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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서 평론] '울릉도 트위스트'의 여성트리오, 이시스터즈의 삶과 노래[2]
‘미8군쇼의 스타’, ‘60년대 가요계의 꽃’으로 피다
2019년 04월 04일 (목) 07:06:41 박성서 webmaster@newsmaker.or.kr

‘울릉도 트위스트’, ‘워싱턴 광장’, ‘서울의 아가씨’, ‘화진포에서 맺은 사랑’, ‘남성금지구역’, ‘좋아졌네’...

밝고 경쾌한 하모니에 특히 고음이 매력적이었던 여성 트리오 이시스터즈. 이시스터즈의 멤버 김희선(78, 본명 김명자)씨의 휴대폰 컬러링은 ‘워싱턴 광장’이다. 5년 전부터 사용한 노래다.

이들의 데뷔곡이자 대표곡인 ‘워싱턴 광장’을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스타로 나섰던 때가 1964년.
그러나 이들은 갑자기 혜성처럼 나타난 여성 트리오가 아니었다. 갖가지 역경을 견디며 활짝 피어난 한 송이 꽃이었다.

비록 힘들고 고되었지만 아름다운 시절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화려했던 미8군쇼의 스타로써 말이다.

이들이 대중들 앞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전까지 이들의 활동은 어떠했을까?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시스터즈의 미8군쇼 시절, 이야기를 따라가 본다.

1960년대 최고 인기를 누리던 여성 트리오, 이시스터즈의 삶과 사랑, 그리고 노래에 관한 이야기, 그 두 번째.

글 l 박성서(음악평론가, 저널리스트), 사진 l 강민숙(사진작가)

이시스터즈의 꿈이 시작된 곳, 미8군쇼

서울 용산구 원효로1가 2-1번지. 이곳이 바로 이시스터즈의 꿈이 시작된 지점이다. 가수로써 첫 발을 내디뎠던 화양(한국흥행주식회사), 즉 KEAA(Korea Entertainment Agency Association, 한국연예대행연합회. 이하 한국연예)가 있었던 자리다.

▲ 서울 원효로에 위치한 옛 ‘화양’ 건물 터를 찾은 이시스터즈의 김희선씨와 ‘KEAA(Korea Entertainment Agency Association, 한국연예대행연합회)’ 창립총회 사진, 1958년

우리나라 대중음악의 제2르네상스 시대를 앞당겼던 미8군쇼, 다양한 장르의 음악과 수많은 스타들을 배출한 미8군쇼는 우리나라 대중음악의 흐름을 바꿔놓은 진원지이자 분수령이었다. 여성 트리오 이시스터즈의 출발은 바로 이 미8군쇼의 문을 두드리면서 시작된다.

열아홉 살의 꿈 많던 시절, 여고를 갓 졸업한 풋내기 김희선씨는 당시 미8군쇼 단원을 모집한다는 신문광고를 보고 ‘화양’의 오디션에 응시한다. 자유곡으로 부른 ‘런던 브릿지(London brige)’를 비롯해 간단한 영어 테스트에 코르붕겐까지 까다로운 시험을 통과, 합격했다. 1960년 여름의 일이다.

“이곳에서 만난 분이 ‘쇼 오브 쇼’ 단장이신 박선길 선생님이었는데 어느 날 제게 트리오를 만들어 활동하면 어떻겠냐는 제의를 해오셨어요. 당시에는 김시스터즈가 라스베가스에 진출해 연일 화제가 되던 때였고 또 박선길 선생 역시 미국의 슈프림스, 맥과이어 시스터즈 등 여성 트리오의 노래에 특히 관심이 많았지요. 해서 저는 당시 교통부에 근무하던 친언니 김천숙과 언니의 직장 동료인 이정자씨를 소개했는데 다행히도 둘 다 오디션을 무사히 통과했지요. 그래서 비로소 트리오로써의 활동이 시작되었죠.”

그렇게 트리오로써 완전체가 갖춰진 것이 1961년 6월. 비로소 활동을 시작한 이들의 첫 그룹명은 ‘스와니 시스터즈(Suwanee Sisters)’였다. 아마도 거쉰 작곡의 ‘스와니(Suwanee, 우리에겐 ’스와니강’으로 잘 알려진 노래)’의 제목에서 따온 단어로 당시 고향을 멀리 떠나온 미군들에게 향수를 자극시킬 수 있는, 더 없이 친숙한 단어라 선택한 듯싶다.

앞서 거론했듯 이들은 ‘화양’ 소속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부언하자면, 당시 미8군 측은 쇼단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1958년도부터 상공부 등록허가제로 바꾼다. 아울러 당시 쇼 공급회사의 허가 조건은 ‘미8군쇼 연예인 공연자 수첩’에 명단이 올라 있는 단원들로 구성된 쇼 단체가 최소한 다섯 곳 이상이어야 했다. 따라서 각각 활동하던 쇼 단체들이 모여 ‘KEAA(한국연예)’를 탄생시킨다. 이 KEAA가 바로 미8군쇼 공급회사의 대표 격이자 5백 여 명의 단원이 소속되어있던 ‘화양’이다. 바로 스와니 시스터즈는 이 KEAA에 속해 있는 ‘쇼 오브 쇼’, ‘어라운드 더 월드’의 단원으로 활동했다. 지금으로부터 약 60년의 전 일이다.


꿈의 무대이자 스타의 산실, 미8군쇼 단체 ‘화양’ 을 가다

▲ 화양의 ‘드림보트’ 시절의 스와니시스터즈, 좌측에 가수 이춘희, 무용수 최승희씨 등의 모습이 보인다

원효로에 위치한 옛 ‘화양’ 건물은 이제 없어지고 대신 그 자리에 모 항공전문학교 건물이 들어서 있다. 이곳에서 김희선씨를 만났다.

지난 2014년, ‘미8군쇼 60년사 특별전(남이섬 노래박물관)’ 다큐 관계로 이곳을 찾은 이후 두 번째다. 처음 이곳을 찾았던 때 김희선씨의 감회어린 표정이 지금도 생생하다.

‘꿈의 무대였던 이곳을 50 여년 만에 다시 찾아온 게 꿈만 같다’며 세월이 많이 지났음에도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고 느껴진다는 게 그의 첫 소감이었다. 워낙 정이 들었던 탓이리라.

“그때는 길 양 옆으로 의상실이 죽 들어찼었어요. 거리 전체가 미8군쇼 단원들을 위한 여러 부대시설로 가득했지요. 꿈 많던 제 이십대의 추억이 서린 거리이기도 하죠. 특히 오후만 되면 저쪽 큰 길 가에 각 지역의 미군부대 클럽으로 가는 군용트럭이 몰려들던 광경이 지금도 눈에 선하네요.”

그의 회고처럼 쇼단은 주로 미군부대에서 보낸 군용트럭으로 이동했다. 쇼단의 멤버는 가수, 연주인, 무용수 그리고 MC, 음향, 조명, 매니저 등 17명 정도였다. 이 인원은 미군트럭 한 대로 다함께 이동할 수 있는 숫자로 미8군 측의 지침이기도 했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 밤늦게 공연을 마치면 미군 측이 다시 출연자 전원을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지금은 달라졌지만 당시 화양 건물은 2층이었어요. 연습실, 음악실도 따로 있었고 악기 창고, 저쪽은 의상을 보관하는 곳, 건물 이쪽은 운동장이었어요. 시간 날 때마다 배구, 농구를 하던 이 운동장이  꽤 컸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터 자체가 굉장히 작네요.”

시간이 지날수록 그 시절이 더욱 그리워진다고도 했다. “미8군 출신가수들은 실력들이 대단했잖아요. 3개월에 한 번 씩 오디션을 주기적으로 봤어요. 여기 2층에서 연습도 엄청 했죠. 단원들이 모두 모여 노래 중간 중간 탭댄스도 배우고... 당시엔 을지로6가에 있는 미공병부대 안 미군클럽에서 오디션을 봤어요. 나중에는 용산 미군클럽으로 옮겨서 보았죠. 이 오디션에서 높은 점수를 받기 위해 정말 많은 트레이닝을 했고 또 레퍼토리를 계속 바꿔 가면서 실력도 많이 늘었죠. 그때 공연을 하러 장교클럽에 가면 아무리 추운 겨울이라도 바지 같은 건 입지 못했어요. 항상 스커트 차림에 의상을 제대로 갖춰야 했고...” 숙소도 인근인 청파동, 후암동 등으로 옮겨 아예 이곳에서 살다시피 했다고 강조한다.

그렇듯 미8군쇼 무대에 서기 위해서는 반드시 미군부대에서 직접 파견한 쇼 관계자들의 심사를 통과해야 했다. 분기마다 주기적으로 실시되던 이 오디션을 거치면서 점차 다양해지는 레퍼토리만큼이나 미8군 연예인들의 실력은 하루가 다르게 향상되었다.

“오랜만에 와보니 옛날 분들 생각이 많이 나네요. 스페니시 송(Spanish Song)을 주로 부르던 이춘희 언니, 베니김의 부인 되시는 이혜연 아줌마, 한명숙 언니, 이금희, 패티김, 신중현씨, 그리고 조영남, 정성조씨... 등등. 특히 이 두 분은 그 무렵 대학을 다니면서 저녁에는 8군 무대에 서곤 했어요. 그야말로 쟁쟁한 스타들의 산실이었죠.”

‘KBS 톱싱거경연대회’ 대타 출전, ‘이시스터즈’ 라는 이름을 얻다

이들이 일반 대중들 앞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은 서울시민회관에서 펼쳐진 ‘전국 아마츄어쇼, 톱싱거 경연대회(KBS)’ 무대를 통해서였다. 이때가 1961년 12월 20일.

“그 당시 중앙방송국(현 KBS)에서 주최하는 ‘톱싱거 경연대회’라는 프로그램이 있었어요. 가수 지망생들의 등용문 격인 프로그램이었는데 어느 날 담당 PD가 다급하게 박선길 선생에게 요청을 해왔어요. 연말 결선에 오른 ‘이시스터즈’라는 팀이 갑자기 불참하게 되었다면서 대신 출전할 가수를 보내달라고요. 해서 우리가 대신 그 팀의 이름으로 출전하게 된 것이지요.”

결과는 2등. 라디오로 중계되던 이 대회에서 1, 2, 3등까지는 방송국 전속가수로 활동할 기회가 주어졌다. 그러나 이들은 이미 미8군쇼단 소속이었기 때문에 방송국 전속가수로는 활동하지 않았다. 다만 이를 계기로 팀명을 이시스터즈로 바꿔 활동하게 된다.


‘쇼 세계의 휴일’을 통해 본격적으로 대중들 앞에 서다

▲ 대한뉴스에 소개된 ‘쇼 세계의 휴일’의 서울시민회관 공연 실황. 1963년 1월

1960년대 초반, 우리나라에 ‘쇼 세계의 휴일’이라는 주목할 만한 공연이 있었다. 세계적인 톱스타들도 내한해 우리나라 가수들과 함께 합동공연을 펼쳐 종종 화제가 되었던 공연이기도 하다.

1961년부터 시작해 매년 두 차례씩 막을 올린 이 ‘쇼 세계의 휴일’ 공연은 이시스터즈가 소속되어 있는 한국연예가 기획했던 일반 관객 대상의 ‘미8군쇼’였다. 말하자면 미8군쇼 무대에서만 활동하던 연예인들을 일반 대중에게 알리는 동시에 일반무대 진출도 모색했던 야심찬 공연이었다. 이 무대를 통해 이시스터즈는 일반대중들에게도 존재감을 알리며 점차 가요계에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옛 가요에 관심 있는 이들이라면 그 무렵 극장에서 영화 전에 상영되던 ‘대한뉴스’ 화면을 통해 이시스터즈가 노래하는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요즘에도 이따금씩 방송되는 이 영상은 ‘울릉도 트위스트’나 ‘화진포에서 맺은 사랑’ 같은 노래가 덧 입혀져 마치 그 노래들을 부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때 부르는 노래는 ‘알뜰한 당신(이부풍 작사, 전수린 작곡, 황금심 노래)’이다. 바로 이 영상이 1963년 1월, 시민회관에서 펼쳐졌던 ‘쇼 세계의 휴일’에서의 공연 실황이다.

“우리는 무대에서 종종 ‘알뜰한 당신’을 부르곤 했어요. 당시 이 공연을 기획했던 ‘미8군쇼의 대부’ 김영순(일명 베니김)씨가 특히 좋아하는 노래라며 이따금씩 우리에게 불러 달라고 요청하시던 게 생각나네요. 물론 우리는 미8군 무대에선 팝이나 재즈를 불렀지만 일반무대에서는 이 노래도 자주 불렀죠. 초창기 우리의 주요 레퍼토리 중 하나였습니다.” 김희선씨의 설명이다.

그렇듯 이시스터즈는 ‘알뜰한 당신’의 멜로디와 함께 일반대중들을 향해 점점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드라마센터에서 펼쳐진 ‘재즈 페스티벌’ 무대를 통해 인기그룹으로 발돋움하다

▲ 1963년 재즈페스티벌 포스터와 페스티벌 기사(동아일보 1963년 6월4일 자)

이시스터즈가 본격적으로 일반대중들에게서도 인기그룹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것은 서울 드라마센터에서 열린 ‘재즈 페스티벌’ 무대에 서면서 부터다.

그동안  미8군 쇼단의 가수와 연주인들은 ‘쇼 세계의 휴일’이란 이름으로 일반대중들 앞에 서긴 했지만 주로 미8군을 상대로 공연해왔기 때문에 일반인들에게는 매우 낯설었다.

그래서 기획된 무대가 ‘재즈 페스티벌’, 이 또한 한국연예가 우리나라 일반관객들을 대상으로 기획한 야심찬 공연이었다. 미8군쇼 스타들을 대중 앞에 선보임으로써 일반인들과 같이 호흡하고 친밀하게 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던 셈.

1963년 5월에 시작된 이 재즈 페스티벌은 한국연예에 소속된 16개 쇼 단체가 번갈아가며 공연을 펼쳤다. 첫 주 3일 동안은 송민영악단, 박성원악단 그리고 민들레악단이 문을 열었고 두 번째 주에는 이시스터즈가 소속된  ‘쇼 오브 쇼’와 ‘뉴 스타즈’가 경연을 펼쳤다.

한국연예의 기획은 적중했다. 이시스터즈를 비롯해 이 무대에 섰던 많은 미8군쇼 스타들이 이후 언론을 통해 소개되거나 방송, 혹은 음반을 취입하며 인기가수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그 한 예로 이 무렵 동아일보가 기획시리즈로 연재한 ‘보컬그룹 순례 편’을 보자. 두 번 째로 소개된 보컬 팀이 바로 이시스터즈였다. ‘리듬 몸에 배인 팀워크, 좋은 스윙 불러 팬들을 확보한 이시스터즈’라는 제목의 이 기사를 그대로 옮겨 보자면,

...‘문 리버’, ‘딕시랜드’ 등의 미국 재즈와 우리 가요 ‘알뜰한 당신’을 불러 차츰 인기 상승 중인 이시스터즈는 데뷔한 지 벌써 3년째다. 이정자(21) 김천숙(24), 김명자(21)의 세 명으로 구성되었으나 김씨 자매가 과반수라 해서 ‘김시스터즈’라고 할 수는 없고(김시스터즈라는 상표(?)는 이미 있었으니...) 이시스터즈라고 이름 지었다. 좋은 노래를 부르기 위해 고집해왔던 이시스터즈, 조용하고 품위 있는 재즈를 통해 팬들을 만족시키려는 노력이 오늘과 같이 호흡을 맞추는데 성공한 비결이다. 2년 전에는 중앙방송국의 아마추어 톱싱거대회에 나가 2등을 차지했고 최근엔 스윙재즈로 고정 팬을 확보, 여유 있게 노래하고 있다. 미국에 가서 미국인들의 몸속에서 스며나는 생생한 재즈를 배워오는 것이 세 아가씨의 소박한 꿈. 이시스터즈는 아직 나이가 젊다는 점과 탄력성 있는 목소리를 갖추고 있어 앞으로 더 큰 가능성이 있는, 가요계의 희망적인 존재다. (1963년 7월 18일자 동아일보)

한마디로 이 기사는 놀랍다. 말하자면 이시스터즈는 데뷔곡인 ‘워싱턴 광장’이 발표되기 1년 전부터 이미 인기그룹으로 발돋움하고 있었던 것이다.

▲ 동아일보의 ‘보컬 팀 순례-이시스터즈 편’ 기사. 1963년 7월 18일 자

이 재즈 페스티벌 공연은 이듬해인 64년부터 ‘뮤직 살롱’으로 이름을 바꾸고 장소도 드라마센터에서 오리엔탈호텔(서울 퇴계로1가) 6층에 개설했다. 이 재즈 페스티벌 무대를 통해 등장한 스타가 바로 이시스터즈였던 것이다.


경쾌하고 탄력 있는 이들의 하모니는 가요계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다. 이즈음 또 하나의 뉴스가 신문을 통해 보도된다. 바로 여성 트리오 이시스터즈의 멤버 중 ‘김천숙, 희선 자매’가 갑자기 ‘허니킴스’라는 이름으로 듀엣을 결성, 음반을 발표했다는 것.

‘징글벨’, ‘고요한 밤’ 등 크리스마스 캐롤과 더불어 60년대 유행했던 림보록을 소재로 한 ’림보가 난 좋아(김영조 작사, 작곡)’를 발표했다는 소식이 그것. 그렇다면 이즈음에서 갑자기 궁금해진다. 이 노래들이 발표되는 시점은 이시스터즈가 막 스타로 발돋움하던 1963년도 후반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왜 이들 자매는 갑자기 듀엣을 결성해 활동을 시작했을까? 과연 이들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김희선씨는 당시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기록과 기억의 차이, 이 미스터리(?)는 과연...  (계속)

▲ 1963년에 발표된 허니킴스 음반(LKL 레코드)과 허니킴스의 김천숙, 김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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