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19.12.12 목 16:23 전체기사 l 기사쓰기 l 자유게시판 l 기사제보 l 구독신청 l 광고안내 l 회사소개
> 뉴스 > 피플·칼럼
     
[박성서 칼럼]‘삼천포 아가씨’,‘영산강 처녀’의 작곡가, 송운선의 삶과 노래[2]
2019년 08월 07일 (수) 14:29:08 박성서 webmaster@newsmaker.or.kr

88세의 인생찬가, ‘나는 여전히 현역’

▲ 송운선 아코디언 음반과 가요명곡전집 표지

‘삼천포아가씨’, ‘영산강 처녀’, ‘채석강의 절경’, ‘지는 해가 아름다워’... 등등. 전국 각지에 세워진 여섯 개의 노래비가 그렇듯 노래는 물론 작곡가로써도 이름이 잘 알려져 있음에도 개인 활동은 비교적 일반 대중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 송운선 선생(88).

그는 음악 생활 60년 동안 가요계 현장에서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다. 가요계를 떠나서 외도한 적 또한 없다. 때문에 우리나라 방송작가 1호이자 작사가 유호 선생은 그를 ‘평생 놀지 못하도록 타고난 작곡가’라고 했을 정도다.

실제로 그의 활동 기록을 살펴보면 얼마나 열정적이고 적극적이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1960년대 파라마운트와 크라운 레코드사의 기획과 문예부 일을 도맡았고 원로작가들의 모임인 한국가요작가동지회 회장, 한국음악저작권협회 부회장, 한국연예협회 부이사장까지 역임했다.

어느덧 88세로 우리나라 가요계에서 최고 어른이 되었지만 여전히 현역이다. 최근에도 부지런히 관계자들을 만나고 가수를 키우고 곡을 쓴다.

평소 목소리 톤은 높지 않지만, 저력이 느껴지는 인물. 그 일관성과 부지런함….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결코 평범치 않은 작곡가 송운선 선생의 삶과 노래. 그 기록 속으로 들어가 본다. 그 두 번째.

글ㅣ박성서(음악평론가, 저널리스트)

데뷔 3년만에 ‘개인 작곡 악보집’펴낸 무서운 신예 작곡가

▲ ‘송운선 작곡집’ 목차와 당시 동아일보에 실린 세광출판사 발행 악보집 광고. 1961년

1950년대 후반, 우리나라에는 일명 ‘포켓용’으로 불리어지던 대중가요 노래책이 등장한다. 특히 기타가 점차 일반화되면서 ‘대중가요 악보집’ 또한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가지고 다니기 간편하게 주머니에 넣을 수 있는 크기의 책이라 해서 일명 ‘포켓판’으로 불린 이 노래책은 악보 전문출판사인 세광출판사가 처음 발행했다.

대중가요 노래책도 점차 다양해지고 세분화되면서 인기작곡가의 작곡집 출판도 러시를 이뤘다. 손목인, 박시춘, 이재호, 이인권, 전오승, 한복남, 손석우, 나화랑, 김부해, 황문평 작곡집 등등이 출판되기 시작했다.

가장 손때가 많이 묻어있는 책, 그만큼 당시 대중가요 악보집은 점차 소리 소문 없이 베스트셀러가 되어갔다. 이 개인 작곡집 출간 대열에 신예작곡가인 송운선 선생도 합류한다. 어느덧 인기작곡가가 되었다는 반증이리라. 1961년도의 일이다.

기타로 반주하며 노래할 수 있도록 코드를 표기한 이 악보집에는 ‘남국의 부르스(박재란)’를 비롯해 송운선 작곡의 노래 15곡이 수록되어 있다. ‘정처 없이 가리라(황금심)’, ‘대포집 부기(김용만)’, ‘정열의 폴카(이다향)’, ‘신의주 편지(박애경)’ 등이 수록된, 총 32쪽 분량으로 책값은 500환이었다.
이 책에서 눈에 띄는 또 하나의 악보가 ‘꽃 파는 차은희’라는 노래다. 특정 가수의 이름을 직접 제목에 사용했다.

가수 차은희는 지난 호에서도 밝혔듯 부산방송국 시절, 위문공연을 함께 다니던 동료 단원이었다. 또렷한 발성과 맑고 깨끗한 목소리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 노래의 주인공, 차은희(82)씨에게 당시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았다.

“벌써 60년이 훌쩍 지났네요. 그럼에도 처음 이곡을 받아 연습할 당시 송선생님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해요. 아주 야무시고 당찬 분이셨지요. 명랑하고 예쁜 노래이니 만큼 열아홉 아가씨의 순정 그대로 예쁘게 불러야 되겠다고 다짐하던 생각도 나고... 특히 제목에 제 이름이 직접 들어가 있어 개인적으로도 오랫동안 아끼던 소중한 노래였어요. 매사 열정이 넘치시던 선생님이 여전히 작곡활동을 계속하고 계시다니 감사하고, 또 뵙고 싶네요.” -치은희씨 목소리는 여전히 또렷하고 힘이 넘쳤다.

꽃들을 사세요 어여쁜 꽃을/언제나 향기롭고 싱싱한 이 꽃은 /행복을 빌어 준데요/나는야 꽃 파는 열아홉 아가씨/이 거리 저 거리로 노래를 부르면서/헤매입니다.
이 꽃을 보세요 정열의 장미/순정이 타오르는 이 꽃을 사면은/사랑도 꽃이 핀데요/새파란 리본을 저 바람에 날리며/오늘은 빌딩거리 내일은 다방거리/헤매입니다.
사세요 새빨간 순정의 칸나/볼수록 아름답고 말쑥한 이 꽃은/청춘의 꽃이랍니다/나는야 언제나 명랑한 노래에/실안개 헤치면서 거리를 떠다니는/천사랍니다. (월견초 작사, 송운선 작곡, 차은희 노래. 1960년 발표)

이 악보집에서 보듯 당시 최고의 히트메이커라고 할 수 있는 인기작곡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개인 작곡집을 낼 정도로 작곡 데뷔 3년 만에 무서운 신예로 등장한 송운선. 그는 이후 발표한 기타 연주음반과 아코디언 연주음반들이 증명하듯 이론과 실기가 탄탄한 실력자였다.

그는 또한 우리나라 최초로 ‘오디오 기타교본’을 낸 인물이기도 하다. 1980년대 당시 카세트 테이프가 일반 대중화 되는 것과 궤를 같이해 ‘눈으로 읽는 책에서 귀로 듣는 책’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걸고 출시된 ‘완전 입체 가요기타 교본(후반기출판사)’이 그것이다. 테이프와 책을 한 세트로 묶어 발매했다.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 최초로 시도된 오디오 기타교본으로 그 필자가 바로 송운선 선생이었다. 시대를 앞서 간 선구자였던 셈이다.

▲ 크라운레코드사에서 출시된 은방울자매 음반들

크라운레코드사, 은방울자매와 더불어 전성기 누려

작곡가 송운선 선생의 전성시대는 크라운레코드, 그리고 은방울자매와 함께 꽃 피운다. 크라운레코드사 대표는 박경원 사장으로 그의 장인이 청계천 세운상가에서 오랫동안 레코드점을 하던 김나팔(평소 말이 많아서 붙여진 별명)씨가 설립한 음반사였다.

“나는 크라운레코드사와 3년 계약을 맺고 음반 기획과 작곡을 맡았지요. 보통 1년에 서, 너 장씩 음반을 발표했는데 결국 크라운과는 13년 동안 같이 작업했어요. 크라운에서 발매되는 음반의 90%를 직접 기획, 작곡까지 했습니다.”

크라운의 간판스타가 바로 여성듀엣, 은방울자매다. 1963년에 첫 음반 ‘쌍고동 우는 항구(불로초 작사, 은방울자매 노래)’를 시작으로 ‘삼천포아가씨’, ‘무정한 그 사람’, ‘삭발의 모정’, ‘사랑은 괴로워요’, ‘요지경 서울’, ‘진달래 처녀’, ‘하동포구 아가씨’ 등 은방울자매를 타이틀로 한 음반만도 여러 장 출시되었다. 은방울자매는 크라운의 달러박스였다고도 했다.

이중 ‘삼천포아가씨’는 노래가 빅히트하면서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1966년 강찬우 감독에 의해서다. 이 노랫말을 모티브로 만든 영화였지만 노래 배경과는 줄거리가 달랐다. 삼천포를 배경으로 결혼 7년 만에 남편을 잃고 홀로 두 아들을 키우는 한 여성의 이야기를 담은 이 영화에서 황정순, 김승호, 신성일, 방성자가 주연을 맡아 열연했다. 은방울자매 또한 직접 출연해서 노래를 불렀다.

본래 이 노래는 작사가 반야월 선생이 작곡가 이재호씨 딸의 사연을 듣고 만든, 실화를 바탕으로 한 노래로써 보다 자세한 얘기는 다음호에 소개하기로 한다.

▲ 영화 ‘삼천포아가씨’와 ‘삭발의 모정’ 포스터

1965년에 만들어진 또 하나의 영화주제가가 ‘삭발의 모정(강대진 감독. 은방울자매 노래)’이다. 궁핍했던 60년대 시대상을 그린 눈물겨운 영화다. 영화포스터의 문구 그대로 ‘온 국민을 울린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어머니(황정순 분)가 전선에서 휴가 나온 아들(김운하 분)에게 쌀밥을 지어주기 위해 머리카락을 잘라 팔아야했던 사연을 담은 영화로 흰 수건으로 가렸지만 낌새를 알아차린 아들이 차마 밥을 넘기지 못한다는 상황을 리얼하게 그려 관객들의 손수건을 적시게 만들었다. 이 부분에서 주제가가 흐른다.

머나먼 전선에서 그 아들이 왔건만/밥 한 끼 못 먹이는 쓰라린 마음/헐벗은 살림살이 팔 것도 없어/머리카락 잘라서 팔아야 하나/아 눈물겨운 삭발의 모정.
머리에 수건 쓰고 감추려고 했건만/그 어이 모를소냐 단발한 머리/쌀밥에 고기반찬 말없이 보며/목이 메어 모자는 울고 말았네/아 눈물겨운 삭발의 모정. (김문응 작사, 송운선 작곡, 은방울자매 노래, 1965년)

“‘삭발의 모정’은 당시 서울 명보극장에서 개봉했는데 특히 주제가가 나올 때 관객들이 눈물바다를 이뤘던, 가슴 아픈 실화를 그린 영화였지요. 또 이 무렵 영화배우이자 감독인 최무룡씨가 사무실로 전화를 했어요. 제가 작곡한 ‘무정한 그 사람(은방울자매 노래)’을 자신의 영화에 삽입하고 싶다고. 물론 허락했죠. 이것이 인연이 되어 최무룡 감독이 직접 메가폰을 잡은 영화 ‘한 많은 석이엄마’ 주제가도 만들게 되었죠.”

세상살이 무정한데 님은 누구드냐/사랑에 버림받고 흘러온 이내 신세/남몰래 우는 사연 누구에게 호소하나/목메어 불러 봐도 아니 올 사람인데/왜 이다지 그리운가 한 많은 석이엄마.
이 세상을 원망할까 그 누굴 원망할까/정들어 지친 몸이 이대로 쓰러지면/철없는 어린 것은 누구를 믿고 사나/네온의 밤거리에 이 밤을 부르는데/나만 홀로 어이 사나 한 많은 석이엄마. -‘한 많은 석이엄마(김문응 작사, 송운선 작곡, 은방울자매 노래, 1966년)’

‘한 많은 석이엄마’는 최무룡 본인이 직접 출연하고 감독까지 맡은 영화로 김지미. 최남현. 남궁원. 전계현 등이 주연을 맡았다. 젊은 날의 일시적인 과오로 사생아를 낳고 ‘양색시’로 전락한 석이 엄마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린 비극적인 드라마다. 이밖에도 ‘엄마의 훈장’, ‘메마른 입술’ 등의 영화주제가를 썼다. 이 이야기는 다음 호에 계속 하기로 한다.

그는 크라운을 발판으로 영화주제가들은 물론 기획음반도 제작했다. ‘첫사랑에 취한 맛(반야월 작사, 송운선 작곡, 은방울자매 노래)’이 그것으로 포항포도주회사 측에서 직접 의뢰해온 홍보음반이다. 일종의 CM송 음반으로 크라운을 통해 1965년에 제작되었다.

그러나 거침없이 질주하던 송운선 선생의 활동이 한순간 급제동에 걸린다. ‘왜색가요 논란’의 중심에 섰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가 만든 노래들이 일순간 방송에서 자취를 감춘다.

▲ 송운선 작곡의 음반들, 1960년대

‘왜색가요 논란’의 중심에 서다

갑자기 방송에서 사라진 송운선 작곡의 노래들, 그 시작을 알린 기사 하나가 1965년 9월 11일, 동아일보에 실린다. ‘정화될 방송음악... 일색조(日色調) 일소(一掃)키로’라는 제목의 기사 내용은 이러했다.

“이달 초 각 방송국 음악과 대표들이 간담회를 한 적이 있다. 서울 중앙방송국, 기독교, 문화, 동아, 중앙라디오 등 5개국의 음악과 대표들은 그 자리에서 왜색조와 저속한 리듬, 멜로디의 음악은 방송에 내보내지 않기로 합의를 보았다. 그리고 오리지날이 분명치 않는 곡도 방송에서 삼가 키로 하였다.
이들이 방송을 내보내지 않기로 한 노래는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를 비롯하여 ‘여자가 더 좋아(최희준)’, ‘마도로스 부기(백야성)’, ‘쌍고동 우는 항구’, ‘삼천포아가씨’, ‘무정한 그 사람(은방울자매)’, ‘영등포의 밤(오기택)’ 등 7곡이었다. 일부 작곡가와 레코드 회사는 크게 반발하고 있다. ‘뭐가 저속하고 어디가 표절이냐’는 것이다. 어떤 작곡가는 이번 일로 못마땅해서 “앞으로 내 작곡을 절대 방송 못하도록 조치하겠다.”고 강력히 반발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이하 생략)”

말하자면 당시 자주 방송되던 노래 중 7곡을 ‘왜색’으로 규정, 방송에 내보내지 않겠다는 내용이다. 송선생의 노래는 심의 대상 7곡 중 무려 세 곡이나 포함되어 있다. 이를 신호탄으로 이른바 ‘왜색가요 금지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정말 이해가 안 되는 조치였습니다. 한국 사람인 내가 태어나고 자란 이 땅에서 순수한 내 감성으로 작곡한 일밖에 없는데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겁니다. 무엇보다 작곡가로써의 자존심과 명예가 한순간에 송두리째 날아갔죠. 어디에다 말도 못하고 기막힌 세상이었어요.”
당시 최고 히트곡인 ‘동백아가씨(이미자)’와 더불어 그의 히트곡들이 방송윤리위원회로부터 금지곡으로 지정된 때가 1965년 11월이다.

방송윤리위원회가 어떠한 단체인가. 5.16 직후인 1961년 7월에 설립된 이 방송윤리위원회는 이로부터 4년 뒤인 1965년 11월, 가요심의전문위원회를 설치한다. 이때부터 방송되는 모든 가요에 대해 광범위한 심의를 실시했다. 당시 심의기준을 이러했다.

첫째, 국가의 존엄과 민족의 긍지를 손상시킬 우려가 있는 가사와 창법의 노래는 방송하지 않는다.
둘째, 퇴폐적, 허무적, 염세적으로 현저하게 어두운 인상을 풍기는 가요는 피한다.
셋째, 아침과 심야의 가요 선곡은 그 생활시간에 적합하도록 특히 신중을 기한다.
넷째, 외국가요를 우리나라 가수가 부를 경우 그 가사는 번역해서 불러야 한다.
다섯째, 모티브가 같거나 모방이 짙은 것도 표절로 간주하여 방송하지 아니한다... 등이었다.

이 기준은 너무 광범위하고 모호해서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으로 시행될 우려가 컸고 실제로 그로 인한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바로 이러한 규정에 의해 많은 노래들이 ‘왜색’이라는 이유로 금지되었다. 심지어 ‘왜색창법’, ‘창법 미숙’이라는 사유도 등장했다. 과연 ‘왜색’의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당시 ‘왜색’이라는 이유로 많은 노래들이 무더기로 금지된 배경에는 아직까지도 확실히 규명되지 않은 몇 가지 설이 나돈다. 그 중 하나가 정치적 희생양 설. 당시 한·일국교를 맺을 즈음 치닫던 반일감정을 ‘왜색 근절’이라는 의지를 보임으로써 ‘민심 달래기용’으로 이용되었다는 설과 또 하나는 당시 정책구호였던 ‘재건’에 대한 ‘의욕 저하 설’ 등이 그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분석도 제기됐다. 다른 하나는 주위 음반사의 작용설이다. 연속되는 빅히트로 상대적으로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타 음반사가 극에 달한 ‘반일감정’에 편승, 심의실과 결탁해 여론몰이를 통한 ‘마녀사냥’에 나선 것이 아니겠느냐는 주장이다.

그렇듯 금지곡을 둘러싼 논란은 뜨거웠다. 특히 ‘타 음반사들 간의 모략설’은 가요계를 내분으로 까지 몰고 갔다. 특정 음반사의 세무조사도 도마 위에 올랐다. 당시 경향신문에 보도된 ‘레코드업체들 탈세, 지구 그랜드 등 입건’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자.

“‘동백아가씨’. ‘추풍령’ 등의 대중가요를 취입, 히트시킨 지구레코드공사 대표 임정수(42)씨와 그랜드레코드 대표 김능억(47)씨를 조세범 처벌위반 혐의로 입건, 총 2천8백68만7천7백10원의 각종세금을 포탈한 내막을 추궁 중이다. (중락) 또한 경찰은 등록도 안하고 ‘쌍고동 우는 항구’(은방울자매 노래) 등이 히트한 크라운레코드사와 ‘탑튠쇼’ 14집을 취입한 미미레코드사도 수사 중이다.” (1965년 8월 6일 자, 경향신문)

당시 이 기사에 대해 송운선 선생은 참으로 어이없다는 반응이다.

“크라운은 정식으로 문공부에 등록, 허가를 받고 레코드를 발매했던 음반사였어요. 당시엔 등록을 하지 않고 음반을 낼 수 있는 시절이 아니었지요. 그러나 누군가 이런 터무니없는 투서를 해서 경찰조사까지 받는 수모를 겪기도 했지요. 억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결과적으로는 이러한 금지곡 파동이 가뜩이나 열악한 가요계를 더욱 퇴보시킨 원인이기도 하죠. 정작 아이러니한 건 금지곡으로 지정되는 순간부터 대중들은 오히려 그 음반을 더 찾아요. 참으로 웃지 못 할, 희극의 시대였습니다.”

한편 작사가이자 가요평론가 김지평씨는 2001년에 발행된 ‘송운선 가요명곡전집(아름출판사 발행)’에서 ‘송운선은 ‘금지곡 조치 7대 피해지 중 한사람’이라고 말한다. 그 내용의 일부를 보자.

‘박정희 정권은 1965년부터 방송윤리위원회와 예술윤리위원회를 설치하고 예술 창작에 대한 통제 내지 제재(制裁) 조치에 들어갔다. 송운선은 바로 두 기관에 제재에 의한 ‘금지곡 조치 7대 피해 작가’ 중 한사람으로 꼽힌다. 트로트 계열의 백영호 송운선 고봉산, 포크 계열에서 김민기 한대수 이장희, 록 계열에서 신중현이 그들이다.’라며 1965년 12월부터 68년 8월까지 금지된 송운선의 곡은 무려 14작품, 15건에 이른다고 했다. 이어 그는 ‘비록 이 노래들은 대부분 ‘왜색’이라는 굴레를 쓰고 금지곡으로 묶였지만 1987년에 모두 해금되었다. 이 같은 금지조치는 애당초 명분이나 논리가 빈약했기 때문에 줄기찬 비판과 저항을 받아왔다. 결국 30년 걸려서야 비로소 제재 당했던 작품들과 작가들이 명예를 회복했던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다음호에 계속) NM

▲ 한국가요작가협회 회원들과 함께 한 고속전철(KTX) 시승식에서. 방송인 송해, 작사가 반야월. 작곡가 김병환, 정주희, 신대성, 박성훈, 이동훈씨 등의 모습이 보인다. 우측에서 일곱 번 째가 작곡가 송운선. 2002년 4월

 

박성서의 다른기사 보기  
ⓒ 뉴스메이커(http://www.newsmaker.or.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전체기사의견(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전체기사의견(0)
뉴스메이커About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우)110-999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문로1가 163 광화문오피시아빌딩 14층 뉴스메이커 | 전화 : 02-733-0006 | 팩스 : 02-733-0009
청소년보호책임자 : 안상호
뉴스메이커는 (주)뉴스메이커에서 발행하는 시사종합월간지로서 특정언론과는 전혀 무관한 완전한 자유 독립 언론입니다.
뉴스메이커를 통해 제공되는 모든 콘텐츠(기사 ·사진)는 무단 사용, 복사, 배포시 저작권법에 저해되며,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Copyright 뉴스메이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newsmaker.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