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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서 칼럼] 뮤지컬 배우 겸 가수, 윤복희의 삶과 노래[3]
2020년 03월 07일 (토) 12:10:18 박성서 webmaster@newsmaker.or.kr
▲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와 ‘웃는 얼굴 다정해도’가 수록된 윤복희 첫 독집 음반, 1967년.

무대는 ‘비상구 없는 공간’이자 ‘용서가 허용치 않는 땅’

말보다 노래를 먼저 배웠고 걸음마를 채 떼기 전부터 무대에서 춤추는 것을 보았다고 회고하는 윤복희씨. 부모님을 따라다니며 극장에서 젖을 먹고 말을 배우고 걸음마를 익혔다.

뮤지컬 배우이자 영화배우 그리고 싱어송라이터 윤복희씨.
지금까지도 ‘미8군쇼 스타의 전설’로 불리는 그는 1963년, 불과 열일곱의 나이에 워커힐 개관기념무대에서 재즈의 거장 루이 암스트롱과 함께 공연을 펼쳐 모두를 놀라게 했다.

이후 세계무대로 진출한 ‘코리언 키튼즈’의 리더로, 그리고 ‘대한민국 미니스커트 1호’로 숱한 화제를 몰고 다녔던 이슈메이커 윤복희씨는 현재까지도 열정적으로 뮤지컬 무대에 선다.

그의 무대 철학은 남다르다. 코리언 키튼즈 시절, 스승이자 수양아버지인 영국인 매니저 찰스 메이더는 열일곱 살인 그에게 언제나 무대란 '비상구 없는 공간'이라고 가르쳤다. '용서가 허용되지 않는 땅'이라고도 했다.

그럼에도 윤복희씨에겐 세상에서 가장 편한 곳이 무대라고 강조한다. 태어날 때부터 보고 자란 곳이 무대였기 때문이다. 뮤지컬 배우 겸 가수 윤복희의 삶과 노래, 그 세 번 째.

글 l 박성서(음악평론가, 저널리스트)

 

▲ 사진 위로부터. 코리언 키튼즈(The Korean Kittens) 시절의 윤복희. 왼쪽부터 lee, kitty, yoon, kim.워커힐에서 밴드마스터 겸 작곡가 김기웅씨와 함께(1962년), 그리고 세계적인 스타들과 함께 한 윤복희(앞줄 가운데).

영국의 쇼 프로모터, 찰스 메이더를 만나다

1963년, 세계적인 트럼펫의 거장 루이 암스트롱과의 워커힐 개관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친 윤복희는 그해 10월, 필리핀 마닐라로 공연을 떠난다. 열일곱 살 때였다. 2주 일정으로 11명의 일행들과 함께 떠난 해외공연이었지만 이로 인해 윤복희의 운명은 다시 한 번 바뀐다.

공연에 대한 반응은 뜨거웠으나 일행은 난감한 상황에 부딪힌다. 에이전시로부터 출연료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작 체류비도 감당할 수 없었다. 결국 이들은 생활비는 물론 비행기표 값을 마련하기 위해 닥치는 대로 무대에 서야 했다.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비행기표 살 돈 조차 없었어요. 여기저기 공연을 많이 했지만 우리 몫은 제대로 돌아오지 않았죠. 마닐라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베이 사이드’ 클럽무대에도 섰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때마침 현지 한국대사관에서 딱한 사정을 알고 도와주었는데 일단 다른 단원들은 외상 비행기표를 구입해서 먼저 귀국하고 저와 무용수 세 명은 계속 잔류할 수밖에 없었어요. 업소로부터 밀린 체류비를 모두 갚을 때까지 공연을 계속 하라는 요구를 받았기 때문이죠.”

남겨진 멤버는 윤복희를 비롯해 무용수인 김미자, 서미선, 이정자씨. 2주 계획으로 떠난 공연 일정은 어느덧 6개월을 넘기고 있었다.

마닐라를 넘어 홍콩과 방콕을 거쳐 싱가포르까지 진출했다. 운명이었을까. ‘싱가포르호텔’ 공연 중에 우연히 들른 영국의 유명한 쇼 프로모터, 찰스 메이더를 만난다. 대단히 열정적이면서도 쇼에 대한 감각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이들이 공연을 끝내고 무대에서 내려오자 그가 엉뚱한 제안을 해왔다. 비틀스처럼 4인조 그룹을 만들어 영국에서 활동할 의향이 없느냐고.

“우리는 메이더의 제안을 받고 밤새 상의한 끝에 의견을 모았어요. ‘그래, 내친 김에 영국까지 가보자’는 것이었죠. 그때부터 저는 밤낮으로 세 무용수 언니들에게 열심히 노래를 가르쳤습니다. 우리의 연습 장면을 본 호텔 사장은 우리 넷이 마치 어린 고양이들 같다며 ‘코리언 키튼즈’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죠.” 코리언 키튼즈(The Korean Kittens)는 그렇게 탄생했다.
1964년 말, 코리언 키튼즈는 싱가포르에서 공연을 통해 공식 탄생을 알린다. 메이더의 제안을 받아들인 윤복희 일행은 관객들 호응에 자신감을 안고 다음날 런던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2주 공연 일정으로 한국을 떠나온 지 1년을 넘기면서 윤복희는 한국과 정반대 방향으로 날고 있었다.

 

코리언 키튼즈, 세계를 날다

▲ 해외 언론에 소개된 코리언 키튼즈 기사와 국내 언론에 소개된 코리언 키튼즈 기사. 동아일보 1965년 9월 4일자.

코리언 키튼즈는 성공적이었다. 영국인 매니저 찰스 메이더는 윤복희씨의 스승이자 수양아버지. 열일곱 살인 그에게 언제나 무대란 '비상구 없는 공간'이라고 가르쳤다. '용서가 허용되지 않는 땅'이라고도 했다.

찰스 메이더는 역시 명성에 걸맞게 스케줄을 세밀히 준비해 놓았다. 런던 도착 다음날 이들은 BBC의 ‘투나잇 쇼’에 출연했다. 한복을 입고 출연해 ‘아리랑’과 당시 유행하던 비틀스의 ‘Can’t Buy Me Love’를 불렀다.

“방송이 나간 뒤 우리는 일약 스타가 되었죠. 처음엔 웃음거리가 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예상 외로 반응이 너무 좋았어요. 거리에 나서면 사람들도 우리를 알아봤습니다. 여기저기서 공연 요청이 쇄도했고 심지어 비틀스보다 더 개성 넘치는 그룹이라고 극찬한 신문도 있었죠. 유럽 전역에서는 물론 서독의 대통령 선거 유세에 특별 초청되기도 했습니다. 그야말로 우리는 날개를 달았던 셈이죠.”
이들은 10개월 간 영국, 스페인, 독일 등 10개국 순회공연을 했으며 이후 라스베가스, 뉴욕 등에서 활약했는데 가는 곳마다 ‘아리랑’ 등 한국노래를 빼놓지 않았다.

“당시 많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었어요. 공연 때면 교민들이 많이 찾아와주셔서 더욱 힘이 났죠. 서독에서는 독일로 시집온 한국부인이 신문보도를 보고 3백 킬로나 떨어진 곳에서 밥과 김치, 담요를 싸가지고 자동차로 달려오기도 했어요. 그때 부른 ‘아리랑’은 더욱 가슴을 뭉클하게 했죠.”

매니저 메이더는 윤복희를 친딸처럼 대해 주었다. 그의 부인 역시 윤복희를 수양딸로 입적시켜 영국 시민권을 얻어주겠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이들은 4개월 일정의 유럽 순회공연을 성공리에 마치고 세계 흥행의 중심인 ‘꿈의 무대’ 미국 라스베이거스에 입성한다.
또한 음악 선생 딕 베이커를 영입한 후 활동 무대를 뉴욕으로 옮기기도 했다. 새로운 레퍼토리를 개발해 밤낮 없이 연습을 했다. 메이더 또한 매우 적극적이었다. 그 결과 프랭크 시나트라, 주디 갈랜드 등 정상급 연예인들이 소속된 ‘라틴 쿼터’라는 걸출한 프로모터와 계약을 성사시켰다.

 

▲ 윤복희 발표 음반들.

또 하나의 기억, 봅 호프와의 만남

코리언 키튼즈 시절, 잊지 못할 기억 중 하나가 세계적인 코미디언 봅 호프(Bob Hope)를 만난 것이었다.

세계적 휴양지인 푸에르토리코에서 공연할 때였다. 마침 그곳에 휴양 온 미국의 코미디언 봅 호프가 예정에도 없이 무대에 올라왔다. 그리고는 공개적으로 자신의 ‘CBS-TV 봅 호프 크리스마스 스페셜’에 출연해 달라고 제의를 해왔다. 이 프로그램은 전 세계로 방송되는 인기 프로그램으로 세계적인 스타들만 초대되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봅 호프가 타계할 때까지 수십 년 동안 진행했던 세기적인 프로그램이었다.

“봅 호프가 공연을 보러 왔어요. 전 몰랐죠. 공연이 끝나고 커튼콜을 하는데 갑자기 누가 앞에 떡 하니 서서 스포트라이트를 가리는 거예요. 갑자기 컴컴해져서 보니 큰 남자 하나가 앞에 떡, 하니 버티고 서있는데 한순간 객석이 뒤집어지는 거예요. 봅 호프였어요. 그가 느닷없이 제 손을 덥석 잡으며 자신의 특집쇼에 나와 달라는 거예요. 순간 객석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죠. 그러나 저는 무대에서 제 마음대로 대답을 할 입장이 못 되잖아요. 매니저와 상의해야하니까. 그런데 오히려 객석에서 오케이 하라고, 빨리 대답하라고 사람들이 마구 소릴 지르며 발을 굴러대는 거예요. 그때 광경을 지금도 잊을 수 없죠.”

결국 코리언 키튼즈는 미국 CBS-TV의 ‘봅 호프의 크리스마스 스페셜’에 출연한다.

“이 프로그램에 코리언 키튼즈가 출연한다는 건 꿈에서 조차 생각할 수 없던 일이었어요. 그런데 그게 현실이라니... 그야말로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었죠.”

봅 호프의 크리스마스 스페셜 제작에 참여한 코리언 키튼즈는 다른 출연자들과 함께 로스앤젤레스 CBS-TV 스튜디오에 모여 두 달여 동안 맹연습을 했다. 이어 1965년 11월, 미국 정부의 특별기를 타고 전쟁터인 베트남으로 날아갔다.
 
“스탭들과 출연진 수 백 명이 전 세계를 군용비행기를 타고 다녀요. 그것을 한 시간 반으로 압축시켜서 특집으로 내는 거죠. 어마어마한 규모의 공연단이 크리스마스가 될 때까지 한 달 넘게 순회공연을 했어요. 태국 방콕에 숙소를 두고 비행기를 타고 다니며 위문공연을 했죠. 공연을 마친 후에도 여기저기 야전병원을 다니며 부상병들을 위로했습니다. 그때 전쟁터의 참상을 생생하게 보고 느꼈죠.”

봅 호프의 크리스마스 스페셜은 그해 성탄절에 CBS-TV를 통해 전 세계에 방영되었다. 방송이 나간 이후 코리언 키튼즈에 대한 위상은 완전히 달라졌다.
아니나 다를까, 여러 매스컴에서 취재경쟁이 시작되었다. 코리언 키튼즈가 어떤 그룹인지, 윤복희가 어떤 가수인지에 대한 보도가 쏟아졌다. 그야말로 스타 탄생의 순간이었다.

“그때 문득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한국인데…’,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2주 후면 돌아간다던 길이 어느새 4년 가까이 훌쩍 지나갔죠. 그래서 베트남 공연을 마치고 잠시 휴가를 내서 귀국했어요. 첫사랑 유주용씨도 생각이 났고 무엇보다 우리 오빠(윤항기)를 한국에서 데리고 나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가 67년 2월 초순경인데 한국에 도착해서 보니 제가 출연 했던 쇼가 우리나라에서도 AFKN으로 방송되더군요.”

이미 월드 스타가 된 윤복희에 대한 귀국 환영 열기 또한 대단했다. ‘세기의 스타 윤복희 귀국 쇼’가 시민회관에서 열렸다. 이 공연은 TBC(동양방송)가 TV중계를 편성한 데 이어 앙코르 공연으로까지 이어졌다. 또한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화제가 되며 연일 이슈메이커로 등장했다. 무엇보다 당시 열풍처럼 불어 닥친 미니스커트 붐은 사회적 논란으로까지 이어졌다.

 

‘윤복희 귀국쇼’와 함께 첫 음반 발표

▲ 1967년 3월 ‘윤복희 귀국 특별쇼’ 공연광고와 ‘세기의 스타, 윤복희 바이바이쇼’ 공연 광고, 서울시민회관.

코리언 키튼즈는 단연 ‘톱 뉴스메이커’로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계속된 방송 출연과 더불어 DBS(동아방송) 연속극 주제가 ‘재혼(이성제 극본, 이봉조 작곡)’도 취입했다. ‘윤복희 귀국쇼’와 더불어 음반도 취입한다.

이때 발표한 첫 독집에는 이봉조 작곡의 ‘웃는 얼굴 다정해도’와 ‘복희의 첫사랑’, ‘마음이 변하기 전에’를 비롯해 본인의 애창곡인 ‘써니’, ‘캔사스 시티’ 등이 수록되어 있다.

눈짓 몸짓 다정해도 믿을 수 없어요/달이 가면 변할 줄 알았으니까/웃는 얼굴 다정해도 믿을 수 없어요/해가 가면 변할 줄 알았으니까/만나서 하는 이야기 즐겁긴 해도/돌아서면 잊어버리는 간지러운 속삭임/그러니까 당신을 믿을 수 없어요.

눈짓 몸짓 다정해도 믿을 수 없어요/달이 가면 변할 줄 알았으니까/웃는 얼굴 다정해도 믿을 수 없어요/해가 가면 변할 줄 알았으니까/헤어지면 아픈 가슴 슬프긴 해도/돌아서면 잊어버리는 쑥스러운 속삭임/그러니까 당신을 믿을 수 없어요. -‘웃는 얼굴 다정해도(현암 작사, 이봉조 작곡, 윤복희 노래)’

이 독집음반의 A면 타이틀 곡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다. 윤복희씨가 스페인에서 직접 만든 노래였다.

캄캄한 이 거리 나 여기 왜 왔나/반겨줄 사람 없는데 누굴 찾아 나 왔나/믿었던 임이기에 모든 것 다 버리고/불결처럼 타오르던 지나간 내 사랑의 추억들은/지금도 내 마음 울리며 안타까이 부르게 하네/외로움만 간직한 채 나는 또다시 어데로 떠나나/웃음도 잃은 내 얼굴 눈물만이 흘러내리네.

비바람 몰아치는 어두운 길목 지나간 사람들을 버리고/이를 깨물면서 돌아서는 쓸쓸한 뒷모습 내 모양이/외로움만 간직한 채 나는 또다시 어데로 떠나나/다시는 다시는 안 오리 정처 없이 떠나네.

불결처럼 타오르던 지나간 내 사랑의 추억들은/지금도 내 마음 울리며 안타까이 부르게 하네/슬픔들만 안은 채로 나는 또다시 어데로 떠나나/웃음도 잃은 내 얼굴 눈물만이 흘러내리네.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윤복희 작사, 작곡, 노래)’

 

우리나라에 미니스커트 붐을 일으키다

▲ 우리나라에 미니스커트 붐을 일으킨 윤복희. 미니 웨딩드레스를 입은 가수 유주용과의 결혼식 사진. 영화 ‘미니아가씨(1968년 10월)’ 광고

더블 재킷으로 제작된 이 독집음반 실린 문제의 미니스커트 사진들은 당시 중앙일보가 서소문 고가도로 위에서 찍은 것으로 음반에 앞서 지상에 보도되자마자 사회 각계에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물론 아직도 세간에 회자되는 ‘윤복희가 귀국할 때 비행기 트랩을 내려오며 입었던 미니스커트...’하는 식의 얘기는 사실과 다르다. 굳이 덧붙이자면 그가 귀국할 때는 1월 6일로 한겨울. 바지에 코트를 걸치고 있었고 더구나 새벽 2시, 통금시간이었기 때문에 인적은 물론 지나는 차량마저 없어 그를 눈여겨 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윤복희씨는 회고한다.

그 무렵 우리나라 여성들의 옷차림은 어떠했을까. 당시 베트남전(월남전) 파병과 때를 같이해 이른바 ‘월남치마’가 대유행했을 무렵이었다. 때와 장소의 구애를 받지 않고 입을 수 있었던 ‘월남치마’는 심지어 시골 아낙네들까지 농사일을 할 때에도 간편하게 입을 수 있었다. 또 도시 농촌 할 것 없이 여성들 사이에서 대유행했던 시기였으니 윤복희로부터 점화된 쇼킹한 미니 논쟁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이 논란이 채 가시기도 전인 두 달 뒤 3월20일, 직접 윤복희를 모델로 무대 전면에 내세운 미니 패션쇼까지 등장, 성황을 이루면서 미니 논쟁은 한층 가열됐다. 3월20일과 25일, 세종호텔에서 열린 패션디자이너 박윤정 의상발표회 무대에서였다.

‘다리의 각선미가 주는 섹시한 매력 때문에 여성들은 더더욱 용감해지기 시작했고 남성들은 휘파람을 불어댔으며 노인들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는 것이 당시 거리에서 쉽게 볼 수 있었던 풍경이었다.
이러한 신드롬은 영화로까지 이어져 신봉승 각본에 김영찬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윤복희가 직접 타이틀 롤을 맡은 영화 '미니아가씨'가 제작, 68년 10월 개봉됐다. 상대역은 남진.

또한 윤복희는 그 해 말, 가수 유주용과의 결혼식에서 미니 웨딩드레스를 입고 등장, 연일 ‘이슈메이커’로 자리했다. 때를 같이해 각선미를 뽐내고자 하는 멋쟁이 여성들의 치마길이와 하이힐은 하루가 다르게 짧아지고 높아져 갔다. (계속)

[참고 자료] 윤복희 자서전 ‘딴따라(1997년, 문예당 발행)’, ‘박성서의 7080 가요X파일-윤복희 편[2]’(서울신문 2006년3월9일자), ‘옛 노래의 재발견(KTV, 2011년)’ 당시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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