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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와 시간의 생명을 느끼는 것
2019년 10월 07일 (월) 15:16:16 이은주 밝은 성 연구소 원장 webmaster@newsmaker.or.kr

남해의 왕은 숙(儵)이고 북해의 왕은 홀(忽)이다.
숙과 홀이 만나기로 하고 남해와 북해 사이 중간 지점에서 만났는데, 여기는 북해도 남해도 아닌 중앙(中央)이다. 중앙의 왕 혼돈(混沌)이 숙과 홀을 위해 자리를 빌려주고 또 융숭히 대접하여 숙과 홀은 매우 흡족하였다.
두 왕들이 중앙의 왕에게 고마움의 사례를 하기로 하고 무엇을 선물할까 상의를 했다.
“모든 인간이 칠규(七竅= 일곱 구멍)가 있어 그것으로 감각하고 먹고 호흡하여 사는 것이오. 그런데 혼돈에게는 그것이 없으니 얼마나 답답하겠소. 우리 힘으로 그것을 뚫어주기로 하면 어떻겠소.”
“좋은 생각이오. 한꺼번에 일곱 구멍을 다 뚫으면 충격이 클 터이니, 하루 한 구멍씩 뚫어주기로 합시다.”
남해의 왕과 북해의 왕이 이렇게 합의하고 혼돈에게 선물을 보내기 시작했다. 하루 한 구멍…. 7일이 지나 마침내 칠규가 다 통하게 되었다. 두 눈을 떠서 보게 되고, 두 귀가 열려 듣게 되고, 콧구멍 두 개가 뚫려 숨을 쉬고, 입이 열려 먹고 말하는 일이 자유롭게 되었다.
“자, 이제 일곱 구멍이 다 트였으니 그대도 명료하게 살아보시오.”
하고 숙과 홀이 중앙의 왕 혼돈을 바라보다가 두 왕은 아연실색했다.
보지도 듣지도 냄새맡거나 말하지도 못한 채로 잘 살아있던 혼돈이, 칠규를 다 통하게 되자 죽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장자> 응제왕(應帝王)편에 나오는 우화다.
우리가 삶을 자각한다는 것에 대하여 생각해보게 된다.
숙(儵)은 ‘갑자기’라는 뜻이다. 개가 튀어나가듯 재빠르고 순발력이 있는 에너지다. 홀(忽)에도 갑자기라는 뜻이 있다. 급하게 빠르고 극적이며 예리한 것들을 의미하는 것 같다. 북해와 남해는 븍극과 남극, N극과 S극 같이 서로 상대적인 관계의 두 극단을 의미하며, 혹은 음과 양의 두 극단이다. 흑이거나 백이거나 그 어느 한쪽이기도 하다. 인간으로 말하자면 맞고 틀리다는 개념이 명학하고, 행동이 분명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좌거나 우거나, 혹은 머리거나 꼬리거나 그 입장이 늘 명료하다.
우리가 알기에 인간의 문명은 잘 모르던 것을 밝혀내고, 애매하던 것을 규명하여 분명한 지식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발전해 왔다. 아직 모르는 것, 애매모호하며 혼돈상태에 있는 것은 비문명 즉 야만의 상징이었다. 이런 혼돈상태를 하나씩 명석하게 규명하고 밝히는 것이 문명의 의미였다. 과학기술과 지식은 이러한 문명을 밝혀내고 불가능하던 것을 가능하게 하는 주요 수단이었다. 그러므로 명쾌하다는 것은 뛰어나고 앞선 사람들의 특징이었다.

장자(莊子)가 말하는 남해의 왕 숙과 북해의 왕 홀은 그 선도적인 인간의 메타포다. 이들이 지성의 세계를 지배하고 기술이거나 자본이거나 간에 극적인 성취를 이룬 인간의 상징이다. 두 극단은 서로 상대적이므로 종종 적대적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서로 많이 닮아있다. N극이 없는 S극은 존재할 수가 없으며 S극이 없는 N극도 존재할 수가 없다. 좌와 우, 음과 양은 그러므로 서로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 겉으론 상반되며 적대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두 극은 통하는 사이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했다.
남해와 북해의 두 왕이 만났다. 남해 왕이 북해에 갈 수 없고 북해 왕이 남해에 갈 수 없으니 중앙에서 만나야 하는데, 중앙의 지배자 혼돈이 융숭이 접대를 했다고 한다. 서로 상반된 입장에 있는 두 극의 만남이 중앙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자연스런 이치다.
우리는 흔히 명쾌함, 명료함을 숭상하고 혼돈스러움을 얕잡아 보지만, 이처럼 남해 편도 북해 편도 아닌 혼돈의 영역이 아니었다면 숙과 홀의 평화로운 만남과 소통은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중앙에서는 양극과 음극이 공존하고, 어느 것도 배척되지 않은 채 수용된다. 흑도 백도 아니거나 흑도 백도 포용되는 회색지대다. 중앙의 왕이 혼돈이라는 것도 자연스럽다. 그는 입장이 명료하지 않다. 명료하지 않으므로 북해와도 통하고 남해와도 통할 수 있으며 포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숙과 홀의 눈에는 이 혼돈의 경지, 회색지대가 안타까워 보였던 모양이다. 그들은 혼돈의 왕을 위하여 일곱 구멍을 뚫어주었다. 그런데 그 구멍을 다 명료하게 뚫어주었을 때 혼돈은 죽고 말았다.
혼돈은 본래 명료하지 않음 자체인데, 7규를 명료하게 하였으니 더 이상 혼돈이 존재할 수가 없을 것이다. 흑과 백만 존재하는 세상이 있을 수 있을까.
시간은 명료한 것들(이론과 입장)이 이끌어가는 것 같지만, 겉으로 그렇게 보일 분이다. 소수의 극단이 훨씬 큰 혼돈의 대중을 이끌어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대중은 역사의 몸통이다. 역사, 시간과 공간에도 생명이 있다. 시간도 태어나고 죽는 것 아닐까. 생태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역사는 그 자체의 욕망과 운명을 따라 흘러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NM
[대화당한의원, 한국 밝은 성 연구소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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