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크리스마스>, <봄날은 간다>, <행복> 등 작품을 통해 대한민국 대표 감독으로 자리잡은 허진호 감독이 <덕혜옹주> 이후 3년 만에 <천문: 하늘에 묻는다>로 스크린 복귀를 알렸다. 극 중 인물들의 감정 변화를 탁월하게 포착해 섬세한 심리 묘사를 그려내며 내놓는 영화마다 호평을 받아왔던 허진호 감독이 이번엔 ‘세종’과 ‘장영실’의 위대한 업적 뒤 사라진 이야기를 펼쳐내며 또 한 번 남다른 연출력을 입증했다.

신세영 기자 syshin@

허진호 감독은 1993년 한국영화 아카데미 졸업작품 <고철을 위하여>로 밴쿠버 영화제에 초청받으며 일찍이 능력을 인정받았다. 이후 박광수 감독의 <그섬에 가고싶다> 연출부로,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에서 시나리오 공동집필에 참여한 뒤 1998년, <8월의 크리스마스>로 데뷔하자마자 평단의 극찬을 받으며 첫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남다른 존재감을 드러냈다. 세련된 화법과 형식미로 신파조 멜로를 뛰어넘었다는 호평을 받으며 제19회 청룡영화상 신인감독상, 제36회 대종상 영화제 신인감독상 등 각종 시상식의 신인감독상을 휩쓸었다. 이후 오늘날까지 회자되고 있는 수많은 연애 명대사를 남긴 이영애·유지태 주연의 영화 <봄날은 간다>, 몸이 아픈 두 남녀 사이의 세심한 감정을 그려낸 황정민·임수정 주연의 <행복> 등 섬세한 연출력으로 전개되는 스토리 속 인물들의 감정을 디테일하게 그려내며 제38회 백상예술대상, 제28회 청룡영화상 감독상을 수상했다. 이어 오랜만의 스크린 복귀를 알렸던 2016년 영화 <덕혜옹주>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라는 운명의 무게를 짊어진 채 평생을 살아야 했던 ‘덕혜옹주’의 삶을 그만의 섬세한 앵글로 담아냈다. 허진호 감독이 이번에는 대한민국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두 천재 ‘세종’과 ‘장영실’의 이야기를 다룬 <천문: 하늘에 묻는다>로 3년 만에 스크린 복귀를 알렸다. 허진호 감독은 “세종과 장영실이 신분의 차이를 떠나서 서로를 알아보고 각자의 꿈을 지지하며 친구처럼 의지하는 감정이 무엇이었을까. 그들의 관계와 감정이 당시 어떤 것이었을 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고 밝혔다.

세종과 장영실, 위대한 업적 뒤 숨겨진 이야기가 뭘까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는 조선의 하늘과 시간을 만들고자 했던 ‘세종’(한석규)과 ‘장영실’(최민식)의 숨겨진 이야기를 그린다. 실제로 세종과 장영실은 신분 격차를 뛰어넘고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며 조선의 과학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 장영실은 본래 부산 동래현 관청에 소속된 노비였으나 타고난 재주가 조정에 알려져 태종 집권 시기에 발탁됐다. 세종은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장영실의 재주를 눈 여겨 보고 있었으며, 즉위 후 정5품 행사직을 하사하며 본격적으로 장영실과 함께 조선만의 하늘과 시간을 측정할 수 있는 천문의기들을 만들어나갔다. 조선 시대 경제 발전에 있어 농업이 가장 중요했던 만큼 날씨와 계절의 정보를 정확히 알아야 했기에 과학 기구의 발명은 필수적이었고, 이러한 세종의 꿈을 장영실이 이뤄내며 두 천재는 엄청난 신분 차이를 뛰어 넘는 특별한 관계를 만들어 나갔다. 조선 시대 세종 24년 당시 발생한 ‘안여사건’(대호군 장영실이 안여(安與: 임금이 타는 가마) 만드는 것을 감독했는데, 튼튼하지 못해 부러지고 허물어졌으므로 의금부에 내려 국문하게 했다. ‘세종실록’)으로 장영실은 문책을 받으며 곤장 80대형에 처하게 되고, 이후 그 어떤 역사에서도 장영실에 대한 기록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된다. <천문: 하늘에 묻는다>는 이러한 실제 역사에서 출발해 천재 과학자 장영실이 생사는 물론, 발명품의 제작 자료에 대한 기록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의문을 남긴 채 사라진 이유에 대한 호기심에 영화적인 상상력을 동원하여 완성한 ‘팩션 사극’이다.

12월 극장가 점령할 역대급 조합 탄생
배우 최민식과 한석규가 <천문: 하늘에 묻는다>로 1998년 개봉된 영화 <쉬리> 이후 20년 만에 재회를 하며 강렬한 연기 시너지를 발산했다. 조선 최고의 천재 과학자 ‘장영실’ 역을 맡은 최민식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세종대왕과 장영실의 업적에만 포커스를 맞추는 게 아닌, 두 사람의 관계와 이것이 어떻게 펼쳐질지 등 이러한 점들이 굉장히 호기심을 자극했고, 작품에 참여하게 됐다”고 말했다. 2011년 SBS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에서 인자한 성군이 아닌 고뇌하고 예민한 군주 ‘이도 세종’을 연기하며 호평을 받았던 한석규가 다시 ‘세종’으로 분했다. 한석규는 작품에 대해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를 찍을 때 세종이 속내를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면 장영실이지 않을까 생각했던 적이 있다. 그런데 이번 영화를 통해 생각했던 이야기를 만나서 매우 기뻤다”고 전했다.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는 그 동안 한번도 다뤄진 적 없었던 조선의 두 천재 ‘세종’과 ‘장영실’의 관계를 심도 있게 그려내고 있다. 누구보다 ‘장영실’을 총애했지만, 한 순간 어떠한 이유로 그를 내친 ‘세종’과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장영실’ 두 사람의 감정선을 섬세하게 녹여냈다. 신분을 넘어선 ‘세종’과 ‘장영실’, 두 남자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뜻을 함께한 스태프들은 좀 더 세심하게 이 둘의 감정선과 심리 변화에 접근해야 했다. 이모개 촬영감독은 “새로운 장비가 아닌 새로운 아이디어가 많이 필요했던 영화였다. 세종은 내밀한 감정선을 가지고 있는 캐릭터로 클로즈업을, 장영실은 세종을 바라보는 인물이기 때문에 주로 풀 샷으로 촬영했다”고 설명했다. 이와 같은 노력은 의상에도 고스란히 담겨 당대의 복식을 보여줌은 물론 장영실 의상의 천 소재, 세종의 곤룡포 자수 등에도 캐릭터들의 성격과 심경 변화가를 고스란히 표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조상경 의상감독은 “장영실은 품계와 세종과의 관계에 따른 변화를 보여주기 위해 처음에는 거친 느낌의 삼베에서 나중에는 명주 비단의 느낌으로 갔다. 세종은 심적 변화가 크게 나타나는 신에서 그가 입고 있는 용포에서 드러나도록 굉장한 노력을 기울였다”고 말했다.

Q. 역사적 사실과 영감의 관계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았는지?
- 천문학적인 지식이 필요했다. 자문도 많이 구했다. 영화에서 역사적 사실과 영화적 상상력과의 조화를 어떻게 해야 좋을까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한국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성과를 이뤄낸 두 인물이었기에 자료조사에만 굉장히 오랜 시간을 들였고 국내 전문가들과 인터뷰는 물론, 담양, 부안, 민속촌 등 수많은 곳을 누비며 촬영을 진행했다. 영화에 등장하는 간의나 간의대, 자격루, 안여 등 어떤 원리로 작동하며, 왜 만들었는지에 대한 조사가 필요했다. 영화에서 실제로 등장하는 장영실 발명품들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재현하고자 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컸던 간의대는 제작에 긴 시간을 들였다. 그 시대를 재현하면서도 영화에 맞는 것을 찾기 위해 노력했고, 당대 천재 과학자인 장영실의 천재성을 어떻게 보여줄지 많은 공부가 필요했던 작업이었다.

Q. 영화 후반부에는 천문 외에도 왕과 사대부의 알력도 등장한다. 그럼에도 제목을 <천문: 하늘에 묻는다>로 결정한 이유는?
- 세종과 장영실이 근정전에 누워 있는 신이 세종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과 그것을 실현시키려는 영실의 마음을 보여주는 좋은 장면이라고 생각이 들어서 제목을 <천문: 하늘에 묻는다>로 지었다. 세종대왕과 장영실에 있어서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라는 것과 벗이라는 그 느낌이 참 좋았다. 신분 차이가 왕과 관노의 신분 차이라는 건 어마어마하잖아요. ‘그 둘이 친구가 돼 가는 과정을 다뤄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했다. 현장에서 촬영을 하면서는 최민식과 한석규 두 분이 30년의 한 길을 쭉 이어온 연기자로서의 모습들이 아름다웠다.

Q. 두 배우를 한 스크린에서 조우하게 할 수 있었던 캐스팅 일화가 궁금하다.
- 시나리오를 두 분께 동시에 드렸고, 또 같 만났다. 두 배우가 같이 작업을 해보고 싶다는 얘기들을 많이 들었다. 저도 <8월의 크리스마스> 이후 한석규 배우와 작업한지 꽤 오래됐다. 최민식 배우는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첫날 만나서 6, 7시간 동안 장영실과 세종과 얘기를 나눴던 기억이 있다.

Q. 왜 ‘세종과 장영실의 이야기’를 다루고 싶었나?
- 세종은 한글창제 큰 업적을 남기기도 했지만 장영실과 함께 천문사업을 만들었다. 당시의 천문사업은 역법이라고도 하는데 그런 학문은 중국의 천자만이 다룰 수 있는 학문이라 어떻게 보면 중국에서 다른 어떤 신하가 접근하면 역모죄로 처벌을 받았다. 아마 조선에서도 천문 사업을 벌이는 것이 굉장히 위험하다는 생각을 했었고, 이런 사업을 어떻게 보면 두 천재가 같이 만든 거죠. ‘같은 꿈을 꿨고, 정말 가깝게 지냈던 이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을까’하는 궁금증이 이 영화의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장영실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 많지 않다는 빈틈이 흥미로웠다. 세종과 장영실이 함께한 업적을 뒤로하고 관계가 왜 틀어졌으며, 장영실은 왜 역사에서 갑자기 사라지게 됐는지, 이러한 질문으로부터 상상력을 발휘해 두 사람의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했다.

Q. 어떤 부분에 주안점을 두고 영화를 만들었나?
- 일반 관객들이 세종에 대한 많은 지식들을 이미 갖고 있는데 어떻게 또 새로운 세종을 보여줄 수 있을까, 장영실은 당시 모두를 놀라게 했던 그 천재성을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 지를 중점적으로 고민하면서 촬영했다.

Q. 내로라하는 배우들을 한자리에 모으셨는데, 이들과의 촬영은 어땠나? 
- 촬영이 참 편했다. 정말 좋은 배우들이 출연을 해서 각자 맡은 역할을 굉장히 잘 표현해주셨다. 어떻게 보면 ‘연기 종합 선물 세트’라고 할 수도 있다. 특히 장영실(최민식)과 세종(한석규)이 만나면 이들의 연기를 보면서 잠시 감독임을 잊고 취한 경험들이 많았다. 저한테 말 안하고 알아서 호흡을 맞춰 짠하고 나타나기도 했다. 원래 감독은 잘못된 부분을 봐야하는데, 그냥 빠져서 그 화면에 집중해서 본 경우가 많았다. 두 배우를 한 화면에서 볼 수 있다는 게 감독으로서도 굉장히 행복했다. 관객들이 정말 기대해도 될 만한 좋은 연기들을 보여주셨다.

Q. 영화의 관전포인트를 꼽는다면?
- 세종과 장영실이 서로의 신분격차에도 불구하고 우정과 신뢰를 쌓아가는 묵직한 감동이 관객들에게 잘 전달됐으면 좋겠다. N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