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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형의 100년의 기록 100년의 교훈
2019년 02월 08일 (금) 02:37:03 김정형 webmaster@newsmaker.or.kr

■김동인 순수 문예지 ‘창조’ 창간 100주년 
 
김동인(1900~1951)이 스스로 밝힌 바에 따르면 그가 한국 문학사에 끼친 공로는 ▲‘더라’, ‘이라’ 등 구투(舊套)의 탈피 ▲현재법 서사체에서 과거체 서사체로의 변혁 ▲‘he’, ‘she’에 해당하는 3인칭 대명사 ‘그’의 사용 ▲사투리의 사용 등으로 요약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사투리의 사용’을 제외한 세 가지는 이광수가 먼저 시작한 것이다. 그렇더라도 문장의 시간 관념을 또렷이 하고 간결한 문장으로 현대 소설의 문체를 개척한 김동인 덕분에 한국 문학이 한 단계 발전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김동인은 평양에서 대지주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김동인보다 18살이 많은 장남이자 이복형은 광복 후 제헌국회 부의장을 지낸 김동원이다. 김동인은 1913년 평양 숭실중학에 입학했다가 곧 그만두고 1914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도쿄학원을 거쳐 메이지학원 중학부로 전학했다. 그곳에는 1년 먼저 와 있던 동갑내기 고향 친구 주요한이 있었다. 1917년 부친의 사망 소식을 듣고 귀국했다가 1918년 4월 결혼한 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미술학교에서 그림에 대한 개념을 익혔다.
그러다가 1919년 2월 1일 주요한과 함께 도쿄에서 순수 문예지 ‘창조’를 창간했다. 주요한이 편집인 겸 발행인으로 이름을 올리고 전영택·김환·최승만이 ‘창조’ 동인으로 참여했으나 재정적 부담은 언제나 부잣집 아들인 김동인의 몫이었다.
김동인이 “4,000년 역사 이래 최초의 신문학의 꽃봉오리”라고 자부했던 ‘창조’ 창간호에는 김동인의 단편소설 ‘약한 자의 슬픔’, 주요한의 신시 ‘불놀이’가 실렸다. 김동인은 창조 2호(1920.2)에는 중편 ‘마음이 옅은 자여’를 실었고, 1921년 5월에 종간된 9호에는 강렬한 낭만주의적 색채가 짙은 ‘배따라기’를 발표했다. 창간호부터 7호까지는 도쿄에서, 8호와 9호는 서울에서 발간된 창조지에는 소설 19편, 시 70여 편, 희곡 4편, 평론 16편, 번역시 49편 등이 수록되었다.

‘창조’ 동인들의 당면 목표는 이광수 문학에 대한 극복

▲ 김동인
참다운 신문학 개척을 기치로 내건 ‘창조’ 동인들의 당면 목표는 신문학 초창기의 독보적 존재였던 이광수 문학에 대한 극복이었다. 김동인은 ‘창조’ 창간호에서 기존의 이야기와는 다른 묘사법과 작법을 선언했다. 이것은 이광수의 계몽적인 문학을 이상화해 관념적으로 도구화한다든지 혹은 ‘정사(情事)의 문학’으로 일관하는 것에 반기를 들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창조’ 폐간 후 ‘개벽’과 ‘동명’지 등에 발표된 김동인의 초창기 단편소설은 낭만적 정열과 감상이 짙은 낭만적 리얼리즘에 가까웠다. 그러다가 ‘조선문단’ 1925년 1월호에 실린 ‘감자’를 계기로 자연주의적 경향을 띠었다. ‘감자’는 종래의 감상적인 탐닉이나 영탄적인 세계가 아닌 자연주의 문학의 절정이었다.
문학적 성취와는 별개로 김동인은 호사스럽고 방탕한 작가로 동료 작가들의 손가락질을 받았다. 평양에서 서울로 올라오면 최고급 호텔에서 밤마다 기생들을 옆에 끼고 살았으며 마음 내키면 도쿄를 산보 다니듯 한다고 해 ‘동인식 도쿄 산보’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다. 그러나 1926년 평양 보통강 관개사업 실패로 막대한 유산을 잃은 뒤에는 갖가지 불행이 겹치기 시작했다. 경제적으로는 궁핍해지고 1927년 아내까지 집을 나가는 등 가정 파탄까지 가중되면서 김동인의 삶은 뿌리째 흔들렸다. 게다가 우울증 등 신경 증세의 악화로 수면제와 최면제를 과다 복용하면서 몸까지 망가졌다.
김동인은 1930년대 들어 이광수의 계몽주의는 물론 신경향파나 카프의 사회주의 문학에 맞서서 ‘예술을 위한 예술’을 내걸고 탐미주의적 순수문학을 지향했다. 예술지상주의가 극적으로 체현된 대표적인 작품들로는 ‘광염 소나타’(신민공론·1930)와 ‘광화사’(삼천리·1930) 등이 있다.
김동인이 신문소설을 쓴 것은 1929년부터였다. 평소 신문소설은 예술이 아니라고 경멸하고 ‘문학을 위한 문학’을 소리 높여 주장하던 김동인이었지만 당장의 생계를 위해서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첫 신문소설은 1929년 동아일보에 연재한 장편 ‘젊은 그들’이었다.
평소 김동인은 기자로 변절한 문인들에게 혹독한 비난을 퍼부었다. 동아일보 편집국장 이광수에게는 “비상한 노력 끝에 위선적 탈을 썼다”며 “그의 작품은 한낱 인도주의를 과장한 문자의 유희에 멈췄을 뿐”(조선일보 1929.7.28)이라고 비난했고, 역시 동아일보 기자로 입사한 주요한에게는 “요한이 ‘사회인이 된다’는 것은 시인으로서의 파멸을 뜻한다”고 비판했다. 그는 주요한에게 “신문사를 그만두고 시인으로 돌아가라”며 “이것은 나의 권고인 동시에 조선 문예 애호가를 대표한 나의 명령”(조선일보 1929.12.3)이라고도 했다.

김동인 덕분에 한국 문학이 한 단계 발전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

이런 김동인이 1933년 4월 주요한이 편집국장으로 있는 조선일보의 학예부장으로 입사한 것은 그야말로 ‘사건’이었다. 더구나 그는 일찍이 대중의 흥미를 끄는 일은 “문학을 배반한 훼절”, “자기의 존재를 굽히고 자기의 존재를 망각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학예부장으로 있으면서 하루 두 편의 소설을 썼다는 것 역시 사건이었다. 1931년 재혼한 그의 아내는 “연재물 두 회분을 30분 내에 쓴다. 글을 쓸 적에 원고지 다음 장을 넘기는 소리가 마치 글을 읽을 때 책장 넘기듯 했다”고 회고했다. 또한 “파지 한 장 없었다. 쓸 분량만큼 원고지를 미리 책으로 만들어 쪽수까지 매긴 후에는 수정을 하지 않고 단번에 써 내려갔다”는 차남의 증언도 있다. 김동인이 ‘금동’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장편 역사소설 ‘운현궁의 봄’도 그중의 하나였으나 학예부장 업무를 처리하며 소설 두 편을 매일 쓴다는 것은 역시 무리였다.
결국 ‘운현궁의 봄’은 재직 기간 중 9회밖에 나오지 못했다.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였지만 결국에는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오만한 성격에 소설가 추천 문제를 둘러싸고 주요한 편집국장과의 의견 충돌로 40일 만에 조선일보를 퇴사했다. 그가 직장 생활을 한 것은 일생을 통틀어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는 훗날 기자 생활을 한 것에 대해 “과부의 서방질이나 마찬가지로 나 스스로도 창피하게 생각하는 바”라고 했다.
1930년대 중반부터 극도의 신경증으로 집필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면서 김동인은 마약에까지 손을 댔다. 1938년 무렵에는 정신착란 증세까지 보였다. 한때는 약물중독 상태에서 총독부 관리가 옆에 있는 것도 모른 채 꺼낸 말이 천황 모독죄에 걸려 반 년간 옥살이를 한 적도 있었다.

일제 말기에는 친일 활동 펼치고 광복 후에는 좌익 규탄하는 필봉 휘둘러

김동인은 1939년 여름 자진해서 총독부를 찾아가 황군 위문 작가단에 끼워 달라고 요청해 ‘성전종군작가’라고 쓴 어깨띠를 두르고 중국의 전선을 시찰하는 등 노골적으로 친일 활동을 펼쳤다. 매일신보에는 “(조선인과 일본인은) 한 천황 폐하의 아래서 생사를 같이하고 영고를 함께할 백성”(1942.1.23)이라는 글을 실었고 1943년에는 조선문인보국회 간사를 지냈으며 1944년에는 친일 소설 ‘성암의 길’을 발표했다. 다만 그 무렵 기억상실증과 심한 난독증으로 거의 1년간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했다.
광복 후에는 좌익을 규탄하는 필봉을 휘둘렀다. 하지만 젊은 시절 술과 기생으로 이어진 무절제한 생활과 수면제 과용으로 인해 1949년 5월부터는 글을 전혀 쓰지 못하고 1949년 6월에는 뇌졸중이 발병하고 1949년 말에는 완전히 누울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었다.
결국 중풍 중세를 보여 왼쪽 몸이 마비된 채 누워 있을 때 6·25 전쟁이 일어났다. 미처 피란하지 못하고 있을 때 인민군이 그를 체포하기 위해 집에 들이닥쳤으나 김동인의 몸 상태를 보고 포기했다. 1·4 후퇴 때는 아내가 자식을 지키기 위해 결단했다. 1951년 1월 3일 자식들과 피란을 떠나면서 “누구든지 이분을 발견하거든 잘 보살펴 달라”는 편지와 돈을 집에 놓고 피난을 떠났다.
부인이 1951년 8월 초 집으로 돌아왔을 때 집은 이미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고 김동인의 시신은 집에서 20m 정도 떨어진 밭고랑에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상태로 발견되었다. 부인은 시신을 그곳에 매장했다가 11월 홍제동 화장터에서 화장했다. 하지만 민간인을 화장해줄 수 없다고 거부해 군인 사체 20여 구와 함께 화장되었다. 가족은 결국 누구의 뼈인지도 모를 유골 일부를 받아 한강에 뿌렸다.


■2·8 독립선언 100주년

100년 전 3·1운동을 촉발했던 일본 도쿄 2·8독립선언의 산실인 도쿄 재일본 한국 YMCA가 자료실 재개관과 기념 영상물 제작 등을 위해 일본에서 1000만엔(약 1억원)을 목표로 모금활동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21일 알려졌다. 2·8독립선언은 1919년 2월 8일 조선인 유학생 600여 명이 일본 제국주의의 중심인 도쿄의 재일본도쿄 조선YMCA회관(현 재일본한국YMCA회관)에 모여 조선의 독립을 외친 사건이다. 일본에서 유학하던 조선인들이 만든 재일본도쿄조선YMCA는 당시 유학생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던 곳으로, 선언 후에는 수감된 학생들의 옥바라지를 하고 변호사를 구하며 선언 참가자들을 적극 후원했다. <세계일보 2019년 1월 22일>


1914년 1차대전 발발 후 일본이 3국 협상(영국·프랑스·러시아)에 가담하자 한국인들은 이들 3국 협상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독일이 승리해야 한국의 독립에 유리할 것으로 판단하고 독일의 승전을 갈망했다. 다행히 독일이 승승장구하자 1916년 초 손병희 교주를 중심으로 천도교에서 독립만세운동이 논의되었다. 1917년에는 1만여 명이 연서해 독일 수뇌부에 독립을 청원하자는 주장이 일각에서 제기되었다. 하지만 1917년 4월 미국의 참전으로 독일의 패전과 연합국의 승전이 확실시되어 모든 계획은 중단되었다.
낙담해 있는 우리 민족에 희소식이 날아든 것은 1918년 1월이었다. 우드로 윌슨 미 대통령이 이른바 ‘14개조 평화 원칙’을 천명한 것이다. 14개조 가운데 전 세계 피식민지 민족들을 흥분시키고 열광케 한 것은 민족자결주의를 강조한 5조였다. “각 민족은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고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이 민족자결주의 주장은 1918년 한 해 내내 전 세계 피식민지 민족들에게 큰 희망을 안겨주었다.
우리 민족 역시 국내외를 막론하고 한껏 기대에 부풀었다. 중국 상해에서 활동하는 여운형·장덕수·김철·선우혁 등이 1918년 8월 중국 상해에서 신한청년당을 결성한 것도 종전 후 14개조가 본격적으로 논의될 것에 대비한 자구책이었다. 그러던 중 1918년 11월 마침내 1차대전이 막을 내리고 1919년 1월부터 승전국과 패전국 간에 손익 결산을 따지기 위한 평화회의가 프랑스 파리에서 열릴 것이라는 소식이 들려왔다.
파리평화회의는 전 세계 피압박 민족에게 희망과 빛으로 다가왔다. 문제는 평화회의에서 논의될 윌슨의 14개조 원칙이 패전국이 지배했던 식민지를 승전국이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논의하는 자리에 불과하다는 점이었다. 더구나 일본은 패전국이 아니라 승전국의 일원이었다.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독일을 비롯한 패전국 식민지 처리에만 적용되고 승전국인 일본의 식민지 조선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한국의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모를 리 없었다. 그렇다고 조선의 독립을 논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어떻게든 파리평화회의에 참가해 우리의 독립 의지를 승전국에 알려야 했다. 그래서 1919년 2월 1일 신한청년당이 파리로 파견한 특사가 영어에 능통한 김규식이었다.
상해의 신한청년당은 이런 사실을 국내에 알리기 위해 장덕수와 선우혁을 파견했다. 이들은 평안도·황해도에서 활동하는 양전백·이승훈·길선주 등 기독교계 인사들을 만나 이런 사실을 전하며 만세운동을 벌일 것을 권유해 적극적인 지지와 약속을 받아냈다. 일본에는 조소앙·장덕수·이광수를, 만주 간도와 러시아령 연해주에는 여운형을 파견해 만세시위운동을 권유했다.
이와 별개로 미국의 동포들은 1918년 12월 뉴욕에서 열린 약소민족동맹회 총회에 참석, 다른 약소민족 대표들과 함께 약소민족의 독립을 결의했다. 이 사실은 영국인이 일본 고베에서 발간하는 영자지에 소개되었다. 영자지에는 1918년 12월 미국의 대한인국민회가 파리평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기로 결의하고 정한경과 이승만을 파리로 파견한다는 사실도 실렸다.

적지 한가운데서 조국 독립을 세계만방에 외친 것

▲ 2·8 독립선언서
유학생들은 이런 사실에 크게 고무되어 1919년 1월 6일 조국 독립을 위한 실천 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고 최팔용·서춘·김상덕·김도연 등 10명을 실행위원으로 선출했다. 그런 상황에서 신한청년당이 파견한 장덕수와 조소앙이 일본 도쿄에 도착, 유학생들의 궐기를 고취했다. 뒤이어 도쿄에 도착한 이광수는 유학생들이 곧 발표하게 될 2·8 독립선언서를 기초했다.
실행위원들은 상해에서 파견한 이광수·김철수와 함께 조선청년독립단을 결성한 뒤 송계백을 국내 밀사로 파견했다. 도쿄 유학생들의 독립선언 계획을 알려 국내 독립운동을 촉구하고 자금을 지원받고 독립선언서를 인쇄할 국문 활자를 구하는 게 목적이었다.
송계백은 1919년 1월 중순 국내에 잠입, 현상윤을 만나 유학생들의 거사 계획을 알렸다. 현상윤이 다시 송진우·최남선·최린에게 선언서를 보여주고 최린이 손병희·권동진·오세창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자 이들도 독립선언 추진에 적극 찬동했다. 이광수는 2월 5일 중국 상해로 건너가 윌슨 미국 대통령, 조르주 클레망소 프랑스 총리,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영국 총리에게 자신이 번역한 영문 독립선언서를 발송하고 중국 내 영자신문에도 실리도록 했다.
재일 유학생들은 1919년 2월 8일 오전, 독립선언서, 결의문, 민족대회 소집 청원서 등을 일본의 귀족원과 중의원, 조선총독부, 일본의 각 언론사 등에 우송하고 오후 2시 도쿄에 있는 조선YMCA회관에 약 600명이 모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했다. 유학생들은 선언서를 낭독하고 4개항의 결의문을 발표한 뒤 독립만세를 외쳤다. 피식민지 국가의 유학생들이 적지 한 가운데서 조국 독립을 세계만방에 외친 것이다.
참가자들은 강당이 떠나가도록 큰 목소리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후 시가행진을 시도했으나 일경에 의해 강제해산되고 실행위원 등 27명은 체포되었다. 검거를 피한 학생 중 100여 명은 2월 12일 히비야 공원에서 다시 유학생 대회를 열었다가 13명이 검거되었다. 나머지 학생들은 독립선언서 사본을 지닌 채 고국으로 돌아와 3·1 만세운동에 동참했다. 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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