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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서 칼럼] 철학박사 가수 1호, 하춘화의 노래 이야기[1]
철학박사 된 여섯 살 신동, 교재는 부친의 50여 년간 기록 메모
2019년 12월 07일 (토) 14:20:32 박성서 webmaster@newsmaker.or.kr

봄날 피어난 꽃, 하춘화(河春花). 우리나라 신민요와 대중가요의 장르를 넘나들며 양쪽 모두 소화가 가능했던 가수 이화자-황금심-박재란 계보의 대를 잇고 있는 인물이다. 불과 만으로 여섯 살 때 데뷔해 현재까지도 여전히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현재 64세지만 가수 활동만 58년째.
지금까지 우리 가요사에서 '최초, 최연소'... 이러한 기록들 위주로 활동했다면 앞으로는 '최고, 최고령'... 기록에도 도전해보겠다고 포부를 밝히는 가수 하춘화의 삶과 노래 이야기.

글l박성서(음악평론가, 저널리스트)

▲ 하춘화 데뷔 시절 사진과 ‘하춘화 50년 리사이틀(세종문화회관, 2011년)’ 부클릿 표지

'노래하는 인형'에서 대한민국 '가요계의 산 증인'으로

필자가 가수 하춘화씨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은 ‘MBC 창사 기념 하춘화 50년 리사이틀(세종문화회관, 2011년)’이다. MBC 창립과 하춘화씨는 서로 동갑내기(?). 하춘화씨가 TV에 첫 출연한 것도 MBC의 '쇼 반세기'를 통해서였다. 중3 때다.

'호반에서 만난 사람(박춘석 작곡)'으로 시작되던 이 공연은 때마침 작곡가 박춘석 평전을 집필 중이던 필자에겐 놓칠 수 없는 공연이기도 했다.

특히 하춘화씨 부친 하종오 옹(2019년 7월 별세)과의 친분이 각별했다. 하춘화 여섯 살 때 데뷔음반과 하춘화 첫 영화주제가 음반을 최초로 공개 등의 인연으로 하춘화씨 부녀와 친분이 시작되었고 그 때문에 하춘화 데뷔 50주년 KBS 9시뉴스 인터뷰 촬영도 필자의 사무실에서 하게 되었다.

당시 하춘화씨 관련 주변인 인터뷰에서 지금도 기억나는 인물은 JP다. JP는 5.16 이후 '예그린악단'을 창설하는 등 대중문화인들과의 교감이 남달랐던 인물. 특히 JP가 오랜만에 브라운관에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에 세간의 관심도 그만큼 높았다. 하춘화씨에게 JP와의 인연을 들어봤다.

"지난 1993년, 일본 오부찌 수상이 내한했을 때부터였어요. 당시 한일감정이 극도로 나빴던 만큼 여러 가지 복잡한 현안이 많았는데 방문일정 중 한 시간짜리 제 공연 관람이 있었지요. 함께 노래도 부르고 분위기도 매우 좋았어요. 그 때문에 다음날 중요한 회담이 순조롭게 마무리되었고 그래서 신문에 '가요외교'라는 용어까지 등장했죠. 오부찌 수상을 제 공연에 초청한 분이 바로 JP였습니다. 노래로 이러한 역할도 가능하구나, 보람을 느꼈던 순간이었지요." 하춘화씨의 회고다.

당시 '하춘화 50주년 기념 리사이틀'의 부제는 '하춘화 노래 50년으로 본 한국가요 80년사'였다. 고복수의 '타향살이'에서 티아라의 'Bo Peep Bo Peep'까지, 가요에서 팝, 그리고 2000년대 아이돌 그룹의 댄스곡을 거쳐 민요까지... 이 날 무대에 올라왔던 인원이 자그마치 350명, 노래는 총 50곡으로 이중 42곡을 혼자 소화했다.

그 무렵 하춘화씨와의 인터뷰 때 그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지금까지는 하고 싶은 대로 하지 못하고 스케줄 대로 움직였다면 이제부터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 것'이라며 ‘지금까지는 최초, 최연소... 위주로 활동했다면 앞으로는 최고, 최고령... 이러한 기록에 도전해보겠노라고. 실제로 '70대에 70주년 공연, 80대에 80주년 공연'... 도 가능하겠다 싶었다. 자신의 목표가 분명한 만큼 열심히 할 일만 남았구나, 싶었다.

50주년 공연 수익금 역시 그동안 늘 그러했듯 다문화 가정을 돕는 일에 모두 기증하는 미담을 남겼다.

이 무렵 그가 출간한 자서전 제목이 '아버지의 선물'이다. 부친이 늘 곁에서 매니저처럼 돌봐주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그의 부친은 90대임에도 불구하고 컴퓨터를 배워 직접 홈페이지를 만들고 최근 근황을 직접 업데이트하고 있었다. 이즈음에서 이전에 하춘화씨에 대해 썼던 글 하나를 먼저 소개한다.

▲ 우리나라 최연소 가수 회원증과 유년시절의 하춘화

부친이 수집해온 하춘화 활동 스크랩북 22권

봄날 피어난 꽃, 하춘화. 우리나라 신민요와 대중가요의 장르를 넘나들며 양쪽 모두 소화가 가능했던 실력파 가수인 이화자-황금심-박재란 계보의 대를 잇고 있는 인물이다.

불과 여섯 살 때 데뷔해 현재까지도 여전히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그럼에도 데뷔 당시 상황들을 비교적 소상히 기억하고 있다. 부친 하종오씨가 그동안 관련 자료를 빠짐없이 모아두었던 덕택이다. 그뿐 아니라 매일 일기 쓰듯 딸의 활동 사항을 빠짐없이 기록해왔다. 스크랩 자료만도 자그마치 22권 분량. 그러다 보니 이 기록은 개인사를 뛰어넘어 어느덧 우리 가요사의 소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이 자료를 비롯한 관련 자료들은 이후 모두 전남 영암군 측에 기증되어 현재 ‘영암 한국트로트가요센터’가 건립되는 토대를 마련했다.)

그 주인공 하춘화씨와 부친을 한 자리에서 만났다. 지난 2008년도의 일이다. 이들이 인터뷰 자리에 함께한 것은 처음이라 했다. 부녀간의 신뢰가 그렇듯 부친의 보살핌 속에 하춘화씨 또한 그에 걸맞는 인기가수로 성장했다.

1961년 12월 3일에 첫 취입한 데뷔앨범은 당시 우리나라 최연소 독집음반으로 화제를 모았고 이어 63년 4월 1일, 한국연예협회 가수분과 최연소 정회원이 된다.

▲ 불과 만 여섯 살에 발표한 하춘화 독집 데뷔음반(1961년 12월)과 첫 출연 영화 ‘아빠 돌아와요(1965년)’ 주제가 음반

“제가 하춘화예요. 금년에 일곱 살입니다.”라는 인사말로 시작되는 그의 첫 데뷔음반. 계속되는 대사, “노래란 것은 우리 생활에 있어서 슬플 때나 즐거울 때나 꼭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해요. 허지만 나이 어린 제가 여러분의 생활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 퍽 걱정이 됩니다. 아무튼 한 번 불러 보겠어요.” 라는 앙증스런 멘트가 이어지는 이 독집음반엔 ‘효녀 심청 되오리다’를 비롯해 모두 여덟 곡의 노래가 수록되었다. 모두 오종하 작사, 형석기 작곡의 노래다. 작곡가 형석기씨는 ‘대한팔경’, ‘맹꽁이 타령’의 유명작곡가. 그리고 작사자 오종하는 바로 부친 하종오씨로 이른바 ‘로꾸거 이름표기’인 셈.

“그 노래들의 작사자 표기가 제 이름을 거꾸로 표기했다는 것은 지금까지 생각지 못했던 부분입니다. 다만 당시 춘화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사랑타령 같은 걸 부르게 할 수 없어 직접 가사를 손질했다는 기억만이 어렴풋할 뿐... 아마도 작곡가 형석기씨의 제안이었을 것 같군요” 부친의 말이다.

우리나라 최연소 독집음반, 글씨 읽을 줄 몰라 외워서 취입

이 음반에 담긴 노래는 그밖에도 ‘비 개인 서울거리’, ‘부산항 블루스’, ‘대구역 떠나는 완행열차’, ‘목포항 탱고’ 등으로 이를테면 어린 춘화양은 노래로 전국 팔도를 순회한다. 마치 이후 전국을 누비며 ‘리사이틀의 여왕’으로 군림, 개인최다공연기록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될 것임을 예고하듯. 실제로 그가 91년, 기네스북에 등재될 당시 공연기록은 1260회. 현재도 1년에 30~40차례 콘서트와 디너쇼를 갖는다.

“당시엔 악보는 물론 글씨조차 읽지 못하던 시절이었지요. 모두 외워서 했어요.” 부친 하종오씨의 말이다. 그럼에도 필자가 입수한 당시 녹음 마스터 테이프를 체크해보니 단지 두 번의 NG만을 냈을 뿐이었다. 당시엔 One Take 방식(편집 없이 한 번에 녹음하는 것)으로 녹음해야 했던 시절임을 감안하면 ‘신동’이었음에 틀림없다. 이 ‘신동’은 예서 그치지 않고 지난 46년 간 스타로 자리했고 아울러 최근에는 성균관대 대학원 동양철학과에서 박사 학위까지 받았다. 논문의 제목은 ‘사회변동기(變動期)의 대중가요와 대중정서의 상관성 연구’.

“갈수록 우리 대중가요가 상당한 영향력이 커지고 있음에도 체계적인 학문으로 접근한 사람이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때문에 스스로 연구를 시작했지요.” 만학도, 하춘화씨가 밝힌 동기다.

▲ 하춘화 발표 음반들

초등학교 시절부터 영화배우로도 활동 시작

‘하춘화’라는 이름이 대중들에게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한 노래는 65년에 발표한 ‘아빠는 마도로스’. ‘태풍이 분다 경보가 내려/엄마는 걱정하셔도...’로 시작되는 노래 ‘아빠는 마도로스’를 취입한 것 또한 불과 열 살 때였다. 아울러 이 무렵 개봉된 영화 ‘아빠 돌아와요(임원직 감독)’에서는, 주연을 맡음과 동시에 주제가까지 취입했다. 서울수송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이로부터 6년 뒤인 71년 ‘물새 한 마리’, 그리고 이어 작곡가 겸 가수 고봉산씨와 함께 ‘영감타령’을 새롭게 편곡해 발표한 ‘잘했군 잘했어’로 대중들 앞에 본격적으로 나타났을 때 그녀 나이는 불과 열여섯 살, 일신여상 2학년 때였다. 이때 이미 하춘화는 정상의 가수로 급부상했기 때문에 당시 엄격히 적용되던 ‘귀밑머리 1cm’라는 교내 규정에서도 열외 되었을 정도로 특혜를 받으며 동시에 전성기를 구가하기 시작한다.

‘물새 한 마리’는 1966년에 발표된 ‘바닷가 처녀(조형식 작사, 고봉산 작곡, 이미자 노래)’를 리메이크한 노래. 1971년에 발표하자마자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만든 그녀의 대표곡이다.

외로이 흐느끼며 혼자 서있네/싸늘한 호숫가에 물새 한 마리/짝을 지어 놀던 임은 어디로 떠났기에 외로이 서서/머나먼 저 하늘만 바라보고 울고 있나/아---- 떠난 임은 떠난 임은 못 오는데.

갈 곳이 없어서 혼자 서 있나/날 저문 호숫가에 물새 한 마리/다정하게 놀던 임은 어디로 떠났기에 외로이 서서/머나먼 저 하늘만 바라보고 울고 있나/아---- 떠난 임은 떠난 임은 못 오는데. -‘물새 한 마리(이용일 작사, 고봉산 작곡, 하춘화 노래)’

동화예술학원 등록, 우리나라 최연소 가수로 등록

가수 하춘화씨는 1955년 6월 28일, 부산 초량동에서 부친 하종오씨와 모친 김채임씨 슬하의 네 자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철강선 제조업체 (주)동아제강의 설립자였던 부친은 이후 야당 정치에 몸담았다가 5.16 이후 정치기반이 무너지자 서울로 무대를 옮긴다. 그때서야 둘째 딸 춘화양의 노래 솜씨가 이미 주위에 소문이 났을 정도로 ‘신동’이었음을 알게 된 부친은 당시 가수 고복수씨가 운영하던 동화예술학원에 등록, 본격적인 노래 지도를 시작한다.

“춘화는 부산에서 보낸 유년시절부터 놀랍게도 일본노래, 특히 미소라 히바리 노래까지 곧잘 따라 불렀어요. 동화예술학원에 들어간 이후에도 숙소가 있던 청진동 여관에서부터 명동의 학원까지 걸어 다니면서도 단 한 차례도 거른 적이 없었을 만큼 노래공부에 매우 열정적이었지요. 심지어는 혼자 다니기도 했죠.”

때문에 부친의 뒷바라지 역시 어린 춘화의 열정 못지않았다. 첫 독집음반을 발표하던 1961년 12월, 공교롭게도 '아동복리법(이후 ‘아동복지법'으로 개정)이 공포된다. 때문에 음반 발표 가수로써 한국연예협회가 발급하는 ’가수증‘을 취득하는데도 어려움이 따랐다. ‘만 14세 이하의 어린이에게는 곡예를 시킬 수 없다’는 아동복리법 조항 때문. 이에 부친은 ‘노래활동과 곡예는 엄연히 다른 분야’라는 청원서를 내기에 이르렀고 결국 그런 후에야 정회원 가수증이 비로소 발급되었다.

‘단발머리 시대’에 초, 중, 고 시절을 보내며 학업과 무대를 동시에 병행했던 하춘화. 그러나 헤어 스타일 만큼은 늘 한결같이 ‘긴 머리’였다. 이 또한 부친의 의지였다. ‘지금은 비록 학생 신분이지만 미래는 연예인으로 장래가 이미 정해져 있다’며 교사들이 바뀔 때마다 꾸준히 설득해왔기 때문에 당시 학교 규칙으로부터 자유스러울 수 있었던 것.

그렇듯 이미 가수에 대한 의지가 분명했던 만큼 하춘화의 연예활동은 가속도를 더하며 ‘물새 한 마리’, ‘잘했군 잘했어’에 이어 72년 예그린의 뮤지컬 ‘우리 여기 있다’와 영화 ‘세노야 세노야’에서 타이틀 롤을 맡아 다재다능한 재능을 선보였다.

▲ 부산극장에서의 ‘하춘화 리사이틀’ 중 코미디언 이주일과의 공연 장면

TBC, MBC 10대가수상, 일곱 차례와 여덟 차례 연속 수상

이어 ‘연포 아가씨’, ‘영암 아리랑’, ‘하동포구 아가씨’ 등 각 지방 소재의 노래를 전국적으로 히트시키며 펼쳐진 전국 순회 ‘하춘화 리사이틀쇼’는 어디서나 만원을 이뤘다. 아울러 TBC, MBC 10대가수상을 7년과 8년 동안 연속 수상하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하동포구 아가씨’ 또한 이미자씨가 1967년 6월에 발표한 노래 ‘제주 뱃사공(한산도 작사, 박춘석 작곡)’를 가사와 제목으로 바꿔 1972년에 재취입한 노래. 현재 경상남도 하동에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쌍돛대 임을 싣고 포구로 들고/섬진강 맑은 물에 물새가 운다/쌍계사 쇠북소리 은은히 울 때/노을 진 물결위에 꽃잎이 진다/팔십 리 포구야 하동포구야/내 님 데려다주오.

흐르는 저 구름을 머리에 이고/지리산 낙락장송 노을에 탄다/하동에 가는 길목 섬진강 물은/굽이쳐 흘러 흘러 어디로 가나/팔십 리 포구야 하동포구야/내 님 데려다주오. -‘하동포구 아가씨(정두수 작사, 박춘석 작곡, 하춘화 노래)’

그러나 당시 ‘최연소’라는 각종 기록을 모두 새로 쓸 만큼 두각을 나타내며 인기를 구가할수록 부친은 주변의 시각에 대해 점차 부담을 느끼기 시작했다. 당시 사회 분위기 상 연예활동은 곧 학업 소홀로 이어지는, 이른바 ‘10대 소녀가수’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 탓이었다. 때문에 부친은 누구보다도 엄하게 부족한 학업과 인성에 대한 교육을 하춘화씨에게 강조해왔다. 때문일까, 하춘화씨는 지난 46년간 그 흔한 스캔들 한 번 없는 가수로 활동해왔다.

동시에 인기가수가 부상한 72년, 취로사업장용 손수레와 새마을공장 등에 재봉틀을 기증한 것으로부터 시작된 그의 선행은 그동안 각 단체로부터 120여 차례 감사패를 받으며 현재 ‘국내 연예인 중 최다 봉사활동자’라는 영예를 안았다.

▲ ‘하춘화 50주년 리사이틀(세종문화회관, 2011년)’ 공연 장면과 당시 필자 사무실에서

심지어 지난 2001년 데뷔 40주년 기념공연에서는 1억5천만 원의 수익금 전체를 결식아동 소년소녀가장 돕기 성금으로 기증했다. 그해 정부로 부터 옥관 문화훈장 받기도 했던 그는 이후 세종문화회관에서 가진 데뷔 45주년 공연에서도 개런티를 포함해 수익금 전액을 환경미화원 자녀들의 장학금으로 기탁했던 훈훈한 미담을 남기기도 했다.

“아버지가 늘 그랬어요. ‘늘 남을 생각하라, 아울러 사회의 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라.’고 말이죠.”

자신에게도 엄격하다. 학구열도 남다르다. 전성기 시절, 부족했던 학업에 전념하기 위해 잠시 은퇴를 선언하기도 했던 그의 이력서엔 대학 관련 학력 사항만도 대여섯 개. 최근에는 성균관대 대학원 동양철학과에서 박사 학위까지 받았다. 논문의 제목은 ‘사회변동기(變動期)의 대중가요와 대중정서의 상관성 연구’.

그의 훌륭한 지침서는 부친의 46년간 기록 메모다. 부친 하종오씨는 이 기록을 묶어 단행본으로 발간할 예정으로 올해 안에 원고를 탈고할 예정이다. ‘현실에 대한 세간의 뜨거운 시선과 미래에 대한 불굴의 의지’, 이러한 함수관계가 회고록에 어떻게 투영될지, 기대되는 대목이다. (계속)

※참고 자료 : 서울신문 ‘박성서의 7080 가요 X파일-하춘화 1, 2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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