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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형의 100년의 기록 100년의 교훈
2019년 04월 04일 (목) 07:21:40 김정형 webmaster@newsmaker.or.kr

■김용옥의 KBS 방송 발언으로 되돌아본 해방정국의 신탁·반탁 소용돌이

김용옥 한신대 석좌교수가 지난 3월 16일 방송된 KBS1 TV ‘도올아인 오방간다’에서 “전 국민이 일치단결해 신탁통치에 찬성했으면 분단도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해방과 신탁통치’를 주제로 진행된 이날 방송에서 김 교수는 “김일성과 이승만은 소련과 미국이 한반도를 분할 통치하기 위해 데려온 인물들”이라며 “일종의 퍼핏(puppet), 괴뢰”라고 말했다. 신탁과 반탁이 격렬하게 충돌한 해방정국 상황을 살펴본다.

신탁통치안에 가장 강력하게 저항한 세력은 김구를 중심으로 한 임시정부 세력

‘워싱턴 25일 발(發) 합동 지급보(至急報)’라는 설명과 함께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 점령.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이라는 기사가 실린 것은 1945년 12월 27일자 동아일보 1면이었다. 수개월 전부터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신탁통치설이 마침내 그 실체를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소련보다 미국이 신탁통치를 먼저 구상하고 언급했다는 점에서 이 기사는 오보였다. 정확히 말하면 동아일보가 오보를 냈다기보다 외국의 뉴스통신사가 오보를 낸 것을 동아일보가 그대로 받아 기사화한 것이다. 기사는 당시 모스크바에서 열리고 있는 미·영·소 3국의 외무장관 회담 결과가 발표되기 이틀 전의 기사였기 때문에 회담의 공식 발표라기보다 전형적인 ‘~했다더라’ 식의 풍문 기사였다.
흔히 ‘모스크바 3상회의’로 알려져 있는 3개국 외무장관 회담은 1945년 12월 16일부터 27일까지 미국의 제임스 번즈 국무장관, 소련의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외무장관, 영국의 어니스트 베빈 외무장관 등 3명이 미진한 전후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모스크바에서 회동한 회담이었다.
유럽과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처리 방안도 함께 논의한 이 회담에서 조선에 관한 내용은 7개항의 협정문 중 제6항의 4개 조항에서 다뤄졌다. 12월 27일 발표된 요지는 조선에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 미소 공동위 구성, 5년 이내 신탁통치 실시, 2주 내 남북 주둔 군사령부 대표자회의 개최였다.

▲ 1945년 12월 31일 열린 우파 정치 세력의 반탁 집회(왼쪽)와 1946년 1월 3일 열린 좌파 정치세력의 찬탁 집회

미·영·소·중에 의한 한반도 신탁통치안이 12월 28일 라디오를 통해 국내에 알려지자 한반도 남쪽에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가 쳤다. 좌·우 할 것 없이 실망과 비분강개로 들끓었고 광복의 환희는 4개월 만에 비탄과 공분으로 바뀌었다. 극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은 해방이든 통일 독립국가이든 결국 국제 정치의 산물이라는 점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신탁통치안을 납득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신탁통치안에 가장 강력하게 저항한 세력은 김구를 중심으로 한 임시정부 세력이었다. 그들에게 신탁통치는 일제에 이은 미·영·소 3국에 의한 재식민지화와 다름없었다. 임정 측은 12월 28일 국무회의를 긴급 소집, 4개항의 반탁 결의문을 4개국 원수에게 보내고 ‘신탁통치 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를 결성하기로 의결했다.
12월 31일 시작된 대규모 반탁운동에 따라 시내 상점은 철시하고 파업과 반대 시위가 이어졌다.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좌·우 구분 없이 모두가 한 목소리였다. 김구는 한 발 더 나아갔다. 12월 31일 임시정부 내무부를 통해 발표한 포고문에서 “현재 미 군정에 속해 있는 모든 관리는 앞으로 임시정부에 예속된다”고 선언했다.
미 군정은 이를 쿠데타 음모로 받아들였다. ‘주한미군사’에 따르면 미 군정 책임자 존 하지 중장은 이튿날 김구를 미 군정청으로 불러 “나를 속이면 죽여 버리겠다”고 협박했다. 치열한 기싸움 끝에 파업을 중단하기로 합의했지만 둘 사이의 관계는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반탁 대회가 갑자기 찬탁 대회로 둔갑하는 해프닝 벌어져

이처럼 온 겨레가 한목소리로 반탁을 외치고 있을 때 1946년 1월 2일 평양의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과 그 산하단체들이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 지지 공동성명서’를 통해 돌연 반탁에서 찬탁으로 태도를 바꾸면서 해방정국에 또다시 거센 소용돌이가 일어났다. 이 때문에 1월 3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릴 예정이던 좌익계의 반탁 시민대회가 갑자기 찬탁 시민대회로 둔갑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공산당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는 소련 정부가 급거 모스크바로 불러들인 북한 주둔 소련군 민정책임자 로마넨코가 평양으로 돌아와 12월 31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집행위원들에게 3상회의 결정을 받아들일 것을 지시하면서 표면화되었다. 38선을 넘어 평양으로 갔던 박헌영은 북한에서 소련의 의중을 확인한 뒤 1월 2일 서울로 귀환했다. 그러나 대중의 반탁 열기를 무시한 공산당의 결정은 해방 공간의 질서에 급격한 변화를 불러왔고 좌우 대결을 심화했다.
신탁통치 사실이 알려지기 전까지는 남한의 모든 정치 세력은 좌우로 확연히 갈라지진 않았다. 좌파와 우파 각각의 내부에서도 갈등이 있었고 쟁점에 따라서는 좌우를 가로질러 입장이 갈리기도 했다. 그런데 신탁통치 문제가 등장하면서 모든 정치 세력은 일거에 좌우로 갈리게 되었고 한국 현대사에서 좌우 간 분열과 대립이 첨예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입장을 바꾼 좌파는 “민족의 이익을 저버린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히면서 정국의 주도권을 우파에 넘겨주고 말았다. 반면 북에서는 반탁을 주장하던 우파가 몰락해 남북의 전체 정치 지형에 냉전구도가 만들어졌다. 이처럼 신탁통치 논쟁은 미소 냉전이라는 국제적 분단 상황에 좌우 갈등이라는 또 하나의 내쟁적 요소를 가미했고 이후 6·25 전쟁과 남북 체제 대결 등 좌우가 치열한 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이승만과 한민당은 초기에는 반탁에 소극적이었다가 김구가 반탁 운동을 주도하자 반탁 정국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자주독립이란 막연한 민족적 열망을 정치적 기반으로 활용하면서 입지를 넓혀나갔다. 한민당에게 반탁은 친일파 정당이라는 태생적 이미지로 인해 제약된 입지를 넓혀줄 수 있는 절호의 정치적 기회이기도 했다.

미국이 원치 않는 좌익의 신탁통치 찬성은 역설

1980년대 들어 반탁 논리가 반드시 옳다고만 볼 수 없다는 주장이 일부에서 제기되었다. 국제 정세를 외면한 채 민족적 감정만을 앞세워 반탁을 주장하다가 결과적으로 분단으로까지 이어졌다는 주장이었다. ‘분단은 악이고 통일은 무조건 선’이라는 통일지상주의자들에게서 특히 이런 주장이 많이 나왔다. 신탁통치 기간을 잘만 활용했더라면 최소한 분단만은 피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소련이 사실상의 위성 정권을 북한에 세워놓은 상태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분단의 원인이 찬·반탁 정국에 있다기보다 이미 소련의 계산 속에 있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따라서 이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다. 미소는 물론 좌우익 모두 동상이몽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상황은 더욱 분명해진다.
당시 미국은 전후 세계 질서 재편의 한 방안으로 한반도를 비롯한 여러 식민지 국가를 신탁통치로 전환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한국에 4개국 신탁통치가 실시되면 영국·중국과 손을 잡고 소련을 견제함으로써 조선을 미국의 세력권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 소련 역시 북한의 통치 구조를 자신의 입맛대로 고친 뒤 신탁통치를 하면 한반도를 공산화할 수 있다는 확신에 사로잡혀 있었다. 남쪽에도 좌익 세력이 만만치 않아 대세를 장악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결국 한반도에 들어설 정부를 자국 세력권으로 확보하는 것이 미소 양국의 목표였고 그 전략으로 일시적인 신탁통치가 양국의 입맛에 들어맞았을 뿐이다. 이 때문에 한반도는 미소 양국 어느 쪽도 양보할 수 없는 경계선에 머물러야 했다.
미국은 예상치도 않은 찬탁·반탁 정국이 곤혹스러웠다. 미국이 제휴하려 한 우익은 반탁운동을 전개함으로써 미국의 정책을 정면으로 배격한 데 반해 좌익은 미국이 원하는 대로 신탁통치를 지지했으니 미국으로서는 당혹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해방 정국에서 나타난 가장 역설적인 현상이었다.
결국 미국은 미소 공동위를 통해 신탁통치를 실현함으로써 통일된 임시정부를 수립하려 한 기존의 정책을 대폭 수정해야 했다.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신탁통치는 한반도 전체가 소련의 영향력 아래 편입되는 좌익 정권의 수립을 의미했기에 결국 신탁통치 구상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판소리 명창 김소희의 삶, 제자 안숙선이 창극 ‘두 사랑’에서 공연

명창 안숙선(70)의 62년 소리 인생을 담은 이야기 창극 ‘두 사랑’이 4월 5~7일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공연한다. 제목 ‘두 사랑’은 그의 삶과 예술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두 스승, 판소리 명창 김소희(1917~1995)와 가야금병창 명인 박귀희(1921~1993)의 사랑을 말한다.

김소희는 10대 후반에 판소리계의 정상 문턱에까지 다다른 천재형

김소희(1917~1995)는 우리나라 여성 판소리계를 대표하는 명창이다. 10대 시절에 이미 대선배들과 어깨를 겨룰 만큼 판소리에 능하고 가야금, 살풀이춤, 서예 등도 두루 섭렵한 만능 예인이었다. 다른 명창들이 그러했듯 김소희 역시 갈고 닦는 노력형이었으나 그들과 다른 것은 재능을 타고났다는 것이다. 판소리 대선배들이 산사나 토굴에서 백일 공부를 했다거나 폭포 아래에서 득음을 했다거나 똥물을 마시고 목이 트였다거나 하는 전설적인 얘기가 풍문처럼 전해지던 그 시절에 김소희는 타고난 목에 재능을 소화해 내는 예인적 기질로 10대 후반에 이미 판소리계의 정상 문턱에까지 다다른 천재형이었다.
전북 고창에서 태어난 김소희가 판소리를 천직으로 받아들인 것은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1학년 때이던 1930년이었다. 김소희는 당시 길가의 가설무대에서 흘러나오는 이화중선의 소리에 반해 가설무대가 철거될 때까지 매일 천막 뒤에서 소리를 들으며 판소리에 빠졌다. 이런 김소희의 재능을 알게 된 형부가 13세의 김소희를 데리고 간 곳이 당대 최고의 명창 송만갑의 집이었다.
송만갑은 단박에 김소희의 재능을 알아보고 “너는 천생 이 길로 들어서야 할 사람”이라며 김소희를 특별 문하생으로 받아들였다. 송만갑은 한동안 김소희를 가르치다가 정정렬 명창에게 천거했다. 이렇게 두 스승한테서 소리를 배운 김소희는 광주의 한 극장에서 꾸민 데뷔 무대에서 “아기 명창”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14살이던 1931년에는 전북 남원의 명창대회에서 당당히 1등을 차지해 주목을 끌었다.
자신감이 생긴 김소희가 서울로 진출한 것은 1931년 12월이었다. 당시는 서울에 발을 붙이려면 한성준의 테스트를 통과하는 것이 지름길이었다. 송만갑이 호남 판소리계의 대부였다면 한성준은 서울 국악계의 대부 격이었다. 한성준은 살풀이춤, 승무, 학춤 등 우리의 전통춤을 정리하고 집대성해 예술의 경지에까지 끌어올린 예인이면서도 국악 무대, 라디오방송 출연, 레코드 취입 등에서 영향력이 큰 요즘말로 하면 ‘국악의 매니저’ 같은 존재였다.

국악 전문가 조사에서 ‘20세기 최고 명창’으로 선정

▲ 김소희

김소희의 재능을 한눈에 알아본 한성준이 김소희를 데리고 간 곳은 서울 정동의 경성방송국이었다. 그 시절의 국악 프로그램은 모든 라디오 프로그램 중에서 가장 인기가 높았다. 10대 소녀 김소희는 방송 데뷔를 성공적으로 끝냈다. 이를 계기로 방송 출연이 계속되면서 일약 ‘아이돌 스타’로 부상했다. 1932년 가을에는 콜롬비아레코드사의 제안에 따라 대선배 명창들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레코드를 취입했다. 당시 국내에는 레코드 취입 시설이 없어 모든 녹음은 일본에서 이뤄졌다. 레코드가 불티나게 팔려나가자 이번에는 오케레코드사에서 취입 요청이 들어왔다.
김소희의 증언에 따르면 일본에서 두 번째 레코드 취입을 할 때 ‘진도 아리랑’이라는 곡명이 탄생했다. 당시 김소희는 ‘춘향가’와 ‘심청가’를 모두 녹음한 뒤 제목도 모르는 남도 민요를 불렀다. 그러자 오케레코드사 관계자가 노래가 좋다며 취입하자고 했는데 김소희가 그 자리에서 제목을 붙여 녹음한 노래가 ‘진도 아리랑’이라는 것이다. 김소희는 국악인이라면 의당 갖춰야 할 악기와 춤을 배우는 데도 열심이었다. 명인들에게서 거문고와 가야금을 배우고 살풀이춤을 익혔으며 독학으로 양금을 섭렵했다. 서예 실력도 출중해 1967년부터 1969년까지 연이어 국전에서 입선했다. 
해방 후 김소희는 ‘여성국악동호회’ 결성(1948.5)에 힘을 보태고 이 ‘여성국악동호회’가 무대에 올린 국극 ‘햇님 달님’에서 달님공주 역을 맡아 ‘햇님 달님’이 대중적 인기를 끄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 국극은 국악을 연극이라는 무대 형식에 접목한 것으로 특히 여성 국극은 전국 어디서나 인기가 높았다.
‘햇님 달님’은 그전의 창극(국극)과는 차원이 다른 창극이었다. 주로 우리의 고전과 똑같은 이야기를 소재로 다뤘던 종래의 창극과 달리 처음부터 끝까지 창작을 바탕으로 구성했기 때문에 일반의 관심이 컸다. ‘햇님 달님’의 성공은 그 후 우리 무대에 여성 국극 전성기를 몰고 왔고 그 붐은 1950년대 말까지 계속되었다.
1954년 김소희는 자신의 집과 패물 등을 모두 팔아 서울 돈암동에 여성국악동호회 산하 ‘민속예술학원’을 설립하고 초대 원장으로 취임했다. 민속예술학원은 1960년 5월 정식 교육기관인 ‘국악예술학교’로 개교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김소희는 1962년 프랑스 파리를 시작으로 1980년대까지 수 차례 해외 공연을 하며 우리 국악의 진수를 소개했다. 특히 1988년 서울올림픽 폐막식을 장식한 ‘떠나가는 배’의 선창으로 전 세계에 우리 판소리의 멋을 알렸다. 1999년 KBS 라디오가 국악 전문가 200명을 상대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20세기 최고 명창’으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으나 그는 이미 1995년 4월 17일 눈을 감고 없었다. 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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