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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서 칼럼] ‘밤안개', ‘보고 싶은 얼굴’의 가수 현미의 삶과 노래[1]
2020년 04월 06일 (월) 14:21:13 박성서 webmaster@newsmaker.or.kr

노래는 내 삶의 존재 이유, ‘목소리가 안 나올 때까지 노래하겠다’


“목소리가 안 나올 때까지 노래하겠다.” 이 말은 가수 현미씨(82)가 지난 2007년, 자신의 ‘50주년 기념 콘서트’ 기자회견에서 한 말이다. 그로부터 십여 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현미는 자신과의 이 약속을 지켜가고 있는 중이다.

‘밤안개’, ‘보고 싶은 얼굴’, ‘떠날 때는 말없이’, ‘애인’, ‘두 사람’, ‘몽땅 내 사랑’, ‘별’, ‘왜 사느냐고 묻거던’ 등... 숱한 명곡을 남긴 그는 특유의 걸쭉한 허스키 보이스와 거침없는 입담으로 전성기 못지않은 방송활동과 함께 무대에서 여전히 인기를 누리고 있다. 몇 년 전 80세를 기념해 신곡 ‘내 걱정은 하지마’를 발표, ‘국내 최고령 신곡 취입가수’라는 기록도 남겼다.
 
매주 화요일에 열리는 ‘현미파워노래교실(현대백화점 문화센터)’은 어느덧 20년을 훌쩍 넘긴 장수 프로그램. 노래가 좋고 사람이 좋아 힘든 줄 모른다는 그녀를 더욱 돋보이게 만드는 것은 매사 꾸밈없고 솔직한 인간적인 모습이다. 언제나 유쾌하고 즐거운 모습으로 ‘있는 그대로의 삶’을 살고 있는 데뷔 63년 차 원로가수 현미의 삶과 노래, 그 첫 번째.

글 l 박성서(음악평론가, 저널리스트)


 

▲ 1957년, 미8군 쇼 ‘벨라’ 시절의 가수 현미.

가수 현미만의 세 가지 생활철학

여전히 파워풀한 에너지가 넘치는 가수 현미, 그녀의 활달함은 본인만의 세 가지 생활철학에서 비롯된다. ‘무던하게 살기’, ‘되도록 많이 이해하기’, ‘남 앞에서 울지 않기’.

또한 현미의 이름 옆에는 늘 ‘세기의 커플’이라 일컬어지던 작곡가 이봉조씨(1931∼1987)의 이름이 붙어 다닌다.

천재의 비범함과 예술가의 파격을 두루 갖췄다고 평가받는 이봉조씨와는 가요계의 소문난 명콤비이자 잉꼬부부. 이들의 로맨스는 한 편의 영화처럼, 그리고 이들이 만들어낸 노래들처럼 격렬하고 정열적이다.

1962년 ‘밤안개’를 시작으로 ‘보고 싶은 얼굴’, ‘떠날 때는 말없이’, ‘애인’, ‘아빠 안녕’, ‘두 사람’, ‘몽땅 내 사랑’, ‘별’ 등을 잇달아 히트시키며 세간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다.
 
이들의 첫 대면은 미8군쇼 시절인 1959년, 명동 재즈카페 ‘은성살롱’에 출연할 무렵에서였다. 그녀는 ‘벨라’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며 아울러 베리, 바니 등으로 불리던 가수 김정애, 현주와 함께 3인조 여성보컬 '현시스터즈'를 결성해 활동하고 있었다.

당시 현미는 한 달에 40회 이상 부킹(출연 예약)을 받으며 다른 가수들이 12만환에서 많게는 18만환의 월급을 받을 때 25만환의 파격적인 개런티를 받을 만큼 인기 절정이었다. 이들 현시스터즈가 미8군 쇼 단체인 ‘스윙스타’에서 ‘뉴 앤 뉴’ 그리고 ‘퍼스트 나이터스’로 전속을 옮겨 활동하던 때 밴드마스터인 색소폰 주자 이봉조씨를 다시 만나게 된다.

▲ 현시스터즈 시절. 좌로부터 현주, 김명선(현미), 김정애(현애).

 

세기의 커플, 작곡가 이봉조씨와의 사랑을 넘어선 사랑

현미 나이 스물한 살, 덕성여대 무용과 2학년에 재학 중인 여대생 가수로써 절대적 인기를 누리던 쇼단의 메인가수였다면 이봉조씨 역시 스물여섯 살로 아직 무명이었지만 한양공대 출신의 패기만만한 뮤지션. 그러나 이들은 처음 서로 ‘소 닭 보듯’ 했다.

현미 입장에서는 자신 월급의 반도 채 안 되는 신출내기 밴드 마스터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이봉조씨 역시 콧대 높은 이 도도한 여가수가 도무지 못마땅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쇼단장 입장에서는 쇼의 간판인 마스터와 메인가수 사이가 자칫 틀어져 쇼를 망치지 않을까 늘 노심초사했다. 해서 구상해낸 것이 ‘이봉조-현미 사이좋게 만들기 작전’. 그 작전 중 하나가 바로 나이트클럽에 함께 데려가 분위기 띄우기였다.

“당시엔 남녀가 춤을 출 때 손바닥 사이에 손수건을 끼우는 게 신사숙녀가 갖추어야 할 예의로 여겼던 시절이었죠. 남녀가 유별한데 어떻게 맨 손을 잡고 춤을 출 수 있느냐는 의미로 당연히 남자 쪽에서 손수건을 준비하는 게 상례였죠. 그러나 이러한 관례를 비웃기라도 하듯 이봉조씨는 그냥 손을 덥석 잡고 마구잡이로 춤을 추더군요. 뿐만 아니라 얼마나 춤이 서툴던지 매번 발을 밟기 일쑤였습니다. 하지만 솔직하고 어딘가 순수한 매력이 있는 사람이었죠.” 현미씨의 회고다.

이렇게 시작된 둘 사이는 급격히 가까워지면서 오히려 쇼단의 운영이 위협받을 정도로 늘 붙어 다녔다. 결국 단장은 둘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 밴드 마스터 교체 조짐을 내비치자 아예 둘은 함께 미련 없이 쇼단을 나온다.

 

1962년 첫 독집음반 ‘밤안개’, ‘당신의 행복을 빌겠어요’ 발표

▲ 현미의 첫 데뷔 독집음반 ‘당신의 행복을 빌겠어요’. 수록곡 중 ‘밤안개’가 크게 히트하자 타이틀을 ‘밤안개’로 바꿔 재 출반했다. 1962년.

이 무렵 현미에게도 드디어 음반을 취입할 기회가 찾아온다. 작곡가 손석우씨로부터 영화 ‘동경에서 온 사나이(박성복 감독)’의 주제가를 취입하자는 제의가 온 것.

“손석우 선생님이 제가 출연하는 장교클럽으로 찾아오셨어요. 바로 그 직전에 미8군쇼에서 활동하던 한명숙씨를 픽업해 ‘노오란 셔츠의 사나이’를, 그리고 이어 최희준씨를 발굴해 ‘우리 애인 올드미스’를 취입시킨 뒤 이어 세 번째로 엄앵란, 신영균, 문정숙 주연의 영화 ‘동경에서 온 사나이’의 주제가를 부를 가수를 찾으러 오셨다가 절 발견하신 거예요.”

놀랍게도 이때 현미 데뷔음반은 독집으로 제작되었다. 음반 타이틀은 ‘당신의 행복을 빌겠어요’. 영화 ‘동경에서 온 사나이’의 주제가 제목이다.

당시엔 무명신인이 데뷔음반을 독집으로 낸다는 것은 쉽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기존의 인기가수들도 대부분 옴니버스 형태로 신곡 음반을 발표할 때였다. 그러나 무명의 신인가수 현미의 데뷔음반이 독집으로 발매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이 신인가수에 대한 기대감이 컸음을 짐작케 한다.

이 음반에는 총 여덟 곡이 수록되어 있다. 당시 히트메이커 손석우 작곡의 ‘당신의 행복을 빌겠어요’,‘핑크 슈우즈’를 비롯한 다섯 곡과 이후 한국의 대표 작곡가로 자리매김하는 이봉조 작·편곡의 ‘밤안개’, ‘슬픈 거리를’ 그리고 길옥윤 작곡의 ‘내 사랑아’가 함께 수록되었다. 말하자면 이 음반은 가수 현미의 데뷔음반이자 작곡가 길옥윤, 이봉조씨의 작곡 데뷔음반이기도 한 것이다.

이 음반에서 ‘It's A Lonesome Old Town’에 우리말 가사를 붙여 만든 ‘밤안개(이봉조 작사, 편곡)’가 크게 히트하면서 음반 타이틀도 ‘밤안개’로 바꿔 재 발매되기도 했다.

‘밤안개가 가득히 쓸쓸한 밤거리/밤이 새도록 가득히 무심한 밤안개/님 생각에 그림자 찾아 헤매는 마음/밤이 새도록 하염없이 나는 간다/그 옛님을 찾아주려나 가로등이여/밤이 새도록 하염없이 나는 간다.’ -밤안개(이봉조 작사, 편곡, 현미 노래)

특히 이 노래 취입 당시 현미의 성량이 너무 커 마이크에서 두 세 걸음 떨어져 취입해야 했다는 일화 역시 유명하다.

이 음반에서 또 하나 주목할 만한 노래가 길옥윤 작곡의 ‘내 사랑아’다. 길옥윤씨 또한 작곡가로써 처음 발표한 노래다.

당시 길옥윤은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한 그가 1962년. 자신이 이끌던 ‘동경스윙오케스트라’와 함께 내한, 귀국기념 음악회를 갖는데 이때 만난 이봉조-현미 커플에게 건네준 노래가 바로 ‘내 사랑아’다.

“길옥윤 선생님이 요시야준이라는 이름으로 일본에서 활동하실 때 잠시 귀국하셔서 8군쇼 악단원들을 모아놓고 재즈에 대한 강의를 하신 적이 있어요. 그때 저도 들었죠. 강의를 마치고 함께 밥을 먹으러 갔는데 그때 나와 이봉조 선생님이 연애한다고 하니까 둘이 참 잘 어울린다며 앞으로 잘해보라며 선물로 ‘내 사랑아’ 악보를 주셨어요.”

이 노래는 이로부터 4년 뒤 길옥윤씨가 본격적으로 귀국해 작곡활동을 시작하면서 패티김에 의해 다시  리메이크, 크게 히트되었다.

‘내 사랑아 저 먼 곳에 있는/내 사랑아 그 언젠가 또 만나련가/아름다운 서울 하늘 밑에서/곱게 곱게 피어난 내 사랑아/세월은 흘러도 그칠 줄 모르는 한 줄기의 내 사랑아/오늘밤도 꿈속에서 만나리/내 사랑 내 사랑아 부디 안녕히.’ -내 사랑아(길옥윤 작사, 작곡, 현미 노래)

▲ 미8군쇼 시절의 삼총사, 좌로부터 현미, 한명숙, 미스K. 그리고 단짝 한명숙씨와 함께.

 

이봉조씨와 노래로 우주여행을 하다

이들의 데뷔곡이자 대표곡이 된 ‘밤안개’의 빅 히트를 시작으로 이봉조·현미 커플은 밤무대와 방송활동을 함께 하며 히트곡을 잇달아 발표한다. 아울러 현미씨는 한명숙, 이금희씨와 함께 ‘3대 여성 허스키보이스 시대’를 열며 60년대 개성시대를 거침없이 질주했다.

현미는 풍부한 무대 경험만큼이나 감정처리와 테크닉이 화려했는데 이봉조씨는 되레 그것을 경계했다. 때문에 취입할 신곡의 악보를 대부분 녹음 당일에서야 건넸다. 그는 테크닉보다 ‘악보 그대로’ 부르기를 유독 강조했던 것.

현미씨 또한 노래 욕심이 만만치 않았다. 때문에 신데렐라 정훈희를 일약 국제가수로 올려놓은 노래 ‘안개’는 줄곧 강짜의 대상이었다. 왜 이렇게 멋진 곡을 다른 여가수에게 주었냐는 것. 참고로 ‘안개’는 정훈희의 데뷔곡으로 1970년 동경국제가요제 입상곡이기도 하다. 이봉조씨는 정훈희와 콤비를 이뤄 ‘안개’를 비롯해 ‘무인도(칠레국제가요제)’, ‘좋아서 만났지요(동경국제가요제)’, ‘꽃밭에서(칠레국제가요제)’. ‘너(그리스국제가요제)’ 등을 잇달아 입상시키며 우리 가요를 세계무대에 올려놓았던 인물.

“내가 투정을 부리자 봉조씨는 갑자기 결심한 듯, 노래로 우주여행을 시켜주겠다는 약속과 함께 새로운 곡에 몰두하기 시작했어요. 그 무렵 라디오 드라마 ‘빨간 양말의 시인’의 주제가를 방송 당시에는 정훈희가 불렀는데 음반으로 나올 때는 ‘바람’으로 제목을 바꿔 내게 주었지요. 아울러 그 이후부터 아예 작정하고 곡을 만드는데 제목들이 가관이었죠. ‘구름’, ‘하늘’, ‘태양의 유혹’, ‘별’ 등등... 말하자면 노래로 우주여행을 시켜주겠다던 약속을 하나 둘 지켜가기 시작했죠.”

그 중 ‘별’은 1971년 제4회 그리스국제가요제 ‘송 오브 올림피아드’에 입상하기도 했다. 이어 이들이 구상하고 있던 곡은 ‘천둥’. 그러나 이들 부부는 19년간의 로맨스를 끝내고 별거에 들어간다.

‘수많은 별들이 빛나는 밤하늘/아득한 그 곳은 별들의 고향/아무도 모르는 이 내 가슴을/조용히 말없이 비춰주네/찬란하게 빛나리 반짝이는 그 모습/영원토록 빛나리 이 세상 끝까지/아--- 아--- 별이 있는 밤하늘 가고 싶어라.’ -별(이봉조 작사, 작곡, 현미 노래)

 

'밤안개' 같았던 사랑, 그 주인공 이름은 그저 '애인'

▲ 전성기 시절에 발표한 현미 음반들.

작곡가 이봉조씨와의 19년간의 사랑, 13년간의 이별. 이들 커플이 남긴 유독 '슬픈 노래'는 한 때 현미에게는 견딜 수 없는 시련이었지만 어느덧 아름다운 보석으로 빛난다.

TBC, KBS 악단장을 거치며 연주자로, 또 작곡가로  톱스타군단을 거느리고 있던 이봉조씨. 속칭  '이봉조사단'으로 불리던 가수들은 현미를 비롯해 ‘맨발의 청춘’의 최희준, ‘비련십년’의 한명숙, ‘맨발로 뛰어라’의 남일해, ‘사랑의 종말’의 차중락. ‘안개’의 정훈희, ‘명동나그네’의 조영남 등이었다.

그중에서도 이봉조사단 1호는 현미였다. 한 때 '부부싸움을 할 시간조차 없이' 바쁘게 지냈던 '이봉조·현미 커플'은 한때 '연예인 마이카족 1호'라는 영광까지 누리며 인기가도를 질주했던 명콤비였다.

그러나 작곡가 이봉조씨가 남긴 노래들의 저작권은 현미씨 몫이 아니다. 그녀는 혼인신고를 하지 못한, 이를테면 이들 노래처럼 법적으로는 호적상 '애인이란 두글자'일 뿐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고인의 제사는 장남 이영곤씨의 몫으로 돌아왔으며 뒤늦게 시어머니의 배려로 저작권료의 3분의 1이 아들들의 몫으로 배정되었다. 물론 진주에서 열린 '이봉조 추모가요제(2006년)'는 현미씨가 도맡았다.

▲ 명콤비이자 세기의 커플, 이봉조·현미 가족의 단란한 한 때.

1.4후퇴 때 피난 내려와 ‘꽃초롱 오페라단’ 단원으로 활동

1938년 1월 21일 평양 박구리에서 부친 김진일, 모친 박영빈의 여덟 남매 중 셋째로 태어난 현미의 본명은 김명선.

평양 경림초등학교 시절, 걸스카우트 단장이자 어린이 대표로 당시 인민공산당 대표 김일성 장군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헌화했을 정도로 재주가 남달랐던 그는 평양 정의여중 재학시절 1.4후퇴 때 두 여동생을 남겨둔 채 나머지 가족들과 함께 얼어붙은 대동강, 임진강, 한강을 지나 대구에서 피난생활을 시작한다.

징집을 피해 부친과 오빠가 외부활동을 할 수 없게 되자 가족의 호구지책은 어머니를 비롯해 남은 가족들의 몫. 열네 살의 현미와 두 살 아래 남동생 뽀빠이(김명순씨)는 대구 염매시장에서 떡 장사를 해야 했고 '아이스께끼통'을 들고 시장 주변을 돌다가 미군부대 주변에서 깡통을 줍거나 산이나 들에 떨어진 낙하산을 주워서 여자속옷을 만들어 팔기도 했다.

어린 나이였지만 대가족의 생계를 도맡은 어머니를 그나마 도울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뿌듯했던 시절, 임시로 문을 연 연합중학교 2학년 때 당시 김백봉무용연구소에 들어갔다가 '꽃초롱 오페라단(단장 김동진)'의 단원이 된다.

'백치 아다다', '과거를 묻지 마세요' 등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가수 겸 배우 나애심씨(2017년 작고)가 생전에 필자와의 인터뷰 당시 들려준 증언에 의하면,

"내가 현미를 처음 보았을 때가 대구 피난시절, 이북 출신 예술인들로 구성된 '꽃초롱오페라단' 단원으로 활동할 때였어요. 그 무렵 김백봉, 후라이보이 곽규석(MC), 구민(성우)씨 등과 함께 '을지문덕'을 공연했는데 이 때 무용수로 갓 입단한 현미가 너무 어려서 가슴에 양말 등을 구겨 넣어 만든, 속칭 '뻥브라'를 한 채 무대에 올라 춤을 추던 장면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어린 현미는 예서 그치지 않고 이어 '희망가극단'의 뒤풀이 막간가수로 들어가 삼개월간의 부산 공연길에 올랐다가 마침내 서울공연까지 따라나선다.

이내 가족들의 손에 끌려 되돌아오지만 몇 달 간 가출에서 맛본 악극단 무대의 매력은 그녀가 대전종합학교를 거쳐 덕성여대 가정과에 입학한 뒤까지도 내내 그녀를 지배했다.

결국 '꿈'이자 '생계수단'의 한 방편으로 55년, 대학을 중퇴한 뒤 무대로 나선다. 학업 대신 무대를 택할 수밖에 없었던 어려웠던 시절, 그녀는 이 젊은 날로부터 40여 년 뒤인 지난 2004년, 덕성여대 측으로부터 명예학사졸업장을 수여받았다. (계속)
.................
[참고 자료] 박성서의 7080 가요X파일-현미[1, 2](서울신문 2006년 6월22일, 6월2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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