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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형의 100년의 기록 100년의 교훈
2019년 03월 06일 (수) 16:23:52 김정형 webmaster@newsmaker.or.kr

■신채호, 붓과 펜으로 항거한 실천적 지식인
독립운동가이자 사학자, 언론인으로 활동하다 순국한 단재 신채호(1880~1936) 선생의 집터로 추정되는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 그의 업적을 기리는 표지석 설치가 추진된다. 이 집은 단재가 서울신문의 전신인 대한매일신보 주필과 황성신문 기자로 민족 정기를 진작하고 항일 투쟁을 벌이고, 항일 비밀결사조직 신민회와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참여하던 1905년부터 1910년 중국으로 망명하기 전까지 살았던 곳이다. <서울신문 2019년 2월 20일>


우리 민족이 광활한 만주 벌판까지 호령하던 위대한 민족이었음을 깨우쳐줘

신채호(1880~1936)는 민족주의와 아나키즘(무정부주의)을 사상적 기반으로 삼은 독립운동가이자 역사학자였다. 한편으로는 애국 계몽운동에 앞장선 언론인이었고 역사 전기소설을 쓴 문학가였다. 그는 “나라가 있으면 반드시 역사가 있고 역사가 있으면 나라는 반드시 일어서게 된다”는 믿음의 소유자였다. 특히 단군과 부여를 정통으로 하는 역사 발전의 단계를 설정함으로써 우리 민족이 광활한 만주 벌판까지 호령하던 위대한 민족이었음을 깨우쳐주었다.
신채호는 충남 대덕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신동 소리를 들었으나 집안이 어려워 신지식을 습득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이런 신채호를 위해 1897년 신기선 전 학부대신이 서재에 있는 자신의 책을 읽도록 배려하고 1898년 성균관에 들어갈 수 있도록 추천했다. 신기선은 이처럼 신채호의 은인이었으나 훗날 친일 매국노가 되자 신채호는 신기선이 송병준, 조중응과 함께 ‘일본의 3대 충노’라며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가차 없이 비판했다.
그 무렵 서울에서 독립협회의 자주·민권·자강운동이 전개되었다. 신채호 역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간부로 활동하다가 1898년 12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가 강제 해산되고 주동자들이 체포되는 과정에서 체포되었다. 1905년에는 황성신문 논설기자로 입사해 언론을 통한 구국운동에 앞장서다가 장지연의 사설 ‘시일야방성대곡’으로 황성신문이 무기정간을 당한 뒤에는 대한매일신보로 옮겨 애국적 계몽 논설로 동포의 울분과 비통을 대변했다.
국권이 기울어가고 있을 때 신채호가 갈망한 것은 나라의 운명을 바꿔놓을 영웅의 등장이었다. 1907년 10월 중국 근대화의 기수 양계초가 쓴 ‘이태리 건국 삼걸전’을 번역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대한매일신보에 1908년 ‘을지문덕전’과 ‘이순신전’, 1909년 최영 장군을 소개한 ‘동국거걸 최도통전’을 연재한 것도 그 연장선이었다. 1907년 창립된 비밀결사 신민회에 창립위원으로 참가해 신민회 취지서를 기초하고 1909년 신민회의 합법단체인 청년학우회가 발기될 때도 취지서를 기초하는 등 애국 계몽운동에 앞장섰다.

민족주의와 아나키즘을 사상적 기반으로 삼아

신채호는 실천적 지식인이었다. 1910년 신민회 간부들이 국외 독립운동 기지를 구축, 장차 일제와 독립전쟁을 전개하기로 결정하자 안창호, 이갑 등과 함께 중국 땅을 목적지로 그해 4월 서울을 떠났다. 중국으로 향하던 중 평북 정주 오산학교에 들러 20여 일 동안 머물렀다. 그때 신채호를 처음 만난 12살 아래의 이광수는 훗날 “오직 비범한 것은 그의 눈이었다… 말속에는 추상같은 남성적 기개가 들어 있었다”는 글을 남겼다.
신채호는 중국 청도를 거쳐 1911년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윤세복, 이동휘 등과 광복회를 조직하고 그해 12월 이상설, 이종호 등이 설립한 권업회의 기관지 ‘권업신문’의 주필로 필봉을 휘둘렀다. 1914년부터는 틈틈이 고조선, 고구려, 발해의 옛 땅인 남만주 일대의 사적과 고조선 창업의 혼이 깃든 백두산 현지를 답사했다. 이때 구상을 마친 역사서가 1930년대에 펼쳐질 ‘조선상고사’다.
민족주의를 중시하던 신채호가 아나키즘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제1차 세계대전(1914~1918)과 러시아혁명(1917)을 거치면서였다. 세계대전의 참상은 그가 중시해온 약육강식·적자생존의 사회진화론을 반성하게 했다. 신채호는 3·1운동에서 다시 한 번 민중의 폭발적 힘을 실감하고 아나키즘에 기반을 둔 민중 직접 혁명론을 민족해방운동의 방법으로 받아들였다.
3·1운동 후에는 일제의 문화정치에 타협하는 민족운동에 비판적인 태도를 취했다. 처음 3·1운동 소식을 들었을 때 신채호 역시 감격했으나 최남선의 독립선언서를 읽고 나서는 “불과 몇 년짜리 운동을 선언했군! 평화운동이 다 뭐하자는 거요?”라며 크게 실망하는 모습을 보였다. 
1919년 4월 상해 임시정부 수립에도 참여했으나 임정 내 이승만의 외교론과 안창호의 준비론 모두 독립을 쟁취하기에는 유약하다고 판단해 임정과 결별하고 아나키즘에 입각한 민중 직접 혁명론과 그 방법론으로 ‘테러적 직접 행동론’을 정립해 나갔다.
그의 이런 생각은 1923년 1월 무정부주의 독립운동단체 ‘의열단’을 이끌고 있는 김원봉의 요청을 받고 기초한 6,400자의 ‘조선혁명선언’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한국독립운동사에 찬연히 빛나는 불후의 명문 ‘조선혁명선언’은 민족주의자에서 아나키스트로 변모해가는 신채호의 사상적 전환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조선상고사’는 고대사의 체계화를 시도한 역작

▲ 중국 뤼순 감옥에 수감된 신채호 선생의 모습

사실상 아나키스트로 변신한 신채호는 권력투쟁에 급급한 임시정부 밖에서 무정부주의적 독립운동을 추구했다. 1928년 4월 120여 명의 중국, 일본, 대만, 베트남, 인도, 조선의 6개국 무정부주의자들이 북경에서 ‘무정부주의자 동방연맹’을 결성할 때도 조선 대표로 참석했다.
회의에서는 외국에서 폭탄 제조 전문가를 초청해 폭탄공장을 만들고 소요 자금은 북경 우편관리국에 근무하는 대만인 아나키스트 임병문이 발행하는 위조화폐로 충당하기로 했다. 임병문은 외국위체 200장을 인쇄해 일본, 대만, 조선, 만주 등 32개소의 우편국에 발송했다. 신채호는 위조화폐를 찾기 위해 대만의 기륭으로 갔다가 1928년 5월 8일 체포되어 2년간의 재판 끝에 1930년 5월, 10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여순 감옥에 갇혀 고통을 당하면서도 우리나라 상고시대의 역사를 정리한 글을 조선일보에 1931년 6월부터 10월까지 103회에 걸쳐 연재했다. 한국 근대 역사학의 중요한 저작인 ‘조선상고사’였다. 신채호는 당초 조선사 전체를 서술할 예정으로 틈틈이 원고를 썼으나 원고를 채 완성하기도 전에 체포되는 바람에 원고는 상고사 부분에서 끝이 났다.
‘조선상고사’는 민족주의 사관에 입각해 우리 고대사의 새로운 체계화를 시도한 것으로 연재 당시부터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조선상고문화사’는 ‘조선상고사’ 연재가 끝난 바로 이튿날인 10월 15일부터 12월 3일까지 연재되었고 다시 이듬해인 1932년 5월 27일부터 31일까지 연재되어 모두 41회 실렸다.
신채호는 이 두 편의 연재 글로 일제에 통쾌한 일격을 가하긴 했으나 오랜 수감 생활로 건강이 악화되었다. 결국 1936년 2월 21일 여순 감옥에서 고달픈 이승의 삶을 마감했다. 한 줌의 재로 변한 신채호의 유골은 조국을 등진 지 26년 만에 어린 시절에 살았던 충북 청원군 고두미(현재 충북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귀래길)의 집터에 묻혔다.
신채호는 생전에 무국적자였다. 조선 통치를 위해 일제가 1912년 공표한 ‘조선민사령’이 원인이었다. 조선민사령에 따라 그간의 족보가 모두 무시되었고 조선인은 호주와 가족사항을 새로 신고해야 했다. 신채호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은 “일제가 만든 호적에 이름을 올릴 수 없다”며 신고를 거부했다. 광복 이후 대한민국은 국적부를 따로 두지 않고, 호적에 등재된 사람에게 모두 대한민국의 국적을 부여했다. 이 때문에 호적 없는 독립운동가들이 무국적이 된 것이다.


■황현의 자결과 ‘매천야록’     

1910년 9월 10일 조선의 마지막 선비로 추앙받던 매천 황현은 전라도 구례 지리산 자락 서재에서 자결했다. 앞서 열이틀 전 대한제국이 망하고 일제의 영토로 전락한 경술국치가 일어났다. 그로부터 3년여가 흐른 1914년, 불교계에서 항일운동을 시작한 35살 승려 만해 한용운(1879~1944)은 매천을 꽃으로 기린 한시를 지어 유족에게 바쳤다. 매천의 혼이 깃든 구례땅 화엄사에 강연하러 왔다가 추모심이 일어난 것이다. ‘의리로써 나라 은혜를 갚으시니/ 한 번 죽음은 역사의 영원한 꽃으로 피어나네/ 이승에서 끝나지 않은 한을 저승엔 남기지 마소서…’ 꽃다운 이 추모시의 친필 이미지가 독립지사들이 투옥됐던 옛 서대문감옥에서 처음 대중 앞에 선보인다. <한겨례 2019년 2월 19일>


“매천의 붓 아래서는 온전한 사람이 없다”

황현(1855~1910)은 시대의 아웃사이더이자 초야에 묻힌 선비였다. 그러면서도 나라의 현실을 가슴 아파한 우국지사였고 조선의 몰락 과정을 생생하게 그려낸 시대의 기록자였다.
황현은 전남 광양의 몰락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신동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하지만 시골의 한 귀퉁이에서는 만족할 만한 스승과 문장가를 찾을 수 없어 19세 때 서울로 상경해 글로써 세상을 논하자며 서울의 내로라 하는 논객들을 찾아다녔다. 시골뜨기 선비가 서울의 최고 문인들에게 서슴없이 도전장을 낸 격이다. 다행히 그의 재주를 알아보고 그와 마음이 통하는 문인들을 만났는데 이건창·강위·김택영 등이 그들이었다. 이건창은 황현의 글을 가리켜 “붓끝의 기백은 반고(후한 시대 사가)가 눈에 차지 않는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황현은 28세 때인 1883년 특별 보거과에서 장원을 했다. 그러나 시골 출신이라는 이유로 1등에서 2등으로 밀려난 것을 알고는 고향으로 내려가 독서와 후진 교육에 전념했다. 그러던 중 아버지의 강권에 따라 34세 때인 1888년, 생원 초시에 장원 급제해 진사가 되었다. 하지만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탐관오리들이 세상을 농락하는 현실에 환멸을 느껴 벼슬길을 포기하고 또다시 낙향해 1890년 전남 구례의 서재에 칩거하면서 ‘매천야록’, ‘오하기문’, ‘동비기략’의 저술에 몰두했다.
그가 독서로 세월을 보내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벗들이 거듭 상경을 요청했으나 “어찌하여 나를 귀신같은 나라의 미친놈들 속에 들어가 같이 미친 사람이 되라 하는가”라며 일갈했다. 당대 세도가들의 교제 요청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는 사마천을 본받아 정치, 사회, 경제 등 모든 분야를 섭렵하고 그것을 후세에게 남기고 싶어했다.
특히 ‘매천야록’은 비극의 현장 기록서였다. 대원군의 집정이 시작된 1864년부터 나라를 잃은 1910년까지 47년 동안, 정치 중심 역사 서술에서 벗어나 당대의 살아 있는 사회·문화·생활상을 모두 6권 7책의 매천야록에 빠짐없이 기록했다. 매천야록에서 돋보인 것은 유려한 문체, 풍부하고 다양한 내용, 사건의 이면을 꿰뚫어보는 예리한 비판 정신이었다. 새로운 남녀 관계, 여학교의 설립 모습, 신식 혼인, 심지어는 1907년 관청에서 요강이 사라졌다는 이야기까지 사회 풍속도 세세히 기록했다.

▲ 황현

그의 꼬장꼬장한 직필은 ‘매천필하무완인(梅泉筆下無完人)’, 즉 “매천의 붓 아래서는 온전한 사람이 없다”는 평이 있을 만큼 추상같았다. 붓끝은 날카로웠고 거침이 없었다. 여흥 민씨들의 부패, 외척 세도의 발호, 벼슬을 사고파는 매관매직, 국채보상운동의 문제점 등 그 내용의 방대함과 상세함은 가히 신문을 능가할 정도였다.
그는 동학농민운동의 동학도조차 ‘비도(匪徒)’로 보고 그들이 나라를 망치는 데 일조했다고 믿었다. 그에게 동학은 ‘굶주린 백성을 선동하는 술수’에 지나지 않았다. 단발령 후 일어난 의병 운동에 대해서도 비판은 신랄했다. “진실로 나라를 사랑하는 의병들은 몇 되지 않는다”며 “대부분 일하기 싫어하는 자들이 떼지어 따라다니며 약탈하고 강간을 자행하는 광도에 다름 아니다”라고 기록했다. 갑신정변의 개화당에 대해서도 “인명 살육을 서슴지 않는 도적이나 역당(逆黨)”이라는 말을 서슴지 않았다.
일본은 매우 싫어하면서도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민간의 물건을 돈 주고 살 정도로 군율이 엄격하다는 사실을 예로 들며 일본군의 훌륭한 점은 그대로 드러냈다. 그러다 보니 지나친 독설과 과장, 때로는 양비론에 빠져 있다는 지적이 없진 않지만 전체적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은 예리하고 냉철했다.

일본은 그토록 싫어하면서도 일본군의 훌륭한 점은 인정해

그가 일생의 대부분을 두문불출하고 살면서도 이토록 상세한 역사를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은 당대 사람들로부터 들은 이야기와 1,000여 권에 달하는 개인 장서, 신문·관보 등의 도움이 컸다. 할아버지가 유산으로 남긴 700석의 재산도 평생 동안 시를 쓰고 매천야록을 남길 수 있었던 밑천이 되었다.
매천야록을 쓰고 있던 1905년, 을사조약의 비통한 현실을 당하자 황현은 ‘문변 3수’라는 시를 지어 을사5적의 매국적 행위를 규탄했다. ‘오애시’에서는 을사조약에 반대하다 자결한 민영환·조병세 등을 애도하고 그들의 우국충정을 기렸다. 또한 옛 중국의 난세에 몸을 깨끗이 가진 사람 10명을 뽑아서 그 행적을 그림으로 그리고 시를 지어 만든 ‘십절도십폭병’을 서재에 펼쳐놓고 그것을 보면서 마음가짐을 가다듬었다.
1908년에는 전남 구례군 광의면에 호양학교를 세우고 신학문을 가르쳤다. 황현이 남긴 1,100여 편의 시와 글에는 일상생활을 소재로 한 생활 시, 기개와 충성 그리고 절개가 면면히 흐르는 우국 시가 많았다. ‘충무공 구선가’(1884)와 ‘의기 논개비’(1898) 등이 대표적인 우국 시다.
황현은 1910년 한일합방을 당하자 식음을 전폐하고 누웠다. 어느 날 죽기를 결심하고 약을 먹었으나 목숨이 끊어지지 않았다. 아우 황원이 달려왔을 때 “내가 약을 삼키려다 입에서 뗀 것이 세 번이었다. 이다지도 어리석었던가”라고 말해 그 역시 죽음 앞에서는 몇 번이나 망설여야 하는 약한 인간임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1910년 9월 10일 새벽, 전남 구례 월곡리의 집에서 유서와 절명 시 4수를 남기고 다량의 아편이 든 소주를 삼켜서 목숨을 끊었다. 유서에는 “나라가 선비 기르기 500년인데 나라가 망하는 날, 한 사람 죽는 자 없다면 어찌 통탄스럽지 않으랴”라고 썼다. 절명 시에는 “새나 짐승도 슬피 울고 바다와 산도 찡그리오 / 무궁화 우리나라 이미 망했구려 / 가을밤 등잔 밑에서 책 덮고 옛일을 되돌아보니 / 사람 세상에서 글 아는 이 노릇하기 어렵구나”라고 씌어 있었다.
그로부터 34년 후 아우 황원은 일제의 창씨개명 강요에 저항하다 1944년 2월 27일 유시 한 편을 남긴 채 독을 마신 뒤 집 근처 월곡저수지에 투신 자살함으로써 형과 같은 길을 걸었다. 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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