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19.12.8 일 12:40 전체기사 l 기사쓰기 l 자유게시판 l 기사제보 l 구독신청 l 광고안내 l 회사소개
> 뉴스 > 국제·통일
     
테러지원국, 납치국으로 오명을 쓰고 있는 북한
그간 그들의 테러는 어떤 형태로 자행돼 왔는가?
2009년 09월 01일 (화) 17:58:14 김용진 기자 a1b2n3@gmail.com

전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인 한국. 앞으로 전 세계에 분단국가가 사라질 날이 과연 언제일까? 북한 정권이 곧 붕괴될 것이라는 발표도 여럿 있었지만 올해 초 북한은 미사일 발사와 함께 김정일 정권의 건재함을 알리며 이러한 주장들을 불식시켰다. 전쟁 직후에는 북한의 경제력이 남한보다 앞선 편이었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남한은 눈부신 성장을 보인 데 반해 북한의 경제력은 제자리걸음과 함께 군사력으로 나라 경제가 집중되면서 북한 주민들의 생활을 그야말로 비참한 지옥으로 치닫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전쟁 이후부터 북한은 남한을 향해 지속적인 테러를 자행해 왔다. 어떠한 형태로든 테러는 있을 수 없고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지만 북한의 그 독특한 성격과 우리나라 및 세계 각국의 이해관계가 얽히면서 그들의 테러는 뚜렷한 해결책으로 도달하지 못했고 최근에야 그들의 미사일 도발 등은 경제제재 등의 압박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지난 1999년에는 북한의 고의적인 NLL 침범으로 서해교전까지 벌어지면서 긴장감이 극도로 치솟았지만 우리 군의 월등한 군사력으로 북한 해군을 격퇴함으로써 북한을 긴장시킨 사례도 남아 있다. 휴전선으로 한 나라가 두 나라로 갈라진 이후 북한은 어떠한 형태의 테러를 자행해 왔으며 그 형태는 해가 바뀔수록 어떤 형태로 변화했는지 알아본다.
   

해방이후 1990년대까지 북한이 자행한 테러의 특징은 시기별로 크게 6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즉, 해방부터 한국전쟁 발발이전, 1950년대, 1960년대, 1970년대, 1980년대, 그리고 1990년대이다. 그리고 테러의 형태와 양상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주요 요인 암살에서, 항공기 납치, 대통령 암살, 대규모 무장공비 침투, 민간 여객기 공중폭발, 국제행사 방해를 통한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고립화, 귀순자 및 해외주재 한국외교관 피살 등으로 점차 대담성과 그 잔인성을 더해가고 있다. 이러한 북한 테러의 특징을 시기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해방부터 한국전쟁 발발이전까지이다. 이 시기는 미군정과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2년간이 포함되나, 대남 테러와 관련한 사항은 주로 한국전쟁 이전인 미군정과 정부수립 이후부터 한국전쟁 발발이전까지이다. 이 시기 주요 테러사건으로는 현준혁 암살, 제주 4ㆍ3사건, 여순 10ㆍ19사건, 그리고 이승만 박사 저격을 비롯한 남한 내 주요 요인 암살기도였다. 북한은 비밀공산당원이나 남파된 간첩을 통해 공산정권수립에 궁극적인 목적을 두고 이에 반대하는 남한 내 반공 세력에 대한 테러 및 전복활동을 주로 실시했다. 두 번째로 한국전쟁이 포함된 1950년대이다. 이 시기 북한은 한반도 분단체제가 고착된 상태에서 본격적으로 테러를 시작하는 시기였으며 기간 중 주요 테러는 1958년 항공기 납치 사건을 들 수 있다. 이 시기 테러의 특징은 북한이 한국전쟁이 패인을 분석하면서 그 대안으로 테러리즘의 기반을 강화했다는 점이다. 이 때 북한은 테러를 위해 직접 공작원을 남파하여 비행기를 납치 등을 주도해 남한 사회에 커다란 혼란을 초래했다.
   
▲ 1974년 8월 15일 재일 교포 문세광이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하는 사건이 발생,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총에 맞고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대통령 저격, 여객기 폭파 등 더욱 잔인해지는 테러수법
세 번째는 한국이 경제개발을 추진하고 자주국방체제를 마련하는 과정에 있었던 1960년대이다. 북한은 1960년대부터 테러를 노동당의 주요 사업으로 계획해 추진했다. 즉 1961년 9월 제4차 노동당 대회 결의서에서 대남 테러를 통해 한국 체제를 약화시켜 한반도를 적화 통일한다는 의도를 분명히 했으며 1962년 노동당 제4기 8차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의 지시와 1965년 노동당 창설 20주년에 즈음한 김일성 축사를 통해서, 그리고 1966년 제4기 14차 전원회의에서 테러 노선을 분명히 했다. 이러한 북한의 테러정책의 배경은 공산주의자들이 테러 전술을 게릴라전과 함께 무장 폭력봉기를 혁명전쟁으로 확대시키는 결정적 요소로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1960년대 북한의 테러는 이러한 목적과 의도 하에 추진됐다. 이에 북한은 한국의 경제 발전상을 보고 위기감 속에서 남한의 혼란과 무력적화통일을 조기에 실현시키기 위해서 대통령을 암살하고 한ㆍ미연합방위태세를 약화시키며 후방지역을 교란할 목적으로 청와대 기습, 미 정보함 푸에블로호 납치, 울진ㆍ삼척무장공비 침투 등 전쟁에 버금가는 테러행위를 자행했다. 네 번째로 1970년대는 남북한 간의 경제 발전의 격차가 심화되고 한국의 자주국방체제가 확립되는 시기였다. 이 시기 북한의 테러행위는 최고조에 달했다. 북한은 특수공작원은 물론이고 재일교포까지 끌어들여 남한의 국가 지도체제 말살과 정치혼란을 야기시키기 위해 두 차례에 걸쳐 박정희 대통령 암살을 기도했으나 실패했다. 이는 국립현충문 폭파사건과 8ㆍ15광복절 대통령 저격사건이다. 특히 8ㆍ15 대통령 저격사건으로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서거하는 비극을 맞기도 했다. 다섯 번째, 1980년대도 북한의 대남 테러는 1970년대의 연장선상에서 최고의 극치를 이루었다. 1981년과 1983년 두 차례에 걸쳐 캐나다와 미얀마를 국빈 방문 중인 전두환 대통령을 암살하려 했으나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그러자 북한은 ‘86 아시안 게임’ 및 ‘88 서울 올림픽’ 개최를 방해하기 위해 김포공항 폭파사건과 대한항공 858기 폭파사건을 일으켰다. 이 시기 북한의 테러 목적은 대통령 암살과 남한의 정치, 경제, 사회 질서를 파괴해 그들의 혁명전략을 완성시키려는 것이었다. 여섯 번째로 1990년대 북한은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련의 붕괴와 김일성의 사망, 그리고 북한 내 3중고로 인해 내부붕괴의 조짐을 보이는 시기였다. 이 시기 북한은 이러한 체제결속 및 내부단결을 위해 테러행위를 자제하다가 어느 정도 체제강화가 완료된 시점인 1996년부터 강릉무장공비 침투와 1999년 NLL 침범, 그리고 귀순자 이한영과 러시아 한국영사 피살 등 테러를 자행했다. 이는 남한 사회를 불안케 하고, 북한 체제의 결속을 유지하면서 북한 이탈세력인 반북 요원에게 공포감을 주어 귀순을 막으려는 의도로 분석되고 있다.
   

1968년 청와대 습격사건
1974년 8ㆍ15 대통령 저격사건
조금이라도 나이가 있으신 분이라면 ‘김신조’라는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1968년 1월 21일 북한 제124군부대 특수요원에 의해 자행된 청와대 습격사건은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함으로써 남한을 혼란에 빠뜨려 적화통일의 계기로 삼으려는 의도 하에 특수훈련을 받은 북한군 31명이 1968년 1월 17일 밤에 비무장지대로 침투하면서부터 시작됐고 그 북한군 중 유일한 생존자가 바로 김신조였던 것. 1968년 1월 21일 밤 10시경 북한군 제124군부대 소속 무장공비 31명이 휴전선을 넘어 침투하여 대통령 관저인 청와대를 습격하려다가, 비상근무 중이던 경찰 검문에 걸리자 기관단총을 난사하고 4대의 시내버스에 수류탄을 던져 승객들을 살상하는 만행을 자행했다. 이날 밤 대간첩작전을 지휘하던 서울종로경찰서장 최규식 총경을 비롯하여 7명의 군경과 민간인이 북한 무장공비들에 의해 살해당했다. 이에 군은 즉각 제6군단장 책임 하에 군경 합동작전으로 무장공비들을 추격 및 포위작전으로 소탕작전을 펼친 끝에 2월 3일까지 31명의 공비 중 1명을 생포하였고 도주한 2명을 제외한 28명을 사살했다. 이들 무장공비가 침투한 목적은 대통령관저 폭파와 요인 암살, 주한 미대사관 폭파와 대사관원 살해, 육군본부 폭파와 고급지휘관 살해, 서울교도소 폭파, 서빙고 간첩수용소 폭파 후 북한간첩 대동 월북 등이었다. 이 사건은 생포된 김신조의 자백에 의해 그 전모가 드러났다. 대한민국 국가원수를 테러 대상으로 삼은 사건으로서 북한의 적화통일을 위한 폭력 혁명전략의 일환으로 우리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이에 정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국방력 강화와 250만 명의 향토예비군 창설, 방위산업공장의 설립을 서둘러 추진하게 되었다. 또한 미국에서는 사이러스 밴스 미국대통령 특사가 2월 11일 방한해 양국간 안전보장을 위한 공동성명이 발표되었고, 5월 27일부터 이틀간 워싱턴에서 제1차 한ㆍ미 국방장관 회의가 개최되어 연례화하는 계기를 조성했다. 그리고 한국정부는 북한의 남파 게릴라 침투에 대비하여 군내에 공비전담 특수부대를 편성했으며 전방에는 155마일 휴전선에 철책을 구축했고 정부정책기조를 경제개발과 동시에 자주국방을 기틀을 강화하는 국방정책을 추진했다.
   

그 후 만 6년도 지나지 않은 1974년 8월 15일 광복절날 발생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저격미수사건은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거행되는 8ㆍ15 경축식전에 귀빈을 가장하고 잠입한 재일 교포 문세광이 광복절 경축사를 낭독중인 박정희 대통령에게 권총으로 저격하려다가 실패하고 붙잡힌 북한의 대표적인 테러 저격 사건이었다. 경축식장 1층 뒤쪽의 해외교포석에 자리 잡고 있던 저격범 문세광은 10시 20경 좌석에서 갑자기 일어나 박 대통령을 향해 저격했는데 1탄은 불발이었고 2탄은 박대통령이 사용 중이던 연설대 우측에 맞았으며 3탄이 단상에 앉아 있던 대통령 영부인 육영수 여사의 두부에 맞았는데, 육 여사는 경호원들과 여자 합창단원의 부축을 받고 서울대학병원으로 긴급 이송되었다. 박 대통령은 저격범이 체포된 뒤에 태연히 경축사를 계속 낭독했고 경축식전은 예정대로 끝났다. 그러나 불과 22초라는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대통령 부인 육영수 여사는 5시간에 걸친 수술을 받았으나 오후 7시경 49세를 일기로 운명했다. 그리고 합창단원의 한 사람인 성동여자실업고등학교 학생인 장보화 양이 경호원이 쏜 총탄에 희생됐다. 8ㆍ15 저격사건은 범인 문세광이 재일 교포이고 그가 범행에 사용한 권총이 일본 경찰에서 훔친 것이며, 그가 입국시 사용한 여권이 일본 정부가 발행한 여권이라는 점에서 한일 관계에 큰 파문을 던졌다. 박 대통령 저격사건 수사본부는 17일 밤 저격범 문세광이 북한의 지령에 따라 박대통령을 암살하려 했다고 발표하였다. 김일두 수사본부장은 문세광이 김일성의 지령에 의해 북한과 일본을 왕래하는 북한 선박 만경봉호에 승선하고 있는 성명 미상의 북한 공작지도원과 조총련 소속 김호룡의 지시에 따라 움직여 왔음을 자백했다고 밝혔다. 이어 김 본부장은 범인 문세광이 이들로부터 거사 자금조로 2차례에 걸쳐 130만 엔을 받았으며, 당초에는 1974년 3월 1일 경축식전에서 범행을 하려하다가 총기 구입이 여의치 않아 8월 15일로 연기했던 것이라고 밝혔다. 수사결과 대통령 저격사건이 문세광의 자백으로 조총련의 지령 하에 이루어진 사실이 밝혀졌고, 범인 문세광은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돼 1974년 12월 21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에게 적용된 죄목은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목적 살인, 살인미수, 출입국 관리법 위반 등이었다.
또한 국내가 아닌 국외에서 있었던 북한의 테러 중 가장 큰 테러로 손꼽히는 아웅산 국립묘지 암살 테러사건은 1983년 10월 9일 자행됐다. 미얀마를 친선 방문 중이던 전두환 대통령 및 수행원들의 아웅산 국립묘소 참배를 이용, 암살하기 위해 사전에 이 묘소 건물 천장에 설치한 북한은 원격조종폭탄을 폭발시켜 한국의 부총리와 장관 등 수행원 17명을 순국케 하고 14명을 부상시키는 천인공노할 테러를 감행했다. 미얀마 당국의 수사결과 이 사건은 북한 독재자 김정일의 친필지령을 받은 북한군 정찰국 특공대 소속 진모(某) 소좌, 강민철 대위, 신기철 대위 등에 의해 저질러진 것으로 밝혀졌다. 미얀마 정부는 이 사건의 수사를 매듭지으면서 11월 4일 북한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하는 한편, 양곤에 있는 북한대사관 직원들의 국외추방을 단행했고 그 뒤 12월 9일 양곤지구 인민법원 제 8특별 재판부에서는 테러범에 대한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이 사건으로 코스타리카, 코모로, 서사모아 등 3개국이 북한과의 외교를 단절했으며 미국, 일본 등 세계 69개국이 대북한 규탄성명을 발표했다. 또한 11월 13일 미국 레이건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 최전방을 이례적으로 시찰하는 등 한ㆍ미 공동 자유수호 결의를 재확인했다.

단순한 납치였던 60년대, 80년대에는 무조건 폭파
   
▲ 대한항공 858기 공중 폭파 테러사건을 일으킨 테러범 김현희가 국내로 압송 직후 공항에서 내리는 모습. 그녀는 재판을 받고 사형이 선고됐으나 전향의사 표명, 김정일의 도구였던 점이 참작돼 사면받았다.
북한에 의한 항공기 테러는 1980년대를 기점으로 크게 변하고 있다. 1980년대 이전에는 단순한 항공기 납치 등 항공기를 이용한 테러이었으나, 1980년대부터는 그 수법이 항공기 폭파라는 반인류적ㆍ반문명적 형태로 나타났다. 또한 그 목적도 인질 납치 및 항공기 억류에서 대량 인명 살상 등을 통한 남한의 불안한 상황을 세계에 알려 한국을 고립시키고 나아가 한반도의 긴장을 조성하려는 것이었다. 특히 국제행사인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북한이 행한 1987년 대한항공 858기 공중 폭파사건은 서울 올림픽을 방해할 목적으로 저지러진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항공기 납북사건은 1969년 12월 11월 12시 25분 강릉발 서울행 대한항공 소속 YS-11기가 승객 47명과 승무원 51명을 태우고 대관령 상공을 비행 중 고정간첩인 조창희에 의해 강제 납북된 사건이었다. 그러나 북한은 동 여객기가 월북한 다음날인 동년 12일 착륙지점을 밝히지 않고 “두 조종사에 의한 자진 입북”이라는 간단한 보도만 내보냈다. 정부는 즉시 이러한 북한의 공중 해적 행위를 규탄하고 기체와 승무원 및 승객 전원의 송환을 촉구하는 한편, 국제적십자사를 비롯한 국제기구에 송환을 협조해 줄 것을 요청했으며 납북행위 자체가 군사정전협정에 위반되는 것임을 지적하고 군사정전위원회를 통한 송환교섭도 아울러 벌였다. 그러나 우리의 성의 있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기체와 51명의 탑승객을 감금해 놓고 미리 조작한 각본대로 대응했다. 12월 20일 북한은 조종사의 기자회견을 보도했는데 그 내용은 조종사 유병하와 부조종사 최석만은 12워 11일 우연하게도 같은 조로 편성돼 강릉을 갔다 오게 되었으며 이들은 군대에 있을 때부터 이심전심으로 서로 뜻이 통했기 때문에 자신 월북을 결행했다는 것이었다. 북한 기자들의 질문도 한결 같이 월북을 정당화할 수 있는 질문이었고 두 조종사는 각본대로 북한 현실의 찬양과 한국 실정의 왜곡선전으로 시종일관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후 1969년 12월 25일 북한 중앙통신사는 성명을 발표, 인질외교의 본색을 드러냈다. 그들은 성명에서 조종사에 의한 의거 입북을 기정사실화하고 국제적십자사 제3자의 개입 없이 그들이 지정한 민간대표들과 직접 소환교섭을 벌이자고 정치적 흥정을 교섭했다. 그 후 북한은 1970년 2월 5일 납북승객을 송환하겠다고 국제적십자에 송환 통보를 하고 지정한 날짜가 지나도록 송환하지 않았다. 1970년 2월 14일 오후 5시 탑승자 51명 가운데 39명이 판문점을 통해 납북 65일 만에 다시 자유의 품으로 돌아왔다. 이날 39명의 귀환승객들은 저녁 8시가 넘어 서울에 도착했고 다음날인 15일 오후 기자회견을 통해 KAL기 납북경위와 북한의 만행을 폭로했다. 승객들은 사건 당시 항공기가 대관령 상공에 이르렀을 때 객석 앞자리에 앉아있던 조창희가 갑자기 조종실로 들어간 직후부터 방향이 바뀌는 것을 느꼈고, 동해 상공에 이르렀을 때 2대의 북한 전투기가 KAL기를 호위한 것을 보고 나서 납북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증언했다. 북한은 민간항공기의 범죄적 납북을 은폐하기 위해 두 조종사에 의한 의거 입북을 주장하면서 필요 이상으로 많은 인원을 억류함으로써 진상이 폭로되지 않도록 하고 있었던 것이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북한이 행한 대한항공 858기 공중 폭파 테러사건은 전 세계를 경악시킨 초유의 사건이었다. 대한항공 858기 공중 폭파 테러사건은 1987년 11월 28일 밤 이라크의 바그다드를 출발한 대한항공 858기가 아랍 에미리트의 수도 아부다비에 기착한 뒤 방콕으로 향발하는 도중 북한 공작원 김현희가 사전 장치한 폭탄에 의해 공중 폭파된 것. 이 여객기는 11월 29일 14시 1분 미얀마의 벵골만 상공에서 방콕공항에 “45분 후 방콕에 도착하겠다. 비행 중 이상 없다”는 보고를 무선으로 보낸 것을 끝으로 소식이 끊어졌다. 이 여객기에는 중동에서 귀국하던 한국인 근로자 등 승객 93명과 외국인 2명, 승무원 20명 등 모두 115명이 탑승하고 있었다. 이 여객기 잔해가 태국 해안에서 발견되었다고 태국 내무부가 발표했고, 30일 오후 858기의 추락이 공식적으로 발표됐다. 12월 1일 사고 비행기에 한국입국이 금지된 ‘요주의 인물’인 일본인 2명이 탑승했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수사는 급진전되었다. 문제의 두 일본인은 ‘하치야 신이치’와 ‘하치야 마유미’라는 여권을 가진 남녀로 바그다드에서 탑승한 뒤 아부다비 공항에서 내렸으며 이중 마유미의 여권은 위조여권임이 바레인 공항에서 밝혀졌다. 이들은 바레인에서 요르단으로 탈출하려다 위조여권 적발로 체포되자 담배 속에 숨겨둔 독극물을 삼켜 자살을 시도하여 남자는 숨지고 여자는 중태에 빠졌다. 한국으로 신병이 넘겨진 ‘마유미’는 중국어와 일본어를 사용하며 중국인 행세를 해오다가 12월 23일 범행을 자백했는데 본명이 김현희이며 당 대외정보조사부 소속 공작원으로서 음독자살한 김승일과 함께 “88 서울 올림픽 개최 방해를 위해 KAL기를 폭파하라”는 북한 김정일의 친필 공작명령을 받고 기내 좌석선반에 라디오와 술병으로 위장한 폭발물을 놓고 내려 공중에서 폭발하도록 했던 것이다. 그 후 김현희는 1990년 3월 27일 재판을 받고 사형이 선고됐으나 전향의사 표명과 김정일의 도구로써 이용된 점이 정상 참작되어 1990년 4월 12일 대통령 특별사면으로 석방됐다.

전 세계인들을 대상으로 한 납치
   
북한은 휴전이후 지금까지 해상, 공중, 해외에서 모두 470여 건에 걸쳐 3,738명에 이르는 남한 인사들을 납치했고 대부분은 사상 세뇌교육과 간첩교육을 시킨 후 돌려보냈으나 아직까지 수많은 인질을 억류하고 있는 세계적인 납치 테러국으로 통하고 있다. 북한은 한국인 납치뿐 아니라 1970년경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노동당 작전부내에 외국인 납치조직을 만들어 놓고 전 세계 외국인에 대해서도 납치를 행하고 있다. 미국의 아시아 감시위원회와 미네소타 변호사 국제인권위원회가 1988년에 펴낸 <북한의 인권>에 의하면 1970년대 초 5명의 레바논 여인이 평양에 끌려가 프랑스, 이탈리아, 네덜란드 등 여러 나라에서 납치되어온 여인들과 함께 간첩교육을 받았다고 밝히고 있으며 1978년 홍콩에서 납치된 최은희, 신상옥 부부도 평양초대소에서 마카오로부터 끌려온 중국인과 요르단 여인을 만났다고 폭로했다. 북한은 특히 일본인에 대한 납치공작도 끊임없이 자행하고 있다. 이 가운데 KAL기 폭파범 김현희에게 일어를 가르쳤던 다구찌 야에꼬(78년 피납)와 일본 중의원에서 폭로되어 일ㆍ북간 외교 문제화로 커진 요꼬다 메구미(니이가다현 거주, 77년 피납당시 13세 중학생), 그리고 현재 북한에 생존하고 있는 것으로 최종 확인된 데라코에 다케시(63년 피납당시 13세 중학생) 등이 납치사건의 대표적인 희생자들이다. 한국인에 대한 납북사건중 대표적인 사례 가운데 하나는 1969년 12월의 대한항공소속 YS-11기 공중 납북사건이다. 북한은 당시 고정간첩 조창희를 시켜 강릉 대관령 상공에서 승객과 승무원 총 51명을 태운 KAL기를 공중 납치했다. 이들 중 여승무원 정경숙과 성경희 등 12명은 아직도 북한에 억류되어 있는 상태다. 북한은 또한 서해나 동해의 휴전선 부근에서 어로작업 중이던 어부 3,662명과 해군 20명 등 총 3,682명을 납치했는데, 1987년 1월 동진호가 백령도 부근에서 조업 중 북한 무장경비정에 의해 납치됐으며, 선장 김순근씨와 어로장 최종석씨 등 선원 12명은 지금까지도 억류돼 있다. 해외에서의 한국인 납치는 1978년 1월과 7월 홍콩에서의 영화배우 최은희, 신상옥 부부 납치, 1979년 노르웨이 연수중이던 전(前) 수도여고 교사 고상문씨 납치(1995년 8월 국제사면위원회에 의해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된 것으로 판명), 1995년 7월 중국 연길시에서의 순복음교회 안승운 목사 납치 등을 들 수 있다. 1983년 10월 19일 노동당 중앙당 청사 내 김정일 집무실에서 김정일이 납치되어온 최은희에게 “납치명령을 내가 내렸다”고 실토했듯이, 북한의 주요한 납치 및 테러공작은 김정일이 직접 지휘했던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한편 국가안전기획부는 “지난 1987년 미국 유학 중 납북된 것으로 알려진 이재환씨를 비롯해 납치 및 월북자 22명이 북한 정치범수용소에 수감중인 것으로 확인됐으며, ‘특별독재대상구역’ 등 다양한 호칭으로 함경남도 요덕, 함경북도 회령 등 산간오지에 10개의 정치범수용소를 설치, 20여만 명을 재판절차 없이 집단 수용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또한 앞으로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될 납ㆍ월북자의 정확한 숫자와 소재지를 공개토록 북한당국에 요구하고, UN인권위원회와 국제사면위원회(AI) 등 국제기구에 진상조사를 촉구할 계획이라고 밝힌 바 있다. 북한은 또 쌀 수입 대금 수천만 달러를 빼돌린 혐의로 태국 주재 북한 대사관 과학기술 참사관 홍순경 일가를 강제로 납치 북송하려다 실패했다. 이에 태국정부는 기자회견을 통해 ”홍순경씨 납치는 태국 주권과 국내ㆍ국제법 및 1961년 체결된 빈 국제협약에도 위배되는 것“이라면서 ”북한 측의 조속한 공식 사과와 함께 이 같은 사건이 재발되지 않도록 약속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북한은 처음에는 특사를 파견해 사건을 무마시키려 했으나 태국과의 2차례의 협상을 마친 후 ”북한 측은 홍씨 집 불법침입과 일가족 납치가 태국관리들에 의해 저질러진 것이며, 북한 외교관들은 아무런 책임이 없다“며 자신들의 개입을 전면 부인하면서 강경 자세로 일관했다. 이는 북한 측이 전형적인 전술로 북한 공관원들의 형사적 책임을 면해보려는 술책으로 보인다. 북한이 이처럼 국제적 비난을 무릅쓰고 납치행각을 벌이는 목적은 첫째, 북한방문 외국손님들을 접대케 한 후 첩보를 수집토록 하려 함이고 둘째, KAL기 폭파범 김현희의 일어교사였던 일본인 다꾸찌 야에꼬와 같이 해외공작 지도원으로 활용하기 위해서이며 셋째, 납치한 한국인들에 대해 세뇌교육 및 간첩교육을 시켜 한국에 남파시켜 파괴공작에 활용하기 위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밖에도 북한의 테러는 1967년 경원선 철도 폭파 테러, 1968년 미 정보함 푸에블로함 납치 테러, 1974년 해결 제863호 경비정 공격, 1978년 광천지구 무장공비 침투테러, 1983년 대구 미문화원 폭파테러 등 지속적으로 테러를 자행하고 있다. 과연 언제까지 북한은 테러지원국, 납치테러국이라는 오명과 함께 세계 각국으로부터 비난과 경제제재를 받을 것인가? 같은 민족이기에 한편으로는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지만 같은 민족의 인명을 살상하고 오랜 기간 동안 가족들과 생이별시키는 그들을 과연 안쓰럽게만 바라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최근 현정은 회장이 직접 북한을 방문해 한동안 경색됐던 남북관계가 약간의 호전 기미를 보이고는 있지만 현재 후계자설이 나돌고 있는 북한이 뒤숭숭한 기운을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언제 어디서 다시 테러를 일으킬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우리도 철저히 대비해야 할 것이다. NM

 

김용진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 뉴스메이커(http://www.newsmaker.or.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전체기사의견(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전체기사의견(0)

뉴스메이커About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우)110-999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문로1가 163 광화문오피시아빌딩 14층 뉴스메이커 | 전화 : 02-733-0006 | 팩스 : 02-733-0009
청소년보호책임자 : 안상호
뉴스메이커는 (주)뉴스메이커에서 발행하는 시사종합월간지로서 특정언론과는 전혀 무관한 완전한 자유 독립 언론입니다.
뉴스메이커를 통해 제공되는 모든 콘텐츠(기사 ·사진)는 무단 사용, 복사, 배포시 저작권법에 저해되며,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Copyright 뉴스메이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newsmaker.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