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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서 평론] ‘타향살이’, ‘목포의 눈물’의 작곡가 손목인의 인생찬가
스스로 택한 ‘자유’에로의 의지, 그 ‘타향살이’의 삶과 노래
2019년 02월 08일 (금) 02:23:39 박성서 webmaster@newsmaker.or.kr

‘타향살이’, ‘목포의 눈물’의 작곡가 손목인(1913~1999)은 우리나라 대중가요 1세대로 초창기 대중음악을 이끌었다.
한국과 일본에서 발표한 대중가요 1천여 곡, 뮤지컬 50여 곡, 영화음악 70여 편의 주옥같은 멜로디를 남긴 그는 작곡가 겸 지휘자로, 그리고 아코디언 연주자이자 재즈가수로도 활동했다.

경남 진주에서 태어나 서울-> 동경-> 뉴욕 등의 타향살이를 통해 그가 늘 강조했던 메시지는 ‘음악은 하나’였다.

작곡가로써 뿐 아니라 가요인들의 권익과 친목도모에도 앞장섰다. 1964년 한국음악저작권협회 초대회장, 89년 1월 한국가요작가협회를 설립했고 만년에는 ‘손목인 음악센터’를 설립해 창작활동과 더불어 후배 양성에도 힘썼다.

스스로 ‘빵떡모자’라 부르던 베레모 차림에 웃음기 가득한 얼굴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사람을 만날 때마다 ‘몇~해만이요~!’라며 건네던 인사는 아직도 많은 이들의 기억에 생생할 것이다. 물론 이 인사말은 일본인을 만날 땐 ‘난넨부리데스까?(何年ぶりですか?)’로 바뀐다.

그가 마지막까지 정열을 쏟았던 ‘손목인음악센터’의 캐치프레이즈는 ‘우리 음악을 아세아로, 세계로!’였다. 음악을 통해 국경과 언어를 넘나들었던 작곡가 손목인 선생, 타계 20주년을 맞아 그의 삶과 노래를 되돌아본다.

글l박성서(음악평론가, 저널리스트)

‘우리 대중음악을 아세아로, 세계로!’기치 내걸었던 손목인음악센터

누군가 내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맞게 된 행운의 순간, 몇을 꼽아보라면 당연히 손목인선생과의 인연이라고 주저 없이 말할 수 있다.

우리나라 가요1세대 작곡가 손목인 선생은 만년에도 직접 ‘손목인음악센터’를 직접 설립, 음악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던 인물이다.

‘타향살이’의 완결판이라 할 수 있는 ‘타국살이(김지평 작사, 손목인 작곡)’를 만든 것도 이 무렵으로 필자는 손목인 선생이 발행인으로 있던 ‘한국문화(韓國文化)’가 발간하는 ‘스타탄생’을 비롯한 두 가지 잡지의 편집데스크를 맡고 있었다. 한국문화는 일본에서 손목인 후원회장으로 있던 일본 출판사 다께쇼보(竹書房)의 노구찌 회장이 한국에 설립한 회사로 이 곳에는 일본인 기자들과 카메라맨, 그리고 재일교포들과 더불어 한국인 편집자들이 ‘한 지붕 세 가족’을 이루고 있었다. 바로 이 잡지의 발행인이 손목인, 편집인이 필자였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인 1989년부터 3년간의 일이다.

손목인선생과 함께 하는 동안 가장 인상적으로 남아 있는 것은, 스스로 ‘빵떡모자’라 일컫던 베레모 차림의 독특한 캐릭터다, 특히 술잔을 들 때마다 ‘몇~해만이요~!’하던 권주사도 생생한데 이 독특한 바이브레이션의 권주사가 일본인과의 술자리에서는 ‘何年ぶりですか?’로 바뀐다.

1992년, 산수(傘壽, 80세)기념 자서전 ‘손목인의 인생찬가/못다 부른 타향살이’도 그 무렵 함께 몸담고 있던 출판사에서 펴냈다. 또한 당시 대중가요에 문외한이었던 필자에게 ‘일엽편주(一葉片舟)’라고 제목만을 메모한 악보를 건네주며 음률에 맞춰 가사 한 번 써보라는 권유에 숙제하듯 차일피일 미루다가 시건방지게도 ‘한 조각 나뭇잎 배’라고 떡, 하니 제목을 바꿔 건네 드린 기억도 나, 가끔 얼굴이 화끈거린다.

한국과 일본에서 가요 1천여 곡, 뮤지컬 50여 곡, 영화음악 70여 편의 주옥같은 멜로디를 남긴 손목인 선생은 작곡가 겸 지휘자로, 그리고 아코디언 연주자로, 재즈가수로 우리나라 대중음악을 이끌었으며 1964년 한국음악저작권협회 초대회장, 87년 문화훈장 화관장 서훈, ‘손목인 음악센터’ 설립, 그리고 89년 1월 한국가요작가협회를 설립, 초대 회장을 역임했다.

우리나라 대중가요의 초석 다진 가요1세대 작곡가

▲ ‘우리 음악을 아세아로, 세계로!’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던 ‘손목인음악센터’의 회보. 창간호 표지. 1992년
우리나라 대중가요의 초석 다진 가요1세대 작곡가

본명 손득렬(孫得烈, 1913~1999). 경남 진주에서 한의사인 부친 손세영, 모친 표성수 사이에서 3남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난 그는 세살 때 서울로 옮겨 재동보통공립학교 시절 소년단에 가입해 음악을 접했고 이어 중동중학교에 진학했다. 당시 YMCA 회원으로 교회음악 중심의 음악활동을 하며 작곡가 현제명에게 테스트 받은 후 성악을 인정받기도 했던 ‘음악 신동’이었다.

1931년 일본 동경제국음악학교로 유학을 떠난다. 처음 피아노를 전공했으나 이후 작곡으로 전환했다. 이 무렵 ‘노들강변’의 작곡자인 외사촌 형, 문호월을 통해 오케레코드사 이철 사장을 소개받게 된다. 1934년, 오케악극단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며 아르바이트 하던 중 이철 사장이 당시 문예부장이던 김능인의 가사 한편을 주며 작곡해 보라고 권유, 닷새 만에 곡을 완성하는데 이 노래가 바로 ‘타향‘이다. 이 음반 A면에 실린 ’이원애곡‘과 함께 신인가수 고복수가 취입, 빅히트하자 오케 측은 서둘러 A면과 B면을 바꿔 출반하면서 제목도 ‘타향살이’로 바꿨다. 당시 오케레코드가 조선 음반계의 선두주자로 나서는 데에 발판을 제공한 작품이 바로 이 ‘타향살이’였다.

1. 타향살이 몇 해던가 손꼽아 헤어보니/고향 떠나 십여 년에 청춘만 늙어.
2. 부평 같은 내 신세가 혼자도 기막혀서/창문 열고 바라보니 하늘은 저쪽.
3. 고향 앞에 버드나무 올봄도 푸르련만/호들기를 꺾어 불던 그때는 옛날.
4. 타향이라 정이 들면 내 고향 되는 것을/가도 그만 와도 그만 언제나 타향.
-‘타향살이(김능인 작사, 손목인 작곡, 고복수 노래)’

▲ 일본에서 활동 당시의 손목인 선생
이 노래의 히트를 계기로 오케레코드 이철 사장은 손목인에게 전속 작곡가로 활동할 것을 제의한다. 전속 이후 손목인은 ‘목포의 눈물(이난영)’, ‘사막의 한(고복수)’ ‘휘파람(고복수)’ 등을 잇달아 발표한다. 특히 ‘목포의 눈물’은 이로부터 32년 뒤인 1967년, 목포의 한 평범한 시민, 박오주에 의해 기념비가 세워져 우리나라 최초의 노래비로 기록되는 영예를 누리고 있기도 하다.

1.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삼학도 파도깊이 숨어드는 때/부두의 새악씨 아롱젖은 옷자락/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2. 삼백년 원한품은 노적봉 밑에/님 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님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노래.
3. 깊은 밤 조각달은 흘러가는데/어찌타 옛 상처가 새로워진다/못 오는 님이면 이마음도 보낼 것을/항구에 맺은 절개 목포의 사랑.
-‘목포의 눈물(문일석 작사, 손목인 작곡, 이난영 노래)’

1935년에 발표된 이 노래는 지금까지도 사랑받는 우리나라 대표가요다. 일제하 일제 강점기에 우리 민족의 '망향가'이자 '저항가'였고, 해방 후에는 설움 받는 호남인의 '시름가'였다. 그리고 민주화 투쟁과정에서 장렬히 산화한 열사에 대한 남도인의 '진혼가'가 되기도 했다. 지금까지도 '목포의 눈물'은 호남인의 입에 마치 세발낙지처럼 착 달라붙은 채 심지어 프로야구장에서 응원가로까지 불리어지고 있다.

일제의 속박을 벗어나 자유롭고 싶다는 의지를 담은 이름, 목인(牧人)

작곡가로 활동, 음악계에 발을 들이면서 스스로 지은 이름이 목인(牧人), 즉 ‘목동’이다. 말과 소가 초원에서 풀을 뜯고 노니는 목장이 ‘마음의 고향’이라고 여겼고 그것은 곧 일제의 속박을 벗어나 자유롭고 싶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1936년 일본 동경제국음악학교 졸업 후 귀국한 손목인은 그 해 7월, 가수지망생으로 오케에 첫발을 들여놓은 후 직원으로 근무하게 된 정계순과 결혼한다.

또한 그 해 10월, 당시 신인가수 강문수가 오케레코드사로 옮겨 처음으로 ‘남인수’라는 이름을 사용하며 발표한 ‘범벅서울’과 ‘돈도 싫소 사랑도 싫소(남인수)’에 이어 ‘짝사랑(고복수)’, 1937년 ‘아시나요(장세정)’, ‘나에게 백만원이 생긴다면(김정구 장세정)’, ‘해조곡(이난영)’, 1938년 ‘청노새 탄식(남인수)’, ‘바다의 교향시(김정구)’ ‘수박행상(김정구)’ 등 굵직한 히트 곡을 잇달아 발표한다.

히트행진을 계속하는 동안 오케레코드 이철 사장은 1937년, ‘조선악극단’을 창설해 총 지휘자로 손목인을 선임한다. 손목인은 일본 유학 시절 당시 일본에서 유행하던 스윙재즈에 매료, 즐겨 연주했는데 아울러 이 때 ‘손안드레’라는 이름으로 직접 재즈송 ‘씽씽씽’, ‘집시의 달’ 등 10여 곡을 직접 불러 취입하기도 했다. ‘안드레’는 그의 세례명.

1941년, ‘조선악극단’의 리더로 일본 공연 도중 그는 일본 신흥키네마의 의뢰로 뮤지컬 ‘춤추는 춘향전’을 무대에 올린다. 우리 고유 가락에 재즈를 가미한 이 뮤지컬에 등장한 일본인 배우와 무용수, 연주인까지 무려 2백여 명을 넘는 초대형 공연이었다.

당초 10일 예정으로 막을 올렸으나 40일 연장공연에 들어갈 만큼 대성공을 거두었다. 연일 흥행기록을  갱신하던 중 ‘부친 사망’이라는 비보가 날아들었으나  신흥키네마 측은 공연을 중단시키기 아까워 이 부음을 숨긴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손목인은 분개, 결국 이들과 결별하며 서둘러 귀국한다. 이것이 한이 되어 이후 하루도 걸림 없이 그가 아침, 저녁으로 의식처럼 치렀던 ‘사진첨배(寫眞瞻拜)는 유명한 일화다.
 
귀국 후 그는 자신의 손목인 악단(CMC)을 15인조로 편성하고 김백희, 김정구, 남인수, 박단마, 신카나리아, 이예성, 황금심 등과 함께 멀리 만주, 일본 등지로 순회공연을 다니면서 1942년 콜롬비아를 통해 ‘소주뱃사공(이해연)’, ‘뗏목 이천 리(이해연)’, ‘들국화(고운봉)’ 등을 계속 발표한다.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1944년, 일본순회공연 도중 그는 ‘조선학생’을 한국으로 빼돌렸다는 이유로 수감되었다가 비로소 광복을 맞는다.

HLKA 경음악단 조직과 방송가요 제작에 참여

해방 직후 중앙방송국(HLKA) 경음악단 조직과 방송가요 제작에 참여했다. ‘자유의 종’을 비롯해, ‘아내의 노래(김백희)’ ‘왜 그런지(이예성)’가 바로 이 때 만든 방송가요. 특히 ‘아내의 노래’는 6.25 전쟁 중이던 51년, 심연옥에 의해 재취입되어 마치 전쟁가요처럼 애창, 현재 군가집에도 악보가 수록되어 있다.

1950년 6월, 육군 장교구락부 전속악단으로 선발되어 대대적인 개회식을 준비하던 ‘손목인 악단’은 6.25 발발로 인해 해체되고 손목인은 한국군 제2군단 정훈공작대장으로 취임했다.

이 무렵 경쾌한 재즈 리듬의 ‘슈샤인보이(박단마)’가 크게 히트, 당시 구두닦이 소년들이 ‘구두 닦아요’라는 외침 대신 ‘슈샤인, 슈샤인’하고 외치는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전후 우리사회의 힘겨운 현실을 익살스런 해학으로 그려낸 이 노래는 1954년 부산 스타레코드를 통해 발매되었다.

일제로부터의 해방과 6.25전쟁을 거치면서도 그의 창작은 멈추지 않았고 악단을 조직해 우리나라는 물론 일본, 중국 등 어디든지 찾아가 노래를 전했다.

1952년, 손목인은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기록영화 ‘민족의 절규’ 2부의 음악을 맡아 녹음작업 차 도일했다. 그러나 국내로부터 필름이 도착하지 않아 기다리던 중 일본의 매니저 가네마쓰(金松)의 소개로 영화주제가를 의뢰받는다. 이때 만든 주제가가 ‘야타로 방랑가(?太郞旅唄)’와 ‘하와이의 밤(ハワイの夜)’. 이를 계기로 손목인은  1955년 일본 빅터레코드사 전속이 된 동시에 본격적인 일본에서의 작곡활동을 시작한다.  

한편 한국도 음악저작권협회 설립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는 계기를 심어준 빅터에서의 2년간 활동 뒤 다시 데이치쿠레코드사 난코(南口)사장으로부터 전속 제의를 받는다.

일본에서 ‘카스바의 여인’ 히트를 계기로 '손목인 가요교실' 열어

일본에서의 최대 히트 곡, '카스바의 여인(カスバの女)'은 데이치쿠에 전속되자마자 발표한 곡이었다. 데이치쿠의 데뷔곡으로 멋진 작품 하나 만들어내려고 며칠 동안 피아노와 씨름하고 있는 그에게 문예부장이 신인여가수를 데리고 와 인사를 시켰다. 에토 구니에다였다.

마치 라틴아메리카 민족 같은 이국적 용모에 저음의 목소리인 에토 구니에다를 보자마자 그에게 어떤 악상이 저절로 떠올랐다. 곧장 피아노에 달려간 그는 그녀의 용모와 목소리를 상상하며 멜로디를 만들어 나갔다. 이 신인 여가수를 모티브로 만든 곡, '카스바의 여인'. 손목인은 ‘구가야마 아끼라(久我山明)’라는 예명으로 이 노래를 발표한다.

이 ‘카스바의 여인’은  ‘눈물의 숲’과 더불어 일본인들로부터 지금까지도 여전히 사랑받고 있는 노래다. 특히 이 곡은 ‘엔카의 아버지’라 불리는 작곡가 고가 마사오로부터 ‘일본가요의 수준을 10년 이상 앞당겨 발전시킨 기폭제가 된 곡’이라는 극찬까지 받았다. 동시에 이 노래는 일본을 대표하는 가수 미소라 히바리를 비롯해 무려 백 명이 넘는 가수들이 리메이크했을 정도로 일본에서 대단한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이 노래를 우리말 가사로 번안해 부른 유일한 가수가 패티김이다. 이 노래의 우리말 가사는 1968년, 작곡가 길옥윤씨가 번안했다.

1. 어차피 당신도 지나가는 나그네/사랑을 속삭여도 하룻밤의 불장난/여기는 머나먼 땅 알제리아/밤마다 피어나는 애꿎은 사연/카스바 뒷거리의 여인이라오.
2, 노래를 해드릴까 못하는 노래라도/그리운 파리의 밤거리의 모습을/꽃피는 마로니에 샹젤리제/물랑루즈의 춤추는 처녀/이제는 흘러버린 옛날이라오.
-‘카스바의 여인(カスバの女, 길옥윤 개사, 손목인 작곡, 패티김 노래)’

▲ 일본에서 크게 히트한 '카스바의 여인(カスバの女)' 음반. 우측은 패티김이 일본에서 우리말 가사로 취입했다.

카스바(casbah)는 아프리카 북부 모로코에 있는 한 도시 이름이다. 한때 이곳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군을 위한 술집들이 많이 몰려 있던 곳으로 말하자면 '카스바의 여인'이란 말은 곧 '밤의 여인'을 일컫는 단어.

이 노래의 대히트로 음반사로부터 그해 최고 히트작에 수상하는 대상의 영광을 받았다. 동시에 비중 있는 편곡은 대부분 그에게 맡겨졌다. 음반사 측에서는 거처도 회사 근처로 옮겨주어 출퇴근에 시간을 빼앗기는 일이 없도록 배려했다.

이름이 널리 알려지자 찾아오는 가수지망생도 급격히 늘어 결국 '손목인 가요교실'을 내기에 이르렀는데 당시 몰려든 가수지망생은 평균 50명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그밖에도 일본 톱스타였던 이시하라 유지로(石元裕次朗)에게 영화 ‘태양의 계절’의 주제가, 그리고 ‘카네이션 꽃피는 밤’ 등을 발표한 후 1957년 3월에 귀국, 국내 영화음악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한국과 일본 가요계를 넘나들며 활동

▲ 손목인 음악센터 시절, 아래 좌측으로부터 하중희(작사가), 손목인, 김지평(작사가), 그리고 윗줄 우측이 필자.
이 무렵 한국을 오가며 역시 많은 영화음악을 발표했다. 당시 발표한 국내영화주제가들을 살펴보면 58년 ‘눈 나리는 밤’ ‘지옥화’ ‘사랑의 길’을 비롯해 기존 히트 곡을 주제로 영화화한 ‘목포의 눈물’, 59년에는 ‘타향살이’ ‘구혼결사대’, 60년 ‘사랑이 피고 지던 날’ ‘옥련공주와 활빈당’, 61년 ‘정조’, 62년 ‘여자의 일생’, 63년 ‘마패와 검’ ‘처와 그 여인’ 그리고 64년 ‘모녀기타’ ‘마도로스 박’, 65년 ‘눈물 젖은 왕관’ 등. 특히 58년 영화 ‘눈 내리는 밤’의 주제가를 부른 가수 오정심과 재혼한 그는 음악저작권 보호의 후진성을 통감하고 1964년, 한국음악저작권협회의 산파역을 맡은 끝에 초대회장에 취임했다.

임기를 마친 후인 1966년, 영화주제가 ‘아빠의 청춘’을 끝으로 아들 후랭키손을 찾아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한 후 15년만인 1982년에 완전히 귀국했다. 87년 문화훈장 화관장을 받았고 89년에는 한국가요작가협회를 설립해 초대 회장을 맡았다.

만년까지 창작활동과 함께 후배 양성에 힘써

▲ 손목인 선생의 친필 악보
악상이 떠오르면 밥 먹다가도 숟가락을 놓았고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오선지에 음표를 그렸다던, 그리고  음악 하는 일은 곧 ‘밥줄이 아니라 생명줄’이라고 유독 강조하던 그.

그는 1999년, 일본에서 관리되고 있는 자신의 저작물 관계로 출국했다가 지병인 심장질환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향년 86세. 그는 오랜 기간 그와 의형제를 맺었던 가수 현인, 그리고 영화배우 황해와 함께 현재 모란공원에 잠들어 있다. 이 곳에 세워진 노래비, ‘타향살이’.

그렇듯 그의 삶 자체가 대부분 ‘타향살이’였다. 최근 한 보고서에 의하면 우리 국민들 10명 가운데 7명이 타향살이를 하고 있다 한다. 질곡의 역사에 떠밀려 대부분 타향으로 강제로 내몰린 사람들, 그러나 음악인 손목인의 ‘타향살이’만큼은 꿈을 좇아서 떠났던, 말하자면 스스로 택한 ‘패기만만한 타향살이’였다.
(※참고 문헌:‘손목인 자서전 ‘못다 부른 타향살이(도서출판 HOTWIND 1992.4)’, ‘작가탐구-손목인(박성서)’ 한국가요작가협회보 20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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