서는 1개의 동메달을 따낸 것이 전부였지만 그래도 그는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 10개를 따고 아시안게임에서도 5개의 금메달을 목에 걸었던 세계 최고의 궁사였다.

여자양궁 단체전,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2016년 리우 올림픽까지 한국이 모두 휩쓸어

김진호 개인은 올림픽과 인연이 없었으나 그가 닦아놓은 길을 따라간 한국의 여자양궁은 1984년 LA 올림픽을 시작으로 역대 모든 올림픽의 개인전을 휩쓸어 세계 양궁을 한국 양궁의 독무대로 만들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 김수녕,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조윤정,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김경욱,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윤미진,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의 박성현 등이 그 주인공들이었다. 2008년 북경 올림픽에서만 개인전 금메달을 중국 선수에게 내줬을 뿐이다. 그러다가 다시 2012년 런던 올림픽 때 기보배가 다시 금메달을 되찾아왔고 2016년에는 장혜진이 금메달을 차지했다.
여자단체전은 1988년 서울 올림픽 이후 2016년 리우 올림픽까지 한국이 모두 휩쓸어 한국은 세계 여자양궁계의 성지가 되었다. 특히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우승의 주인공 김경욱은 70m 떨어진 타깃 정중앙에 있는 소형 카메라를 두 차례나 깨뜨리는 ‘퍼펙트 골드’로 ‘신궁의 신궁’ 소리를 들었다. 1997년 캐나다에서 열린 제39회 세계양궁선수권대회에서는 한국이 남여 개인전과 남녀 단체전 4종목을 모두 휩쓰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올림픽에서 메달 따는 것보다 한국 대표팀에 선발되는 것이 더 어렵다고 할 정도로 한국 양궁이 승승장구하자 외국 선수들의 목표는 어쩔 수 없이 2위로 바뀌었고 은메달을 목에 걸어도 그들은 우승과도 같은 기쁨을 누렸다. 올림픽과 세계대회에서 한국 양궁의 싹쓸이와 단독 질주가 좀처럼 멈추지 않자 세계양궁연맹은 수시로 경기방식을 바꿔 한국 양궁을 견제하는 데 골몰했다. 그렇다고 결과가 달라지지는 않았다. 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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