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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형의 100년의 기록 100년의 교훈
2019년 01월 08일 (화) 01:20:03 김정형 webmaster@newsmaker.or.kr

■‘10월 유신’ 선포와 박정희 대통령 취임
1972년 박정희 정부가 유신(維新) 체제를 선포하면서 전국에 내린 비상계엄 포고령은 계엄 요건을 갖추지 못한 위법·위헌 조치였다는 대법원의 판단이 처음으로 나왔다. 계엄 포고 자체가 무효라는 것이다.… 허모(76)씨는 ‘불법 집회 금지’ 규정을 어긴 혐의로 기소됐다. 그해 11월 5일 지인들과 친구 집에 모여 도박을 했다는 이유였다. 그는 군법회의를 거쳐 1973년 7월 대법원에서 징역 8개월을 선고받았다.… <조선일보 2018년 12월 22일>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에 따라 오후 7시를 기해 국회가 해산되고 정당?정치활동이 금지되었다. 정지된 헌법 기능은 비상국무회의로 넘겨졌다. 10여 개월 동안 비밀리에 추진해온 ‘10월 유신’이 마침내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대학에는 휴교령이 내려졌고 언론?출판은 사전검열을 받았다. 국정감사 역시 1988년 부활될 때까지 16년 동안 동면에 들어갔다. 평소 박정희 정권에 밉보이거나 강성으로 찍힌 10여 명의 국회의원도 중앙정보부와 보안사령부 등에서 발가벗긴 채 물고문, 전기고문, 통닭구이 등을 당했다.
이날의 특별선언은 10월 27일의 국무회의에서 ‘10월 유신’으로 공식 명명되었다. ‘유신’의 어원에 대해서는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벤치마킹했다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시경’과 ‘서경’의 ‘유신’에서 따왔다는 시각이 있는 등 정확한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다.
▲ 박정희 대통령의 비상계엄(10월 유신) 선포를 보도한 1972년 10월 18일자 경향신문 1면
풍년사업’으로 명명된 유신공작은 1년 전인 1971년 12월 6일 박 대통령의 돌연한 국가비상사태 선언으로 막을 열었다. 체제 강화를 꾀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갑작스럽게 발표된 탓에 헌법적 근거가 빈약하다는 지적이 제기되었다. 그러자 공화당이 법적인 근거를 갖추고 비상사태시 국민을 광범위하게 통제할 수 있는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보위법)을 12월 27일 단독으로 통과시켰다. 대통령에게 비상대권을 부여한 보위법의 날치기 통과는 ‘10월 유신’으로 건너가기 위한 징검다리이자 예행연습이었다.
‘풍년사업’은 1972년 5월 이후락 중정부장이 평양을 다녀와 박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본격적으로 싹이 텄다. 박 대통령은 내부 결속을 강화할 수 있는 체제 정비의 필요성을 이후락에게 은연 중 내비쳤고, 박 대통령의 의중 파악에 누구보다 능란한 이후락은 대통령 입맛에 맞는 유신안을 준비했다.
3선 개헌에 이어 또다시 개헌하기가 쉽지 않을 뿐 아니라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에 고전하고 남북대화 재개로 명분이 생겼다는 것 등이 두 사람 간에 오고간 이심전심이었다. 곧 이후락의 지시로 프랑스, 스페인, 대만 등지의 헌법들을 참조한, 입법?사법?행정 3권이 박정희 대통령 1인에게 집중되는 권력구조가 성안되었다.
풍년사업 추진상황이 매주 박정희, 이후락, 김정렴 비서실장의 3인 회의에 넘겨지면 3인 회의는 내용을 보완해 중앙정보부로 내려보냈다. 8월쯤 마스터플랜이 마무리된 뒤에는 신직수 법무장관과 김치열 중정 차장이 투입되어 새 헌법의 구체적인 골격을 짰다.
유신을 선포하기 전, 내용을 사전에 전달받은 미국과 일본이 각각 닉슨 대통령과 다나카 총리의 중국 방문을 유신 선포의 한 이유로 든 것을 선언문에서 빼달라고 요구하는 바람에 ‘10월 유신’은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른 국가안보의 중요성을 설명하지 못하는 불구 선언이 되고 말았다.

유신 홍보 위해 100억 달러 수출, 마이카 시대 대대적으로 선전

이런 과정을 거쳐 사실상 대통령 종신제를 기조로 하는 헌법 개정안이 발표된 것은 1972년 10월 27일이었다. 정부는 유신 홍보를 위해 100억 달러 수출, 1000달러 소득, 마이카 시대를 대대적으로 선전하며 유신헌법 지지를 호소했다. 공포 분위기까지 더해져 유신헌법은 11월 21일의 국민투표에서 91.9%의 투표율과 91.5%의 찬성률로 통과되었다.
새 헌법은 대통령을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새로운 기구에서 간접선거로 선출하도록 규정했다. 대통령은 국회를 해산할 수 있으나 국회는 대통령을 탄핵할 수 없도록 해 대통령의 권한을 대폭 강화했다. 법관 임명권도 모두 대통령에게 귀속시켜 사법부마저 무력화했다.
국회의원 선출은 임기 6년에 전국 73개 지역구에서 1구 2인을 뽑는 중선거구제로 바뀌었고 통일주체국민회의가 국회의원 정족수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73명의 의원(유신정우회)을 일괄 선출하게 해 국회 역시 대통령이 장악하도록 했다. 독재 그 자체였다.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는 12월 13일 비상계엄을 해제한 후 12월 15일 실시되었다. 박 대통령은 12월 23일 이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2359명 중 2357명(99.9%)의 지지를 얻어 임기 6년의 대통령에 당선되고 12월 27일 제8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비로소 1인 체제의 뿌리가 내려진 ‘10월 유신’이 완성된 것이다.
‘10월 유신’은 정권 반대자들에 대한 가혹한 탄압과 인권유린의 시대였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강압에 의한 추진력과 역동성을 지닌 ‘개발독재의 시대’이기도 했다. 오늘날 한국의 중공업은 모두 이 개발독재에 의해 만들어지고 다져졌다. 제철, 전자, 자동차, 조선, 석유화학 등도 모두 그 시대의 산물이었다. 가난을 상징하는 보릿고개도 그 시대에 없어졌고 남쪽의 1인당 GNP가 북쪽을 능가한 것도 그 시대였다. 개발독재를 발판으로 삼은 ‘한강의 기적’이 이 땅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독일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 피살 100주년
“마르크스 이후 가장 뛰어난 두뇌”, “강철 같은 여성 혁명 투사”, “피에 굶주린 로자” 등등…. 로자 룩셈부르크(1871~1919)를 가리키는 수식어는 이렇듯 강렬하고 섬뜩하다. 로자는 제정 러시아의 폭정 아래서 신음하는 폴란드의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가정은 부유했으나 어릴 적 앓은 골반관절염으로 다리를 절고 키가 작았다. 로자는 고교 졸업 후 폴란드사회당이 창당할 때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결국 경찰의 체포령을 피해 스위스로 망명, 취리히대에서 철학과 법학을 전공했다.

1890년 무렵 대학에서 알게 된 리투아니아 출신의 유대인 혁명가 레오 요기헤스는 로자의 정치적 동반자이자 투쟁의 동지였다. 두 사람은 혁명을 위해 죽음을 불사해야 하는 긴장 속에서도 사랑을 꽃피웠다. “이 세상에 오직 하나뿐인 당신”, “당신을 포옹하고 수없이 입맞춤을 합니다”, “나는 아기를 가지면 안 되나요?” 등 도무지 혁명 투사에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표현이 로자가 레오에게 보낸 편지에 가득했다.
사랑 감정은 16년 동안 이어졌으나 두 사람 사이에는 사랑을 편하게 나눌 시공간적 여유가 없었다. 너무 자주 떨어져 있고 수시로 감옥을 드나들었기 때문이다. 그 무렵 로자는 단순하면서도 고급스러운 옷을 선호했고 괴테, 실러, 롤랑, 모차르트, 베토벤, 렘브란트의 예술을 즐겼다.
▲ 로자 룩셈부르크
로자는 1897년 취리히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1898년 독일 베를린으로 잠입해 본격적인 혁명 활동을 펼쳤다. 로자는 추방의 위험 없이 독일에서 활동할 목적으로 독일 남자와 위장 결혼을 했다. 로자가 독일사회민주당에 가입했을 무렵 베를린에는 독일사회민주당 지도자들 간에 격렬한 이론투쟁이 전개되고 있었다. 독일을 사회주의화하는 수단으로 의회정치를 통한 점진적 개혁을 택할 것인지 아니면 마르크스 이론에 따라 노동 대중의 폭력혁명을 택할 것인지 하는 이른바 ‘수정주의 논쟁’이었다. 논쟁에 불을 지핀 인물은 점진적이거나 평화적인 방법으로도 사회주의 실현이 가능하다고 본 ‘유럽 사회주의 운동의 대부’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이었다.
로자도 논쟁에 뛰어들었다. 로자는 ‘사회 개혁인가 혁명인가’라는 제목의 소책자에서 부르주아 체제는 프롤레타리아의 폭력적 집권에 의해서만 타도되고 그래야만 프롤레타리아의 새 세계가 열린다고 주장했다. 베른슈타인의 주장을 ‘이단’이라고 공박하며 당에서 축출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로자는 논쟁을 통해 폭력혁명론자로 부각되었고 이 때문에 정부의 집중적인 감시를 받았다. 로자는 레닌과도 1904년 ‘당 조직 논쟁’을 벌여 또다시 존재감을 과시했다. 직업혁명가들이 프롤레타리아 독재 정부를 세워야 한다는 레닌의 주장에 대해 로자는 몇몇 지도자들이 당의 권력을 독점하면 안 된다고 맞섰다.

“마르크스 이후 가장 뛰어난 두뇌” vs. “피에 굶주린 로자”

1904년 여름 독일사회민주당을 위한 선거운동에서의 발언이 문제가 되어 2개월간 투옥된 것은 이후 로자가 감내해야 할 투옥과 석방의 전주곡이었다. 로자와 레오는 1905년 1월 러시아에서 ‘피의 일요일’ 사건이 일어났을 때 각각 위조 여권을 만들어 러시아로 잠입하려다가 폴란드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다.
‘피의 일요일’ 사건 후 로자는 ‘농민에 의존하는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독재론’을 전개했다. 사회주의자들이 농민과 연합하고 그들의 혁명적 행동에 의존해 절대주의를 타도한 다음 단독으로 정부 권력을 장악하고 노동자·농민으로 구성된 혁명적 대중을 군대 조직으로 편성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주장 역시 레닌의 이론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레닌은 농민의 중요성을 배제하고 혁명적 대중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은 채 직업적이고 음모적 혁명가들이 당의 중앙을 형성하고 국가의 핵심인 무력 기관들을 장악함으로써 혁명적 쿠데타를 성사시켜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로자는 1905년 12월 폴란드의 바르샤바로 돌아가 총파업을 지원했다. 그러나 폴란드사회당의 지도자들은 러시아혁명이 달성되면 폴란드가 러시아에서 독립할 수 있는 희망이 사라진다고 생각해 총파업을 저지하는 등 사실상의 ‘부르주아 민주혁명’으로 선회했다. 로자는 총파업이야말로 프롤레타리아의 유일한 전투 수단임을 외치며 투쟁을 선도하다가 1906년 3월 ‘반국가음모죄’로 체포·투옥되었으나 매수 공작을 벌여 석방되었다.
로자는 1907년부터 7년 동안 베를린의 독일사회민주당 학교에서 강의하면서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필연적인 연관을 밝혀낸 ‘자본 축적론’(1913)을 틈틈이 썼다. ‘자본 축적론’은 자본주의가 제국주의로 변화하는 과정과 제국주의가 일으키는 전쟁에 대해 날카롭게 분석해 마르크스의 ‘자본’에 필적하는 명저로 꼽히고 있다.

‘자본 축적론’은 마르크스의 ‘자본’에 필적하는 명저

로자의 투쟁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같은 해에 태어나 같은 날 살해된 카를 리프크네히트(1871~1919)다. 카를은 베를린대에서 법학을 전공한 변호사로 활동하며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로 활약했다. 1907년 청년인터내셔널 창설을 주도하고 독일의 군국주의 정책을 공격했으며 사회주의를 강력히 옹호하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런 일련의 일들로 18개월 동안 투옥되었는데도 옥중에서 지방의회 의원에 당선되었다.
카를은 자본주의를 타도하고 사회주의를 실현해야만 평화를 성취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런 그에게 수정주의로 기울고 있는 사회민주당 역시 비판의 대상이었다. 로자와는 수정주의와 사회민주당의 연립정부 구성을 반대하는 등 모든 면에서 일치했다. 1914년 8월 1차대전이 발발했을 때 사회민주당은 독일 국민의 민족주의와 애국심에 편승하기 위해 정부의 전쟁 예산을 통과시켜 세계 사회주의자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로자와 카를은 당의 결정에 맞서다 1915년 2월 함께 투옥되었다.
1년 후 석방된 로자와 카를은 전쟁이 한창이던 1916년 1월 사회민주당 내 급진 좌파들과 함께 ‘스파르타쿠스단’을 결성했다. 두 사람은 1916년 5월 1일 스파르타쿠스단의 메이데이 봉기를 주도했다. 하지만 봉기는 진압되었고 둘은 체포되어 남은 전쟁 기간 감옥에 갇혀 있거나 보호 조치를 받았다. 이 때문에 1917년 2월과 10월에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났을 때 현장을 지키지 못했다.
로자는 1918년 레닌과 또다시 논쟁을 전개했다. 1917년의 러시아혁명 성공 후 레닌이 “러시아 사회의 후진성을 고려해야 한다”며 민주적으로 선출된 제헌의회를 무력으로 해산하고 자신의 추종 세력들을 중심으로 관료적 레닌주의를 구축하자 이를 비판한 것이다.
로자는 “혁명운동은 자의적으로 만들어질 수 없고 또한 당 간부들의 결정에 의해 야기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역사적 시기 하에서 자발적으로 폭발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레닌은 이런 로자를 가리켜 “대중 추수(追隨)주의자”라며 맞받아쳤다. 레닌을 추종하는 다른 동지들도 로자의 ‘자발성 주장’이 “계급투쟁에서 당의 지도적 역할을 부정 내지 과소평가하고 비인격적이고 객관적인 요소를 과대평가함으로써 의식적이고 조직된 행동의 중요성을 망각했다”고 비판했다.

‘레닌주의에 반대하는 이론적 오류의 총합’으로 비판받아

1918년 11월 1차대전이 끝나 독일의 제2제국이 무너졌을 때 독일의 과도 연립정부를 이끈 것은 사회민주당의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였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에 빠지지 않은 채 노동자들의 생활 향상에 관심을 쏟아 1905년 독일사회민주당의 사무총장이 되고 1913년 당수로 선출되었다. 온건 노선을 이끌었던 그의 지도력 아래 임시 공화정부는 제헌국민의회 구성을 위한 선거 일정을 발표했다. 로자와 카를은 즉각 반기를 들고 1918년 12월 독일공산당을 창당했다.
다만 로자는 1917년의 러시아 10월 혁명을 독일에 그대로 재현할 생각은 없었다. 로자는 10월 혁명 후 러시아에 나타난 정치체제는 프롤레타리아를 위한 독재 체제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독재 체제라고 비판했다. 그가 지향한 것은 노동자계급이 권력과 국가와 역사 발전에 당당하면서도 창조적 주체가 되는 이상주의적이고 인간주의적인 체제였다.
로자와 카를이 독일공산당을 창당하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추구하자 독일 정부의 우익 세력은 로자와 카를을 표적으로 삼았다. 이런 가운데 로자와 카를은 1919년 1월 5일 ‘스파르타쿠스 봉기’를 일으켰다. 그러나 봉기는 군부와 의용군에 의해 진압되었고 주동자들은 체포되거나 살해되었다. 로자와 카를 역시 1월 15일 밤 체포되었다. 카를은 도주하다 사살된 것처럼 꾸미려는 군부와 경찰의 음모에 의해 등 뒤에서 쏜 총을 맞아 죽었고, 로자는 총의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맞아 실신한 상태에서 차로 끌려가 권총으로 살해된 후 베를린의 란트베르 운하 속으로 내던져졌다. 로자의 시신은 5월 31일 부패된 모습으로 강에서 발견되었다.
로자는 서유럽의 보수 우파에게만 ‘피에 굶주린 붉은 악마’가 아니었다. 스탈린주의자들에게도 ‘볼셰비즘의 적’이었으며 ‘레닌주의에 반대하는 이론적 오류의 총합’으로 호된 비판을 받았다. 1956년 흐루쇼프의 스탈린 비판 이후 복권되긴 했지만, 독일사회민주당의 수정주의와 개량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을 이끌었다는 맥락에 한정되었다.
로자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신봉자답게 자신의 조국인 폴란드 독립에 반대하고 사회주의 연방을 선호한 탓에 폴란드 인민공화국에서도 푸대접을 받았다. 그래서 찍힌 ‘민족 허무주의’라는 주홍 글씨는 죽어서도 쫓아다녔다. 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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