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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서 칼럼] 뮤지컬 배우 겸 가수, 윤복희의 삶과 노래[1]
2020년 01월 06일 (월) 12:44:04 박성서 webmaster@newsmaker.or.kr

무대에 서기 위해 '분장'은 하되
예쁘게 보이기 위해 '화장'은 않는다

말보다 노래를 먼저 배웠고 걸음마를 채 떼기 전부터 무대에서 춤추는 것을 보았다고 스스로 회고하는 윤복희씨. 그는 '문밖의 천직'으로나 여겼던 핏줄을 이어받은 탓에 극장에서 젖을 먹고 말을 배우고 걸음마를 익혔다.

윤복희씨가 처음 무대에 선 곳은 서울 중앙극장. 무대에서 맡은 첫 역할은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 무대에서 산타크로스가 선물 보따리를 풀면 그 속에서 나와 노래하며 춤추는 깜찍한 인형.

이후 세계무대로 진출한 ‘코리언 키튼즈’ 리더로, 그리고 대한민국 미니스커트 1호로 숱한 화제를 몰고 다녔던 이슈메이커 윤복희씨는 현재까지도 열정적으로 무대에 선다. 그의 무대 철학은 남다르다. 태어날 때부터 보고 자란 무대였기에 세상에서 가장 편한 곳이 무대라고 말한다. 그에겐 제2의 고향이다.

‘무대에 서기 위해 ‘분장’은 하되 예쁘게 보이기 위해 ‘화장’은 하지 않는다.’고 강조하는 윤복희씨의 삶과 노래, 그 첫 번 째.

글 l 박성서(음악평론가, 저널리스트)

‘무대는 제2의 고향’, 세상에서 가장 편한 곳

우는 듯 웃는, 얼굴 가득 찡그린 표정에서조차 어쩐지 행복감이 충만해 보이는 가수 겸 뮤지컬 배우 윤복희씨(73), 그는 최근에도 꾸준히 뮤지컬 무대에 서고 있다.

현재 공연 작품은 ‘하모니’. 영화 ‘하모니’를 각색한 이 뮤지컬은 교도소라는 공간에서 재소자들이 합창단을 만들면서 생기는 에피소드를 담은 가족 뮤지컬이다. 윤복희씨는 사형수 김문옥 역으로 합창단 지휘자 역을 맡고 있다.

윤복희, 스스로 회고하듯 ‘말보다 노래를 먼저 배웠고 걸음마를 채 떼기 전부터 무대에서 춤추는 것을 보았다’는 그는 '문밖의 천직'으로나 여겼던 핏줄을 이어받은 탓에 극장에서 젖을 먹고 말을 배우고 걸음마를 익혔다.

▲ 우리나라에 ‘미니스커트 신드롬’을 불러일으킨 윤복희 독집 음반 재킷,1967년.

‘부길부길쇼단’을 이끌며 각본, 무대장치, 연출, 연기까지 모두 소화해내던 ‘원맨쇼의 일인자’로 ‘시대를 앞서간 천재’라 평가받는 윤부길씨가 그의 부친. 그리고 무용가이자 악극인 고향선씨가 모친이다. 또한 현재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는 가수 윤항기씨가 친오빠.

“아버지는 코미디 연극 뮤지컬 등에 두루 능했어요. 극본을 직접 쓰고, 연출하고 출연까지 하신 분이었죠. 쇼단을 직접 운영하기도 했고요. 많은 사람들이 아버지를 ‘천재’ ‘선구자’ ‘진정한 예술가’ 등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경성음악전문학교, 그리고 동경음대에서 순수음악을 공부하신 후 한국에선 처음으로 ‘견우와 직녀’ ‘콩쥐팥쥐’ 등 오페라를 무대에 올렸습니다. 뮤지컬 영화 ‘안개 낀 서귀포’를 만들기도 하셨죠.”
우리나라 뮤지컬의 창시자이자 1인극의 효시, ‘부길부길쇼’의 윤부길, 그리고 무용가 고향선(본명 성경자), 그렇듯 윤복희씨는 태어나면서부터 무대를 보며 자랐다.

그는 말한다. ‘무대는 곧 제2의 고향’으로 극장 안에 있으면 어릴 때부터 마냥 편했고 그 느낌은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유년시절 별명은 ‘찹쌀제리’, ‘좁쌀여우’, ‘쥐방울’...

그가 지금까지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는 유년시절 최초의 기억은 부산 피난시절 때 일화다. 1951년 1.4후퇴 당시 윤부길씨 가족은 인천에서 군함(LST)을 타고 부산으로 향했다. 부산에는 많은 예술인들과 연예인들이 이미 피난 내려와 있었다. 윤부길씨는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유엔군 위문단’을 조직해 미군클럽에서 공연을 시작한다.

▲ 1979년 서울국제가요제에서 '여러분'으로 그랑프리를 수상하는 윤복희와 윤항기 남매(우측)와 유년시절.

“그때 제 별명이 ‘찹쌀제리’, ‘좁쌀여우’, ‘쥐방울’이었어요. 체구는 코딱지만 한데 아무한테나 차칵차칵(찰싹찰싹) 달라붙는다고. 전혀 낯을 안 가렸대요. ‘좁쌀여우’라고도 했는데 유독 어른들 비위를 잘 맞췄대요. 어떻게 하면 귀여움을 받을 수 있는지 여우같이 알아채더라는 거죠. ‘쥐방울’이라고도 불렀는데 어디 있는지 잘 보이지는 않지만 무슨 소리인가는 계속 났었다고 하더군요.”

그렇듯 어린 윤복희는 찹쌀제리처럼 단원들에게 착 달라붙어 비위 좋게 연습하는 걸 옆에서 지켜보곤 했다. 물론 재미있으면 그대로 따라하면서.

“아줌마들이 연습하는 걸 볼 때마다 참 신나고 재미있었어요. 눈만 뜨면 모여서 탁, 탁, 탁 소리 내며 춤추지, 노래하지. 그러던 어느 날 공연장까지 따라가게 됐어요. 신기하게도 아줌마들이 연습할 때 하던 걸 그대로 무대에서도 하는 거예요. 나도 덩달아 신이 나서 부스에서 따라했지요. 한순간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기에 보니 조명이 나를 비추고 있는 거예요. 객석에서는 막 박수치고 소리 지르고 휘파람 불고... 깜짝 놀랐지만, 정말 신나더라구요.”

그때 부르던 노래와 춤이 당시 유행하던 ‘아가씨와 건달들’이었다는 것은 후에 알았다. 그렇듯 고생이 많았던 부산피난시절이었지만 잊을 수 없는 추억도 많다.

“당시 위문단원들은 사례를 현금으로 받지 않고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씨레이션(C Ration, 미군 전투식량)으로 대신 받았어요. 그 속에는 통조림, 커피, 담배 별별 게 다 들어있었는데 단원들은 그걸 국제시장이나 깡통시장에 가서 팔아서 생계를 유지했지요.”

이런 기억과 함께 춤과 노래. 그리고 쇼는 신나는 것이라는 인식이 어린 윤복희에게 각인되고 있었다. 비로소 꿈이 시작된 것이다.

“저도 꼭 한 번 무대에서고 싶었어요, 그래서 몇 년 간을 부모님께 졸랐죠. 한 번만 무대에서 노래하게 해달라고. 그러나 안 되는 거야. 그때는 어린이가 무대에 올라간다는 건 있을 수 없었지요.”

그는 부모의 공연을 따라 부산, 대구 등 전국 각지를 다녔다. 그리고 1953년 8월, 휴전과 함께 서울로 돌아온 부친 윤부길씨는 오랜만에 중앙극장 무대에 선다. 당시 신문에 실린 공연 광고 문안은 이러했다.

“오랫동안 뵈입지(뵙지) 못하였슴(습)니다. 오는 8월 20일부터 중앙극장 무대에서 모아두었든(던) 요절복절 주머니나, 여러분과 함께 클러나(끌러) 보지요? -윤부길”

▲ 1953년 8월, 휴전과 함께 서울로 돌아온 윤부길씨는 오랜만에 중앙극장 무대에 섰다. 당시 신문 광고(좌측). 그리고 같은 해 12월에 막이 오른 ‘윤부길과 그 클럽의 오색 크리스마스’ 광고(서울 중앙극장, 1953년)

휴전과 함께 막이 오른 이 공연에 이어 그해 12월,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또 한 번의 윤부길씨 공연이 이어진다. 공연 기획자는 랑랑(낭랑)악극단의 김성택 단장(가수 혜은이의 부친)이었다. 공연 타이틀은 ‘윤부길과 그 클럽의 오색 크리스마스’

“그 무렵 특히 무대에 세워달라고 부모님께 졸랐어요. 심지어 노래 안 시켜주면 죽는다고 오빠가 가지고 있던 양철 필통에 손가락을 넣었지요. 접었다 폈다 하는, 칼처럼 날이 선 곳에 검지손가락을 넣고 힘껏 누른 거예요. 피가 줄줄 났죠. 그걸 보고 엄마, 아버지가 하얗게 질려서 ‘그럼 딱 한  번 만이다.’ 라고 하시더군요.”

첫 무대, ‘크리스마스 선물’로 등장하다

윤부길씨가 당시 전쟁에 지친 국민들을 위해 펼쳐 보인 공연 타이틀은 ‘오색 크리스마스’다.

▲ ‘아홉 살의 천재소녀 윤복희’의 출연을 알리는 부우케, NBC악단의 시공관 공연 광고.

“당시 서울 중앙극장 무대였어요. 마지막 장면에서 산타크로스가 선물자루를 메고 나와 무대에 내려놓자마자 ‘여러분들께 선물을 드리겠습니다.’라며 보자기를 풉니다. 그때 마그네슘에 터지면서 거기서 제가 튀어나와요. ‘메리크리스마스!’를 외치면서. 그리고는 시계추처럼 몸을 좌우로 흔들며 부기우기 리듬에 맞춰 노래하지요.”

그는 당시 무대를 지금까지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천장에서 색종이가 무대 가득 뿌려지고 나는 망사로 된 빨간 원피스 입고 나와 춤추며 노래했죠. ‘아이 러브 푸시 언더 팩, 아이 러브 푸시 언더 팩! 리루 리루 리루...’ 그런 후 무대를 한 바퀴 돌면서 막이 내리지요.”

앞서 밝혔듯 이때 부른 노래가 바로 당시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던 뮤지컬, ‘아가씨와 건달들’의 삽입곡이다.

그의 손가락에는 아직도 그때의 흉터가 남아 있다. 무대 인생 육십 여 년의 영욕이 지나간 그 상처. 인생을 결정지었고 또 운명을 예지하는 또 하나의 ‘손금’이 된 그 자국.

그렇듯 그가 무대에서 펼친 첫 역할은 ‘선물’이었다. 그리고 이후 60여 년 동안 국민들에게 커다란 감동과 더불어 선물을 선사하고 있다.

▲ 유년시절의 윤복희 공연 장면

윤복기-복희-성복희-윤아-보키 폰 보데, 그리고 윤복희...

본명 윤복기(尹福起). 1979년 서울국제가요제에서 '여러분'으로 그랑프리를 수상하는 순간, 명장면을 연출했던 오빠 윤항기씨와 마찬가지로 '기'자 돌림이다.

연기, 춤, 노래. 그 모든 '끼'를 타고난 윤복희씨. 그러나 그는 살아오면서 여러 차례 이름이 바뀌었다. 무대를 따라 옮겨 다니는 생활이 그러했듯. 심지어 한동안 호적조차 없었다.

처음에는 그냥 남들에 의해 발음상 계집 이름 '복희'가 되었다가 해외공연을 떠나기 직전인 열여섯 살 때 어머니 성을 따 '성복희'라는 이름으로 호적에 처음 올렸다. 해외에서 활동 중일 때에는 ‘윤아’로  불렸다. 이후 독일계 혼혈가수 유주용과 결혼하면서 '보키 폰 보데'가 됐다. 그러던 86년 비로소 부친의 성을 따 무대이름 '윤복희(尹福姬)'로 스스로 호적에 올렸다. (이때 호적을 45년생으로 잘못 기재했다) 이름에 얽힌 에피소드는 뒷부분에서 다시 상세히 소개하기로 한다.

이름만큼이나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그는 불과 열 살 남짓에 부모를 모두 여의고 오로지 '무대' 하나만을 의지해 살아왔다. 본인 스스로 거슬러 가본 유년시절의 기억에서조차 먹는 것, 잠잘 곳을 걱정해야 했던, 어쩔 수 없는 이미 ‘어른 아닌 어른’이었다.

“무대에 따라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셔야 했던 아버지는 만년에 건강이 매우 안 좋으셨어요. 결국 활동을 접고 입원, 퇴원을 반복하셨는데 그러다보니 어쩔 수 없이 어머니가 치료비를 벌어야 했죠. 또한 우리 남매까지 먹여 살려야 되니까 혼자 유랑극단을 따라나서게 됐죠. 그런데 묵호로 공연을 떠나신 후 일주일 만에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는 전보가 날아왔어요.” 윤복희씨 나이, 겨우 아홉 살 때였다.

“전보를 받고 아버지는 우리를 데리고 묵호로 향하셨어요. 그때가 8월이었는데, 장마가 져서 다리도 끊어지고, 해서 걷다가 차타고 또 다시 걷고, 하던 끝에 나흘 만에 도착했지요. 그러나 단원들이 이미 묵호를 떠난 뒤였어요.”

공연장소를 강릉으로 옮겼다는 말을 듣고 물어물어 찾아가보니 다행히도 악극단원들은 아직 그곳에서 공연을 하고 있었다.

“강릉에 도착해서 단원들이 묵고 있는 여관 건너편에 방을 얻었어요. 그런데 아버지가 창호지 문을 손가락으로 뚫으면서 단원들 숙소인 여관을 계속 감시하라는 거예요. 혹시 엄마가 나올지 모른다고.... 엄마가 죽지 않았는데 죽었다고 거짓말시킨다며... 한 사흘 그러다가 결국 포기하고 어머니가 묻힌 산소로 갔어요. 풀도 없이 흙으로만 덮여 있던 그 빨간 황토 무덤 앞에... 비가 계속 내리고 있었죠.”

엄마의 무덤 앞에서 돌아서기가 쉽지 않았다. 겨우 서른 살에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어머니. 그 충격으로 인해 윤복희는 열 살의 어린 나이에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갑자기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린 나이에 도저히 말도 안 되지만, 그땐 그랬어요. 아버지는 병원에 계시고 오빠는 시골에 있고, 혼자였죠. 그때 갑자기 죽으면 엄마에게 간다,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부엌칼을 움켜쥐고 배에다 갖다 댔습니다. 너무 아팠어요. 다른 곳도 그랬고... 처음엔 웃음이 나더니 이내 울음이 터졌습니다. 머리를 무릎 사이에 처박고 그렇게 한참을 엉엉 울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부친 윤부길씨마저 얼마 뒤 세상을 떴다. 오빠 항기는 공주에 있는 아버지 친구 집으로 보내졌다. 학교를 계속 가야 하니까. 유년시절에 갑자기 혼자가 된 윤복희, 그는 새삼 먹는 것, 잠잘 곳을 걱정해야 했던, 어쩔 수 없는 ‘어른 아닌 어른’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시고 난 뒤 굶거나 지붕 없이 잔적은 없었다. 스스로 길을 찾아 나섰기 때문이다. 시공관, 투스쿼럴스, UN센터, 미8군쇼, 그리고 세계무대를 향해... (계속)

[참고 자료] ‘박성서의 7080 가요X파일-윤복희 편’(서울신문 2006년3월2일자), ‘옛 노래의 재발견(KTV, 2011년)’ 당시 인터뷰.

▲ 코리안 키튼즈(KOREAN KITTENS) 시절. 좌로부터 리, 키티, 윤복희, 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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